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
한설
博川 최정순
한설 무렵
평북 박천 봉화리 마을
사나흘 굶긴 매 방울 달아
꿩 사냥 나서면
날 선 동천冬天 선벽鮮碧에
은 이불 덮고 누운 산하
매와 날리는 휘파람
산 허리춤 조카들 그물망 포위
매 꿩 포식 전 방울 소리 듣고
구럭 무게 커져간다.
꿩 깃털 넣어 푹신한 베개 만들고
발갯깃 먹물 뚝뚝 수묵 담채화 치고
꿩 꽁지 잉크 묻혀 쓰던 일기 덮으면
가마솥 꿩뼈 우려낸 국물
김치 꿩고기 다져 넣은
입 안 가득 채우는 주먹 꿩 만두
고향 설 풍경
아버지 이제, 함께 하겠지요.
참새
博川 최정순
함박눈 밤새 소리 죽여 소복소복
햇살 받아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날 때
참새 무리 먹이 찾아 볏가리 날아들면
재잘재잘 소란스럽다.
Y자 나뭇가지에
넙적 고무줄 새총
살금살금 접근
눈치 챈 참새 도망간다.
참새 날아오는 길목
곡식 뿌려 놓고
삼태기 부지깽이 고여
줄 매어놓고
기다리던 아버지
포르르 날아든 참새들
삼태기에 가뒀다.
구어 먹고 볶아 먹던
아버지처럼 고소한 참새의 맛
지금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다.
겨울 동화
博川 최정순
동지섣달 동장군
칼 뽑아 여기저기 난도질
문고리 쩍쩍 손 달라붙고
가마솥 물 꽝꽝 얼고
외양간 소 코뚜레
고드름 맺히는 겨울
옷 버리면 어머니에 혼날까
장롱 속 잠자는
한여름 바지 꺼내 입어
콧물 묻은 주머니 얼고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산 중턱 비닐포대 타고
눈길 날아오면
아버지 걱정 담은 눈
나무 낫으로 깎아
팽이 썰매 연 윷가락 만들어 주어
동무들과 재미있었는데
아버지 따라 가버린 겨울의 끝자락에
추억만 대롱대롱.
겨울밤
博川 최정순
꼬리 없을 것 같은 긴 겨울밤
자유 찾아 와,
감옥 아닌,
감옥 갇힌 아버지
이북 고향 부모 형제 그리움
잊기에 버리기에 너무 마음 쓰라려
눈물 펑펑 쏟으며 처연한 달빛만 보다
고향에서 먹던
절구에 찹쌀 찧어
손바닥만 한 떡 채반 말렸다가
가마솥 참기름 튀겨 자식들 먹였다
사르륵사르륵, 눈 내리는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