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샬렘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손발이
[5월 영적 독서회]
* 일시: 5월 23일(목) 오전 11:00~12:30
* 장소: 열방선교교회
(주소: 고양 일산서구 송포로 237 샬렘하우스)
* 읽을 책: "베네딕트 옵션" 저자: 로드 드레허 / 이종인 옮김/ 출판사: IVP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시간입니다. ( 핸드드립 커피와 빵 제공)
* 참석하실 분은 미리 문자로 남겨주세요.
Hp. 010-5264-8084 (배병로 목사)
===============================================================================================
힌국어판 서문
서론: 각성
1장 대홍수
2장 위기의 근원
3장 삶의 규칙
4장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적 정치
5장 모든 계절을 위한 교회
6장 그리스도인 마을에 대한 발상
7장 그리스도인 형성으로서의 교육
8장 고된 노역을 위한 준비
9장 에로스와 그리스도인 대항문화
10장 인간과 기계
결론 베네딕트 결단
감사의 글
주
찾아보기
해설
한국의 교회들은 이와 같은 도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나는 여러분이 이 책에서 읽게 될 미국과 유럽의 사례들이, 베네딕트 옵션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과 전통에 맞게 조정되는 발상을 주기를 희망한다. 세속적 근대성은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하며 문화적으로 전 세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한다. 아시아, 북미, 유럽에 있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가지고 이 위기에 함께 대처해야 한다.
_한국어판 서문
내가 『베네딕트 옵션』을 쓴 의도는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교회를 깨우고 자신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도록 고무하는 데 있다. 우리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사유와 실천에서 우리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서구의 신앙인들에게 잊힌 마음의 습관을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삶에 접근하는 우리의 방식을 철저히 바꿔야 할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타협하지 않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_서론: 각성
우리는 공적 광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교회의 도덕적 우위도 우리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이들이 우리의 도덕률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보전하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우리의 종교 기관의 건강 상태에 근거 없는 확신을 두는 것이다. 근대에 서구를 덮친 변화는 모든 것을 바꾸었고,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는 더 이상 영혼을 형성하는 곳이 아니라 개개인의 구미를 맞추는 곳이 되었다.
_1장 대홍수
고난으로 괴로움을 당했지만 의미는 풍성했던 중세의 세계에서 떠난 긴 여행은, 한동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편안함을 주지만 의미와 연결은 사라진 텅 빈 곳으로 우리를 보냈다. 서구는 우리를 하나님, 창조 세계, 서로와 잇는 황금의 실을 상실했다. 우리가 이를 다시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해체를 막을 희망은 없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서구에서 이 생명선을 보게 될 것 같지 않다. 서구에서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지 않거니와, 볼 수 있는 능력도 더 이상 없는 듯하다. 우리는 풀려 버렸는데, 어떻게 묶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_2장 위기의 근원
성 베네딕투스의 길은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제 현실을 그대로 보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한 방법이다. 베네딕도회의 영성은 이 세계를 사랑으로 참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듯 세계를 변화시키라고 가르친다. 베네딕트 옵션은 “규칙”의 덕목에 의지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교회, 가정, 공동체, 교육, 직업, 섹슈얼리티, 기술에 접근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_3장 삶의 규칙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는 일을 멈추고,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에서 충성을 쌓는 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구도...자에게 친밀한’ 공동체보다 ‘발견자에게 친밀한’ 공동체가 되어, 우리에게 오는 사람들에게 새롭고 다른 삶의 방식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적 이야기와 관습에 의해 형성된 삶의 방식으로, 그 이야기의 진리를 흐리고 망각하게 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 진리에 굳건히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안정성과 질서에 의해 특징지어진 삶의 방식으로,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행하는 기도, 금욕주의, 타인을 위한 봉사의 일을 통해 성취되는 것?유동하는 근대성은 제공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다.
