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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기
김 우 식
부산항을 떠나 대한해협으로 들어서자, 여객선(오션풀라워)은 더욱 세차게 흔들렸다. 큰 파도가 뱃머리를 부딪칠 때면 ‘두두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브레이크 없이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처럼 덜커덩 요동을 친다. 여행을 떠날 때는 일상의 끈을 싹둑 잘라버리고 떠나는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데……. 가슴이 철렁일 뿐이다. 우린 출발부터가 여의치 않았다. 당초 2014. 12. 1일 출항 예정이었지만, 이틀이나 지연된 12. 3일에야 겨우 출항했는데도 바다는 포효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강한 북서풍 바람 때문이다.
우리 일행 34명은 젊음을 바쳐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전우회원. 월남 참전 용사가 아니라 한국전력공사 전우회(電友會) 출신. 연령은 60~70대로서 의기와 우애로 똘똘 뭉친 동부지회 소속이다. 우리는 12. 2일 밤 11시 50분에 전용버스로 서울 잠실에서 출발하여 12. 3일 즉, 오늘 새벽 5시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여행 총책임자 전영우 회장님은,
“이번 대마도 여행을 함께 해주신 동부지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안전하고 유쾌한 여행이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 동부지회와 몇 번의 인연을 맺어왔고 이번 대마도 여행도 세심히 주선해준 ‘씨밀래투어’ 김영실 실장님과 서울부산을 오가며 안전운행을 해주실 한기섭 기사님께 큰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김영실 실장님.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워킹맘. 가냘프면서 어딘지 강단 있어 보이는 그분은 ‘하나투어’ 대리점 격인 ‘씨밀래투어’의 간부다. 대마도까지 동행은 하겠지만, 대마도에서는 현지 여행사 소속 가이드가 인솔한단다.
사실 뱃멀미는 나와는 무관한 일로 알았다. 쏘맥에 막걸리까지 허구 헌 날 12시를 넘겨 집에 들어가면,
“하여튼 위장 하나는 타고났어요. 무쇠라도 녹았을 거구먼.”
타박하는 아내 앞에서, 거봐 내가 다 알아서 마신다니깐. 의기양양하던 내가, 이건 체면이 아니다.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도 아닌데 무진 속이 메스꺼워진다. 선박 무게 445톤에 정원 445명이면 분명 적은 배가 아닐 텐데 이리 속절없다니.
- 우리 여객선은 20분 후면 대마도 히타카스 항에 도착합니다.
앳된 여성의 선내 방송소리다. 맞다. 자연은 사람이 견딜 만큼만 고통을 주는 거야.
부산에서 49.5km, 1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뿌연 선실 유리창 밖으로 해안가 절벽과 숲이 보인다.
히타카스 항구는 살집이 적은 고구마처럼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대마도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여객선은 엉덩이를 돌려 옆구리를 부두 독크에 댔다. 우리 일행 34명은 짐을 챙겨 다른 여행객들과 섞여 입국신고서, 세관신고서를 들고 입국심사대를 향해 줄지어 갔다.
줄 선지 20분이 지났는데도 세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동물검역소? 출입구에 분명 그렇게 써진 간판이 세로로 붙어있다. 거제도의 2배쯤 되는 섬, 남북 82km, 동서 18km인 섬을 지키는 세관원들의 심사는 꽤 꼼꼼했다. 사무실 하나를 통과하는 데 40분이 걸렸다. 밖에는 우리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궂은 날씨에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마도 가이드, 부산 아지매 김대정입니다. 여자지만 아버지께서 큰일을 바르게 하라고 큰대(大) 바를정(正), 대정(大正)이라고 지워주었습니다.”
톤이 굵고 활달한 김대정 가이드님은 50대 초반, 혹카이도에 살고 있다고 한다.
