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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 안지(安止)가 상서(上書)하기를,
“신(臣)이 초야(草野)의 외로운 몸으로서 외람되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길[仕途]에 오른 다음, 4조(朝)를 섬겨 관직(官職)이 성(省)·부(府)의 자리에 이르렀으니, 그 은총(恩寵)과 영광(榮光)이 지극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죄과(罪科)가 있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故鄕)에 돌아갔는데, 장차 거기에서 몸을 마칠까 하였더니, 전하(殿下)께서 즉위(卽位)하시던 초기에 신에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제수(除授)하였다가, 얼마 아니되어 직질(職秩)을 건너 뛰어 검교 찬성(檢校贊成)의 1품 관직에 임명하였습니다.
노신(老臣)은 특별히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 감격이 골수(骨髓)에 맺혀서 기쁘고 황송스럽기가 끝이 없었습니다. 신사년 여름에 우거지(寓居地)에서 올라온 지 겨우 며칠만에 전하(殿下)께서 신을 불러서 보시고 고인(故人)이라고 일컬으시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특별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하시고, 또 어제(御製)의 서한(書翰)을 내려 주었습니다. 천일(天日)이 밝게 되돌아와서, 이어서 내의(內衣)를 내려 주시고, 계양군(桂陽君)에 명(命)하여 그것을 신의 몸에 입혀 주시고 일어나 춤을 추도록 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찬연(粲然)히 크게 웃으시고 인하여 심히 즐거워하다가 날이 저물어 잔치를 파(罷)하였습니다. 이 날의 은총(恩寵)과 영광(榮光)은 전(前)보다 더 빛나며 후(後)에도 없을 터인데, 하물며 꿈속에 천상(天上)에 올랐다가 깨어나 하토(下土)에 있는 듯하여 더욱 감격한 마음을 무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지난 가을에 특별히 신에게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검교 영중추원사(檢校領中樞院事)에 임명하고 10일 이내에 명하여 검교(檢校)의 두 글자를 떼어버리고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으로 고쳐서 제수(除授)하게 하고, 4품의 과록(科祿)을 받도록 하고 아울러 혜양(惠養)의 은혜를 내려 주시니, 그 영광과 은총이 분수에 넘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부끄럽게도 보답(報答)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성산(聖算)이 만수 무강(萬壽無彊)하시기를 축원(祝願)할 뿐이요, 어찌 이런 생각을 버릴 때가 있겠습니까?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날 사람들도 오히려 종남산(終南山)을 생각한 자가 있었는데, 하물며 노신(老臣)은 성상(聖上)의 은혜와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입어서 항상 화산(華山)의 아래에 있으면서 금궐(金闕) 가운데를 출입(出入)하고 천안(天顔)을 가까이에서 받들면서 여러 번 은총의 대우를 받았으니, 어찌 연곡하(輦 下)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정(情)이야 조금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나이가 80세를 넘었고, 또 지난 겨울에 처음으로 바람을 맞아 풍질(風疾)이 발작하여 병세가 나았다가 더하였다가 무상(無常)하더니, 지난 달에 더욱 악화되어 베개에 엎드려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전하(殿下)께서 환궁(還宮)하던 날을 당하여 봉영(奉迎)할 수가 없어서 길 왼쪽에서 창연(愴然)히 취화(翠華)를 바라보고 한갓 스스로 머리를 들고 첨망(瞻望)하였을 뿐입니다. 신의 천식(喘息)도 아침 저녁으로 견디기 어려우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餘生)을 마치기를 원(願)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께서 신의 직책(職責)을 면(免)하게 하여 고향에 돌아가도록 내쫓아 본디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그윽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의 노병(老病)이 날로 위독(危篤)하고 다리와 무릎이 절름거리고 약(弱)하여서 전라도(全羅道)의 본가(本家)까지도 말을 타고서 돌아갈 수가 없을 듯합니다. 사사로이 스스로 통념(痛念)하건대, 노중(路中)에 들것[ 床]을 걸머 메고 갈 사람 약간 명과 초료(草料)·죽반(粥飯)을 지급(支給)하라는 문자(文字)를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주시고, 이어서 복호(復戶)하여 주신다면 다행하겠습니다. 이것이 또 노신(老臣)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전율(戰慄)을 이기지 못하고 부복(府伏)하여 대죄(待罪)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안지가 또 상서(上書)하여 외손(外孫) 등에게 벼슬을 주도록 청(請)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회부하였다. 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안지의 거처(居處)에 연달아 식물(食物)을 보내 주라.” 하였다. 그 때 안지의 나이가 이미 80여 세였다. 처음에 임금이 즉위(卽位)하자, 안지가 와서 뵈었는데, 임금이 옛친구로서 그를 대우하니, 안지가 창(唱)하기를, “살아서 성주(聖主)를 만나니 오히려 늦은 것을 혐의스러워 하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 친구를 서로 만나는 데는 시작과 끝이 없다네.” 하고, 시신(侍臣)들에게 명(命)하여 이를 잇달아 창(唱)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총과 지우(知遇)가 남보다 달라서 몇 년이 안되어 관직이 극품(極品)에 이르렀다. 이 때에 이르러 사직(辭職)하고, 또 진정(陳情)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몇 가지 일을 청(請)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안지의 집이 본래 빈한(貧寒)하여 그가 고향에 돌아갈 적에 행장(行裝)이 몇 바리[냇]의 짐에 차지도 아니하였고 풍모(風貌)가 중인(中人)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썹이 기다랗고 머리가 하얗게 희었다. 광화문(光化門)을 지날 때 들것[ 床]에서 내려서 궁궐(宮闕)을 향하여 배사 (拜謝)하고 통곡(痛哭)하다가 가니,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지가 일찌기 권제(權 )와 더불어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는 데 부실(不實)하여 벼슬이 떨어지고 호남(湖南) 지방을 널리 유람(遊覽)하였는데, 사람들이 혹은 그를 비난하고 비웃었으나 언짢은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시(詩)를 잘 지어 간고(艱苦)한 일을 각박하게 처리하지 않고 여유 있는 태도를 취하고 스스로 고은(皐隱)이라 호(號)하였다.
【원전】 7 집 61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安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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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安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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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號는 皐隱 䏙津人으로 官止領中樞府事 諡號는 文靖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