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씨(廉氏)의 유래에 대한 기록으로는 [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부터 왔다]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여적(趙汝籍:선조~인조)이 쓴 청학집(靑鶴集)에 "廉氏 出于 帶方國也(염씨출우대방국)"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 정황들로 보아 염씨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으로 보는 것이다.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으로, 生卒墓미상, 號大司徒公(호는 대사도공), 官三韓壁上公臣大司徒(관직은 삼한벽상공신대사도),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을 통일할때의 공적 등으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대사도에 오르신 분이다.
고려 태조 23년(940) 新興寺(신흥사)를 重修(중수)하면서 功臣堂(공신당)을 세우고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동서 벽에 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를 삼한벽상공신이라하며 公께서도 이때 三韓公臣(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한때 諱字(휘자)를 교明(교명)으로 기록하였으나 고려사 역사서 또 萬姓譜(만성보)와 氏族源流(씨족원류) 등에 모두 邢明(형명)으로 나타나 있어 改諱(개휘)하자는 대종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改諱(개휘)한다 기록을 남겨 후일의 참고에 供(공)한다
물론 시조 이전에도 여러 염씨가 자료에 나타나 있는데, 국보 제104호인 '염거화상탑'의 장본인인 고승 '염거'와 서기 647년인 선덕여왕 16년에 국정에 참여했던 '염종', 또 648년인 진덕여왕 1년 6공(六公) 중 한 사람으로 대신을 지낸 '염장' 등이 있으나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고, 고려초에 활동하신 염형명선조부터 계보가 이어지고 가문을 일으키게되어 '염형명'선조를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중시조는 염제신(廉悌臣 시호;충경공, 1304~1382년)인데, 시조의 13대후손이며 고려시대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공민왕, 우왕 등 다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여러 요직을 거치며, 문하시중까지 오르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져, 고려역사에 빛날 뿐만아니라 염씨를 부흥시킨 분으로, 후손들은 '염제신(廉悌臣)'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이분께는 공민왕께서 친히 그려 하사한 초상화가 있는데,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돌아가신 후 충경공 시호가 내려졌고, 또한 왕명에 의하여 목은 이색이 찬하고, 청성군 한수가 글을 써서 만들어진 신도비가 경기도 장단군 묘소앞에 세워졌다.
본관은 파주(坡州)로, 시조 염형명이 살던곳이 봉성현이므로 처음에는 '봉성'이라 하였으나, 중시조 염제신이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하였다가, 다시 지명 이름을 따서 '서원'으로 삼았다가 '서원'이 '파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도 파주로 개관하게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파주이외에 다른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는 세거지일 뿐 모두 파주염씨로 염씨는 [파주] 단일본이다.
첫댓글 좋은 정보네요~~~중시조 할머니 집안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서==수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