그들이 선택한 삶과 죽음
히말라야 등반사상 가장 끔찍했던 참사는 한꺼번에 10명이 목숨을 잃은 독일 낭가파르바트원정대의 비극을 꼽을 수 있다.
1934년 7월, 정상을 200여 미터 남겨두고 있던 독일원정대는 다음날에 있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신의 저주가 시작된다. 엄청난 위력으로 불기 시작한 세찬 폭풍설은 이들의 도전의지를 무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등정의지를 접은 채 퇴각하는 이들 앞에는 굶주림과 강추위. 덮고 잘 모포 한 장조차 없는 상황이 이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대자연의 위력 앞에 하나 둘 씩 쓰려지면서 한 사람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은 채 전 대원이 무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대장 메르클을 위시하여 알프스 북벽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벨첸바하 조차도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이들 중 최후까지 목숨을 지탱했던 대장 메르클과 셰르파 케레의 죽음은 가슴을 찡하게 하는 사연을 남겼다. 케레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음에도 고락을 함께한 동지를 버려둘 수 없어서 끝까지 설동 속에 남아 최후를 함께한다. 그는 대장과 고용인이라는 사실 관계를 떠나 죽음을 선택 했다.
문제는 케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다. 등산의 자랑스러운 전통중의 하나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동료를 끝까지 챙기는 것이다. 훗날 케레의 죽음은 숭고한 셰르파 정신으로 높이 찬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동료를 사지에 버려둔 채 혼자서 탈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위기에 처한 동료를 죽음의 나락에서구하고 함께 탈출에 성공하거나, 동료와 함께 죽음을 택하는 소설 같은 실화는 극한상황과 마주한 인간의 실존이 있기에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렇듯 죽음과 마주했던 이야기들은 외국인들에게서만 있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산악인이 주인공이었던 일도 있다.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실화소설 ‘끈’의 주인공 박 정헌의 촐라체 북벽에서 생환이 그랬고, 지난 4월 마나슬루에서 체력이 떨어진 동료를 데려가기 위해 함께 남아있다 실종된 윤 치원의 경우가 그랬다.
2005년 1월. 촐라체(6440m)북벽에 오른 박 정 헌과 그의 후배 최 강식은 등반을 끝내고 하산하던 중에 최 강 식이 발을 헛디뎌 25m 깊이의 크레바스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이 순간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9일간의 사투가 시작된다.
최 강 식은 크레바스 속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두 발목이 부러진 채 자일에 매달렸고, 박 정 헌은 최 강 식의 추락충격으로 딸려나가며 안경이 부서지고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다. “형. 살려 주세요...” 최 강식의 절규가 크레바스 벽을 타고 메아리 쳤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25m 길이의 자일뿐이다. 갈비뼈가 부러진 몸으로 자일 끝에 매달린 최 강 식의 몸무게를 지탱하며 더 떨어지지 않도록 버텨주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다. “자일을 끊어 버릴까” 아주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인간적인 갈등이 밀려왔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다 해도 후배를 빙하의 얼음 구덩이 속에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후배를 끌어 올렸다. 그 시간부터 두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다.
두 사람은 빙하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 한다.
최 강식은 시력 0.3인 박 정헌의 두 눈이 되고 박 정헌은 최 강식의 두 다리가 되어 5일 동안 굶주리며 영하 20도의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죽음을 이겨내고 끝내 살아 돌아왔다. 조난 당한지 9일만이다.
조난 3일 째 되던 날 박 정헌이 구조요청을 위해 먼저 내려왔을 때, 최 강식은 두 다리가 부러진 몸으로 5시간 동안 두 팔과 무릎으로 벌레처럼 빙하의 너덜지대를 엉금엉금 기고 몸을 굴려서 야크를 키우는 움막까지 내려온다.
이 둘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살아 돌아 왔다. 박 정헌은 동상으로 8개의 손가락과 2개의 발가락을 잘랐고, 최 강식 역시 아홉 손가락과 발가락 대부분을 잘랐다.
영국의 생존실화 <Touching The Void>에서는 사이먼 에이츠가 추락한 동료와 연결한 자일을 칼로 끊고 혼자 베이스캠프로 내려왔으나 박 정헌은 죽음 앞에서도 동료와 연결된 자일을 끝내 자르지 않은 채 동료와 함께 살아서 돌아왔다.
금년 4월 마나슬루를 등반하던 윤 치원은 정상을 지척에 둔 지점에서 기상악화로 등정을 접고 하산하던 중 탈진한 후배 박 행수를 데리고 내려오다 함께 실종됐다. 당시의 날씨는 지척을 구분할 수 없는 화이트 아웃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영하 40도의 추위와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동안 해외원정에서 보여주었던 윤 치원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동료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사람이다. 지난 해 7월 낭가파르바트(8126m)에서 하산 중에 일어난 고 미영의 충격적인 추락현장에서도 눈사태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 미영의 시신을 수습해 등에 메고 먼 길을 하산하기도 했다.
