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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걸출한 문인화가였던 이인상의 송하 수업도입니다.
오늘도 불이의 산기슭 소나무 밑의 강의실에서 수업이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문인목 입니다.
시간은 약 260년 정도 격차가 있지만 문인화 대가의 그림속의 풍경과 비슷한 풍경 속에서
문인목을 논하다니 묘한 감회가 생깁니다.^^
능호관 이인상(1710~60)은18세기 회화를 이끈 선비화가중 가장 비범했던 문인화가입니다.
시, 서, 화에 능했으며 성품이 곧고 개결했던 그는 비행과의 야합을 용인할 수 없어 관직을 버리고
단양인근의 설성에 은거하며 그림에 심취해 자적하고 몹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와 전서, 그림의 삼절인 이인상은
그림양식에서 사실(진경)이 아닌 사의를 그려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사유화의 대가였습니다.
그 일화를 하나 들어보면
학사 이양천이 이인상에게 제갈공명 사당의 잣나무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자
이인상은 그림은 그리지 않고 전서로 설부(雪賦)를 써 보냈고 학사는 의아하여 다시 그림을 독촉하니
이미 그림을 보냈는데 못받았냐고 반문하였습니다.
학사가 받은것은 전서뿐이라고 답하자 이인상은
"대저 바람서리가 모질다 보니 능히 변치 않을 것이 있겠는가. 자네 잣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구해 보게"
라고 화두를 던졌고 그제서야 이인상의 재치를 알아챈 학사가
"그것이 자네가 추구하는 화도라면 너무 황량하다" 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인상이 학사에게 던진 화두는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에서 뜻을 취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가장 나중에 시듦을 안다"는 논어 <자한편>의 뜻을 새삼 떠올리게도 합니다.
오늘ZERO님의 수업내용입니다.
수업내용의 핵심을 정리해보면
본래의 문인목이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강직한 뜻과 자유로운 정신의 기운이 스며있어야 한다는 얘기인것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문인목의 모습이 아닌 파격적인 모습이 되더라도
그것은 문인목의 범주에 속한다는...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십니다.
오늘 실습에서 작업한 유구에서 데려온 황피소사입니다.
작업전의 모습입니다.
나무를 분에서 꺼내보니 좋아보이던 근장부와 달리 잘린 부위가 크고 편근으로 형성돼 있어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일단 깊게 묻었습니다.
옆가지를 제거하고 윗가지 하나만 살릴것으로 예상했는데
갑자기 ZERO님께서 이인상의 송하관폭도를 얘기하십니다.
결국 아래모양으로 1차 개작이 되었습니다.
내년에 근장부에서 취목을하고 다시 각도를 눕혀 심을 생각입니다.
이인상의 송하 관폭도입니다.
같은 수종은 아니지만 오늘의 송하수업을 기억한다는 뜻으로
오늘 작업한 소사를유사한 수형으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수업이 끝나고 돌아와 문인화에 대한 관련서적을 검색해 보니
좋은 자료가 보입니다.
이 글의 이인상에 대한 자료들은 모두 이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더불어 위 책의 저자인 문인화가 강행원님의 글 중 되새겨 볼만한 글이 있어 좀 길지만 첨부해 봅니다.
-남도 문인화의 흐름을 찾아서- 문인화의 역사성과 그 전망
강 행 원 (화가/동양미학)
문인화의 발생 배경과 역사적 개념
1).발생배경
문인화의 역사적인 맥락을 돌아보면 서양회화보다 일천 년이나 빠른 자각이 있었다. 발생연원은 멀리 중국 남북조(南北朝)시대의 종병(宗炳=375~443)미학이 제시하고 있는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각의 가치이념은 노장사상을 바탕한 은일정신과 문학화(文學化)의 자연주의가 결합하여 이룩된 소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미학의 주인공 역시 송무제(宋武帝)가 권하는 벼슬길도 사양하고 평생 야인으로 지낸 청담사상(淸談思想)을 고취한 문인이다. 이러한 청담사상은 고대사회를 주도하던 문인사대부들의 문화적 관습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관직에 머물러 있을 때는 유가(儒家)적 풍속을 따랐으며, 관직을 그만두었을 때는 도가(道家)적인 풍속을 따르게 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유가적 풍속은 유위(有爲)를 추구한 현실정치참여와 이상사회 건설에 뜻을 두고 있었으며, 도가적 풍속은 무위(無爲)를 추구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간의 품성을 지키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이들의 풍속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함께 시문을 즐기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문인들의 청담사상에 대한 가치이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속에 따라 사대부들 역시 관직에서 물러나면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사회적인 문화적 통념이었다. 임어당(林語堂)은 말하기를 “도가와 유가는 중국인들 영혼의 양면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 같은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도가적 가치이념 속에서 탄생한 것이 문인화의 시원인 셈이다. 도연명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詩歌)문학 속에서 그림이 자연을 주제로 하는 자각의 눈을 뜨게 된 것이 그 발생 배경이다.
