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한 가문의 후손들은 힘든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엄혹한 세월이 흘러갔다 세도 정치로 얼룩진 조선후기 사회에서 가산이 뒷바침 되지 않는 양반의 삶은 오히려 상민들보다 힘든시기였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뇌물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몰락한 가문이 제 자리를 찾는것은 지난했고
그리고 찾아온 일제시대 ~~~양반사회는 무너졌고 갑자기 신분상승한 상민 출신들이 돈으로 족보를 사고 양반의 후예임을 내세우기 시작하던 시절
우리가문 역시 그러한 역사의 환란기를 피해가지 못하고 용흥사의 변과 같은 종계의 중심이 흔들리는 대란을 겪으면서 종통은 흐려지고 종계는 마구 비틀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회가 농경사회로 남아있을때는 가문중심의 사회였고 가문의 어른들이 젊은 후예들을 가르치고 전해 줄수있는 역량이 있어 가문의 숨결은 보전이 되었으나
산업 사회가 시작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젊은이 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등의 대도시로 떠나갔고 이들에게는 가문의 역사와 종통 족보같은 오랜 전통이 스며들 틈이 없었다
아주 빠른 시간에 어르신들은 돌아가시고 그나마 옛 얘기처럼 전해져 오던 가문의 이야기 비사들도 기억의 저편으로 멀어져 가기 시작했으니
이틈을 타 가짜목사 이수생을 앞세운 상주계 목사공 파들은 더더욱 자신들이 위변조한 갑술보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족보를 찍어내며 궁극에는 전자보를 도입하는 과정에까지 이러한 가짜 종통을 네세워 보천 종가를 상주파의 방계로 만들어 나가는작업중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도 감사한것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손자에게 알아먹기도 힘든 가문의 이야기들을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말씀해 주셨다는것이다
대략말을 알아먹을만한 나이인 6~7살때부터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할아버지는 끈임없이 가문의 이야기들을 이야기해 주셨다
심지어는 치매질환이 찾아와 정신이 혼미해져 가시는 와중에서 돌아가실때 까지도 하지만 성장한 나는 얼마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종교의 영향으로 인해 가문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가문의 일에 점점 관심을 잃어 가던중 수구초심이라 했던가 세월이 가고 나이는 들어가면서 가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인터넷상의 흥양이씨 종친회에 가입하여 아것 저것들을 들여다 보던중 어릴적 할아버님께 들었던 희미한 이야기들과 계시판의 상황이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이것 저것 자료를 찾아가면서 헛갈리면서 제 자리를 찾으면서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 가던중 갑술보 이전의 가문에 통용되던 대동보 신미보와 흥양보천에 전해져 내려오던 족보와 가승들이 전남대 아카이브에 그대로 실려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리고 흥양읍지 호남읍지 호남절의록 조선실록 등을 찾아 헤매던중 마침내 저들 가짜목사 이수생을 앞세운 신 상주파의 거대한 음모로 인하여 철저히 망가진 가문의 전통과 가계를 확인할수 있었다 처음에는 이를 굳이 이리 따로 카페를 개설하여 논하지 않고 대동회 게시판에서 이를 논하고 바꾸어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지만
대동회 게시판은 굳게 닫혀 있었고 종친회 게시판의 그들은 그럴뜻이 전혀 없었는지 내가 올린 글들에변변한 답변도 없이 내가 실명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게시판 밖으로 측출하기에 이르렀다
오래써온 아이디라서 그런지 실명으로 전환하고자 하나 전환이 되지 않아 글을 쓰면 반드시 제목 곁에 실명을 달았는데도 불구하고 ~~~
하니 어떠하겠는가 급한대로 스스로 카페를 개설하고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 수 밖에
지금 종친회 운영권을 움켜줜 이들이 빨리 이러한 잘못들을 고치고 바른길에 들어서기는 요원해 보이고 그나마 나도 사라지고 나면 누가 이러한 일들을 정리하여 누군가 바른길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 길을 제시해 줄이가 없어 보인다는 현실적 위기감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며 역손들은 반드시 심판 받아야 하니 이제 아래의 글로써 대략쓰는 흥양이씨 정통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흥양이씨 정통사 연재 - 최종장] 최후의 통첩: 가짜의 이름을 내리고 흥양을 떠나라
흥양 보천의 적통이자 창석공 영회(泳晦) 할아버지의 후손인 시조 언림군 28세손 이방일(炯)은, 800년 가문의 혈맥을 더럽힌 90년 조작의 역사를 심판하며, 끝내 거짓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최종 통첩한다.
1. 역손(逆孫)의 규정: 진실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는 자손이 아니다
지금껏 나는 사료와 원문을 통해 상주 용흥사에서 벌어진 이종린 일파의 위조 행태와, 국가 기록에도 없는 유령 목사 ‘이수생’의 허구를 낱낱이 밝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근거 없는 이수생의 계보를 인정하고 따르겠다는 자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더 이상 흥양이씨의 후예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대들은 조상의 핏줄을 배신하고 소설을 추종하는 역손(逆孫)일 뿐이다.
2. 관향(貫鄕)의 박탈: ‘흥양(興陽)’의 이름을 도용하지 마라
흥양 보천의 흙은 단 한 방울의 가짜 핏줄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짜 할아버지 이수생을 끝내 조상이라 부르고 싶다면, 흥양이씨라는 거룩한 관향을 즉시 내려놓아라. 어찌 가짜를 모시면서 진짜의 이름 뒤에 숨어 조상을 모독하려 드는가!
상주 땅이 그렇게 좋다면 스스로 '상주이씨(尙州李氏)'로 개관(改貫)하여 나가라.
아니면 상주 박씨도 좋고 김씨도 좋고 정씨도 좋을것이다 그대들에겐 진실이 필요없지 않은가 종통과 종권만 있으면 되니 이씨이면 어떻고 박씨이면 어떤가 이래도 저래도 가짜의 후예이긴 마찬가지 인것을
아니면 이수생의 진짜 본가로 의심받는 '전의이씨 상주파'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3. 최후의 경고: 90년 위조의 먹물은 이미 말랐다
너희가 아무리 나무판에 가짜 이름을 새기고 수만 권의 위조 족보를 찍어냈으며, 가짜종통을 내세운 전자보를 인터넷 바다에 뿌려놓아도
최초의 족보 을축보 이후 1871년 신미보(辛未譜)에 박힌 보천의 정기(正氣)는 결코 깎이지 않는다. 이제 가짜의 껍데기를 내다 버리고 보천의 눈물겨운 역사 앞으로 돌아올 것인가, 아니면 가문의 이단아가 되어 영원히 축출될 것인가?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나, 흥양의 이름으로 가짜를 섬기는 패륜만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4. 선언: 보천의 이름으로 정통을 선포하노라
오늘 이 시각 이후로 흥양이씨의 모든 정통 지류는 가짜 목사공의 굴레를 벗고, 우리 가문의 위대한 희생과 적선(積善)의 역사가 살아있는 보천의 품으로 합류하기를 바랄뿐이다. 이것이 조상님들의 한을 풀고 자손만대에 흥양이씨 가문의 후예임을 그자랑스럽고 비장한 역사속에도 면면히 이어져온 정통 가계의 떳떳한 이름을 물려줄 유일한 길이다.
2024년 5월 12일
기록자: 흥양보천 적통·영회공 후예 시조 언림군 28세 이방일(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