_5장 모든 계절을 위한 교회
오늘날 우리의 교육 제도는 세속적인 성취 면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 높은 열망을 불어넣지 못하고, 단지 학생들의 머리를 사실에 관한 것으로만 채워 넣는다. 중세 성기 이후, 지식 자체를 위해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는 서서히 덕을 추구하는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왔다. 그리고 오늘날 그 단절은 말끔하게 완료되었다.…학습을 덕으로부터 분리한 결과, 과학, 법, 돈, 이미지, 말 등을 다루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성취가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느냐는 것은 부차적인 질문이며, 대다수 사람에게 이런 질문은 순진해 보일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학생들의 지적?영적 삶과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상관없이 신앙에서 떨어져 나갈 위기에 처할 것이다.
_7장 그리스도인 형성으로서의 교육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대에, 일상의 노동을 성화하는 프란시스 수사와 베네딕도회의 모델은 직업 생활에서 전통적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본받아야 할 모델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첫째, 베네딕도회의 모델에서는, 일과 예배는 통합되어 있으며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신앙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둘째, 이는 육체노동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선물은 탈기독교 사회가 우리를 일터로부터 축출한다면 재발견해야 할 선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노동을 하나님과 공동체에 돌리는 선물로 여긴다. 만약 베네딕트 옵션 공동체가 살아남으려면 그들은 이와 같은 종류의 연대를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는 단순히 영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 수준에 기초한 것이다.
_8장 고된 노동을 위한 준비
우리 현대 미국인들은 이 시대의 사회 속 아주 많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을 전적으로 사적인 문제이자 개인의 권리 중 하나로 본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다. 베리가 말하길, 섹슈얼리티에 연관된 공동체의 규범, 제의, 전통들이 의도하는 바는 “섹슈얼리티의 에너지와 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보존하고, 단지 남편과 아내를 서로 연합할 뿐만 아니라, 부모를 자녀에게, 가정을 공동체에, 공동체를 자연에 연합시키는 성의 능력을 보존하고 명백하게 하며, 가능한 최대한으로 섹슈얼리티의 계승자들이 그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 섹슈얼리티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게끔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_9장 에로스와 새로운 그리스도인 대항문화
그것은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기에 내 생활을, 예컨대 내가 집에서 일할 수 있기에 내가 원하는 곳에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포함해, 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면에서 더 낫게 만들었다. 인터넷은 내게 많은 것을 제공했고 지금도 매일 그러하다. 그러나 다른 모든 새로운 기술이 그러하듯, 인터넷은 빼앗아 가기도 한다. 인터넷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은 우리의 능동적 힘에 대한 의식이다. 매튜 크로포드는 인터넷에 내재된 고유의 역설을 기술로 파악한다. 즉, 인터넷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선택을 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수동적인 포로 상태로 유혹한다.
_10장 인간과 기계
우리는 일하고, 기도하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긍휼을 보이고, 이방인을 환영하고, 계명을 지킨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특히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할 때 감사를 드리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우리의 신실함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 누가 아는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어는, 그리스도인 시인 W. H. 오든의 말처럼, “기쁨 가운데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_결론: 베네딕트 결단
일그러진 하나님, 위기의 기독교?
세속주의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교인 수는 감소하고, 신앙을 표현하는 일은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교회 안팎에서는 다양한 가치가 난립하며 각자의 잣대로 교회를 향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믿는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었고, 자본주의, 물질주의 같은 세속적 시대정신과 선택적 친화성을 갖고 공생 관계를 형성하며 공적?제도적 영역에서 그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는 듯 보였던 기독교는 계속해서 변하는 다양한 시대정신과 친화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영향력을 상실할 시점에 와 있다.
방향 잃은 현대를 위한 6세기 수도사 베네딕투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에서 현대 사회를 서로마 제국의 몰락과 비교한다.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현대는 개인의 자유와 의지를 최우선시하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는 일견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객관적 도덕 기준이 사라진 시대, 과거를 거부하는 시대, 자기를 형성한 종교와 문화 등의 구속력 있는 이야기를 거부하는 시대, 사회와 사회적 의무로부터 자기를 분리하는 시대다.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시대를 바라보며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성 베네딕투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6세기에 활동한 성 베네딕투스는 원래 누르시아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를 위해 로마로 향했지만, 당시 쇠락하는 로마의 사회상을 본 뒤 도시에서 물러나 은수자로서 기도하고 관조하는 삶을 살며, 기독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수도원의 유산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로드 드레허의 『베네딕트 옵션』은 현대를 위한 베네딕투스가 필요하다는 매킨타이어의 제안을 적용하려는 시도다.