2).역사성
자연을 주제로 한 그림이 문인화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학화(文學化)에 기반을 둔 문인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어왔기 때문에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인 사대부화라는 명칭을 붙여둔다. 문인사부화는 전반적으로 동양회화의 정신적인 그릇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화론상에 있어서도 그 개조가 되는 종병이나 왕미(王微) 등에 의해 저술된 회화미학이 주체가 되어왔던 것이다.
종병은 자신의 화론에서 그 시작을 “성인은 도(道)를 품고서 사물에 응하고 현자는 마음을 맑게 하여 상(像)을 음미한다(聖人含道暎(應)物, 賢者澄懷味像)”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화자(畵者)가 그림에 임하기전에 성인이나 현자가 취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화도에 임하는 맑은 마음으로 그림에 응하게 된 그 대상을 관조케 하는 태도를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징회미상(澄懷味像)의 도(道)가 세상에 통하도록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대한 근엄한 질서를 세우는 일종의 교시이다. 이렇게 시작된 동양의 회화문화가 하나의 수묵화로써의 꽃이 피는 시기를 약 10세기경으로 잡는다하더라도 서양미술의 실용 시기보다 700년이나 앞서있는 셈이다. 이때부터 동양회화는 書畵一致 또는 詩畵一致라는 독특한 개념들이 성립되어 그 시대의 친숙한 문화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이다. 문인화란 이름이 탄생하게 된 그 역사적 배경은 시화(詩畵)일치라는 개념성립으로부터 예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시화(詩畵)일치라는 말은 그림과 시가 밀접한 관계성을 갖게 된 동기부여를 의미한다. 그 기저에는 자연을 관찰하여 포착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에 담고 있는 감성에 대한 표현의 결과물임을 의미한 말이다. 이와 같이 그림과 시에 관하여 서로 깊은 관계를 맺어 왔음은 문인들이 주도한 그림들이니 만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당시 문인들이 그린 그림 곧 문인화를 지칭하여 일명 무성시(無聲詩)라고도 하여 왔는데 이 말은 모양은 있으되 소리가 없는 시(詩)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림이 곧 소리 없는 시라면 따라서 시는 소리를 지닌 그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곧 문인화는 시인화를 의미하게 됨으로써 그림과 시를 동질 세계로 묶어 시화 일치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는 화가의 입장은 시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의적인 붓놀림은 이미 마음속으로 선언해버린 어떤 의식으로 무장한 작가 정신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가 시의적적인 순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태어난 일필휘지의 작품들이 후일 문인화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지(紙)·필(筆)·묵(墨)이 그 기본 재료가 되면서 번지는 미적 효과가 어우러져 시인화가 중심이 되어 전반적인 수묵주종의 동양회화가 발전해 왔다.
그러나 계속 수정이 가능한 서양회화에 비해 일필로 그려야 하며 거기에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필연으로 한 화격(畵格)과 동시에 문기(文氣)가 있어야 하는 독특한 평가 기준도 따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마치 선시(禪詩)의 오리무중한 도정의 소리를 알아차리는 번득임처럼 잔소리를 생략한 일필휘지의 노정에서 얻어낸 결과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필·묵의 특성 때문에 ‘서(시)화일치’라는 개념이 지탱하게 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서·화에 대한 배경의 분위기가 전재된 속에서 괄목할만한 특평이 있었다. 8세기 송(宋)대의 소동파(蘇東坡)가 당대의 왕유(王維)그림을 평하기를 “그림 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畵中有詩 詩中有畵)”라고 한 것이 동양회화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후대 17세기 명(明)대의 동기창(董其昌)이 시화일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인의 화와 직업인의 화를 분리하면서 사용하게 된 것이 문인화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는 소동파가 언급하고 있는 왕유를 남종문인화의 조종으로 하고 북종화는 이사훈(李思訓)을 조종으로 양대 계맥을 형성하여 품평에 대한 질서를 세우게 된다. 직인화(화원화)인 북종화와 문인화인 남종화에 대하여 상남폄북론(上南貶北論)을 들어 북종화를 폄하하고 남종화의 우위론을 내세워 계급세계의 질서를 강화하기에 이른다. 그렇지 않아도 선비문인들에 대한 봉건사회적 우위는 당연한 것인데 작품세계에 까지 차등을 두어 장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회화 발전은 문인화가 절대적인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문인화는 사실상 남종화와 맥락이 같은 동양회화의 지류로 보게 되는 역사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신적인 큰 핵우산 역할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후광은 근현대에 와서도 사실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사의적인 바탕을 유지하는 방향을 지금도 잘 벗어나지 않고 있다. 