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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으며 땅 지키는 마음으로 살아온 세월 | |||||||||||||||||||||||||||||||||||||||||||||||||||
성실한 성품으로 화합해 온 400년 | |||||||||||||||||||||||||||||||||||||||||||||||||||
2008년 10월 24일 | |||||||||||||||||||||||||||||||||||||||||||||||||||
고양신문 박기범 기자 smile@mygoyang.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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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안씨는 시대를 뛰어넘어 충효를 대표하는 가문이다. 또한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학자 집안이기도 하다. 이런 순흥 안씨가 400여년 전 고양 지역을 찾아와 정착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문봉동 순흥 안씨는 성실함 하나로 수 백년을 지역의 토박이로 성장해 왔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 순흥 안씨 집성촌 문봉동 안촌 마을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충효를 대표하는 가문 2000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안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 17번째로 19만 7천여 가구에 달한다. 순흥 안씨는 고려 신종 때에 흥위위보승별장을 지내고 신호위상호군으로 추봉받은 안자미가 시조다. 안자미는 당시 흥녕(오늘날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살게 되면서 그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순흥을 관으로 삼게 됐다. 순흥 안씨는 조선 시대 6대성(六大姓)으로 꼽히는데 이는 단순히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안향, 안문개, 안축, 안보와 같은 유명한 선비들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안씨 문중은 고려, 조선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도 안창호, 안중근과 같은 인사들을 배출하면서 충효 정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알려져 왔다. 순흥 안씨가 문봉동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4백년 전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순흥 안씨는 피난차 가문의 사람들이 흩어졌는데 그 중에서 안선이 문봉동으로 들어오면서 정착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이야기 중에는 안선이 사리현동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도둑이 들어 집을 불태우자 문봉동으로 이주하면서 그 자손들이 문봉동에서 정착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안선의 묘소는 현재 사리현동에 위치하고 있다.
고양서 채소농사 제일 먼저 시작 순흥 안씨가 사는 문봉동 안촌 마을은 안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수 백년간을 이 일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땅을 지켜왔다. 차손인 안창수씨는 “이 곳은 외지인 소유의 땅도 거의 없을 만큼 순흥 안씨들이 강한 유대를 갖고 모여 살아 왔다. 순흥 안씨는 이 마을의 땅을 팔면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생각하며 묵묵히 농사를 지으며 문봉동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순흥 안씨는 이런 마음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고, 문봉동의 산업 발달은 고양시의 산업 발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벼 농사 위주의 생활을 하던 순흥 안씨는 고양 지역에서 누구보다 먼저 채소 재배를 시작했고 그 작물의 품질도 뛰어나 서울 등 장터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종중회의 안필노 씨는 “서울에서도 문봉리 쌀은 인기가 좋았다. 쌀을 싣고 장터로 가면 내가 문봉사는 것을 알고 상인들이 쌀을 팔라고 붙잡고 놔주지를 않았다”고 말했다. 토양이 좋아서 벼농사가 잘됐고 그 맛도 좋아서 문봉에서 재배된 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이후 문봉동 순흥 안씨들은 채소 재배를 시작하게 된다. 아직 고양 지역에서는 벼 농사가 보편화 돼 있던 시기였다. 쌀이 잘 되는 만큼 채소도 그 품질이 뛰어났다. 집집마다 고추를 재배할 정도로 문봉동의 채소는 쌀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이영찬 고양시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 “과거 이 마을의 채소와 쌀은 유명했다. 특히 고추를 온상을 통해 재배한 것은 아마 이 곳이 처음일 정도로 채소는 고양시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다. 또한 품질도 좋아서 제 값을 잘 받고는 했다"고 설명했다.
며느리들도 인정하는 부지런함 안명노 종중회장은 “논농사, 밭농사도 하고 양계, 소 등 다양한 변화를 거쳐왔다. 한 집 걸러 목장이 있기도 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렇게 인기를 끌던 쌀과 채소들은 불광동 등 서울 시장에 많이 팔렸는데, 불광동 상인들 사이에서는 장터에 파리가 있으면 “문봉에서 묻어온 파리다”라고 말할 정도로 문봉의 채소는 인기였고 서울 장터의 주요 공급처였다. 지금은 식사지구 개발과 함께 마을 곳곳에 공장과 창고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고양 지역의 기반이 농업에서 2차, 3차 산업으로 발전해 가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일이 많은 집안에 시집 온 며느리는 순흥 안씨를 어떻게 생각할까. 김복순 할머니는 18살에 문봉동으로 시집와 올해로 87세다. 김 할머니는 순흥 안씨가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한다.
