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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970년대는 국외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의 분열, 닉슨독트린 및 중국과 미국의 수교로 국제적인 냉전이 완화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국내외의 정세가 반공안보논리를 강력한 밑받침으로 삼아온 박정희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그 결과 우리 역사에 있어서도 남북화해의 물꼬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남북간에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갈래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한 당사자들이 만나 각기 상대방을 인정하는 조건위에서 긴장 상태의 해소와 조국통일의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 결과가 쌍방의 합의에 기초하여 1972년 7 ․ 4남북공동성명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7‧ 4남북공동성명으로 잡힐 듯이 눈앞에 보이던 통일은 남한의 유신 체제의 전개와 북한의 주체 사상의 발현으로 오히려 분단의 시대를 영속화시키려 고착화하고 있었고, 독재 정권이 주도하는 경제 개발은 개인의 정서와 사회와의 부조화에서 오는 소외를 경험하는 소외계층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현상은 분단 현실을 소재로 한 ‘분단소설’의 창작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물론 한국전쟁과 분단은 5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의 현실로 지속되고 있고 이를 보는 작가들의 눈은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한다.
먼저 한국전쟁을 이야기 할 때 60년대 이전의 작가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와 직접 맞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전쟁을 직접 경험한 60년대 이전의 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소설들, 이를테면 이호철의 「탈향」(1955), 김동리의 「흥남철수」(1955), 선우휘의 「불꽃」(1957), 이범선의 「오발탄」(1959), 등이 한국전쟁의 비참함과 전쟁의 무의미함을 주로 다루었다고 한다면, 주로 소년시절에 전쟁을 경험한 70년대의 작가들은 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했다. 이들은 분단에 대한 이전 세대들의 소재주의적 접근을 넘어서 분단의 원인과 두 체제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여 활로를 개척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소설문학은 그 이전 세대가 가졌던 반공문학, 맹목적인 반전(反戰), 또는 전쟁의 혐오적인 자세, 한국전쟁이 민족적 수난의 핵심적 요인이라는 감정적 차원에서의 인식을 뛰어넘어 이념적 갈등에 의한 분단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즉 60년대의 소설들이 기존의 전쟁참상의 기록과 일방적인 반공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면(최인훈의『광장』), 이에 비해 70년대의 소설들은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단의 문제를 접근하게 되었고(김원일의 『노을』, 윤흥길의 『장마』등), 80년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적극적인 입장을 띠면서 납북, 월북 또는 행방불명된 작가들의 작품들이 암암리에 읽히게 되었으며, 88올림픽을 앞 둔 시점에 와서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문화예술작품이 공식적으로 유입됨에 따라 몇몇 북한의 고위직에 있거나, 있었던 작가를 제외하고는 광복이전의 모든 작품에 대해 해금조치를 단행하게 됨으로써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학의 대응방식도 조금씩 변해왔으며, 나름대로 시대의 변별성도 갖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황석영은 이러한 1970년대의 분단 현실을 소설 속에 형상화하고 있는데, 특히 민중의 일상적인 삶에 작용하는 분단의 상처를 조망하면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 근원에 놓여 있는 인간성 훼손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Ⅱ.황석영의 작가적 위치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작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황석영은 작가로 등단한 다음해에 막노동 공사판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을 직접 겪었고 7~80년대 민주화운동, 문화운동의 고비마다 늘 사건의 현장을 지켰으며, 1989년 통일일꾼으로 북한을 방문한 이래 수년 간의 망명생활을 감수한 끝에 50대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렇게 모진 풍파를 견디느라 때로는 창작의 공백기도 없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황석영은 자신의 체험과 시대의 아픔을 이 땅에 사는 민중의 운명으로 체화시킨 빼어난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독자들의 기다림에 부응했다. 뿐만아니라 현실의 억압이 가중될수록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갈수록 깊어지고 풍요로워져서 매번 독자의 기대를 넘어서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단적인 예로「객지」의 비록 오늘이 아니어도 좋다는 주인공의 마지막 발언에서 엿보이듯이 특정한 시공간에 고립된 개체의 운명에 갇히지 않고 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개인과 집단들에게 공동체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뿐만아니라 황석영의 문학은 ‘한국의 작가’에서 ‘동아시아 작가’로 나아가서 ‘세계의 작가’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들을 두루 확인시켜 준다. 예컨대 황석영의 몇몇 단편에서 중국필자는 현재의 중국문학계에 루쉰이 남긴 숙제가 무엇인가를 짚어내고 있으며, 일본 필자들은 황석영 소설을 통해 동아시아에 산다는 의미를 한국과 일본 필자들이 함게 숙고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또 프랑스 작가의 글은 「삼포가는 길」에서 영달 일행의 처연한 발자국 위로 내리는 눈이 「한씨연대기」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38선으로 얼어붙은 한반도 전체에 내리는 눈이라는 것을 섬세한 독법으로 읽어냄으로서 우리가 분단체제에서 겪은 고통이 서구 독자들에게도 가슴 아프게 와 닿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난 수십 년간 분단체제의 극복을 지향한 민족문학의역정이 세계사적 보편성과 맞닿아 있음을 실증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에서 이미 그의 작품은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으며,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황석영의 소설「한씨 연대기」는 스웨덴어로 번역 출간되어 현지에서 “독자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국전이 시민전쟁인가 거대 세력 간의 힘의 대결인가 하는 원론적 질문보다는 전쟁 속에서 인간의 붕괴를 그리고 있다”며 “한국의 근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전에 대해 간결한 어구로 큰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요테보리 포스트」도 “황석영의 작품을 묶어 전집으로 출판하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대가의 면모를 보인다”고 극찬했다.
이미 독일과 프랑스에서 호평을 받은 황씨의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심사하고 시상하는 스웨덴에서 출판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황씨의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을 더 높이는 호응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손님』독일어판은 지난 봄 다수의 독일어권 언론들을 통해 유럽 지역에 비중 있게 소개되었고, 스위스 일간「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지는 “서양에서 온 치명적인 두 이념(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잔인한 테러 행각을 미화없이 묘사하고 있다”고 호평했다. 또『오래된 정원』’ 프랑스어판은 지난해 일간지 르 몽드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 포함됐다는 등의 다수의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황석영의 문학은 세계 속에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적 위치를 가진 황석영의 작품에 대한 기존의 논의 중 중·단편 소설에 대한 논의는 리얼리즘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고, 등장인물들의 삶을 다룬 것이나 작가의식을 체험과 관련하여 다룬 것과 등이 있다.