한국문인화 이상에서 동기창에 의해 명명된 문인화와 남종화의 개념이 서로 혼입된 개념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것이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발생 연원에 대한 순차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남화양식과 동일하다고 주장하기도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그 개념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인화는 중국문인화와 그 출발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 연원은 고려조(高麗祖)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미학이론서가 전제되지 않는 선비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러므로 굳이 한국성을 찾는다면 선비화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고려조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시서(詩書)와 함께 화필을 여기의 풍류문화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인화의 용어성립과 그 성격에 관해서는 중국에서처럼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시․서․화(詩․書․畵)를 다루는 방법상의 문제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봐야할 것이다. 한국문인화의 발생에 있어서 그 시원을 찾는다면 고려조의 선비그림들로 하여금 문인화의 시작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문인화란 화명으로 시작된 역사성을 엄격히 따진다면 조선조(朝鮮祖)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조선문인화의 초기는 중국의 남화양식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고 고려의 연장선에서 선비그림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입장을 다시 부연하면 어떻든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동기창이 세운 남화양식이 유입되기 전에 이미 그가 폄하한 북화의 직인화풍이 우리선비들에게 소개되어 그 영향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조 초기에 이루어졌던 선비문인들의 그림들이 고려조의 연장선에서 중국 북종계열인 직인화풍의 영향권 속에서 혼합되게 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의 문인화는 강희안(姜希顔)이 남긴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국립박물관소장)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그 초기는 화론상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의성과는 무관한 북종화계열과 만나서 한국문인화, 즉 선비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문인화의 흐름은 서화를 다루는 이념면에서 선비들의 논리가 당시 사회문화를 주도하여 왔음에도 회화적 변혁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의 문인 사대부들의 신분의식에 대한 당시 사회적 풍토가 화기(畵技)에 전념하는 것을 천한 일로 여기는 문화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조선조의 대표적인 사대부화가 인재(仁齋) 강희안(1417~1494)이 남긴 말이다. “서화는 천기(賤技)이니 후세에 유전하여 이름을 더럽힐까 저어스럽다(書畵賤技流轉後世祗以辱名耳)”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자신의 그림이 후세에 전해져 사대부의 이름이 천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내용이다. 이 점에 대하여 강희안의 친아우였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같은 사대부화가 입장이지만 당시 서화의 기예를 즐기는 일이 천하다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러한 관념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무릇 사람들의 기예는 다 같은 것이지만, 마음 씀이 곧 다르다. 우리선비들의 기예는 순전히 우의할 따름이며 소인들의 기예는 유의할 따름이다(凡人之技藝雖同, 而用心則異. 吾子之於藝 寓意而己 小人之於藝 留意而己).” 그의 이러한 견해는 서화를 즐기는 일이 천한 것이 아니라 서화를 하는 사람들의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다는 사회적 통념을 바꾼 말이다.
그러나 유가사상이 바탕하고 있는 조선사회는 서화의 여기를 천기로 여겨왔던 관념을 여전히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 채 그 핑계를 계층성이 떠안고 있어야 했다. 조선조 중기는 명말 청초의 남화가 유입되면서 문인화는 남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 동기창의 상남폅북론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어 문인화의 적성과도 부합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더욱 새로운 발전 양상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남화 형식의 문인화는 문인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며 화원들도 때에 따라서는 남화풍을 즐기는 시대적 취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회화의 표현영역은 계급성에 대한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듯이 화원과 문인의 그림에 대한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원도 자유롭게 문인들처럼 여흥을 즐길 수 있고 사의성도 추구할 수 있으나 다만 의식주 문제에 따른 제약이 있어서 문인들처럼 일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착과정의 시점에서 한편으로는 민족정신의 주체를 찾는 각성으로부터 사경(眞景)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있었다. 이때 문인사대부 화가들도 뜻을 같이하여 적극성을 띠고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 양식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한국회화의 당시 상황은 문인화와 화원화(직업화)의 표현 양상이 서로 복합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문인화에는 남화의 전형양식만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사실양식을 표현하는 경향이 서로 뒤섞이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을 가져왔다. 중기이후의 작가들을 살펴보면 金禔 .李英胤 沈師正 申緯 趙涑 李霆 林熙元 金正喜 趙熙龍 金秀喆 許維 田琦 등 이들은 남화의 전형양식을 선호한 반면 尹斗緖 趙榮祐 姜世熀 李麟祥 등은 진경에 바탕을 둔 이름을 드날린 문인 화가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시·서를 고루 갖춘 명망가 들이다.