맨 먼저 찾은 곳은 미우다 해수욕장. 20분쯤 걸렸다. 히타카스 항은 그냥 어촌이다. 거리의 집들은 무채색, 검거나 회색의 지붕에 하얀 벽.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고등학생은 거의 후쿠오카로 유학을 간단다. 간혹 마티즈 같은 소형차만 보인다. 좁은 도로 소형차의 천국, 그들의 실리주의다.
미우다 해수욕장은 일본의 해수욕장 100선에 선정. 천연 白沙의 고운 모래 입자, 에메랄드 그린 물빛이 쾌 이국적이었다. 해변 중앙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돌섬이 이채롭지만 그러나 내겐, 우리 목포시 대반동 해수욕장과 오십보 백보다.
한국전망대.
대마도의 최북단에 있다. 전망대는 팔각정으로 파고다공원 정자를 본떠 한국적 정서를 연출한 듯. 좋은 날씨에는 부산이 보이고, 밤에는 광안대교의 불빛이 찬연하다고 한다. 역시 대마도는 거리로만 보면 우리와 가까운 나라다.
전망대 아래편에 조선국역관사 조난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1703년 쓰시마 번주가 사망하자, 조문차 조선 역관이 배를 타고 방문하게 되는데, 전복되어 112명 전원이 사망한다. 이를 애석히 여겨 1991년. 3월 여기에 위령비를 세웠다 한다.
우리 버스는 임진왜란 출항지인 오우라 해변을 차창 밖으로 관망하면서 쓰시마에서 가장 유명한 백제은행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수령 1500년. 벼락을 맞았지만 지금도 새끼를 치는 등 활력이 대단하여, 수태를 못 한 여인네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에보시타케 전망대 가는 도중에 와다스미 신사의 겉모습을 훑어 봤다. 와다스미 신사는 바다의 신을 모신 해궁. 대마도가 섬이다 보니 바다의 신을 모시는 거야 당연지사. 5개의 도라이(鳥井)가 있어 용궁 신화의 세계를 연상하게 한다. 도라이는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과 같다. 주위 산에는 어디를 보나 나무숲들이 울창했다.
대마도는 연간 강수량이 1,800mm로써 우리나라보다 35%가 많다고 한다. 산사태 등의 자연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삼나무(스기나무), 대나무, 참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이들 나무는 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탁월해서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한 이유 중 하나가 물을 잘 먹는 스기나무로 전함을 만들어서 기동력 약화로 참패했다고 한다.
에보시타케 전망대(대마도판 하롱베이).
176m 에보시타케山 정상에 세워 아소만의 동서남북 모두를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아소만은 들쑥날쑥한 해안을 활용한 진주 양식장이 많았다. 석양과 일출이 아름다워 연말 연시에는 특히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만제키바시(만관교). 대마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쓰기 위해서 일부러 섬을 쪼갰다고 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부대였던 수뢰정이 이 항로를 통해 진격하여 승리했다고 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각각 말(馬)의 모양의 두 개의 섬이 마주 보고 있어 대마도(對馬島)라는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한다.
북쪽에서 시작하여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관광을 해서인지 어느덧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까지 왔다. 이즈하라. 항구이지만 소금기, 비린내 등 갯내음이 안 나는 것이 좀 특이했다. 저녁 5시가 넘어 땅거미가 지고 있는 시간. 저녁 식사로 멧돼지 바비큐를 먹기 위해 이즈하라 시내에서 한적한 시골로 20여 분 달렸다.
4명당 한 테이블. 우리 테이블은 나와 원형, 윤형 내외분과 같이 앉았다. 모두들 꽤 시장기를 느꼈으므로 서둘러 멧돼지 고기를 불판에 구워 허기를 달랬다. 희미한 조명에 눈이 익고 다소 배가 차오르자 한 잔의 유혹이 왔다. 휴대용 가방 속에 있는 진로 팩 소주 2개를 땄다.
“대마도까지 가서 진로를 마시려우. 또 몇 개는 모르지만 열 개가 넘게…….”
