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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1 ~ 3
제 목 : 안식하시니라
본 문 : 창세기 2:1 ~ 3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1. 하나님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비슷한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비슷한 정도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들은 것을 통해, 책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수준의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각색하고 하나님을 만들어 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오해가 발생하고, 그 오해가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는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습이 참으로 많이 발견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심판, 진노, 저주, 징계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사랑, 자비, 용서, 평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해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있고, 하나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의 원인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만 하고, 그 뜻과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오해거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참 진리와, 참 자유와,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모두 10번에 걸쳐서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배려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정말로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이셨으며, 사람을 향해 큰 소망과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기뻐하고, 사람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사람으로 인해 행복해 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수고와 사람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평안과 자유와 행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상황에 따라 심정과 마음이 변하듯,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는 사람의 죄적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오해, 성경에 대한 오해,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심판, 진노, 저주, 징계의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겉만 보면 분명히 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도 그렇고, 바벨탑 사건도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도 그렇습니다. 예언서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분명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 해야만 하셨는지, 그리고 그 일과 말씀의 결과로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궁극적으로 누가 좋아졌는지를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도 분명히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평안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을 구원하셨고, 사람의 행복한 삶을 원하시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인도자이심을 자랑스러워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삶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안식은 완성
오늘 본문 말씀 중, [창세기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정말로 감격스럽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성경책에도 아마 좋아하는 말씀 구절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씀 구절에는 형광펜이 칠해져 있거나 빨간색 줄이 그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색이 칠해져 있거나 밑줄 그어진 구절을 보면 대체로 내가 해야 될 일, 성경이 권면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보다도 ‘안식하시니라’ 같은 말씀에 색이 칠해져 있고, 줄이 그어져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 ‘안식하시니라’ 만큼 정말로 감격적인 말씀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안식하시니라’ 만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은혜의 말씀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우선 오늘 말씀 ‘안식하시니라’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이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이제 세상이 만들어졌고, 사람이 지어졌으니까 드디어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세상,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 세상, 하나님에 의해 완벽하게 조성된 세상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입장에서는 새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에 의한 창조 자체는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람에게 해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에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궁창, 완성되었다. 땅과 바다, 나 하나님이 바라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 해, 달, 별, 이제 완성되었으니까 네 역할만 하면 된다. 동물과 식물, 완벽하다. 사람, 나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이니까 이제 누리고 살기만 하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하시니라’는 ‘천지창조가 끝났다, 천지창조가 모두 이루어졌다, 천지창조가 완성되었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즉 사람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가능할 수 있었고,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천지창조가 완성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일을 마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그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완성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지창조가 완성이 아니라면 최종 목적이 나와야만 합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온전하지 못한 세상, 부족하고 결핍한 세상, 문제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 새로운 하나님의 목표가 등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 없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 없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목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곱째 날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안식하셨습니다. 즉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을 선포하는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측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성된 존재, 완벽한 존재, 누리는 존재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첫째 날의 이름은 단지 첫째 날입니다. 둘째 날의 이름도 단지 둘째 날입니다. 셋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특별히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그럼 여덟째 날은 어떤 날일까요? 그리고 아홉째 날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성경 속에서 여덟째 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홉째 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일곱째 날부터 쭉 안식일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이후의 모든 날이 안식일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새 날은 없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가시는 듯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적절한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이해에 조금 도움은 되리라 믿습니다. 3-4년 전입니다. 우리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사이에 과학상자라는 것을 가지고 많이 놀았습니다. 여러 가지 공구와 재료들을 이용하여 헬리콥터도 만들고, 거북선도 만들고, 로봇도 만들고, 풍차도 만들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사용안내서가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정밀하게 조립해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나 만들려면 시간을 꽤 필요로 합니다. 헬리콥터 같은 경우는 일주일이 꼬박 걸렸던 것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둘째 날까지 아이가 헬리콥터의 골격을 만들어 놓고 좋아합니다. 셋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헬리콥터의 상단 날개를 만들어 놓고 좋아합니다. 아직 완성되려면 하루, 이틀은 더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 날 뒷날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 조립이 다 끝났습니다. 모터를 연결하고 스위치를 켭니다. 날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정말로 좋아합니다. 심히 좋아합니다.