첫째, 리얼리즘과 관련된 논의는 김병욱, 백낙청, 김치수, 신동한, 염무웅, 성민엽, 현준만, 김우창, 천이두, 구중서, 이태동, 이동하, 백문임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황석영의 소설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주변인으로 밀려난 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하고 있다고 보았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삶을 다룬 논의는 한형구, 한점돌, 김한식, 서정숙, 이보영, 김주연, 김재수, 장세진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의 논의는 고향 상실을 소외의 원천으로 보고 소외의식적 측면에서 다룬 것 실향의식 또는 외지인 의식의 관점에서 다룬 것과), 그리고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을 다룬 것 등으로 나뉜다.
셋째, 작가의식에 대한 논의는 김치수, 성민엽, 진형준,오생근, 권오룡, 황광수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황석영의 소설이 개인적 체험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체험과 관련해 작가의식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작가의 자전적 체험에서 우러난 작가의식의 투철함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과, 황석영 소설에 나타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가가 드러내는 낭만주의적 태도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으로 나뉜다.
이상으로 기존 논의를 검토한 결과, 대부분의 평자들은 황석영이 소외된 자들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형상화한 측면은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그의 소설에 나타난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적 경향은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황석영의 확고한 문학관과 실천적 삶의 이력이 그의 작품 전반에 침투하여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소외된 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이 탁월하게 형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들은 몇몇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황석영 소설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외에 학문적 접근으로는 이용군, 김원규, 강상대, 임회록 등의 학위논문을 들 수 있다.
이상의 학위 논문들은 몇몇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또한 황석영 소설의 부분적인 특성을 밝히는 데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는 황석영 단편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데는 한계를 갖는다. 본고는 기존 연구들의 바탕위에 분단을 소재로 한 1970년대의 소설 중「한씨연대기」「잡초」「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과 1987년에 발표한 「골짜기」를 텍스트로 하여 발표순서에 따라 분단의 의식의 변모 양상을 고찰할 것이다.
Ⅲ. 분단의식 변모 양상.
1. 분단 이데올로기의 폭력성 비판-「한씨연대기」
70년대 분단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현대사에서 우리 민족의 큰 상처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과 분단현실에 대한 재인식이다. 이 시기에는 소년 시절에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에 의해 작품 활동이 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과거사를 단순히 조망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현재화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찾는 보다 적극적인 모색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의 분단 소설은 민중에 대한 발견과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통해 분단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분단소설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을 배경으로 분단의 원인을 사회ㆍ경제적 측면에서 조망하고 있기도 하고, 외세의 작용과 그로인해 왜곡되는 민족의 삶에 대한 고발을 다루기도 하며,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분단의 상흔과 질곡을 민중의 시각에서 넘어서려는 의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황석영의 「한씨연대기」(1972)는 1970년대 분단소설의 특성 중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분단의 상흔과 질곡을 민중의 시각에서 넘어서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분단 이데올로기에 의해 삶이 훼손당하고 희생된 한영덕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김일성 대학의 산부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한영덕은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간 존엄의 사상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북한이 추구하는 권력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동화되기를 거부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당원들의 치료뿐만 아니라 보통병동의 환자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데, 당원인 원장은 ‘정수의 애국인민과 평양의 행정에 종사할 사람’을 치료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한영덕은 환자는 위급함의 정도가 있을 뿐 특별히 손길을 더 주어야 할 대상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뿐이다. 그 와중에 자신과 더불어 당에서 소외되었던 친구 서학준으로부터 인민병원으로부터 도망치자는 권유를 받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원장의 허락없이 목숨이 위태로운 계집아이의 수술을 감행한다. 원장은 이에 지시를 어긴 한영덕을 당에 고발하겠다며 위협하지만 한영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환자를 돌본다. 이렇게 권력 중심적 이데올로기에의 동화를 거부하던 한영덕은 결국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불순분자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는 살아남게 되고, 친구 서학준으로부터 이번에는 남한 군의관에 입대하자는 제의를 받지만, 혼자만 살 수는 없다는 것과 전쟁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신분 보장을 바라는 짓은 하지 않겠다며 이 또한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간직한 채 권력 중심의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지닌 북한을 떠나 자유를 찾아 남한에 온다. 그는 잠시 다녀오겠다며 북에 두고 온 아들이,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지 않을까 수용소 주변을 기웃거리다 간첩으로 의심받고 수사기관에 잡혀들어가 엄청난 물리적 고문을 당한다. 겨우 풀려나온 그는 먼저 월남해 있던 여동생 한영숙을 만나 그녀의 집에 얹혀살지만 그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일거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던 중 의사 면허증을 필요로 하던 박가와 동업을 하게 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남편이 경찰이었다가 북으로 끌려간 이후 다방마담으로 홀로 살고 있던 윤미경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고 그녀는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그런 안정된 생활도 잠시.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던 박가가 끊임없이 낙태수술을 통한 돈벌이를 종용하자, 그는 ‘모체에 든 생명줄을 함부로 끊어놀 수야 없디요’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이에 자신의 요구를 거절한 데 앙심을 품은 박가는 그에게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수사 기관에 고발해 그는 다시 모진 고문을 받는다. 자신의 간첩 혐의를 완강히 부정하고 겨우 풀려 나온 후 그는 집을 떠나 홀로 살다가 적산가옥 2층 그늘진 북향방에서 외롭게 생을 마친다.
「한씨연대기」는 작가의 큰외삼촌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전쟁과 결부된 집단적 이데올로기가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민중들의 삶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술시점이 아주 독특하다. 제목과는 달리 한영덕의 말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현재-과거-현재로 진행되는데,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한영덕의 삶을 알기 위해 작품을 재구성하도록 요구한다. 독자는 서술의 혼란을 통해 한 노인의 죽음을, 한 일상인의 죽음이 아닌 체제의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전쟁을 겪었던 민족적 삶의 비극성으로 한층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다음으로 독자는 북쪽의 권위적이며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기에 죽을 뻔 했고, 남한에서도 그런 삶의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한 지식인의 어이없는 죽음과 만나게 된다. 이것은 단지 한영덕 한 인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삶의 비극성인데. 인간의 존엄성을 가치로 삼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 남북의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인다, 너 간첩이야, 간첩. 네 따위 하나쯤 죽여 봤자 전시에 누가 알 상싶으냐. 쏜다……지금 당장!
개새끼, 내 교대하기 전에 서명하지 않으면 아주 씹어 먹어버릴테다.
심문병은 한씨의 머리카락을 잡아일으키며 싱글벙글 웃었다.
딱한 양반이로군
그들은 끗발내기를 하는 도박꾼들처럼 대결했다.