가방을 쌀 때 아내의 지청구다. 아사히 병맥주도 3병(600엔/병당)을 사서 우리끼리 자축을 했다. 고소하다. 술 없고 아내 지청구 없이 사는 사람들, 도대체 어떻게, 무슨 재미로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첫날 숙소는 두 곳으로 쪼개졌다. 나기호텔 6명, 츠타야호텔 28명. 쪼갠 이유는 단 한 가지. 모든 숙박업소에 고루 배정을 해주기 위한 대마도 숙박업소의 배려 때문이라 한다. 식당도 마찬가지. 특별히 잘되는 집과 안되는 집을 없애자는 취지란다. 일본인들의 집단의식이다.
나기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우리 같으면 모텔수준. 102호, 2인 1실. 다다미방으로 되어있고 나와 원형이 나란히 누우면 정말 빈틈이 없다. 난방은 벽걸이 에어컨. 건조한 열기가 나온다. 바닷가로 난, 두 짝 유리문은 단창이고, 고리가 빠진 커튼이 소불알처럼 늘어져 있다.
TV는 몇 년도 제품일까? 낡아빠진 저 벽지는? 한 쪽 끝이 불그스름한 출입구 형광등이 떨고 있다. 수명이 다된 것 아니면 저전압이 때문이리라. 화장실은 좌변기와 세멘대. 투명을 잃은 지 오래된 플라스틱 컵 하나. 손톱보다 작은 칫솔, 행주만 한 수건 두 개. 출입문 열쇠는 없다. 도둑이 없다는 과신인지, 고장 나서 아예 떼버린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다. 그렇다. 없어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많아서 불편할 수도 있다.
2층에 공동 욕실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득 고양이 걸음으로 올라가야 했다. 이빨 빠진 플라스틱 바구니에 옷을 구겨 넣고 욕실로 들어선다. 욕실 문 철제 손잡이는 없어지고 대신 막대기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걸 검소하다고 해야하나, 칠칠 맞다고 해야하나.
샤워기는 2개. 나머지는 집수 통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샤워를 해야 한다. 80년대 초 잠실주공 2단지에 살 때 상가 지하 목욕탕에 들어온 것 같다.
2일 째(12/4일) 아침 8시 나기호텔 1층 식당. 우리 6명, 나기호텔 여주인인듯한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해준다. 밥, 국은 리필. 메주콩을 띄운 나또 1개씩이 식단에 놓여 있었다. 김대정 현지가이드가 강조했던 그 일본 나또다. 청국장과 비슷하나 청국장은 끓여 먹는데 나또는 생으로 먹는다.
우유, 고구마와 함께 일본인의 수명을 남자 90세, 여자 91.5세까지 늘려놓은 장본인, 나로서는 처음 대하는 식품이다.
우리 전용버스는 9시 숙소(나기호텔)출발,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대마도 시청 옆 공용주차장에 주차. 츠타야 호텔 숙소팀(28명)과 합류했다.
5층 하얀 건물의 대마도 시청에는 현수막이 걸렸다. 12. 14일 중의원 선거를 알리는 플래카드. ‘아베’ 자민당 일본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 그는 아베노믹스의 재신임을 받아 집권을 연장하려는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관광팀과 등산팀으로 나눈다고 한다. 나는 7명과 함께 등산팀을 선택하였다. 산행 목적지는 유명산(일본명: 아리아께 야마. 표고 558m. 총거리 2,850m. 왕복소요시간 2시간 반).