그러므로 서화에 대한 감식안도 출중했으며, 사회적인 당시의 문화를 주도하여 왔기 때문에 일반 화원들에게도 정신적인 영향을 크게 미쳤던 것이다. 김홍도(金弘道), 정선(鄭敾) 등 화원출신들에 의한 한국적인 리얼리즘이 발전하여 정착하기까지 이들은 문인사대부 화가들의 후광을 많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한국 문인화는 남종화양식의 호방한 수묵의 유형을 추종하는 경향과 우리의 진경(眞景)양식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두 측면이 함께 공존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문인화는 그 전형방식이 형사보다는 사의성에 치중하여 왔기 때문에 실사를 가볍게 여기거나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관념적 전형에 머물러 안주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사실양식을 선호하는 쪽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일부에서는 시서의 보완수단으로 보는 폐단이 있었으며 서예와 혼입하는 여기의 성향과 함께 그 종속성에 대한 관계를 함유하고 있었다. 후기에 들어서는 문인화양식의 경향이 미학이론서의 토대에 더 접근하여 중국풍에 가깝게 다가서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실성에 기반을 마련하던 한국풍의 문인화가 다시 방향이 전환되게 된 셈이다. 그것은 조선후기 최고의 석학이기도 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미친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선사회의 서화천기사상의 뿌리가 뽑히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음인지 문인화에 대해서 서예와는 상반되게 남긴 작품수가 많지 않다. 한국문인화에 미친 추사의 영향은 한국화의 큰 흐름인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밀어 낼만큼 문인화의 일격(逸格)에 대한 흠모의 기반이 그의 성례(成禮)로부터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조선회화의 창조적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국화풍(國畵風)의 사실양식은 사실상 퇴조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그와 같은 문인정신의 문인화는 추사가 마지막으로 조선후기를 장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는 조선의 문인화(한국문인화)는 또 다른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구한말(舊韓末) 비운을 겪는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남도문인화의 흐름 예도(藝道)라는 것은 그림의 본질에 대한 그 이념의 논의이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림이 전하는 예도의 관계는 물질과 정신이 융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시대정신이나 사회상의 반영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적인 독자성을 들추어 그 일방만을 조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남도문인화만을 따로 조명하기 위해 그 인맥을 들추어 보지만 남도 문인화풍이라고 하는 독자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당시 문인화가 정착하게 된 조선조의 서화에 대한 관심이 지방색을 띨 만큼 작가의 세(勢)와 그에 걸맞는 양식상의 변화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조의 남도 문인화가 계보상의 단절 없이 근대로 이어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근대의 특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점은 일제강점기의 식민화과정을 겪는 시기에 출현한 작가들이 받아들였던 일본식 문화와 교육에서 변화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조선조가 문을 닫는 일제강점기를 근대의 시기로 정하여 먼저 근대 전기인 조선조를 중심으로 그 인맥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근대 전기를 상한선으로 보면 조선조 중기에 이른 中宗시대부터 열거하게 되는데 호남 출신의 문인화가로서는 學圃 梁彭孫(1488~1545=능주인)과 霞川 高雲(1495~? =장흥인)이 있다. 학포의 작품으로서는 국립박물관 소장의 산수도가 전하며, 특히나 묵죽화에 대해서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호남을 자랑할 만한 문인사대부 화가이다. 그리고 宣祖시대에 와서는 眉叟 許穆(1595~1682=나주인)을 위시하여 恭齋 尹斗緖(1668~1715=해남인)가 있으며, 공제의 아들 蓮翁 尹德熙(1685~?) 손자 靑皐 尹愹(1708~1771) 등 3대가 화업을 잇는다. 미수 허목은 자신의 독자적인 서체(眉叟体)를 갖추었으며 사군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공재 윤두서는 특히나 윤선도(尹善道)의 종손으로써 그의 출현은 호남 그림의 독자성을 엿보게 할 수 있는 근간이 되고 있다. 더욱이 3대가 화업을 잇게 되는 가계(家系)로써 윤두서의 영향은 중앙화단에까지 그 파장은 자못 컸다. 그리고 松月軒 林得明(1767~?=나주인)이 겸재(謙齋)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서화를 아주 잘 하였다. 근대 중기에서는 호남 화단의 독자성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작가들의 계보가 이어지지 못하고 한 가문의 가계 중심으로 종식되고 말았다. 하지만 윤공재(尹恭齋) 개인의 뛰어난 독자성은 민족정신의 주체성 확립에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조 말기로 내려오게 되면 추사 김정희와 교유하여 영향을 입게 된 중심인물이었던 小痴 許維(1808~1892=진도인)가 있다. 특히나 소치는 추사와 교유가 깊었던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무안인)의 사이에서 그 정신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소치의 출현이 근대의 유일한 접목으로 남도 화단의 계보를 이루게 된다. 그는 당대의 추사로부터 충분히 인정을 받은 거목이었다. 