광도높은 백열전등을 한씨의 머리 위 정면과 측면에 켜놓고 세 사람의 심문자가 저 쪽 어둠 속에서 번갈아 재빨리 질문했다. 대답이 늦을 적마다 드러내놓은 정강이 위에 곤봉의 타격이 가해졌다. 한씨 는 극심한 피로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렸고 나중에 는 침까지 흘렸다. 영원히 비정한 백주(白晝)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가 자동적으로 고개를 떨구고 졸게 되면 콧구멍 속으로 고춧가루 섞인 물을 들이부었다. 한씨는 그때에 교수도 의사도 피난민도 아니었고 미친 시대위에 놓인 한갓 고깃덩 이일 따름이었다.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이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어떻게 박탈되고 희생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작가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려 ‘한영덕은 남한의 폭력적 이데올로기 앞에서 교수도 의사도 피난민도 아닌 미친 시대 위에 놓인 한갓고기덩어리일 따름이었다’고 진술하여 전쟁과 그로 인해 자행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잔인성을 비판하고 있다.
“정보대는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현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과오라도 범할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보안상의 문제에서 그들은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했 었다는 선까지만 밝혀주면 그만일 테죠.”
기럼, 억울하고 원통하게 당한 사람은 어카구요. 생사람을 춘향이 식으로 때레잡는 거이 민주국가 야요?
부인, 변호를 맡을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이번 전쟁에서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우리의 자유는 절반으로 삭감되어 있는 거죠. 그것은 양쪽의 똑같은 명분입니다. 계속 죽지 않고 이 런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고충이 따르게 마련 아닙니까? 여하튼 저는 이 사건이 검찰에 넘어올 가치도 없는 사건임을 확신합니다.
위의 인용은 한영숙이 오빠를 구명하기 위해 찾아간 변호사와의 대화 내용이다. 변호사의 말에 의하면 사회는 개인에게 자유로운 삶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한 사회는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없으며, 전쟁의 시대에는 인간을 선의의 피해자로 삼아 죽이는 과오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영덕 개인의 비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살아야했던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전쟁 자체를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전쟁으로 인해 고착된 분단 상황 속에서 그것을 허울로 집단적이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인간의 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나아가 가족 그리고 민족의 공동체성까지 파괴하는 절망적 현실을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시대 현실을 비판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인간 존엄성을 지키려 한 한영덕의 의지를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한영덕이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당원의 치료에 앞서 계집아이의 수술을 행하거나. 물질적 욕망을 외면하고 낙태를 거부하는 등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용기와 실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을 구제하고자 한다. 김병욱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의 한씨를 통하여 작가는 한 양식 있는 지식인이 집단에 의해 동화되지 않고 조용한 저항을 통하여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전체주의 국가체제에서 한씨와 같은 인간이 받는 수난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증언한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집단이 거역하는 한씨를 통하여 한 양식있는 인간의 당연한 행위를 추구한다.” 이러한 지적에서 주목할 점은 김병욱이 한영덕의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영덕이 실천한 인간존엄의 사상은 모든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임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권력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타락한 오늘날의 현주소를 반증하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이 1970년대에만 머물러 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씨연대기」는 현실 구제의 모습을 한영덕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지 않다. 부조리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한 길은 한영덕 외에 그의 누이동생 한영숙을 통해서도 모색된다.
“전 어젯밤에 하도 외로와서 우리 큰 아이를 깨웠시요. 어린거이 눈이 둥그래가지구 자기가 멀 잘 못한 거이 있느냐구 기러디 않아요. 너희가 뭘 잘못해. 우리들이래 다 죽일 것들이디. 기러문서 저 는 갸한테 말했시요. 거저 훌륭한 사람되야 한다. 나라의 이런 때를 거울삼아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이댐 좋은 세상이든 나쁜 세상이든 넷말하듯 하라구요. 내레 알아먹지도 못하는 아이한테 오라버니 겪은 얘길 모두 해줬답네다.”
위 인용문은 전쟁을 치른 세대의 책임을 날카롭게 묻고 반성하는 의미를 일깨워준다. 또한 전쟁은 어느 한 편의 책임이 아닌 그것을 막지 못한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의 책임임을 암시한다. 한영숙의 자기반성적이고 자기각성적인 태도는 그것 자체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실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자신의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오늘보다는 나은 미래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윤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윤리적 결단과 거기에서 생겨나는 집단적인 힘이 중요한 것’이라는 황석영의 의식은 이렇듯 한영숙에게 투영되고 있다.
작가는 더하여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태어난 그들의 후손들에게 미래의 비젼을 제시하는 상징적 장치를 잊지 않는다.
한혜자는 단신 월남한 주정뱅이 고용의사와 납북된 경찰관의 아내였던 전쟁 미망인사이에서 태어 났다. 그 애는 뒷날 성숙한 처녀가 되었을 때에 자신의 별명을 ‘개똥참외’라고 지었다. 인분에 섞여 싹이 트고 폐허의 잡초 사이에서 자라나 강인하게 성장하는 작고 단단한 열매. 이별을 겪고 나서 체념한 사람들이 인생의 새로운 인연에 따라 살아갔는데, 그들의 버려진 기대와 함께 태어난 아이 들은 자기네 이전의 삶을 일종의 우스운 농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중략 -
새벽의 냉기에 눈을 뜬 혜자는 서학준 박사와 고모가 잠이 든 걸 확인한 뒤에 살그머니 일어났다. 그 애는 발꿈치를 들고 영좌(靈座) 앞으로 걸어가 향그릇 옆에 놓인 유품들 중에서 수첩을 집어들었 다. (중략) 그 애는 우중충하고 비좁은 계단을 내려와 그 집을 빠져나왔다. 고별식은 끝났고, 이제 아버지는 망령마저 떠돌 수 없도록 땅 속 깊이 묻힐 것이다. 혜자는 아바지의 매장에 관한 따분한 기억을 갖고 싶지 않았다. (중략) 혜자는 종이등피를 쳐들고 거의 다 타버린 촛불을 불어 껐다. 첫차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그 애는 역까지 뛰어서 갔다.