유명산 입구는 80년대 하월곡동 달동네를 같은 곳을 지나야 했다. 유명산 입구. 표지판은 흰 바탕에 검은색으로 현 지점 현재 표고 55m, 빨간색으로 스타트 0m, 고올 2,850m라고 표시되어 시작점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상까지는 10개의 표지판이 있었고, 한결같이 깨끗하게 쓰여 반듯이 세워져 있었다. 등산로는 사람이 일부러 만든 계단은 없었다. 가급적 능선 생김새 그대로 길을 낸 것 같다. 참나무, 삼나무, 동백나무 군락을 번갈아 난 숲을 걸었다. 우리 외 다른 등산객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늘로 쭉쭉 뻗은 삼나무가 우우 하늘로 치닫는 은갈치 떼 같다. 산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시내에서도 새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새소리뿐 아니라 개,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다 어디 갔을까? 하와이가 뱀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새가 없단 말인가. 올라갈수록 나무숲 위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유명산 정상. 산밑으로 띄엄띄엄 집들이 보였고 작은 산들이 첩첩이 보였다. 아파트 같은 건물을 뺀 우리의 도봉산에 오른 것 같다.
다시 원점으로 하산한 시간은 12시 10분. 2시간 10분이 걸린 셈이다. 관광팀과 합류시간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아 있다. 티아라 대형마트 쇼핑몰로 갔다. 정말 물건이 많다. 종류도 많고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1931. 5월 대마도 번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2001. 11 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기념비 제단 위에는 인조 꽃다발이 빛이 바랜 채 꽂혀 있었다. 가련한 덕혜옹주는 결혼 24년 만에 이혼하고 1961년 귀국, 1989년 낙선재에서 병환으로 별세한다.
관광팀과 합류하여 현지식 점심을 먹기 위하여 한적한 외곽으로 이동했다. 우리는 어제 지정된 식사 외에 회를 추가로 시켜서 먹기로 했다. 횟값은 1인당 만 원.
‘란데이’ 식당의 로꾸베 정식. 덴뿌라와 간장 소스를 내놓았다. 그리고 대마도의 향토 대표 음식 고구마 국수가 나왔다. 대마도는 고구마가 유명한데 그 전분을 재료로 하여 국수를 만든 것이다. 일종의 우동인데 풀기가 없어 면발이 툭툭 끊어졌고 전분 때문인지 국물은 짙은 갈색이었다. 면발이나 국물 맛이 글쎄다.
생선은 도미나 광어? 나는 휴대가방에서 진로 팩 소주를 내놓고 일행과 나누었다. 생선회에 술이 있는데도 흥이나 열기는 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다.
일행 한 분이 식사를 보이콧 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우리 자리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꺼림칙하기도 한 점심을 마친 후, 대마도에서 몇 곳 안 된다는 온천탕(후타루노유)을 갔다.
이즈하라 항에서 1시간 소요. 100% 천연 온천수를 쓴다 한다. 온천수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요금표를 보니 성인 기준 450엔.
온천 건물 바로 옆에는 실버타운이 있었다. 하루 이용금액은 1,000엔, 간호사, 식사, 헬스 등 노인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단다. 그래서 일본은 노인 천국. 하와이 여행 때 와이키키 해변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꼭 잡고 석양을 바라보는 두 노인, 그들도 일본인이었다.
수선사(修善寺 슈젠지.)
이즈하라 대마도 시청에서 10분을 걸었다. 거리에서 일본사람을 볼 수가 없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모두 한국 관광객이다. 개나 고양이도 없다. 대마도 인구 35,000명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우리와 한국 관광객에게 도시를 내주고 종적을 감춘 것 같다. 어디로 갔을까?
이즈하라 시내를 관통해 술집 골목을 지나, 어느 납골당 옆 수선사에 들어섰다. 김대정 가이드는 특별히 침묵해달라고 한다. 수선사 앞 목조 이층집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야단이란다. 시끄럽다고.
김대정 가이드, 한국인이면 꼭 들려야 하는 이유는 뜰에 세워진 비석 하나가 있기 때문이란다. 최익현 순국비,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의 주동 5적(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의 처단을 주장하며 항일운동을 한다. 1906년 일본군에 붙잡혀 쓰시마에 유배되는데, 일본인이 주는 음식은 먹을 수 없다 하여 이듬해 굶어서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선생의 순국비 앞에서 엄숙히 묵념을 했다. 현재 선생의 유해는 충남 논산 노성에 모셔져 있다.