그러나 추사의 영향권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 역시 추사의 입맛에 맞추어진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독자성은 일격에 의한 사의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특유한 자신의 갈필법을 쓰는 호방한 선질의 수묵화였다. 소치문하에서는 米舫 金益魯(?)해남인, 春舫 金瑛(1837~?)해남인, 玉田 林樑材(?), 沙湖 宋修勉(1847~1916=여산인)동복에 살았음, 湖石 任三鉉(?)진도인 이외에도 못찾아낸 작가들이 더 있다. 그리고 그의 아들 米山 許瀅(1852~1931)과 손자 南農 許楗(1908~1987)으로 이어지는 3대의 가계보를 잇고 있다. 미산은 소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남농은 남화풍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念齋 宋泰會(1872~1941=화순출신)와 松坡 李淸欽(1882~1937=장흥출신)이 있으며. 소치의 반계인 毅齋 許百鍊(1891~1977=진도출신)이 있는데 남화풍에 의한 근대화를 이룩하게 된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독자적으로 문인화를 즐겼던 서예가 素荃 孫在馨(1903~1981=진도출신)을 빼놓을 수 없다
소전역시 자신의 서체를 이룩한 독보적인 작가로서 문인화 작품을 적잖이 남겼으나 그 계보는 서예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근대를 잇는 작가들은 보면 소치가문의 3대를 잇는 남농 허건이 근대시기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 동생 林人 許林이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식 일본교육을 받았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그리고 의재 허백련이 호남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지만 그에게도 동생 許行冕이 있었으나 일찍 타계하였다. 근대시기에 송태회가 일본신교육을 받아 미술교사로 재직 중 선전(鮮展)’에서 인정을 받았으며,이청흠도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문화에 동화 되였으며 귀국 후에도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의재’ 역시 유학하여 일본 남화(남종화)의 대가 小實翠雲에게서 사사하여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다. 그 후 선전에 특선하여 주목받는 화력으로 저명한 유지들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과 교유하면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그 뒤 광주에 정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기 시작한 반성은 국권(國權)을 빼앗긴 그 시대에 대처하는 민족사회의 자주적 전통의 절실한 자각이었다. 그래서 서화에 대한 학식과 감식이 풍부한 그는 한국회화에 대한 민족전통을 회복하는 데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47세 때(1938년) 연진회(鍊眞會)를 조직하여 후진양성에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광주를 중심으로 연구 발표전을 활발히 하면서 내린 뿌리가 중앙 화단과는 다른 호남의 남화를 형성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현대로 이어지는 의제문하의 문인화계보는 槿園 具哲祐, 九堂 李範載, 金峰 朴幸甫, 穉蓮 許義得, 谿山 張贊洪 등으로 이어진다. 소치가문의 남농은 근대산수의 리얼리즘에 의한 또 다른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남화로서 호남화풍의 특성을 이루는 한편 제자들을 양성하였으나 대체로 일반 회화에 편승한 계보로 이어진다. 남농 계보의 문인화 성향으로는 아산 조방원, 전정 박황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양 계보에서 문인화의 범주를 넘어 일반 회화에 편승한 많은 문하가 있다. 참담한 근대와 현대작가들 문인화의 근대성은 비단 남도 문인화의 흐름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인화의 전체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문인화에 대한 근대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는 참담함이 있다. 그것은 문인화 본질의 이념이나 사회상에 대한 반영의 문제가 아니라 한나라의 국권(國權)이 상실됨에 따라 계승되어 왔던 문화나 제도가 말살되는 붕괴시대의 종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났던 일제강점의 식민정책은 가장 먼저 조선문화를 장악하는 데 두고 있었다. 그것은 한 민족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민족정신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정신이 집약된 문화를 짓밟는 것은 통치수단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모든 문화양식의 구조가 일본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회화문화의 모든 제도는 식민통치의 의도 안에 통제되어 모든 기능을 잃게 된 것이다. 이 말은 한국문인화의 전통이 앞 시대와의 연장이 아니라 종식이거나 단절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예도(藝道)의 맥락은 일단 중단된 공백기가 된 셈이다. 이 점에 있어서 조선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개성의 근대의식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은 숙제로 남는다. 이와 같이 제도나 문화가 상실하게 됨에 따라 신분적 차별이 없어진 이상, 상대적으로 그림구분의 개념도 또한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면 문인화와 직인화를 형태상으로 구분해야 할 이유가 무의미하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비 그림의 개념은 물론이거니와 선비의 개념조차도 예도의 모든 것이 철저하게 분해되어버린 셈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근대교육을 받은 미술인들이 많이 배출됨에 따라 신분상으로 문인이라는 개념구별 또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에서도 문인의 의미를 굳이 찾는다면 조선조에서 이어진 선비입장의 문인은 근대적 교양으로 개량되거나 개화된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고전적인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잔존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근대의 신교육을 받은 미술인들은 자연적으로 문인의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인의 세계는 고전의 시문(詩文)을 갖추게 된 선비와 같은 어떤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문인의 반열에 해당된다. 