월남한 주정뱅이 고용의사 아버지와 납북된 경찰관의 아내였던 전쟁 미망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분단이 잉태한 우리 민족의 수많은 전후 세대로 분단의 비극적 산물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래서 그녀는 죽은 아버지의 매장에 대한 따분한 기억을 갖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품 중 수첩을 집어들고,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집에서 빠져나온다. 집이라는 공간이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면 혜자의 이 행동은 아버지의 육체와 영혼의 공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우중충하고 비좁은 계단을 내려와 그 집을 빠져나온 행위는 아버지가 살았던 우중충한 시대의 계단 즉 역사에서 걸어 나와 아버지가 살았던 공간 즉 아버지 시대와 완전한 이별을 상징한다. 그런데 혜자는 아버지의 유품 중 수첩을 들고 나온다. 수첩은 기록을 남기는 물건이다. 아버지의 수첩에는 아버지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매장에 대한 따분한 기억을 갖고 싶지 않은 그녀가 아버지의 수첩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역사의 이어짐을 상징한다. 작가는 사소한 듯 보이는 수첩을 아버지와 혜자를 연결하는 매개물로 이용하고 있다. 아버지의 공간을 결연히 벗어나지만 그녀는 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수첩으로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의 역사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 시대의 망령(분단 이데올로기든지, 비극적 시대 상황이든지)은 아버지의 주검과 함께 땅(무덤) 속에 묻혀버릴 것임을 확신한다. 첫차를 타러 나오던 혜자가 되돌아가 굳이 등피의 불마저 꺼버리는 행위는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아버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차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첫차 시간이 멀었는데도 그 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떠나는 혜자의 모습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는 우리 민족의 미래의 모습이다. 아버지의 시대의 비극적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밝힐 다음 세대의 희망을 상징한다. 작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하게 탄생했지만 개똥참외처럼 강인하게 성장한 혜자에게 아버지 시대의 망령을 모두 떨어내고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능동적 세대로서의 역할을 줌으로서, 그녀를 통해 분단 이데올로기 극복 의지와 우리 민족의 비젼을 제시한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통해 분단으로 야기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미래를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 비극의 심화 - 「잡초」
「잡초」(1973. 3)는 태금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성인이 된 화자의 회상으로 시작되는데, 전쟁 전후 내가 살았던 공단지역에서 일어났던 좌우익의 대립과 전쟁의 모습이 어린 ‘나’에 의해 진술된다.
우리는 해방 후 월남하여 영등포에 있는 영단주택에 살았었는데, 방직공장의 사무원으로 취직한 어머니는 취학 전인 나를 돌보게 하려고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처녀인 태금이를 식모로 데려온다. 그녀는 나와 짝패가 되어 신기한 곳을 찾아다니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그러다 태금이가 좌익운동을 하는 뚝발이네 형을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뚝발이네 형네들이 사는 창고 동네도 가게 되는데, 그곳은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창고 몇 채를 차지하고서 칸막이를 하고 사는 지저분하고 어두운 동네였다.
내가 입학한 다음날 여러 사람들의 합창소리와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면서 공작창 앞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그 때 태금이는 이미 길 밖에까지 나가서 동네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었다. 잠시 후 무기를 든 사람들끼리 다시 싸움이 벌어져 사람들이 길바닥에 늘비하게 쓰러졌다. 며칠 뒤에 내가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태금이는 견습 여공으로 취직이 되어 우리집에서 나가면서, 뚝발이 형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했다. 얼마 후에 비행기의 폭격이 시작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만 ‘나’에게 있어서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음울한 포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밖에 난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태금이의 도움으로 마을을 빠져나가 오랜 피난 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온 나는 죽은 시체를 보고서도 쥐새끼의 시체를 대하던 버릇대로 침을 한번 뱉고 지나갈 정도로 무감각한 아이가 되었다. 어느 오정 때 전쟁놀이를 하며 놀던 나는 앙상하게 마르고 볕에 그을은 얼굴 가운데서 눈만 번들거리는 미친 태금이와 만난다. 그녀는 방직공장의 무너진 담을 지나 폐허가 된 공작창 앞 언덕에 올라 음산한 군가조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 노래는 늦가을까지 계속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경험에서 소재를 가져온 작품이다. 작가는 해방 후 평양에서 내려와 효창동에 살다가 영등포로 옮겨 정착해 살았다. 영등포에는 경성방직 공장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곳에 사무원으로 취직해서 다녔다고 한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철도공작창이 있었는데, 전평(全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좌우익이 서로 테러하고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랐다고 한다. 「잡초」는 그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서술방식에 있어「한씨연대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하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씨연대기」가 서술자의 입을 통하여 인물의 비극적 삶을 객관적으로 진술하고 있는데 비해, 「잡초」는 성인이 된 내가 어린 시절을 떠올려 어린 나의 목소리로 진술하는 회상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1970년대에 주로 분단 소설을 썼던 ‘유년기 체험세대’들이 자신들의 전쟁경험을 떠올리며 사용하던 방법이다.
이 작품은 어린이의 관점에서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관찰하고 있다. 굳이 관찰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가 다른 등장인물의 내면을 들여보거나 사건의 전개를 통해서 그 추이를 짐작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태금이가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대놓고 핀잔을 주는 사람을 처음 보았을 뿐더러, 언 제나 잘났다고 까불대는 누나들에게 호령했을 때에는 나는 완전히 태금이가 내편이라고 믿게 되었 다. 태금이는 좋은 나라였고, 엄마와 누나들은 때때로 나쁜 나라일 수가 있었다.
1인칭 소년의 눈으로 관찰되고 있는 중심인물 태금이는 어린 아이다운 주관적 입장에서 어머니나 누나보다도 가까운 ‘좋은 나라’ 사람으로 어린 ‘나’에게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다. 태금이는 집 안에만 갇혀있던 ‘나’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하며 현실을 인식하게 하여 ‘나’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얼굴이 새까맣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몸집은 작았는데 목소리만은 굵직하고 점잖았다. 아가씨, 좀 던져주쇼. 태금이가 공을 던졌다. 태금이의 얼굴은 온통 자두처럼 붉어져 있었다.(중략) 태금이 는 그 무렵부터 살구씨 냄새가 나는 어머니의 크림을 몰래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태금이의 심리적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찰하는 객관적 입장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부서진 모양의 창고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그 창고 몇 채를 차지하고 칸막이를 하고 살았다. 우리는 그 지저분하고 어두운 동네로 들어섰다. 우 리는 그 지저분하고 어두운 동네로 들어섰다.
그러나 태금이와 뚝발이네 큰형의 존재는 ‘나’에게 영단주택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전환점이 된다.
그런 혼란 중에 텅 빈 여공 기숙사 속에서 여자들의 울음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 다. 목격한 사람들에 의하면, 한쪽에는 뚝발이에 일가를 비롯해서 여러 집 식구들이 참혹한 꼴로 뉘어져 있었다. 몰살된 식구들도 있었지만 어쩌다 한둘 남은 양편의 아녀자들이 의좋게 복도에 주 저앉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난리 전에 벌어졌던 패싸움이 그렇게 끝날 줄은 몰랐다고들 했다.
