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渡津) 삼랑진(三浪津)
엣날 삼랑진읍을 하동면으로 부르고 있을무렵 이 곳 삼랑진 나룻터는 김해와 마주보며 수운의 주요한
요충지로서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봅니다. 경부선 삼랑진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이라는 역이
있었다는 것은 경전남부선이 생길 때만 하더라도 수운으로 삼랑나루터를 이용하는 물자가 많았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상측 우단의 작은 강이 밀양읍에서 흘러들어오는 응천강 하류 입니다.
버드나무 뒤로 보이는 작은 교량이 국도 58호가 김해의 생림면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철도공사에서 국도 58호의 철교입니다.
현재 삼랑진역을 출발하여 낙동강역을 거쳐 한림역을거쳐 진영으로 통하는 철교입니다.
뒷기미 나루를 찾아
실비 같은 것이 가끔 떨어지는 날씨다. 나들이에 혹 차질이 생길까봐 거듭 하늘을 본다. 소풍가는 아이마냥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여행은 혼자여도 좋고 함께 할 벗이 있다면 더 더욱 좋지 않을까.
호포, 물금, 원동을 지나면 삼랑진 뒷기미 나루에 도착하게 된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길이다. 낙동강을 끼고 도는 굽은 길 사이로 초록 커튼이 포근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호사에 눈 먼 장님도 번쩍 뜰 거 같은 착각이 인다.
“농익은 감이 제 무게 이기지 못해 철퍼덕 맨땅에 떨어져 산산히 흩어지는 곳, 초로의 적막이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그곳이 물금이다”고 최서림 시인은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물이 금이 된다 해서 물금이라는 말도 있다. 그 말이 맞는지 조그만 시골 마을이 신도시가 되었다.
어느덧 차는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임경대와, 가야진사, 용화사를 지나 원동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내포천을 비롯한 지류들이 합류하는 곳이다. 토곡산의 염수봉과 향로봉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의 배경이 된 화제리는 요산의 처가(妻家)이기도 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에 젖다보니 궂은 날씨는 5월의 싱그러운 햇살에 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곳 지나는 곳마다 푸른 기색이 눈을 적시는 커다란 산수화다.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푸르른 나뭇잎에 물방울이 일렁인다. 화가 김창렬이 숱하게 그렸던 살아있는 그 물방울이다. 어릴 적 보았던 커다란 토란잎도 그랬다. 아침 일찍 눈을 뜨거나 비 오는 날이면 작은 이슬방울을 토란잎이 앙징맞은 입술에 구슬처럼 달고 있었다.
눈 호사를 누리며 이런저런 망상에 빠진 사이 삼랑진 하양마을이다. 낙동강 아래쪽 강폭이 가장 넓다. 바다와 같다 해서 하양이라던가. 봉주사 아래 그림 같은 하얀 집이 보였다. 우리를 초대 해준 박흥일 선생 댁이다. 너무 붙어 다녀서 얄미움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부부가 거처하는 곳이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당에는 봄꽃들이 안주인의 미소를 닮아 벙긋 거린다. 뒤란 매화가지는 찢어질듯이 많은 열매를 품었다. 각종 채소들의 푸른빛에서 바지런한 주인의 향기가 묻어난다.
꽃 잔디가 곱게 깔린 마당에 시와 수필을 그렸다. 오월의 햇살과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현기증이 났다. 얼굴들이 복사꽃처럼 화사하다. 곡차 한 잔 하지 않아도 행복에 취한 모습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오고간다.
낙동강 본류에 밀양강이 합류 한다는 뒷기미 나루로 향했다. 뒷기미란 뒤쪽 개울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오우진 나루터로 불리기도 했다. 좁은 길을 지나가니 나루터 횟집이 나온다. 주위 경관을 보느라 눈이 바쁘다. 예전에는 낙동강 철교아래 강가에 선창이 있었다. 그 안쪽에는 객주 집과 여관. 난전 등이 즐비하여 시장을 이루었던 곳이다. 속칭 지점거리 각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강 건너 보이는 곳이 김해 생림 이다. 삼랑진은 세 갈래의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크게 일렁인다는 뜻이다. 수운의 요충지로 소금배도 자주 쉬어 갔다는 이곳 나루터는 요산 김정한의 “뒷기미 나루터”란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강물에 반사된 저녁 햇빛이 가끔 차안에까지 비쳐왔다. 강 건너 먼 산 위에서는 이런 것과는 관계없이 해님이 뉘엿뉘엿 졸고만 있었다.” 고 표현했던 그 강물에 물막이 공사가 한창이다. 500km가 넘는 긴 강줄기를 높은 크레인이 괴물처럼 막았다.