이어 고즈넉하지만, 그저 평범하게 보이는 대마
도 사무라이 저택과 거리를 저녁 식사로 이동해 갔다. 어느 호텔의 식당. 쌀밥과 튀김 그리고 단무지. 일본인들의 小食이 느껴진다. 식사뿐 아니라 조분조분하고 깔끔한 분위기가 그들의 생활방식을 대변하는 것 같다. 화려한 인테리어가 없는 대신 특출나거나 모난 곳도 없다.
2일째 숙소는 첫날 그대로 나기호텔이다. 18명. 츠타야 호텔에서 10명이 이쪽으로 넘어왔다. 숙박업소협의회에서는 매일 이렇게 안배를 한단다.
원형 지인이 우리 방으로 찾아왔다. 나한테도 술 한잔 하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쉬겠다고 했다. 아마 두 번만 권했어도 따라갔을 것이다.
방안은 추웠다. 나는 마지막 남은 참치 캔으로, 역시 마지막 진로 팩 소주를 마셨다. 바다를 향해 한쪽 벽이 꽉 찬 유리문 넘어 바다는 어둡고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해변을 달리는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실려 가로수 나뭇가지가 유령처럼 유리문에 흘렀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얼 찾고 있지? ‘삿뽀로 여인숙’에서 마지막 종을 찾아 헤매는 진명이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여행자의 고독은 그림자처럼 형체가 없고 고드름처럼 차가웠다.
3일 째(12/5일) 마지막 날, 날씨는 바람이 불고 다소 흐렸다. 나는 5시 반에 일어나 2층 복도 끝 욕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아직 아침 식사까지는 2시간 반이나 남아있다. 흐릿한 여명 속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기호텔 남자 주인이 직접 한다는 이발소는 아직 영업 전이다. 그 주인은 대마도에서 최고의 이발사로서 일본 전국 커트 경연대회에서 3회나 수상한 적이 있단다. 커트 1,500엔, 샴푸는 500엔 따로 받는다. 마침 지나던 노선버스가 서더니 기사가 내려 자동판매기에서 음료수를 뽑는다. 대마도는 자동판매기 천지다. 찬 것 따뜻한 것 모두 있다. 커피, 녹차는 300엔.
갯내음 없는 바다는 고요하다. 저 멀리 몇 개의 섬이 떠 있고 군데군데 가두리 양식장 위로 갈매기 몇 마리가 훠이훠이 날고 있다.
아우모도시 자연농원으로 가는 길이다. 이즈하라에서 남서쪽으로 40여 분 달려야 한다. 한적한 시골 길 저 멀리 자그만 산자락 밑, 집 몇 채가 모여 있다. 김대정 가이드는 열띤 목소리로,
“우측 파란 기와집이 보이죠. 거기에 ‘타니쟈키’라는 작가가 십여 년을 살았던 곳입니다.”
그랬다. ‘타니쟈키 즁이치로’는 1933년 단편소설 ‘춘금초’를 발표한다. 대갓집 하인 사스케는 집주인의 딸 슝킹을 남몰래 사랑한다. 어느 날 밤 슝킹이 얼굴에 화상을 입게 되고 자기에게 무심한 줄만 알았던 그녀는 사스케, 당신을 사랑했노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사스케는 영원히 그 사랑을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신의 동공을 바늘로 무수히 찔러 눈을 멀게 된다. 슝킹에 대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이 단편으로 ‘타니쟈키’는 일약 세계적 스타로 부상하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1985년에 ‘타니쟈키’ 문학상을 받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김대정 가이드는 그를 비난했다. 상업적 마케팅 소설가라고. 1989년 ‘노르웨이 숲’과 ‘상실의 시대’는 제목과 출판사가 다를 뿐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어쨌든 그는 우리의 고은 시인과 함께 10여 년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소설의 세계적 대가임에 틀림이 없다.
