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적은 서양인들이 훨씬 더 빠르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식민지를 둘러싼 대량 학살과 인종 말살에서도 서구인은 ‘생존자’(survivant)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인은 ‘매우 활발한’(sur-vif) 자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어 ‘비프’(vif)에는 적어도 세 가지 뜻이 있다. 폭력(갑작스런 무력 행사, 느닷없는 격렬함 등)의 비유인 재빠름과 신속함[속도], 그리고 생명 그 자체(살아 있다, 생명이 붙어 있다!).
동양-느림(도/명상/기/태극권..수레/농경문화):서양-빠름(말, 철, 총...)
폴 비릴리오, 서구 지성계의 카산드라
철학자, 도시계획자, 영화비평가, 군사역사가, 미디어연구자……. 전 세계 비판이론가들의 공론장인 웹진 『비판이론』(CTheory)은 이처럼 다양한 이력을 지닌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 )에게 ‘서구 지성계의 카산드라’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한 그리스 신화의 예언자로서, 아폴론의 저주로 아무도 그 예언을 믿지 않게 된 불운의 예언자이다. 본인 스스로 한 대담에서 밝혔듯이 비릴리오의 논의들도 “지적 스캔들이라는 죄목으로 빈번히 무시되어 왔다.” 그러니 비릴리오를 카산드라라고 부르는 것도 꽤 어울리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언을 믿는 사람이 몇 명이든 카산드라가 예언자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은 비릴리오에게도 해당된다. 비릴리오가 카산드라라고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념의 향연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그의 독특한 집필 스타일 때문이었다. 저서를 발표할 때마다 탈영토화, 노마디즘, 전쟁기계, 소멸의 미학, 시간정치, 극의 관성, 내부식민화 같은 독특한 개념들을 잇달아 선보였으니 비릴리오를 처음 접한 대부분의 독자들로서는 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테고, 그런 만큼이나 비릴리오를 둘러싼 세간의 인상은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예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카산드라의 이미지와 중첩됐을 것이다.
‘질주학’(dromologie)이라는 개념을 선보이며 ‘속도’를 비판이론의 핵심 주제로 부각시킨 이 책 『속도와 정치』(1977)는 이런 비릴리오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속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철학?정치철학을 선보인 이 책의 몇몇 테제들?“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 “정지는 죽음이다”, “혁명은 일종의 과속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운동의 독재를 가져왔다”, “‘산업 혁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질주정 혁명’이 있었을 뿐이다. 민주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주정이 있을 뿐이다” 등등?은 파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시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릴리오는 프랑스계 미국인인 문화이론가 실비어 로트링거와의 대담에서 『속도와 정치』를 이렇게 자평한 바 있다. “『속도와 정치』는 속도라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책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속도를 다룬 저술가들은 별로 없습니다. 속도를 정치의 측면에서 다룬 사람으로는 마리네티를 비롯한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 그리고 마샬 맥루한 정도입니다. 그게 다죠.” 그래서일까? 로트링거가 ‘이론적 사건’이라고 불렀던 이 책은 발간 직후 비평계에서 쉽게 이해를 받지 못했다.
얄궂게도, 비릴리오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인물들은 동료 비판이론가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군장성들이었다. 특히 <고등군사학교>(L?nseignement Militaire Suprieur)의 교장인 뷔 장군(Georges Buis, 1913~ 1998), <고등국방연구소>(Hautes Etudes de Dfense Nationale)의 소장인 상귀네티 제독(Alexandre Sanguinetti, 1913~1980) 등이 그랬다. 1962년부터 드골이 추진하던 핵전략 계획의 중심 인물이었던 뷔 장군과 상귀네티 제독은 비록 비릴리오를 비판하긴 했지만, 특히 전술 핵무기와 핵전략(핵 억지력)의 등장으로 속도와 정치의 개념 자체가 뒤바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듯 소수의 독자들에게만 알려진 채 카산드라의 운명을 살아갈 뻔했던 비릴리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 발표된 1980년을 전후로 서서히 유럽 비판이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1979년 비릴리오와 함께 해적방송국 <토마토 라디오>(Radio Tomate)를 설립해 자유라디오 운동을 전개했던 가타리의 소개로 비릴리오를 알게 된 들뢰즈가 『속도와 정치』에 나온 일련의 테제들(특히 파시즘 분석)을 『천 개의 고원』에 확대 적용해 비릴리오의 분석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줬던 것이다.