일곱째 날 아침입니다. 어제처럼 날개가 돌아가는지 스위치를 켜봅니다. 아무 이상 없이 헬리콥터의 날개가 돌아갑니다. 아이는 정말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그리고 완성한 헬리콥터를 진열장에 자랑스럽게 진열합니다. 드디어 완성된 것입니다. 아이에게, 그리고 헬리콥터에게 여덟째 날, 없습니다. 아홉째 날, 없습니다. 일곱째 날로 모두 마무리 된 것입니다. 일곱째 날 이후 아이의 심정과 마음과 상황은 여덟째 날까지, 아홉째 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계속, 쭉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사람은 여섯째 날 지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일곱째 날 안식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로는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창조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 첫 날이 바로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에서 사람은 첫 날, 즉 안식일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이 계속해서 쭉 이어지게 됩니다. 즉 사람이 안식일을 맞기까지 사람이 수고하고 애쓴 것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람이 수고하고 애쓸 것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가능했던 것입니다.
3. 안식은 기준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하나님의 선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안식은 완성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서 안식은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기준을 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피조세계가 완성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피조세계가 아무 문제없이, 아무 하자 없이 운행될 수 있도록 기준을 제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준은 완벽해야 합니다. 기준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됩니다. 기준에 하자가 있으면 안 됩니다. 기준에 문제가 있거나 기준에 하자가 있으면 심각한 불균형, 심각한 무질서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기준은 굳건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모든 것을 감당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기준은 누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주신 삶의 기준은 누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사람에게 새로운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온전하기 때문에 사람이 특별히 해야 할 새로운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도 사람이 해 드릴 일,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가 완성된 이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 중에 하나님을 향하여 사람이 수행해야 할 어떤 명령도 없습니다. 예배의 명령, 감사의 명령, 헌신의 명령, 찬양의 명령, 제물의 요구 등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며, 그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창세기 [1:28]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이라고 하십니다.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얼핏 보면 명령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고3이 되었으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네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명령인가요? 장가 가는 아들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결혼 전 날 이럴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장이 되니까 이전 보다 더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명령인가요?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명령이 아니고 축복입니다. 사랑과 애정이 가득 담겨있는 선생님, 부모님의 축복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 말씀에서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내가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주었으니까, 땅을 주었으니까, 물고기와 새와 땅의 생물을 주었으니까 너희들이 그것을 즐기고, 향유하고, 누려라’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기만 하면 되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준을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 기준이 바로 안식에 들어가실 때 하나님께서 품은 심정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날 성도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수고와 노력 후의 쉼과 휴식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안식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이루어 놓으신 안식을 누리며,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을 대하는 성도들의 마음에 대하여 가끔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주일 날 자녀가 공부 하는 것을 막습니다. 내일부터 기말고사가 시작되는데, 자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 주일 날 일체의 지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일 날 헌금 이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개인적인 경우니까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집안에 결혼식이 있습니다. 그 결혼식이 하필 주일입니다. 결혼식에 안 가는 사람, 있을까요? 없을까요? 결혼식에 안 가는 사람, 참으로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일 예배 한 번 빠졌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냐?’ 하면서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 비난은 결혼식에 가지 않은 그 사람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비난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욕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집안 경조사에 빠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결혼식에 참석을 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빠지고 결혼식에 참석하는 마음이 내내 찜찜합니다.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마음이 정말로 편치 않습니다. 아무튼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필 그때 자동차에 펑크가 나면서, 경미한 부상을 당합니다. ‘아이고, 내가 예배 빠지고 결혼식에 가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셨나 보네. 내 이럴 줄 알았어. 계속 마음이 불안하더라니까. 이번에는 펑크로 끝났지만 다음에는 더 큰 일이 생길지도 몰라. 이건 분명히 하나님의 경고야. 다음부터는 어떤 경우에도 주일 날 만큼은 꼭 지켜야지.’ 하면서 굳세게 마음을 먹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주일 예배 한 번 빠졌다고 벌 주시는 하나님이실까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식은 삶의 기준이라는 하나님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게십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즐거워하면서, 세상 가운데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참 된 안식인 것입니다.