자연은 그대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뒷산 소나무에 목 맨 박 노인은 “커다랗게 열린 채 뒤집어진 눈이 나루터 쪽을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소설속의 인물 박 노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박 노인이 죽은 날도 물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검푸르기만 했다더니 오늘의 물빛도 변함이 없다.
삼랑진과 부산에 이르는 이 길은 요산의 문학적 공간이 되었다. 모래톱 이야기, 산서동 뒷이야기, 뒷기미 나루, 수라도의 무대가 이곳에서 펼쳐졌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즈음 웅어회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웅어는 바다에서 자라 산란기 때 강으로 거슬러 온다. 그 때가 지금이라 했다. 처음 맛 본 웅어는 부드럽게 감치는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혀끝으로 오는 바다와 강이 온 몸을 적신다.
날이 기울자 문우들은 발길이 바쁘다. 차 시동 소리가 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일몰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뜰 수 밖에. 언제든 다시 뒷기미나루를 찾아야겠다. 가보고 싶었던 봉주사와 오우정에도 다시 걸음을 해야겠다.
한 자리에 모여 수필을 낭독하고 시를 낭독한 뒷기미나루는 요산선생의 정신과 함께 문학의 마당으로 더욱 아련하게 남을 것이다.
고속국도 55호선이 삼랑진 IC를 지나 김해로 가는 교량입니다.
삼랑진(三浪津)
삼랑진읍 삼랑리 낙동강 철교가 있는 자리이다. 고려시대 이전부터의 나루터로서 김해와 대안(對岸)하여 경상좌도(낙동강을 경계로 좌우 양도로 나누었다).의 대로와 접속하는 수운의 의 요충지였다. [밀주구지]에 “三浪津凝川入洛處古有三浪樓高麗僧圓鑑詩“라는 가사가 있다. 응천. 낙동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옛날부터 ‘살랑루(三浪樓’가 있어 형승(形勝=지세나 경치가 뛰어남)을 자랑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 원감(圓鑑)의 [삼랑루시]에는 ”徬州沙店拂螺(방주사점불람) 遂浪風船舞鷁(수락풍선무익)“라는 귀절이 있는바 '나룻가에 저점(邸店=조선 후기에, 연안 포구에서 상인들의 숙박, 화물의 보관, 위탁 판매, 운송 따위를 맡아보던 상업 시설. 비슷한 말 : 저가2(邸家)·저점(邸店). )이 달팽이 껍데기처럼 늘어서 있고, 바람개비 춤추는 배는 물결을 해쳐간다” 하였다. 당시의 삼랑진은 상가 활동과 수운의 요지로서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었음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라 하겠다. 더구나 조선조후기에는 삼랑수조창(三浪後漕倉= 세곡(稅穀)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곳집. 조선 시대에는 경창(京倉), 가흥창(可興倉) 등 전국에 열 곳이 있었다.)의 설치로 영남지방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나루는 조창과 함께 낙동강철교의 부설로 폐쇄되였다.
삼강사비(三江祠碑)
경상남도 문화제 제 304호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이 비는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이어었던 여흥 민씨 5 형제의 두터웠던 효성과 우애.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운것이다. 민씨 5 형제는 육계 구형, 경제 구소, 우우정 구연, 무영당 구주, 삼매당 구서를 말한다.
형제들은 1510년(중종 5) 옛 삼랑루가 있던 이곳에 정자를 짓고 함께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기며 두터운 우애와 고결한 행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형제들의 효성과 우애가 알려져 조정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천거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그 정신을 기려 정자를 오우정이라 이름하고 그 정자를 기리는 시를 지어 후세에 남기도록 하였다.
그후 1563년(명종 18)에 이 지역의 선비들은 정자내에 오우사를란 사당(祠堂)을 지어 봄 . 가을로 제례를 지냈으며 따로 비석을 세워 형제들의 효행과 우애를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정자와 사당 및 비석 뿐만 아니라 형제들의 남긴 문장과 저서들도 대부분 불타버려 그들의 삶을 되새길만한 자료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가 1702년(숙종, 28)애 다시 서원을 짓고 1775년(영조51)에는 현재의 비석(삼강사비)을 세움으로써 형제들의 효행과 우애를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은 貞庵 閔遇洙가 짓고 글씨는 遂庵 金尙夏가 썼다.
"효도와 우애가 하늘에 이르렀다."
오우선생의 약전 입니다.
삼강사비각 입니다.
오우정 입니다.
압구정이라 편액한 서원입니다.
우우정의 전경입니다.
1766년(영조42, 병술)에 건립된 이비는 삼랑진 조창을 창건한 밀양부사 김인대의 유애비입니다
삼랑진조창 영세불망비 등의 비군(碑群)은 그 역사의 의미가 큰 것으로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그 비석의 역대 관원들의 비석을 간추려 보겠습니다.