일본 노벨상 수상자는 22명, 노벨 문학상을 두 명이다. 우리는 노벨평화상 1명뿐. 문학적 레벨로는 우리나라가 일본이 뒤질 리 없다고 한다. 다만 번역의 질적, 양적 면에서 절대 부족한 면이 문제란다.
김대정 가이드가 자기 취향에 ‘딱’이라는 아우모도시 자연농원에 도착했다. 계곡 전체가 단 하나의 화강암 바위로 되어있다. 그 화강암 틈을 따라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한 바퀴 휭 돌았지만 글쎄 우리의 송추유원지의 반에 반도 못 미치는 것 같다.
이즈하라 시내 면세점. 고객의 100%가 한국인이다. 나또(김대정 가이드가 좋은 식품이라고 특히 강조했고, 호텔에서 아침식사 때 1개씩 간을 보여주던 청국장 식품). 양주, 담배(담뱃값 인상안이 국회에서 심의되고 있어서인지 엄청 구매), 화장품(일본 화장품은 성실보다는 진실함이 있다는 풍문 때문에 또 무쟈게 사 재킴), 식칼, 가위 등 생활용품, 스카프, 볼펜 등 기념품. 심지어 도마, 타올까지 한바탕 태풍이 몰아친 듯 진열창은 금세 바닥을 치면 종업원들이 어느새 꽉 채워 놓는다.
나도 안 사면 손해 보는 것 같아 뭘 살까 궁리 중에 마침 원형이 화장품 백을 들고 있다. 영양크림 3개에 1 플러스 세일이란다. 옳다! 그거다. 그런데 54만 원! 아니 무슨 놈의 화장품이 쌀 두 가마 값이 넘는단 말인가.
“이러고도 우리나라가 온전 하려나?”
내가 혼잣말로 투덜거리자,
“일본 관광객도 마찬가지잖아요. 요즘 엔화 환율이 떨어져서 예전만 못하지만.”
누군가가 되받는다.
김대정 가이드는 다시 우리 34명을 두 팀으로 나뉜다. 관광팀과 자유시간팀으로.
나는 관광팀으로 김대정 가이드를 따라 나섰다.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 도내의 문화재, 고고 역사자료, 민속자료, 소(宗)家 문고 등이 전시되어있고 조선통신사 행렬도도 볼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비. 쓰시마번(對馬藩)은 임진왜란 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고 그 결과 조선통신사 사절(400명 규모)이 빈번하게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1992년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비를 세운 것인데 비 앞에 서서 조선통신사들의 우국충정과 힘없는 나라의 설움 같은 비애에 젖어 처연하게 서 있는 비를 바라보았다.
하치만구 신사(八幡宮 神社)
655년 천황 명으로 시미즈 산 기슭에 신전을 축조하고 하치만신(무사들로부터 숭배되어온 무신)을 모신 신사. 신사입구에 하늘 천 자 모양의 석조물이 있는데 신사를 알리는 석조물로써 천황 명령이면 3개 이상을 세운다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신사(神社)가 곳곳에 있다. 공원이나 거리, 가정 내에도 있다. 선조, 자연의 신을 모시는 국수주의적 신앙은 이미 토착 신앙을 넘어서 국민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A급 전범 유해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가 그 대표적. 납골당도 마찬가지.
시내에도 있고 주택가 안에도 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그들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더 많은 공을 들인다고 한다. 이는 불교도가 전 인구의 70%인데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목뼈를 특히 숭상하는데 목뼈가 연꽃 모양을 닮아서라고 한다. 대신 어디에도 산소, 봉분은 보이지 않았다.
이스하라 해변에서는 군데군데 오징어 건조장이 있다. 5층 건조대를 만들고, 중심축에 모터를 걸어 회전시켜 건조시키고 있었다.