이로부터 조선조에서 이어진 전통방법의 문인선비들은 완전히 몰락하여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와 같이 문인화는 상대적으로 구시대적 산물로 전락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음에도 새로운 회생이 다시 시작되기에 이른다. 매몰된 근대의 아픔을 딛고 점차 현대로 내려오면서부터는 남도화단의 문인화에 대한 비중은 유래 없는 팽창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된 데는 남도 문인화에서 의재가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만큼 크나큰 의의를 남긴 결실인 것이다. 그것은 주체성과 복고주의 회복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제도 교육에서 할 수 없었던 전통에의 부흥을 이끌었던 점이다. 그리고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이어가게 되면서 문인화는 점차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남도 문인화의 현재의 흐름은 어떻든 선대에서 이어진 계맥과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출발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금봉 박행보로부터 이어지는 김영삼, 이상태, 강종원. 이부재, 허임석 등으로 연계되며, 치련 허의득으로 이어지는 구지회 , 박태후, 이용선 등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창현 박종회 와 윤산 강행원이 독자적으로 확립한 세계로서 자신들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데 창현은 문하에 치중하고 윤산은 이론에 치중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번 남포미술관에서 “남도문인화의 흐름을 찾아서” 라는 주제로 기획하게 된 초대 작가들로서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음의 작가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강종원 강영화 강행원 고지우 구성희 구지회 김길록 김무호 김병숙 김성님 김송자 김영삼 김영숙 김영실 김용선 김주성 김팔수 나영주 민병희 박문수 박종회 박태후 박항환 박행보 백준선 이병호 이부재 이상태 이연재 이용선 이정원 이형국 유시영 장찬홍 정남희 정석훈 정순오 정순태 정운기 정웅균 정현숙 조창연 최창길탁영희 한상운 허임석 허장복 황의철 등 출품작가들 이외에도 초대되지 못한 많은 작가군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출향작가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남도특유의 독자성을 찾기 보다는 이들이 전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의식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한 셈이다. 남도문인화는 현대의 오늘에 이르러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서 전국에 분포하여 이들이 지도급에서 각자의 문하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주체성 확립을 통하여 미래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전망과 대안 근대로 내려오면서 겪게 되는 식민화과정 속에서 문인화가 어떻게 발전했을지 모르는 의문을 남긴 채 단절이라는 표현과 함께 숙제로 남겨놓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쯤은 문인화가 걸어왔던 한 세기의 긴 터널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또한 주체적인 사상은 아직 유효한 것인가에 대한 그에 걸맞는 대답의 정립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먼저 남도문인화의 흐름에 있어서 민족주체성과 복고정신의 회복에 대한 팽창의 결실은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집단적 개성의 강점이 개별적인 자기개성의 약화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집단적 강점으로 부상한 남도문인화가 사실상 전국의 주역이 되어 일색으로 넘치는 데서 오는 획일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상의 단점은 작가자신들의 끊임없는 변화를 꿈꾸는 비범한 의식과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현재의 한국문인화는 외형상으로 정식적인 장르의 이름을 회복한 셈이지만 내용상에 있어서 소재적 한계를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작가들의 정신적인 사고도 서예의 종속성에서 선뜻 그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장르가 독립된 문인화를 전공한 자신들이 긍지와 사명을 가지고 극복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더 큰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문인화가 상대적으로 구시대적 산물로 여겨지는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문인화의 특질인 시인화의 사의성에 대한 접근을 가장 우리다운 목소리로 만나야 하는 오늘의 인식을 어떻게 수용해야 현대성이라는 바다에서 그 소외와 표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인화는 재료에 있어서 지(紙), 필(筆), 묵(墨)을 사용하는 한 조형상의 그 양식은 영원히 소멸될 수 없는 깊이와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 화론에 대한 미학이념 철학은 현대에 와서도 사실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사의적인 바탕을 유지하는 방향을 지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도교육에 있어 문인화학과가 없기 때문에 수묵의 호방한 선질의 매력에 이끌려 문인화양식을 선호하는 한국화 전공자들이 상당수가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이고 보면 그 전망에 대한 답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며, 오히려 간단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갈채에 달려 있다. 