그렇지만 비릴리오가 유럽 내부를 너머 영어권 나라들과 그밖에 다른 나라들에서까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걸프 전쟁(1991), 유고 사태(1995~99), 뉴욕 세계무역센터 붕괴(2001) 같은 일련의 세계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부터였다. 한때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치부됐던 비릴리오의 개념들(특히 ‘지각의 병참학’, ‘시간의 전쟁’ 등)이 이 전쟁들을 통해 현실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절판됐던 그의 책들이 복간되기 시작하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비릴리오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라는 헌사를 바치게 됐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파리 건축전문학교> 명예교수인 비릴리오는 최근까지 프랑스 서부의 항구도시 라로셸에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영국의 유명출판사 버소가 9?11사건의 정치적?철학적 파장을 살펴보는 특별 시리즈의 집필자로 보드리야르(『테러리즘의 정신』), 지젝(『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과 함께 비릴리오(『무엇이 올 것인가』)를 선택했듯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한창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제 비릴리오를 더 이상 카산드라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릴리오는 자신을 “기술(technology)이라는 기예의 비판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별 일이 없는 한 현대기술은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고 그렇게 발전된 기술은 또 다시 속도의 가속화를 가져올 것이기에, 비릴리오의 속도/기술비판도 새로운 예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예언을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몫이리라. 그렇지만 우리로서는 우리 시대의 카산드라를 한 명 갖고 있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지 않을까?
『속도와 정치』:공간의 정치학에서 시간의 정치학으로
“兵之情主速”, “不戰而屈人之兵”. 『손자병법』의 제11편 「구지」(九地)와 제3편 「모공」(謀功)에 나오는 이 두 문장은 손자의 군사사상을 압축해 표현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킨다”라는 뜻의 뒷 문장이 오늘날의 ‘대전략’(Grand Strategy)에 해당된다면, “용병을 하는 데 있어 주안점은 속도에 있다”라는 뜻의 앞 문장은 ‘군사전략’(Military Strategy)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두 문장은 비릴리오가 『속도와 정치』에서 전개한 이론을 압축해 주는 구절이기도 하다. 비릴리오의 독특함은 손자의 군사전략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데에 있다. 즉, 비릴리오는 손자의 “兵之情主速”을 “存在之情主速”(존재의 주안점은 속도에 있다)으로 읽고 있는 것이다. 비릴리오는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곧 거주한다는 것”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끌어들인다. 이 명제는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의 존재 여부를 전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공간의 획득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홉스 식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갈등의 장(場)에서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공간을 선점?획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은 무엇일까? 비릴리오의 답은 속도이다.
“속도는 사냥꾼이나 전사에게 언제나 우월함과 특권을 가져다 줬다. 왜냐하면 육지를 취득하고 영토를 지킨다는 것은 그 영토를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서 그곳을 재빨리 훑어볼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타인을 정복(지배)하거나 특정 공간을 타인보다 빨리 선점할 수 있는 속도, 바로 그런 속도가 존재의 가능성을 보증해 준다.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다!
이 책 『속도와 정치』는 바로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프랑스 대혁명, 제1?2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나치즘, 포르투갈 혁명, 프랑스의 반핵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 손자, 생-쥐스트, 마리네티, 괴벨스, 하이데거 같은 인물들의 논의를 넘나들며 서구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할 뿐만 아니라 속도가 전쟁과 권력, 그리고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해 나아간다. 그럼으로써 서구의 희망이었던 속도가 어떻게 서구의 악몽으로 변해갔는지까지 보여준다. 비릴리오는 “오고 갈 자유의 획득”이라는 몽테뉴의 이상(理想)이 시속(km/h)에서 초음속(1,200km/h)으로, 더 나아가서 광속(30만km/s)으로 변해 가는 속도의 가속화로 인해 어떻게 변질됐는지를 살펴보면서 속도와 권력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비릴리오가 보기에 프랑스 대혁명은 “고대의 봉건적 농노제로 상징되던 부동성의 억압에 맞서는 반란”이었다. 즉, “임의적인 유폐나 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는 의무에 맞서는 반란”이 프랑스 대혁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동의 자유를 주장했던 이 반란은 혁명 전쟁을 교묘히 활용했던 부르주아지의 술책(공포정치, 총동원령 등)으로 인해 운동의 독재로 귀결됐다. 바야흐로 부르주아지는 “운동의 축적으로서 폭력의 축적을 뛰어넘은” 것이다. ‘운동이 독재’를 달성한 부르주아지는 산업혁명을 통해서 기계적 운송장치(증기기관, 엔진)를 획득했다. 부르주아지는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모두 능가하는 기계적 속도(현존함대, 자동차, 탱크)를 얻게 된 것이다. 인구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이 동양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처럼 서구인들이 기계적 속도를 선점했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속도는 서구의 희망”이 된 것이다! 비릴리오는 이 과정을 육지에 대한 권리, 바다에 대한 권리, 하늘에 대한 권리를 차례로 요구하게 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부르주아지의 모습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현대사회-목적도 끝도 없는 비상상태!