우리 일행 34명은 이스하라 항 대합실 귀퉁이 짐 보관소에서 짐을 찾고 출국허가서, 여권을 준비해서 들어올 때처럼 출입국 검사소로 들어갔다. 부산 아지매 김대정 가이드도 동행했다. 부산 친정집에 들을 일이 있단다. 이즈하라 선착장에는 대아고속해운 소속 여객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3시 10분. 우리를 태운 여객선은 대마도 동쪽 해안을 타고 북진했다. 또다시 대한해협으로 들어서자 산더미 같은 파도가 거칠게 몰아친다. 조선시대에는 노략질을 일삼은 왜군이 다녔고, 굴욕적 화해를 위해 조선통신사절단이 건넜던 대한해협.
이제 우리는 우리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당당히 그들의 서비스를 받고 대한해협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부산까지는 49.5km, 일본 후쿠오카까지는 138km. 우리 백제인이 건너가 나라와 문화를 일군 곳. 조선시대에 몇 차례 정벌을 했지만, 산악에 비해 평지가 10%밖에 안되 농경사회를 이뤘던 우리 조상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대마도.
일본은 대마도를 군사적 요충지, 대륙과의 문화·경제적 교류의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섬 전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관광 자원화하고 있다. ‘고려문’을 새로 만들고 있으며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등 우리의 역사적 관심을 고조시켜 관광을 자극하고 있다.
또한, 면세점을 확충하고 어디를 가나 한국말로 팻말을 만들어 놓고 우리를 맞이한다. 일본의 자영업자는 우리 때문에 먹고 산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집을 구입해 이주해 오려는 한국인들에게는 텃새가 극심하다. 말을 걸지 않는다. 이지매 집단 따돌림 시켜 6개월을 못 버틴다고 한다. 그들의 철저한 집단의식과 자위의식은 친절과 미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5시 20분.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즈하라 항에서 2시간 20분이 걸린 셈이다.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의 입국 절차는 비교적 빨랐다. 맞아, 역시 대한민국이야. 나는 양주 2병을 샀는데 좀 걱정이 되어 내 짝꿍 원형 배낭 속에 한 병을 나눠 넣자고 했다.
“좀생이 같아. 4만 7천 원 짜리 발렌타인(17년산) 2병을 누가 잡는다고.”
원형이 지청구했지만 어쨌든 2병이잖아. 한 병이 기준인데.
세관을 나와 김대정 가이드와 이별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용버스(하나관광)에 탑승하였다.
5시 35분에 부산출발. 서울로 향했다. 서울 도착해서 지하철이 끊길 거라 걱정하는 분들이 있어 한기섭 기사님은 맹렬히 운전한다.
김영실 실장님은 경산 휴게소 저녁식사시간으로 딱 10분 주었다. 서울 잠실역에 11시 30분 도착. 우리 일행 34명은 2박 3일간(2014. 12. 3일 ~5일)의 대마도 여행을 마무리하였다.
일본인은 북한, 중국 다음으로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려 66.3%가. 지금까지도 역사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편협한 그들의 집단적 의사표시다.
그러나 나는 반일의 입장을 배제하고 지정학적 이웃으로써, 서로 다름의 문화를 이해하면서 일본인을 냉철하고 떳떳이 바라 볼 수 있는, 맑은 시선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마도 여행을 총괄 지도해주신 전영우 회장님, 황종하 총무님께 감사하며 김영실 실장님, 김대정 가이드님도 고마웠다.
또한, 여행 내내 나의 동거남, 원형의 우정에 고개 숙이며, 윤형 내외분, 임 지점장님 내외분과 함께한 여행, 정말 행복했고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굉장히 소상하게 기행문을 남기셨네요. 우리 문학회도 꼭 같이 다녀왔는데... 부끄럽습니다. 대단합니다.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증을 많이 공부하셨군요. 새로운 것 많이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