그 단점을 먼저 든다면 지금도 증가추세에 있는 현재의 문인화는 그 눈높이가 잘못 맞추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인화작가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의 다수가 작품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결점이 “서툰 솜씨가 능숙함의 결여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는 교(巧)를 감추기 위한 ‘소동파’ 미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능숙해서 넘어버린 것이 아니라 잘못된 그 자체를 허물이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다 만 미완의 작품처럼 아마추어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군자에 머물고 마는 소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남종화의 영역이 곧 문인화의 법주임을 인식하여 보다 다양한 소재확대와 격(格)을 갖춘 고도의 선질(線質)과 조형상의 빼어난 구성을 무기로 삼을 때 비로소 문인화는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실정신을 바탕한 사의성이 추구되는 작품으로서“거칠지만 속(俗)스러움에 빠지지 않고 섬세하지만 싼빡한 맛에 흐르지 않는다.”는 ‘왕이(王履)’의 논(論)에서 말하는 것처럼 프로정신을 지녀야 한다. 결론 문인화시작의 연기(緣起)에서 역사성에 대한 긴 전통과 미학의 가치이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대강 파악해 보았다.
중국과 한국의 비교와 우리의 참담한 근대성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남도 문인화의 흐름에 대한 오늘을 진단해 보았다. 여기서 괄목할 만한 문제는 조선조의 한국문인화가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민족정신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양식상의 변화를 꾀하게 된 노력을 들 수 있다. 물론 사의성을 전재로 하면서도 사실정신에 기반을 두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는 서화의 기예가 문화적으로 천기사상을 바탕하고 있어서 큰 발전은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근대를 이어온 오늘의 한국문인화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문인화형식의 양식만 남기게 된 채 시․서․화(詩․書․畵) 삼절을 의미하는 고전의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시대로 서․화는 서․화대로 각기 분리되면서 문인화 본래 정신은 해체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술은 시대의식이나 역사이념의 산물(産物)이며 동시에 그에 알맞은 양식을 가지고 나타났다가 또 사라지는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에서처럼 민족주체성에 대한 소재와 함께 양식상의 변화를 꾀하는 그러한 새로운 정신이 필요한 때이다. 전국을 주도하고 있는 남도문인화가 책임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더욱이 서구에서 밀려온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급격히 통일화, 획일화, 탈국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반면에 그 폐해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인류의 희망은 다양한 문화의 글로벌화가 촉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동안 서구의 논법에 이미 매몰된 우리의 일반 회화로서는 그 경쟁력을 잃고 있다.
그리고 글로벌 시대의 오늘에 있어서는 더욱 차별성을 지킬 수 없는 한계에 와 있다. 이로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어법에 대한 모색과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문인화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문화의 자기다운 목소리를 펴 보일 수 있는 가능한 화목이 아직 오염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문인화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한 동방의 사유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문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의 그 전환을 기대하는 바이다.
첫댓글 흠... 한국문인화.. 질러야 겠군요..^^
지르지 마시고 빌려 보던지, 서점에서 보던지... 내용이 값에 비해서는... 흠!
앗, 실수. 질러서 회원들 돌려 볼 수 있도록 해 주삼.
제꺼 돌려보세요.^^
공부를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송하관폭도와 문인화에 대한 자료를 뒤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문인화와 문인목의 관계는 성이 장씨인 중국의 장개석총통과 한국의 장면박사 만큼이나 관계가 없다.
네~ 당연히 표현의 형식이나 언어로 보면 분명 전혀 다른 분야 이지요. 문인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분재와 같이 겸해서 얘기되어지는것이 싫을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문화적 관계란 만들어 가는것이지 규정지어 잘라말할 수는 없는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본질적인 정신과 뜻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면 분야가 달라도 충분히 관계지어 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밀레니엄님께서 대단히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으니 zero 역시 단정적 표현으로 답글을 달아본다.