그러나 존재의 가능성을 보증해 줬던 속도는 오늘날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됐다. 좀더 우월한 속도를 확보하려고 서로 투쟁하던 서구 열강들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계적 속도를 능가하는 초음속과 광속을 낳았기 때문이다. 비릴리오는 핵무기(핵 억지력)의 등장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비릴리오의 설명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나누는 것이다. 무엇을 나누는가? 의사결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속도의 가속화 때문에 의사결정이 놀랄 만큼 짧은 시간의 한계 속에서 이뤄진다. 핵폭탄의 가공할 살상 능력은 “핵전쟁을 선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 내일 안에 숙명의 단 1초로 줄어들 위험”을 만들었기에 정치적 의사결정의 시간을 소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로 상징되는 절대적 속도는 이처럼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만이 아니다. “핵무기의 위험은 핵무기가 터질지도 모른다[외파]는 위험이라기보다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핵무기가 우리의 정신을 내파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다.” 이 상황에서 비릴리오는 도착적(倒錯的)으로 변해버린 손자의 대전략(“不戰而屈人之兵”)을 본다. 핵무기의 가공할 살상 능력을 억제하기 위한 ‘상호확증파괴’(MAD)시스템이 “싸우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는 것”을 가능케 했으나, 그 결과 현대 사회는 “목적도 없고 끝도 없는 비상 상태”에 처해 스스로를 유폐해 버리는 비극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거대한 수용소가 됐다”는 프랑스 혁명가 바레르의 탄식을 상기시키는 이런 상황에 직면해 현대 사회는 내부적으로 안전에 집착하게 됐다는 것이 비릴리오의 진단이다. “끊임없이 서로를 위협하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공격을 하지 못한 채 서로 마주보고만 있게 된”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정치에, 소비나 안락함을 사회적 안전에” 결부시키며, “테러리스트들과 같은 방식으로 안전에 대한 필요를 교묘하게 조작”해낸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이다! 안전은 운동의 부재와 동일시 된다. 그리고 운동의 부재는 속도의 제한과 동일시된다. 핵 억지력 같은 것을 통한 불확실한 균형 상태에서라면, 섣부른 행동이 파국적인 위험을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적 권력이 “폴리스, 치안, 다른 말로 하자면 교통로 감시” 즉 운동의 독재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속도라는 주제를 양생술(養生術;느림을 다룬 몇몇 명상서들)이나 자기경영 전략의 일환(‘~형 인간’ 등의 처세술)으로 다루는 책들만 소개됐던 국내 독서시장에서 속도와 정치, 움직임[운동]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속도와 정치』는 지금까지 은폐되어 왔던 정치의 이면, 즉 속도의 측면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기존 비판이론의 시각을 좀더 확장시켜줄 것이다.
『속도와 정치』 한국어판의 특징
● 비릴리오 전문 연구자의 「지은이 소개」 수록 (원고지 160매 분량)
지난 2002년 비릴리오의 『정보과학의 폭탄』(La Bombe informatique, 1998)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긴 하지만, 비릴리오는 아직 국내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저자이다. 게다가 비릴리오를 소개한 국내 유일의 논문(이득재, 「빛, 속도, 그리고 전쟁」, 『문화과학』, 제24호/가을, 2000)도 그의 다채로운 이론적 궤적을 살펴보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따라서 한국어판에는 영국 노섬브리아 대학 통합학문학과의 학장이자 유명한 비릴리오 연구자 존 아미티지 교수의 글을 번역해 부록으로 수록했다. 『속도와 정치』를 중심으로 비릴리오의 이론적 발전 과정을 비판적으로 소개한 아미티지 교수의 이 논문은 국내 독자들이 비릴리오를 이해하는 데 충실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와 비릴리오를 비교한 『옮긴이 해설』 수록 (원고지 120매 분량)
국내에서 비릴리오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 계기는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 소개된 뒤부터였다. 특히 들뢰즈/가타리가 비릴리오의 개념(탈영토화, 노마디즘, 전쟁기계 등)을 빌어 왔다는 사실이 비릴리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따라서 한국어판에는 옮긴이 후기 대신 ‘해설’을 실어 이 이론가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소개하고자 했다. 독자들은 『옮긴이 해설』과 『지은이 소개』 두 글을 읽으면 비릴리오의 이론적 입장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비릴리오의 영화와 전쟁에 관한 에세이 <전쟁과 영화>도 이미 작년에 출간되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