4. 안식은 배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은 또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유 함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해 주실 일이 이제는 없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최종 목적이었던 사람이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나 하나님이 이제 한 발짝 빠져주겠다.’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 같아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 저는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때 참 많은 회식 자리를 경험했습니다. 상사를 모시고 회식을 하기도 했고, 후배 직원들과 회식 자리를 갖기도 했습니다. 회식은 꼭 주동하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주동하는 사람이 어떤 캐릭터이냐에 따라 회식의 메뉴, 회식의 분위기, 회식이 끝나는 시간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놀고 싶어서 회식을 주동하는 상사와 자리를 갖게 될 때는 당연히 힘든 자리가 됩니다. 그 상사가 좋아하는 메뉴를 따라가야만 하고, 그 상사를 즐겁게 해주어야만 하고, 그 상사가 지쳐서 떨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주어야만 합니다. 회식이 끝나는 시간도 당연히 늦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회식이 아니라 노동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그때는 이 같은 잦은 회식으로 아내에게 정말로 많이 혼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업무에 지친 부하 직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회식자리를 마련해 주는 상사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상사는 대체로 메뉴 선택권을 부하 직원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면 계산을 다 치루고 먼저 빠져줍니다. 직원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부하직원들은 정말로 눈치 보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적당한 시간이 되면 자발적으로 해산합니다. 다음 날 업무에도 지장이 없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사랑과 전쟁 시즌 2’가 방송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부부관계를 다루는 드라마입니다. 정말 많은 이유로 부부가 이혼을 하고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부의 직접적인 잘못으로 인해 이혼하고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주변 사람들로 인해 부지기수로 그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위 시월드에 의해서 이혼이 발생합니다. 처월드에 의해서 가정이 망가집니다. 부부가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시월드가 개입하고, 처월드가 개입하고, 친구들이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그 부부는 당면한 문제를 슬기롭게 봉합하고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지창조 후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심정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내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으니까, 내가 모든 것을 완성해 두었으니까 이제는 너희들끼리 아름답게, 자유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비록 창조주이지만 눈치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부담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빠져 주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이었고, 온전하게 지어진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가득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도 사람은 온전히 살 수 있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마음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빠져 주셔도 사람은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원리와 하나님의 가치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임을 하나님께서 여겨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성되었으니까, 모든 것의 기준이 마련되었으니까, 그리고 너희는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너희들끼리 잘 살 수 있을 것이야’라는 하나님의 인정,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배려, 하나님의 자비가 안식에 담겨있는 또 하나의 의미인 것입니다.
5. 시험, 연단
지금까지 ‘안식하시니라’에 담긴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은 천지창조를 완성하셨다는 하나님의 선포였습니다. 안식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오해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교회에서 힘든 일을 많이 겪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건강상의 문제로, 가족 간의 문제로, 성도 간의 문제로 힘든 일을 참 많이 겪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 기독교인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해 나를 시험 하신다’ 혹은 ‘나를 연단하신다’ 라는 표현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고 사람을 연단하시는 분이실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안식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안식은 완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완성은 완벽한 상태, 하자가 없는 상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사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이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 완벽한 존재에 대해 시험이 왜 필요할까요? 필요치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 하신다면, 그것은 사람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제대로 지었나? 혹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라며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신다고 가정 해 보겠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사람보다 사람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결과를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당연히 아십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당연히 알고 있는데 시험이 왜 필요하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시며, 시험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똑같은 이치로 연단도 하지 않으시며, 연단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표현할까요? 그 이유는 죄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사람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사람의 마음속에 죄의 마음이 들어오게 됩니다. 죄의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연합, 사람과 사람과의 연합을 가로막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깨뜨리려고 하고, 사람의 삶이 불행해 지도록 유도합니다. 그 죄의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원인이 마치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사람을 조정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지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의 원리, 죄의 시험으로 인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결코 온전한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죄는 결코 사람의 행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사람을 괴롭히고 불행해지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짐할 때, 죄는 결코 이런 우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고 훼방하고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하나님께로 덮어씌우는 아주 교활한 존재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성도는 죄와 싸우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갖춘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지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지음 받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구원 받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존재, 바로 성도, 그 성도가 여러분과 저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승리자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자입니다.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빛 된 자이며, 성도는 세상의 소금인 자입니다. 성도의 삶 어렵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 힘들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람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아름답게, 행복하게, 자유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참 예배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참 기도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참 전도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성도의 참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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