순진한 아이의 주관적 입장에서 객관적 상황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전쟁의 모습조차도 전쟁 전에 일어났던 ‘패싸움’과 동일한 연장으로 인식하고 전쟁의 참혹한 현장에 망연히 앉아있던 좌우익의 아녀자들을 의좋게 복도에 주저앉아 있는 정도의 상황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따라서 전쟁과 분단의 비극적 희생자로 작품의 중심인물인 태금이의 행동과 삶의 변화 과정도 어린이다운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묘사되거나 어린이다운 추측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이것은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어린이 관찰자가 갖는 미숙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분단 현실의 본질적인 면을 형상화하지 못하게 만든 요소’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전쟁의 비극이 더 심화되기도 한다.
시골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꽤 무감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 뒤를 타박타박 걸으면 서 먼지나는 신작로 위로 내가 본 것은 하얗게 내리쬐는 땡볕과 죽은 개처럼 부패하고 있는 사람의 시체들이었다. 나는 우리 동네 밭고랑이나 수챗구멍에서 보았던 쥐새끼의 시체를 대하던 버릇대로 침을 한번 뱉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전쟁놀이를 하노라면 아이들은 예전과 달랐다. 그전에는 땅, 하고 쏘면 제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거 나 손을 들고 서 있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목을 뒤로 꺾고 땅 위에 벌렁 나뒹굴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계급을 엄히 지킬 줄도 알았다. 내가 너보다 높잖아 하면 기가 죽어서 항의를 그치는 것이 었다.
앞의 인용문에서 피난 생활을 경험하고 돌아온 내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쥐새끼의 그것과 동일시할 정도로 무감각한 아이가 되었다는 것은, 아이가 피난길에 시체를 많이 보았다는 것을 추측케 하는 표현으로서 전쟁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뒤의 인용문에서 아이들의 전쟁놀이에 죽음과 계급의 위계가 생겨나는 것은 또한 전쟁이 가져온 현실의 비극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아이의 눈으로 관찰하고 아이의 목소리로 표현하기에 독자들에게 더 깊게 전달된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은 태금이가 미쳐서 돌아오는 것으로 정점을 이룬다. 전쟁은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처녀인 태금이를 미치게 한 것처럼 우리 민족 누구든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태금이는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광인을 등장시켜 현실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것인가를 진단하고 해부하여 이를 부정하려 했다. 광기의 제시는 이재선도 지적했듯 단순히 삶의 일상성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질병의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와 사회가 지닌 병리의 비유요 상징인 동시에 이러한 시대와 사회를 앓고 있는 신음과 양심 및 희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병이 오히려 더 건강한 것이라는 역설적인 가치의 전가치화(轉價値化)가 작용한다는 이재선의 지적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 하겠다.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전쟁이란 것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독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에는 「한씨연대기」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어두운 상징물들이 등장한다. ‘폐허가 된 공작창’이나 ‘을씨년스럽게 자라난 잡초’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자칫 치유될 수 없는 민족의 현실을 상징하는 듯이 보이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장치를 빠뜨리지 않는다.
태금이는 깨진 벽돌쪼가리와 철근 사이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나도 태금이처럼 그곳 을 올려다 보았더니 새 집이 여러 군데 뚫려 있었다. 태금이는 여러 줄로 꽂힌 햇살 가운데 그런 모습으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새들은 생명력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태금이는 여러 줄로 꽂힌 햇살 가운데 서 있다. 햇살은 빛이다. 폐허의 현실 속에서 태금이를여러 줄기의 빛이 비추고 있다. 폐허 속에서 모든 것을 상실하고 미쳐있는 태금에게 여러 줄기의 빛이 비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빛은 태금이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그 빛은 전쟁과 분단으로 폐허가 된 참혹한 현실 속에서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우리 민족에게 작가가 제시하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3. 한(恨)의 형상화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1973. 11)은 좌익운동을 하다 죽은 남편이 묻힌 고향을 떠나 20년을 객지에서 홀로 살다 죽은 어머니의 뼈를 아들이 들고 와,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어 수습해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와 오래 전에 죽은 아버지의 옆에 어머니의 뼈를 합장하는 내용이다.
까막골에 검은 양복을 입고 라면 상자를 짊어진 청년이 찾아온다. 그는 배씨 성을 가진 노인을 찾는데 그는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어 수습해준 죽은 아버지의 친구다. 청년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시신 옆에 어머니를 합장하기 위해 왔다고 말한다. 청년은 배씨를 통해 그의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하다 죽었고, 마을은 그 무렵 쑥밭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어머니는 마을을 떠나 20년을 외로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년은 배씨가 봉분도 없이 만들어 놓은 아버지의 묘를 파헤쳐 검은 뼈를 꺼내어, 등에 짊어지고 온 라면 상자 속의 어머니의 노란뼈와 합장하여 다시 묻는다.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은 혼란한 역사 속에서 슬프고 외로운 생을 살았던 한 여인의 한(恨)을 조망한 작품이다. 좌익 이데올로기를 가진 아버지로 인해 청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그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외로이 살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분단의 고통은 한(恨)의 차원으로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과는 달리 꿈을 통해 우리 민족의 미래를 제시한다. 꿈은 무의식의 상징적 표출이다.
청년은 꿈에 수많은 말의 무리가 구름을 먼지처럼 일으키며 끝없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검은 말, 흰말, 얼룩말 들의 팽팽한 궁둥이가 햇빛에 번쩍였고, 끝도 없는 말발굽 소리가 귓가에 가득 찼 다. 드디어 말발굽 소리도 멀리 가고 일렁이던 먼지가 차츰차츰 가라 앉았다. 망원경의 유리알을 통 해서 지평선이 나타났다. 숫자와 좌표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사방 어디에나 똑같은 산천이었다. 인기척없는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그때마다 초조해서 안달이 났다. 다시 말이 달려가고, 들판이 보 이고 하는 장면을 거듭 꿈꾸었던 것 같다.
꿈은 무의식의 표출이다. 청년은 꿈 속에서 말의 무리가 구름을 먼지처럼 일으키며 끝없이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검은 말, 흰말, 얼룩말 들의 팽팽한 궁둥이가 햇볕에 반짝이는 모습도 보았다. 이 장면은 마치 이육사의 광야의 한 장면을 떠올릴만큼 웅장하다. 뒤에 나오는 아버지를 상징하는 검은 뼈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노란뼈(흰뼈)가 말의 색깔과 묘하게 일치한다. 그렇다면 얼룩말은 아들인 청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꿈속에서 청년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이 광활한 들판을 맘껏 달리고 있다. 이 꿈은 우리 민족의 활기찬 미래를 암시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인 듯 보인다.
어디…… 어디 좀 보여주게.