문봉 서원 영향에 더 높은 교육열 순흥 안씨는 예부터 문성공 안향 선생을 비롯한 많은 학자를 배출한 학자 집안이다. 안문개, 안축, 안보 등 석학(碩學)을 비롯해 18명이 문자시호(文字諡號)를 받았다. 안향은 원나라에서 주자전서를 직접 베껴와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전한 인물이다. 안향은 또 학교를 설립하고 장학제도를 마련하는 등 유학의 중흥을 위해 애썼다. 그는 동방성현 18인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전국의 모든 향교에서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서원인 소수서원에 최초로 배향 되기도 했다. 안축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남긴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경기체가의 대가로 아름다운 시인이기도 하다. 안지는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할 정도로 그 학문이 뛰어났다. 또한 3대에 내려 부원군(府院君)을 지내거나 5대에 내려 대제학을 지내는 등 대표적 학자 집안이다. 문봉동 순흥 안씨 종중도 교장 등 교육계 인사들의 배출이 두드러지고 학구열이 높았다. 문봉동 순흥 안씨 종중 역시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에 대해 순흥 안씨와 지역 사람들은 마을 앞에 있었던 문봉 서원의 영향이라고 믿고 있다. 문봉 서원은 고양시 여러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분을 배향하고 있는 대표적 서원이다. 이들 여덟 분을 고양시에서는 오래 전부터 ‘고양 팔현’으로 모시고 고양의 대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 된 뒤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순흥 안씨는 예부터 마을에 공부하고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며 이 서원이 마을의 자랑이며 마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믿는다. 안명노 종중 회장은 “우리 종중이 학구열이 높았다. 교장, 경찰 공무원 등 유독 공무원 특히 교육 공무원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종인들에 대한 교육 체계화 목표 음력 10월이면 문봉동 순흥 안씨 종인들은 사리현동에 위치하고 있는 입향조 안선의 묘소에서 시향을 지낸다. 이 때는 각 지에 흩어진 종인들 60여명이 모여 함께 한다. 또 음력 7월 15일에는 벌초도 하고 음력 10월 3일에는 장사랑공파 남양주 시향에도 참여하는 등 조상들을 모시는 일에 열심이다. 3년에 한 번씩은 상촌, 안촌, 빙서촌 사람들이 함께 모여 봉화산에서 도당제를 지내기도 한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도당제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잡고, 술을 직접 담그는 등 정성을 쏟는다. 문봉동 순흥 안씨 지손들은 모두 출가하여 외지에서 살고 있고, 60세 이상의 어르신들만이 살아가고 있다. 마을도 예전과는 달리 대형 식당도 생기고 농사보다는 다른 산업의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순흥 안씨 사람들은 다른 마을들이 변화하고 집성촌이 해체되는 것을 보면서 그냥 지금 이대로 고향땅을 지키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고 한다. 다소 불편해도 고향에서 종중 사람들과 함께 정을 나누며 살고 싶은 것이 작은 소망인 것이다. 안명노 종중 회장은 “회장으로서 자손들이 조상들을 잘 섬기고 각 집안들이 화목하길 바란다. 종인들의 집안이 화목하면 자연스럽게 조상도 잘 모시게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종중회에서는 앞으로 종중에 대한 자료를 정비해 젊은 종인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 갈 계획이다. 뿌리와 조상에 대한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젊은 종인들에 대한 교육만이 선조들의 가르침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 종인들의 가문에 대한 이해 높이겠다”
“귀중한 자료들이 많다. 씨족협의회 차원에서 번역을 시도하고 싶다.” 안창수 씨 집에서 고서적을 살펴보던 고양시씨족협의회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안씨는 아버님이 보관해 오시던 책이라며 여러 권의 서적들을 씨족협의회와 고양신문에 공개했다. 이 날 안씨가 공개한 서적들은 주로 종중의 일들과 종인들의 행적에 대한 내용으로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한 그의 아버지가 꼼꼼하게 기록, 보관해 온 것들이다. 이 밖에도 매헌집, 매헌실기의 서적과 소설 작품집 등도 보관돼 있었는데 서적을 구해 친필로 복사한 책들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서적들이었다. 김복순 할머니는 안창수 씨가 책들을 보관해 온 것을 보고는 “잘 보관해 와서 고맙다”라며 그의 노고를 칭찬했다. “아버님은 이런 책들을 나무 상자를 만들어 꼼꼼하게 보관해 오셨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종중 일에 애정을 쏟는지 잘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안창수 씨는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직접 종중에 대해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차손으로서 왜 종중 일에 관심을 갖고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는지 깨달았지만 이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다. “종중의 여러 어르신들이 살아 계실 때 많이 배우고 정리해두려 한다. 내가 이 작업을 안 하고 어르신들마저 돌아가시면 정말 종중에 대한 이해와 선조들을 모시는 일들이 단절될 것 같다. 이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 잘 알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