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俗離山)은 조선조 명종때의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자 도인이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선생이 산신으로 주재하고 있다.
정도(正道)를 걷는 수련학인들은 잘 봐주나, 무당같이 소소한 잔술(小術) 공부는 매우 엄격히 통제하므로 공부하기 힘들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여기서 공부한 무당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속리산 계곡이 다른 산보다 암반이 좋고 넓직넓직해서 기도공부를 하기에 아주 좋은 입지조건이라, 공부를 시작했는데
밤중에 한 흉칙한 신장(神將)이 나타나 가시방망이를 들고 마구 두들겨 패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 다음날로 보따리를 쌓아 줄행랑을 쳤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하였다.
대체로 속리산에서는 무당들이나 잡술을 하는 사람들이 신빨(神發)을 못받는다고 하며, 억지로 하다가는 어느날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홀연히 죽는다고 한다.
또한 아예 세상을 등진 사람은 산신이 잘 봐주고 출세하려는 야망이 있는 수련학인들은 안봐준다고 한다.
이준경 선생은 생시에 이미 정신계 중단은 도달한 도인으로서 평소 매일같이 겨울에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것이 바로 제갈공명이 쓰던 백우선(白羽扇)같은 것으로 정신수련의 경지가 깊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을 부치면 어느 곳이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등 수많은 현묘(玄妙)한 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준경 선생은 죽기 전에 사위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 후 속리산중 한 폭포밑에 수장(水葬)해달라.
그리고 대상(大祥) 치르기 전-즉 죽은후 만 이년째-에는 자식이라도 일절 곡(哭)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자식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런데 자식이 뒤늦게 알아 속리산 근처에 사는 사위의 뒤를 밟아 쫓아가서 수장한 폭포를 알아냈다.
그래 대상치르고 와서 폭포앞에서 곡을 했더니, 갑자기 물속에서 관이 떠올라왔다.
관을 열어보니 시신은 없고 용 한 마리가 있는데 용이 몸은 다 이루어졌고 다만 여의주(如意珠)만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동고 이준경 대감이 죽은 후 용으로서 변신하려는 기간이 만 2년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하루 못 채우고 실패했더라는 고사(故事)이다.
이런 연고로 지금 속리산신으로 있으면서도 좀 심술을 부린다고 한다.
이런 측면이 무당들이나 좌도(左道)의 소술(小術)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봉우선생이 생전에 대종교(大倧敎) 총전교(總典敎)로 재직중이실 때의 일이다.
1990년도에 대황조 한배검 야외 경배(敬拜) 행사의 일환으로 속리산 어느 산자락 밑에서 행사를 주관하는데, 도착당시부터 자욱한 안개때문에 행사 진행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 봉우선생이 "성질 급한 늙은이가 왔소이다. 이것만 좀 치워주면 좋겠소." 하며 마치 누구와 얘기하듯 독백(獨白)하였더니 자욱했던 안개가 차일 걷히듯이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싹 걷혀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산신과 직접 교통(交通)하는 장면이 아닌가 한다.
필자나 평소 봉우선생을 곁에서 모시던 많은 학인들은 이런 경험을 대개 한두번 이상은 겪게 된다.
즉 허공에다 대고 상대방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시던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속리산 옆에 경상북도 쪽으로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이를 청화산이라 한다.
청화산 산주는 박씨 부인이라 해서 고대소설 『박씨부인전』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우리 나라 전국의 산신가운데 유일한 여자 산신이다.
박씨 부인도 역시 도인으로서 소설에서는 남편 이시백(李時白)을 도와 과거에 급제케 하고, 도술로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충렬정경부인에 봉해지는데, 아무튼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청화산 산주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할머니 산신으로 불리고 있어 여성산신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주 인자하고 학인들의 소원을 잘 들어주며 공부 또한 잘 도와주는 산신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