펼쳐진 종이 위에는 한 두어줌 되어 보이는 골편들이 있었다. 노인은 그것들 위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골편 몇 개가 떨어졌고 노인은 그것을 주워올렸다. 청녕이 아버 지의 형해위에다 납석의 파편과도 같은 어머니의 뼈를 떨어뜨렸다. 검은 뼈 사이에서 노란 뼈는 곧 판별할 수가 있었다. 그 석회질들은 기묘한 모양을 이루어 섞여 있었다.
자네 아나? 한(恨)이란 건……색깔이 있다면 똑 저 모양일 걸세.
청년이 고개를 들어 그쪽을 살펴보았다. 청천 하늘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맞은 편 능선의 중동이가 태로 비스듬히 잘려 있었다. 한 입 베어문 홍도(紅桃) 처럼 단애의 속빛은 더욱 강렬했다.
앞의 예문은 어머니의 한을 푸는 화해의 의식이다. 어머니로 표상된 전 세대의 비극(한)을 짊어지고 온 후대는 어머니의 뼈를 아버지의 뼈와 합장함으로써 전세대의 비극을 영원히 땅에 묻는다. 이는 「한씨연대기」에서 혜자가 아버지의 망령이 영원히 땅에 묻힐 것을 확신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뒤의 예문은 이 작품의 주제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한(恨)이라는 정서를 한 입 베어문 홍도(紅桃)의 색으로 형상화한 것은 너무나 선명하여 독자의 가슴에 분단의 아픈 현실이 강렬하게 전달된다. 또 작품은 앞의 두 작품과 달리 빈번하게 말없음 언표를 사용하는데 이는 표층구조에 드러나지 않은 심층적 서사를 말없음표 속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작가와 독자의 능동적 대화를 유도하여 역사적인 공동체 인식을 확인하게 하는 서사적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기재를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시신을 아버지 옆에 합장하러 온 아들이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알게 뭡니까? 저는 그저 어머님이 원하시던 대루 해드릴 뿐입니다.” 라며 부모가 겪은 전쟁의 실상을 외면한 채 전쟁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지 않음은 아쉽다.
4. 어두운 시대현실 극복 의지-「골짜기」
이 작품이 발표된 1980년대는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광주항쟁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민족ㆍ민중운동’으로 대표되는 운동의 문화, 이념의 문화가 지배적인 시대로 한국 현대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민주화의 시대였다. 5ㆍ18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87년 6ㆍ29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 격동과 조응되면서 다원화현상을 드러냈고, 6ㆍ29이후 봇물 터지듯한 언론자유에 힘입어 쏟아져 나온 월북문인작가들의 작품들과 북한물들의 출판, 그리고 지난날부터 터부시되었던 사건들의 재조명으로 4ㆍ3제주 사건, 여ㆍ순사건, 지리산 빨치산 등을 문학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중국의 연변 소련동포들의 문학도 소개, 출판되었다. 또한 그동안 금지되었던 납 ․ 월북 문인들의 작품개방으로 우리 문단의 반쪽 문학이 복권되었으며 중ㆍ단편 소설 풍토에서 장편소설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 시대의 많은 작가들은 군부독재의 기만과 탄압에 대하여, 사회 계층간의 갈등과 외세의 지배 메커니즘에 대하여, 그리고 여타 부조리에 대하여 글을 쓰고자 노력했는데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은 좀더 깊이 있는 역사인식으로 심화되었다.
「골짜기」(1987)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日記抄 1980년 겨울이라는 부재를 달고 3개의 일기를 초록하고 있다.
작가인 나는 수배중인 인물로 광주항쟁이 일어난 월말쯤 집으로 숨어들어온다. 집에 온 나를 가족들은 방문이 꽁꽁 잠근 채 숨도 쉬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곳에서 전쟁 중 피난살이에서 느꼈던 것 같은 탈향(脫鄕)을 절감한다. 어느 날 기억에도 희미한 친구가 군인이 되어 찾아와 나에게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령하며 편지 한 장을 써 주었다. 나는 그 편지를 들고 육지와 멀리 떨어진 이 섬으로 떨어져 나왔다. 그 섬에서 새로운 방문자가 나를 찾아왔으나 편지를 전해주자 안심하고 돌아갔다. 나는 열평 남짓한 공무원 아파트에 짐을 풀었는데 두해 동안 그곳에서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어느날 긴급조치로 쫒겨다니다가 향토주의자가 되어버린 김(金)이 찾아와 전설의 발굴 현장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곳은 삼십여년 전에 이 섬을 휩쓸었던 살육의 진상을 보여주는 동굴이었다. 그곳에서 잔해들을 바라보며 나는 공기마저 정지된 저 숨막힐 듯한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이다.라고 되새긴다. 마을 사람들은 의사가 읽어주는 잔해의 특징으로 낙원 저쪽으로 사라져 갔던 사람들을 맞혀내고는 했다.
그해에 가장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나는 전도사인 한 가정주부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쓴다.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다가 수술을 받고 살았는데 살아나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북돋우며 살겠다는 약속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이라는 좌익수를 소개받았다. 그는 고아로 자라나 실연을 하고 이곳은 자신이 자기 같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월북을 시도한 진이는 처음에는 그녀를 거부하다 마음의 문을 열었는데 이제는 그녀를 만나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은 더 이상 변하고 싶지 않으며 그냥 감옥에서 살아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답장을 부탁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는 자기가 안정되게 살고 있는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안 그런척 꾸미고 살고 있다고 말한 후 분단으로 병든 이 사회에서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죄없이 죽어갔다고 말한 후, 우리의 역할은 진이가 휴전선을 헤매기 전까지의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바꾸어 나가는 일에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함박눈이 내리는 날, 어머니가 위중함을 알리는 전보가 날아온다. 나는 어린 사남매를 데리고 혼자서 전후의 험한 세월을 살면서 늘 귀향을 그리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애지중지 보관하던 검은 가죽가방 속에 들어있던 서류뭉치를 불태우는 어머니도 떠올린다. 서류뭉치는 일본 은행에서 내준 채권 따위와 아버지의 고향에 있다는 전답의 문서 따위다. 귀향에의 희망이었던 서류뭉치를 태우는 어머니를 보고 나는 섬뜩하게 어머니가 얼마 못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었다.
눈보라가 치고 폭풍경보가 내려 배를 탈 수 없는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북한강가에 아버지를 이장하여 함께 묻히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배표를 사온 김(金)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 거기서 전과 4범으로 막 출소한 한 남자에게 술을 사 주게 되는데 그는 “니미……이따위로 살 바엔 차라리 저쪽이 나슬 것이오, 암만.” 하고는 김(金)의 사과하라는 말을 당당하게 거절하고 나간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에게 빨갱이 혐의나 씌우려는 이 사회에 절망을 느낀다. 그러다 산중에서 길을 잃은 한 사내가 아득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찾아갔다는 옛이야기를 떠올리고, 나도 옛날 얘기대로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비틀거리면 올라갔다.