초월과 일상을 연결하는 오래된 미래, 기독교 전통의 회복
드레허는 유명론,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 혁명, 계몽주의, 산업 혁명, 세계대전, 성 혁명 등 중세 후기 이후 서구 사회 속에서 나타난 굵직한 역사의 흐름을 짚어 나가며 근대성 분석을 시도하는데, 특별히 근대성이 낳은 원자화, 파편화, 불신앙에 주목한다. 그리고 “성 베네딕투스의 규칙”과 오늘날 이를 계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근대성의 특징과는 대비되는 기독교 전통의 가치와 실천을 하나씩 드러낸다. 질서와 기도에는 근대가 잃어버린 초월성, 즉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드러나 있으며, 초월성의 회복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노동에는 새로운 의미가, 삶에는 안정성이 부여된다. 하나님께 뿌리 내린 개인들은 공동체로 한데 모여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세상을 환대할 힘을 갖춘다. “규칙”을 따르는 삶은 엄격해 보여도 이 균형 잡힌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진리, 아름다움, 선함을 재발견한다.
적극적으로 물러나며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는 삶, 베네딕트 옵션
『베네딕트 옵션』은 단순히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6세기 수도사처럼 수도원에 들어가자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고대부터 이어져 오는 지혜, 바른 정체성 형성을 위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세속화...된 현대 사회 속에서 지혜롭게 사는 전략을 구사하자는 것이다. 세속의 가치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기 위한 모판을 구성하자는 것이다. 그 길은 주류 사회에 속하려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물러나 수도원 전통에 담긴 기독교 영성을 구현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자본, 성, 기술의 지배 아래 표류하며 자아를 극대화하는 데서 물러나는 삶, 지역에서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가족과 이웃을 돌보고 손님을 환대하며 교육과 노동에 종사하는 삶, 단순하고 밋밋해 보여도 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드러내는 삶. 베네딕트 옵션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퍼온 글]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The Benedict Option: A Strategy for Christians in a Post-Christian Nation”은 제목과 소제목만으로도 그 내용과 저술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후기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전략이 베네딕트 옵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후기 기독교 사회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 되었는지 그 사상적 역사를 분석하고 서술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이후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중세 수도원 운동을 일으킨 누르시아(Nursia) 출신의 수도사 베네딕트(Benedict)가 설립한 베네딕트 수도원과 수도규칙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트 옵션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과 실천들을 서술하고 있다.
1. 후기 기독교 사회의 근원
첫째로 드레허는 후기 기독교 사회의 출현을 단순히 현대에 단기간동안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중세의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의 논의를 설명하면서 실재론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찾았다면 유명론은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가치와 의미의 체계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비판한다. 유명론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이름을 부여할 때, 인간도 자연과 같은 하나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연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사실이다. 신의 유일한 대리자였던 교황만 아니라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위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는 만인제사장적 의식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유명론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유명론은 성경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권위 있는 성경 해석을 약화 시켰다는 점에서 종교개혁 이후의 교파의 분열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유명론은 이후에 여러 분야로 전파되어 신의 간섭 없이도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의 가능성을 열었고, 이 결과 기독교인 학자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만유인력과 고전 역학의 토대를 놓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시계를 만들고 눈이 멀어서 더 이상 간섭할 수 없는 눈먼 시계 공처럼 세상을 창조하시고 더 이상 간섭하시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오직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자연스럽게 계몽주의를 탄생시켰고, 기적과 신비로부터 인간을 계몽하여 과학으로 이끄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신이 간섭하지 않는 세상에서 신이 없는 세상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둘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삶의 양식을 생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중심인 사회에서 성경은 신의 초자연적인 계시일 수 없다. 성경은 단순히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초자연에 대한 묵상, 혹은 가능한 상상에 불과했다. 이러한 이유로 서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었던 성경적 세계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람과 환경,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1960대 일어난 성 혁명은 기독교적 가치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가족관과 남녀의 성에 대한 이해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드레허는 미국사회의 낙태와 동성결혼의 합법화의 진행이 이러한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낙태와 동성결혼이 서구 기독교의 몰락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2. 베네딕트 옵션의 출발점