또한 2000년에는 몽블랑(4807m) 정상 부근에서 실종된 동료 산악인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일주일 동안을 정상부근의 발로산장 앞에 천막을 치고 머물면서 혼자서 실종지점을 중심으로 하루에 두 차례나 몽블랑을 오르내렸다.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으나 이런 행적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우정과 신의 그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잃은 지 오래된 어휘들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가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것은 무한한 감동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자기 팀과 동료에 대해서는 책임을 인정하고 동료 구출을 위해서 위기상황을 감수한다. 그러나 조난자가 다른 팀이거나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구조의 손길을 주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막대한 원정경비와 수 년 동안 어렵사리 준비해온 등반을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과 맞바꾸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실제로 있었다. 1981년 성균관대학 안나푸르나 남 봉(7273m)원정대의 김 홍기는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평생 동안 열망해왔던 정상을 포기한 채 조난자를 구출한다.
당시 김 홍기는 6020m 고도까지 진출한 후 캠프3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플루테드 피크(6501m)를 등정하고 하산 중이던 한국인 1명이 정상부근에서 실족하여 700m의 설 벽으로 추락 중상을 입고 구조를 기다린다는 무선을 받는다. 그는 곧 하산하여 조난자 후송을 위한 헬기 착륙장 공사 까지 마무리해주었다. 이 일로 그는 그토록 갈망해온 정상등정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만다.
2006년 5월 중동산악회의 이 명호. 최 인수. 박 재우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다. 세 사람은 평소 그토록 갈망해왔던 세계 최고봉 등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가슴 부푼 기대를 안고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출발 1시간정도 지났을 무렵 앞서가던 셰르파가 눈에 덮인 물체를 가리켰다. 가까이 접근해보니 얼어붙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는 경남 팀의 곽 정혜였다. 몸을 흔들어보니 전혀 반응이 없고 ‘콜드(춥다)’라는 신음 소리만 들렸다.
곽 정혜는 정상등정을 끝내고 혼자서 하산하던 중 고정 로프가 끝나는 지점에서 배낭을 벗고 장갑을 갈아 끼던 중 실수로 약 200m를 추락했다. 조난 당시 곽 정혜는 배낭도 없어졌으며 장갑도 끼지 않은 상태로 추위에 노출된 채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이들 세 사람이 주변을 향해 ‘헬프’소리를 외치며 도움을 청했지만 옆을 스쳐가는 몇몇 사람들은 사고가 난 것을 알고 구조요청을 외면한 채 모두가 피해갔다. 이들은 캠프4로 조난자를 어렵사리 후송한 후 응급조치를 시작했다.
조난자를 돌보느라 정상등정 시간이 점점 지체되고 있었다. B.C에서는 출발을 재촉하는 무선이 계속된다. “야! 시간이 없어 어떻게 할 거야” 선배 이 명호가 재촉을 한다. “형. 곽 정혜의 상태가 심각해요. 조금만 더 정혜를 보살피고가요. 이대로 두고 올라가면 살면서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아요” 이들 세 사람은 정상을 눈앞에 두고 등정을 포기 할 것 이냐, 올라갈 것이냐를 놓고 갈등했다. 결국 이명호만 등정을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조난자 수습을 위해 남기로 했다.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죽음의 지대에서 가사상태의 조난자를 거둔다는 것은 자신을 버릴만한 결단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날 이 명호는 등정에 성공했고 두 사람은 곽 정혜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정상을 포기한 대가로 그들은 죽음에 직면한 한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얻어냈다. 정상등정 이상의 값진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로체페이스로 하산하던 박 재우는 잠시 정상을 되돌아보았다. 이번원정을 위해 직장마저 그만두고 에베레스트에 몰입했던 그다. 어느새 그의 눈가엔 물기가 비쳤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곽 정혜는 한국 여성으로는 5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고, 조난당시 동상 후유증으로 손가락 5개와 발가락 1개를 절단했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아름다운 동행을 약속한 사람은 알파인 저널리스트로 알려진 이 영준이다. 두 사람은 청첩장에서 결혼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생의 산을 오르기 위해서 함께 자일을 묶고 한 지붕 아래서 한 코펠에 밥을 먹 기 위해서이며, 오르려는 목표는 좁은 정상이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고, 산악인 커플다운 멋진 내용이다. 신부는 노총각을 거두어 주었고, 신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장애를 거두어주었으니 이 두 사람의 삶에는 분명 밝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생명의 은인 박 재우가 결혼식의 사회를 진행키로 했다고 한다. 부활의 구원자였던 그가 인생을 출발하는 그녀를 위해 또 한 번 도움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해마다 수 천 명이 알프스나 히말라야에 도전하다 목숨을 잃는다. 왜 사람들은 죽음과 마주했던 끔직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다시 산에 오르려 하는 것일까? 인간은 꿈과 목숨을 맞바꿀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교장샘 마음이 울컥~~~항상 건강하세요~``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모님은 건강 하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