문인화와 문인목을 고정 관념 속에 가두어 놓고 생각하면 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문인화와 문인목 사이에는 <문인>이라는 단어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기에
그 관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인의 전통이 박약한 일본 분재가 규정하는 문인목과 삼테기님
또는 zero가 지향하는 문인목은 개념적 차이가 크다.
대만의 장개석 총통과 한국의 장면 총리는 모두 격변의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며, 다양한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 지도자에 오른 사람이니
상식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공통점 또는 관계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무릇 어떤 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일은 사유의 폭과 자유로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제로님, 잘 계시지요.^^
"무릇 어떤 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일은 사유의 폭과 자유로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위 말씀에 공감 합니다.
한국 소나무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 사유의 폭을 넓혀 미국 리키다소나무 밭으로 간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이 독특하신것 같습니다.
분재인이시라면 소장하고 계신 나무도 궁금해지네요.
저야 뭐 보시는대로 초보수준에서 생각을 풀어가고 있는 입장이지만
직접 뵙고 담론을 나눠보면 재미있는 분일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밀레님엄님은 불이에 회원으로 가입하신지가 16개월가량 되었으니 카페에 올려진 글들을
찬찬히 보셨다면 카페지기의 지향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소나무 정취를 맛보려 리키다 소나무 밭으로 간다?" 와 같은 극단적 방식이라야
사유의 폭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토론을 이어가기에는 상호간 공감대가 아직은
부족한 듯 여겨집니다. 멀지 않은 곳이니 시간내어 불이도량을 방문하여 회원들의 나무를
살펴보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삼테기님 말씀대로 밀레님엄님의 분재관을 읽을 수 있도록
소장목 사진을 카페에 올려주시는 것도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한 방법이 되겠지요.
삼태기님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열독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글의 내용과 답글의 의미로 보건데.....
외부에서 불이의 뜻을 읽어내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나 불이 카페의 글만으로는 본인의 습득방법을 타파하거나 개연성을 찾아낸다는 자체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려운지는 알지만 쉽게 버릴줄 알아야 들어갈 수 있는.......
끊임없는 정진이 만들어내는 출입하가증.....
저로서는 개연성을 찾는 과정이 아닌, 감각을 이끌어낸다로 접근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저는 초보라서 애초에 버릴게 별로 없다보니 고민거리가 별로 없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저도 모든 힘은 감각의 확실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관념에 젖기 전에 내 눈으로 관찰하고, 느끼고, 시도하고......
카페들릴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불이의 게시물들을 제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렵다.!'이렇게 느끼는게 사실입니다.
관념론적인 분재접근방법이 주된 내용이고 여기에 경험론이 가미된 내용들로 채워진 공간에서 아직 분재 즐김의 초입에 머물고 있는 저로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게 지금의 제 현실입니다. 아직은 단순한 배양기술습득 수준에 머물고 있는 저인지라 취목할 소재의 상부가지를 잘라내고 철사를 감는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입니다. 뿌리부분의 편근은 배양과정에서 뭉텅잘려나간 뿌리처리의 과오에서 오는것도 있지만 상부가지의 영향도 없지않다고 배웠기에 편향된 가지를 더욱 편향되게 배양하는
것 또한 제게는 너무 난해하게 다가옵니다. 차후 취목에도 편향된 가지 운영은 편근을 만들기 쉽다배워서 더 그러합니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제가 분목을 보는 눈이 아직 부족하여 배양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자주 들리긴 하지만 솔직히 너무 어렵습니다.
여백 공간 비워냄... 이것은 가진것이 있어야 가능한데 전 아직 이러한 것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가 봅니다.
앞으로 더 증진해야겠습니다.
제 표현이 잘못된것 같은데 편근이라기보다는 덩치가 있는 다간형나무에서 옆구리에 있는 간 하나를 떼낸것 같습니다. 뿌리는 간 쪽에 따로 붙어있던거라서 살아 있을 수 있던것 같고요. 잘라낸 부위가 근장부로 보이게 심겨 있었는데 꺼내보니...좀 황당했지만 어차피 단점이 확실한 나무라면 어정쩡하게 보완하기 보다는 그 단점을 당당하게 장점으로 살려가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취목은 제 생각인데 할수도 있고 안할수도 있고 나중문제인것 같구요. 분에서 꺼낸 모습의 사진이 있으면 쉽게 설명이 될텐데... 꼭 지나간 다음에 생각이 납니다.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잎이 가장 나중에 시듦을 안다.
중요한 글귀를 생략했었군요.^^
전혀 다른 뜻으로 읽혀질수도 있는건데...수정하였습니다.
惑世誣民
惑世蕪民. 잡초같은 나무일 수도 있지만 저한테는 소중하니 잘 지켜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