둘째로 드레허는 이러한 서구 기독교의 몰락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ursia) 출신의 수도사, 베네딕트(Benedict)에 주목한다. 베네딕트는 서로마의 몰락과 함께 정치, 경제, 종교, 성적인 타락의 길을 가던 당시 기독교와 로마 사회를 수도원 운동을 통해 정화하고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누르시아의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14세에 동굴로 들어가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고 나와 자신의 고향 누르시아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후에 자신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수도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생활하였다. 그는 청빈, 정결, 복종의 3원리를 바탕으로 베네딕트 수도규칙을 만들었다. 수도규칙에는 기도와 예배, 성경 읽기, 노동 등을 매일 규칙적으로 행할 수 있는 원리들과 나그네 환대와 징계, 구제와 관련된 규칙들이 제시되어 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당시에 세상의 흐름과는 정 반대의 생활 방식을 추구함으로서 어찌 보면 외딴 섬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을 지녔지만, 그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그 이유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의도적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세상과의 단절을 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역행하는 세상을 향해서 창조의 원리에 따른 옳은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베네딕트는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자연스럽게 추구한 것이지 의도적인 단절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베네딕트 수도원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병원을 운영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농사 짖는 법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감당하였다. 자신의 제산과 권리를 포기하고 이를 기꺼이 형제와 자매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이러한 선한 실천의 원천은 이들이 매일 행하는 기도와 성경읽기 예배와 노동의 규형 잡힌 삶의 습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베네딕트의 가능성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은 드레허가 아니었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학자인 알리스데이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가 바로 그 최초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다시 한 번 부흥하게 만든 그의 대표적인 저작 “After Virtue”는 1981년 출간되자마자 각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도 이 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당시 무신론자였던 매킨타이어는 이 책의 결론에서 가장 이상적인 덕 윤리 공동체의 예로서 베네딕트 수도원과 수도규칙을 제안하였다. 이후에 2007년에 나온 개정 3판의 서문에서 그가 과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아퀴나스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록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사상을 더 확장하고 깊게 발전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후에 같이 공부한 외국인들에게 들은바로는 그가 이 책을 쓰고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도미니크 수도사로 알려진 아퀴나스의 첫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드레허의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시종일관 매킨타이어의 아이디어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외적인 수도생활이나 수도규칙을 그대로 답습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이들이 형성했던 성경적 덕(virtue)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는 복음주의를 비롯한 보수적인 기독교는 회심과 그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회심 이후의 삶을 회심과 연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였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비판한 사람이 소저너스의 창시자인 짐 월리스이다. 그는 그의 책 “회심”을 통해서 회심은 단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며, 삶의 태도가 완전히 변화하는 것이 회심의 완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드레허나 매킨타이어 식의 바꾸어 설명하면 회심이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이와 상응하는 선한 습관을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서 불변하는 성품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을 411년, 78세의 제롬(Jerome)이 젊은 수도사 로스티쿠스(Rosticus)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철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주입함으로서 낡은 것을 떨쳐버립니다. 이들은 다른 쪽을 망치질하는 것을 통해 반대 쪽 못을 빼는 것입니다.… 우리도 반대 되는 덕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움으로서 우리의 잘못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시편 저자는 “악을 떠나 선을 행하고,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쫓으라”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악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악을 떠나면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선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을 찾고 선이 우리 앞으로 날아갈 때,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서 그것을 쫓아야 합니다. 선함은 모든 분별력(understanding) 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임재(habitation)입니다.”