「골짜기」는 사상범으로 수배를 받던 내가 기억에도 희미한 어린시절의 군인 친구의 도움으로 수배 명단에서 제외되고, 5ㆍ18광주민주항쟁으로 뜨겁던 광주의 집을 떠나 잠시 섬에 머무르면서 겪었던 일을 일기초의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중년인 내가 서술자로 나에 대해 진술하므로 앞에서 다루었던 작품에 비해 인물의 섬세한 심리나 그 변화까지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내면을 깊이 바라보고 진술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골짜기」도 앞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6ㆍ25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그 연장 선상에서 5ㆍ18광주민주항쟁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이 보인다. 먼저 전쟁으로 인한 인간 소외가 현실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우리들의 비도덕성, 그리고 분단으로 인한 상흔 등을 작가는 보여주려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나절에 부모를 따라 내리게 된 낯선 도시나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 분위기는 이를테면 우리를 감싸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 담에 죽어서 영혼이 이승의 위를 떠서 흘러 지나칠 때와 같은, 이쪽과는 절연을 냉정히 드러내는 그런 분위기였다. 개 짖는 소리, 아이의 울음, 계집아이들의 웃음소리, 놀러 나간 아이를 찾는 식구들의 긴 목소리, 음식냄새, 그리고 흐릿한 창문의 불빛들 가운데 서게 되면 이 세상에는 영영 내 집이 없다는, 여기는 딴 나라라는, 여긴 내 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점령된 도시에서 나는 탈향을 절감했다.
1980년 광주에서 살고 있던 나는, 피난 시절 탈향으로 겪었던 소외의식을 지금 점령된 도시에서 느끼고 있다. 6 ․ 25가 많은 이들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종용하여 타지에서의 소외감을 느끼게 했듯이 1980년 광주의 현실도 그 연장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저 굴 안의 사람들을 그렇듯 철저하게 유폐시켜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중략)…
공포 때문에 스스로를 한 시대로부터 유폐시켰던 양민들의 몇 줌 안 되는 목숨의 흔적들은 차라리 네이팜이 휩쓸고 지나간 밀림의 촌락들보다도 잔혹했다. 내가 쫓겨난 도시에서의 엊그제 같던 일들도 저렇게 냉혹하고 정밀하게 묻혀져 갈 것이 아닌가. 동굴 안에서 사람을 뺀 모든 것은 정지된 채 그대로였다. 공기마저 그대로 정지된 저 숨막힐 듯한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이다, 라고 되새기자마자 나는 뜨거운 물을 삼킨 것처럼 흠칫, 했다.
광주를 떠나서 온 섬의 동굴에서 나는 잔해로 남아 있는 삼십여년 전의 전쟁의 참상을 보게 된다. 전쟁이 끝난 지 삼십년이 지났어도 우리 민족에게 전쟁의 망령은 전설이 발굴되듯 불쑥 고개를 내밀어 현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섬에까지 전쟁의 참상은 구석구석 스며 있다. 나는 이 동굴의 참상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숨막힐 듯한 동굴안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끝난 지 삼십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전쟁의 참상은 존재하고 그로인해 우리는 여전히 숨막힌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단 이데올로기라는 허울을 걷어내지 못하고.
누구나 말로는 아주 쉽게 남북 분단이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실제 로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마치 무너진 집의 벽 한쪽에 받침대 대신 동시대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 을 세워두고, 그들로 하여금 무너져 내리는 지붕을 쳐들고 있도록 해두면서 임시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꼴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정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임시 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위의 글은 전도사인 가정주부에게 내가 보낸 답장의 일부이다. 이 시대 현실이 분단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조차 그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무너져 내리는 지붕을 쳐들고 있도록 하는 그 행위는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현실의 우리 모습이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에 일침을 놓는다. 이것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동등한 이익, 불행을 함께 나눠서 감수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윤리의식과 통한다.
이는 고아로 자라나 목공쟁이가 되어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으나, 고아라는 이유와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실연을 당하고 음독을 결행했던 진이가 이땅은 자기 같은 사람이 살 곳이아니라고 생각해 월북을 기도하는 행위를 낳게 하고, 술을 먹고 “니미……이따위로 살 바엔 차라리 저쪽이 나슬 것이오, 암만.” 이라고 말하는 전과 4범 남자의 소외의식도 낳게 한다..
나는 막 불이 붙어 연기를 올리며 타오르는 서류뭉치를 자세히 보고 놀라서 외쳤다.
아니, 이건……
그래, 느이 아부지 고향의 땅문서다.
나는 애초에 이북의 땅문서를 가죽가방에 애지중지 보관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 노릇이라고 생각 해 왔지만, 어머니기 가끔씩은 깊은 밤중에 고리짝에서 그런 잡동사니들 펴보기도 하고 되읽어보기 도하면서, 실재하는 저 먼 고향의 언저리를 빙빙 돌아다닌는 것을 눈치채고는 과연 가죽 가방이 귀 중한 까닭이 있다고 고쳐 생각을 고쳐먹었던 것이다. (중략)
인제는 고향은 아예 안갈 작정이세요? (중략)
와 안 가, 가야디. 갈라구 태우는 거야. 이까짓 머하간. 이런 거 까탄에 고향에 못가디. 문서가 머이가, 쪽박을 차두 가야디.
나는 그때 이미 어머니의 주름살 사이로 날카롭게 지나가던 결의 비슷한 표정을 보면서 섬뜩하게 어머니가 얼마 못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분단으로 실향을 한 사람들은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고 있다. 나의 어머니도 그런 한 사람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검정 가방은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꾸려놓은 짐보따리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생전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음을 인식한다. 그녀는 이승에서 고향에 돌아기기를 체념하고 귀향의 보따리를 없앤다. 그것을 없앨 때의 그녀 심정을 이해한다면 그녀가 검정 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불태우는 행위는 소지(燒紙)의식과 연결되어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하다. 결국 전쟁은 살아생전 나의 어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 막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우리 분단 현실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데 앞의 작품들과는 달리 옛이야기를 그 장치로 삼았다. 나는 전쟁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빨갱이란 죄목을 씌워 사회에서 추방하는 현실에 절망하지만 옛이야기를 떠올린다.
옛날 옛날에 한 나그네가 산중에서 길을 잃었대. 그래서 한참을 헤매는데 저어 아득한 어둠 속에 서 불빛이 반빡반짝하더래. 나그네는 힘을 내어 인가가 있겠거니 하고 불빛을 찾아갔대. 주인장 계 시오. 나는 옛날 얘기대로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비틀거리면 올라갔다.