제롬의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덕이란 이해의 대상이 아라 실천의 대상이다. 매킨타이어는 “History of Ethics”에서 윤리와 도덕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증명하려고 시도했던 과거 계몽주의자들의 시도가 결국 정서주의(emotivism)에 머물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정서주의란 개인의 감정이나 환경에 따라 도덕적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매킨타이어의 덕 윤리는 지역적, 언어적, 종교적 공동체 단위로 이들이 경험한 문화와 정서에 따라서 도덕적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근본원리는 도덕, 윤리란 이해와 증명,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덕을 통해 습득된다는 것이다. 이를 기독교적으로 설명하면 초자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도덕과 윤리이며, 이는 인간이 순종하고 따라야할 것이지 이해한 후에 따를지 말지를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이란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따라야할 것이기에 어떤 반론 없이 자발적으로 따르는 것이며, 이 과정 가운데 성령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신자의 마음의 비석(심비)에 성품으로 확고하게 새겨지게 된다. 이것이 성화이다. 드레허는 이 오래된 기독교의 원리를 베네딕트 수도원과 수도규칙을 통해 발견하였으며, 위기에 처한 후기 기독교 사회의 교회에 이것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3. 베네딕트 옵션의 영역
셋째로 드레허는 베네딕트 옵션을 신자들의 각 영역에 적용하도록 격려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한다. 먼저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함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근대의 중요한 특성들 중의 하나로 액체성을 꼽는다. 이는 현대인들의 거주지, 사상, 기술 등의 유동성, 다변화성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한 지역에 머물면서 지속적인 관계와 규칙적인 만남을 통해서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도태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준다. 이러한 이유로 세상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고 이를 따라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어떤 선한 습관을 형성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한다. 특히 성경적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 외에도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 더욱이 또래 공동체가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에다. 이러한 이유로 드레허는 신자들이 경제적인 손해나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교회 공동체의 주변에 모여 살도록 격려한다.
드레허는 특별히 교육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는 공교육이나 사교육에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자녀를 빼내어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이는 다소 급진적일지 모르지만 드레허가 주장하는 교육이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고전적 교육의 부활을 의미한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고대 그리스-로마식의 교육을 기독교화한 중세식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드레허는 현대의 교육이 사람을 기능적인 존재로 만드는 도구화 된 교육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적인 가치를 함양하고 선한 덕을 구축하는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드레허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현대의 교육 환경은 각자의 옳은 것을 인정하고 학교가 이를 어떤 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게 선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현대 학교에서 선생은 도덕적 인도자가 아니라 기능 전수자 혹은 정보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육에서 선생은 하나님을 향하여 학생들을 인도하는 순례자이자 수도원의 수도원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학교 시스템에 아이들을 전적으로 맡겨 놓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충이며,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이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동일한 악하고 무익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면 드레허의 주장처럼 홈 스쿨이나 또 다른 기독교 학교를 구상해야 할까? 그리고 그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더하여 교회는 드레허가 주장하는 그런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있는 영적이며, 현실적인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녹녹하지 않다. 이런 후기 기독교 사회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심리적 안정과 물질적 복을 기독교의 핵심인 것처럼 가르쳐 온 교회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의 남은 자,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기독교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개개인들이 일어나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드레허가 마지막으로 베네딕트 옵션을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한 두 가지 영역은 후기 기독교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현상인 성(동성애)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스마트폰 기술이다. 이 이유도 동일하다. 성 혁명과 동성애는 전통적인 공동체인 가정을 파괴함으로서 기독교회가 구축한 윤리적 체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스마트폰 기술은 공동체 안의 상호 대화를 단절시키고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있다.
4. 우리의 선택
이상에서와 같이 드레허의 베네딕트 옵션은 기독교적 가치와 성경적 원리를 전 방향에서 지키고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고자하는 몸부림이다. 이전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인 정당 참여와 투표를 통해 입법과 정치권력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하다.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승리감은 잠시일 뿐, 오히려 권력에 빌붙은 기독교라는 오해와 비방만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일을 계속해야 한다. 다만 그 일을 할 사람들이 반드시 다수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소수라 할지라도 베네딕트 옵션에 헌신된 예수님의 참 제자라면, 그리하여 어떠한 타협도 없이 성경적 가치를 위해 헌신할 사람이 있고 이를 견고하게 지지하는 기독교인 공동체가 있다면, 그가 할 사람과 세상을 낚는 어부로서 역할은 가희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상이 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더 머물고 함께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향하여 매일 우리를 이끌고, 우리의 자녀와 동료 기독교인들의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드레허의 베네딕트 옵션은 어쩌면 한국 교회에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배척받을지 모른다. 아니면 다른 신학이라고 무시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아직도 자신이 물에 있는 것처럼 파닥거리는 상태에 있다면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때, 베네딕트 옵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노아의 방주일 것이다. 과연 우리의 선택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