지금 길을 잃고 어두운 산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그네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나그네처럼 현재의 어둠을 이겨내고 그 빛을 향해 갈 것이다. 지금은 비틀거리면 올라가지만 곧 빛이 있는 곳에 당도할 것이다. 작가는 변함없이 작품속에 분단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남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일기초라는 부재를 달긴 했지만 짦은 분량에 너무 많은 사건을 담다보니 긴장감이 떨어진다. 그리고 1인칭 시점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6ㆍ25와 5ㆍ18을 함께 겪은 등장 인물의 고뇌를 그려내는 데 실패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로서도, 아들로서도, 또 시대를 아파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Ⅳ. 결론
지금까지 본고는 황석영의 작품 중 분단을 소재로 한 「한씨연대기」,「잡초,」,「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골짜기」를 통해 황석영의 분단 의식 변모 야상을 살펴보았다. 황석영이 문단에 데뷔하고 많은 활동을 했던 1970년대는 소련과 중국의 분열되고 중국과 미국의 수교로 국제적인 냉전이 완화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국내적으로도 남북화해의 물꼬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7‧ 4남북공동성명으로 잡힐 듯이 눈앞에 보이던 통일은 남한의 유신 체제의 전개와 북한의 주체 사상의 발현으로 오히려 분단의 시대를 영속화ㆍ고착화하게 되었고 문단에서는 분단소설의 창작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또한 1980년대는 많은 작가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은 좀더 깊이 있는 역사인식으로 심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황석영은「한씨연대기」,「잡초,」,「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골짜기」를 발표하였다.
「한씨연대기」에서 작가는 한영덕이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폭력적 분단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인간 존엄의 사상을 실천하려 한 의사 한영덕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분단 상황 속에서의 부조리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하게 탄생했지만 개똥참외처럼 강인하게 성장한 혜자에게 아버지 시대의 망령을 모두 떨어내고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능동적 세대로서의 역할을 줌으로서, 그녀를 통해 분단 이데올로기 극복 의지와 우리 민족의 비젼을 제시한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통해 분단으로 야기된 현실의 질곡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미래를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잡초」는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분단 현실이 쾌활하고 생기 넘쳤던 태금이라는 한 여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관찰케 한 작품이다. 순진한 아이의 주관적 입장에서 객관적 상황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분단의 비극적 희생자로 작품의 중심인물인 태금이의 행동과 삶의 변화 과정도 어린이다운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묘사되거나 어린이다운 추측으로 이야기될 뿐이다. 이것은 ‘전쟁의 전체적인 모습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어린이 관찰자가 갖는 미숙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분단 현실의 본질적인 면을 형상화하지 못하게 만든 요소’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전쟁의 비극이 더 심화되기도 한다.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은 혼란한 역사 속에서 슬프고 외로운 생을 살았던 한 여인의 한(恨)을 조망한 작품이다. 좌익 이데올로기를 가진 아버지로 인해 청년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그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외로이 살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분단의 고통은 한(恨)의 차원으로까지 상승하는 것이다. 그 한은 한 입 베어문 홍도(紅桃) 처럼 강렬한 빛을 지녔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는 분단의 현실을 선명하게 형상화한 빛깔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인 6 ․ 25와 5ㆍ18을 모두 담고 있는 「골짜기」를 통해작가는 전쟁으로 인한 인간 소외가 현실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분단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우리들의 비도덕성, 그리고 분단으로 인한 상흔 등을 보여주려 한다. 작가는 5ㆍ18을 6 ․ 25의 연장 선상에서 인식하고 있다. 3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전쟁의 참상들, 그리고 인간 소외.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낳은 사생아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조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장치를 작품 곳곳에 두고 있다.
「한씨연대기」에서는 분단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인 한영덕의 딸인 혜자에게,「잡초」에서는 이념과 전쟁의 희생자인, 미쳐버린 태금이에게 비춰지는 몇 줄기 햇빛으로,「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에서는 분단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인 부모를 둔 청년의 꿈을 통해서, 그리고 고통스런 우리의 현대사의 세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골짜기의, 옛이야기를 통해서 미래의 희망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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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황석영, 앞의 책, 98쪽
19) 오생근, 「個人意識의 克服」, 『문학과지성』, 1974, 여름, 앞의 글, 415쪽.
20) 황석영, 앞의 책, 103~105쪽
21) 송명주, 「전후문학연구-세대별 작가 의식을 중심으로」, 숙명여대교육학석사학위논문, 1993, 48~49쪽
6ㆍ25 이전인 1940년대에 출생하여 1970년대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 온 작가들을 ‘유년기 체험세대’라고 부른다. 6ㆍ25를 직접 경험한 세대가 전쟁으로 받은 상처를 직접성 혹은 현실 거부의 방식으로 처리한 것에 비하여, 이 ‘유년기 체험세대’는 민감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하여 소년기의 체험을 추체험의 형식으로 그들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작가군의 공통의식은 단순한 흑백논리가 6ㆍ25 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고, 가해와 복수의 반복은 일종의 복수극으로 6ㆍ25를 나타낼 수 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끼리의 화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표적 작가로 김원일, 윤흥길, 전상국, 이동하, 조정래 등이 있다. 이 ‘유년기 체험세대’는 또한 순진한 눈을 통한 어린이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데, 김원일은 다음과 같이 이유를 말했다. ‘’나에게는 아버지란 사상범이 있었고, 내 성격이 워낙 소심하다보니, 분단 문제에 접근한 소설을 쓸 때에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함정을 찾기에 너무 신경을 쓰다보니 ……이하 생략
22) 황석영, 앞의 책, 184쪽
23) 황석영, 「잡초」, 앞의 책, 186쪽
24) 앞의 책, 190쪽
25) 앞의 책, 196쪽
26) 앞의 책, 197쪽
27) 한은숙, 앞의 글, 43쪽
28) 앞의 책, 198쪽
29) 황석영,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앞의 책, 302~303쪽
30) 황석영, 앞의 책, 305~~306쪽
31) 황석영, 앞의 책, 306쪽
32) 신종곤, 「황석영의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연구, ‘말없음 언표의 서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돈암어문학』13호. 성신여대 국문과 돈암어문학회, 2000. 9
33) 조동숙, 「분단소설문학에 수용된 6ㆍ25동란의 이념적 고찰」,부산여자대학교,『수연어문논집』제 19집, 88~89쪽
34) 황석영, 「골짜기」, 『몰개월의 새』, 창작과비평사, 2000, 251쪽
35) 앞의 책, 256쪽
36) 앞의 책, 263~264쪽
37) 앞의 책, 266쪽.
38) 앞의 책, 274~2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