1. 1812년에 세워진 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府使洪候履簡永世不忘碑)
2. 1843년에 건립된 관찰사조상국인영조운정영세불망비(觀察使趙相國寅永漕運正永世不忘碑)
3. 1842년 까지 밀양부사로 재임한 차사원겸도호부사조공운표영세불망비(差使員兼都護府使趙公雲杓永世不忘碑)
4. 1857년 세워진 부사이후정재선정비(府使李候定在善政碑)
5. 1872년에 세워진 부사이후철연영세불망비(府使李候喆淵永世不忘碑) 2좌
6. 1872년에 세워진 순찰김공세호영세불망비(巡察金公世鎬永世不忘碑) 등이 세워져 있으나 그 관리상태가 극히 불량하여 이 중 철비 2좌는 구멍이 생겼으며 인근주민들의 농작물 및 잡초에 파묻혀 있습니다.
또 제포만호 대신 밀양부사가 차사원(差使員)을 겸하여 직접 조세를 영납했다는 사실도 영남 조운(漕運)의 이권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시사(示唆)를 주고 있다. 실지로 [밀양부선생안]에는 삼랑후조창(三浪後漕倉) 설치 이후 밀양부사로서 그 이권에 연루되거나 조선의 사고로 파직된 사람이 3명,정배된 사람이 2명, 채포 구금된 사람이 1명, 죄천된 사람이 2명 등 모두 8명의 수령이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랑진 조창의 실질적인 존속과 성행은 1894년(고종 31)갑오개혁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그 이후는 살랑진 나루터로서 면모를 바꾸었다가 낙동강철교의 준공과 함께 나루터도 폐쇄되었다.
☞ 만호(萬戶) ~ 무관직의 하나, 수군(水軍)에 오래 남아 있었으며 대개 정 4품관이 임명되었다.
차사(差使) ~ 중요한 임무를 주어서 파견하는 임시직.
三江書院(五友亭)
삼강서원(三江書院)은 삼랑리 낙동강가에 있는 민씨(閔氏) 오우정 안에 있는 서원으로 연산(燕山). 중종(中宗) 때 학자인 욱제(勗齊) 민구령(閔九齡), 경제(敬齊) 민구소(閔九韶), 우우정(友于亭 민구연(閔九淵), 무명당(無名堂) 민구주(閔九疇), 삼매당(三梅堂) 민구서(閔九敍) 등 5 형제를 향사하고 있다.
1510(中宗, 5 庚午) 경에 엣 삼랑루가 있던 자리에 욱제 민구령이 정자를 지어 네 아우와 함께 우애를 극진히 하고 학문을 닦으며 청고(淸高)한 행의(行義)로서 이름을 남겼는데, 1547년 (명종 2,정미)에 당시의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임호신(任虎臣)이 그 명성을 듣고 이곳을 찾아와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정에 벼슬을 천거하는 한편 오우정(五友亭)이란 현판을 써서 걸었다.
그 뒤 1563년(명종18, 癸亥)에 이곳 향중의 선비들이 민씨 5선생의 우애와 덕행을 추모하고 정자 안에 오우사를 지어 제향(祭亨)하였으며 경내에 따로 기사비(記事碑)를 세웠다.
그후 오우사는 삼강사로 바뀌었고 다시 삼강서원으로 승격하여 조두(俎豆=제기의 하나)의 위의를 더욱 갖추었다.
정자와 사당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으나 그 뒤 자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고 이후 수 백년 동안 여러 차례 흥폐를 거듭해오다가 1868년(고종 5, 무진) 조령에 의하여 서원이 훼철되었다.
1897년(고종 34, 정유)에 후손인 민영지(閔泳智). 민엉하(閔泳夏) 등이 첨종(僉宗) 의 의논을 주도하여 사당이 있던 자리에 큰 집을 새로 짓고 오우정의 현판을 걸어 보존하였다.
1979년(기미)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동으로 후손들이 협력하여 정자의 규모를 확충 하고 사당을 다시 지어 향중 유림들의 공의로서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고 향사림(鄕士林)의 주관으로 서원 향사를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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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후조창(三浪後漕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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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향토청년회는 해마다 삼랑후조창(三浪後漕倉)유지 비석군 주변을 정비사업해
지역문화재를 가꾸고 환경을 정비하는 애향심을 보여주고 있다.
삼랑후조창유지 비석군은 경상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393호이다. 비석군은 삼랑진읍 삼랑리 612번지에 위치하며 7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주위에 손박장군사당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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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에는 통장골이라는 지명이있는데 여기서 통장은 통창과 조창이 있었던곳이다.
통창은 삼도수군의 짠밥으로 쓰일 곡식을 저장하는곳이었고 조창은 각지역(양산,김해,밀양인근)에서
걷어들인 정부세곡을 보관하던곳이다. 예부터 수로가 발달한 낙동은 요즘말로 물류기지였던 모양이다.
조창유지비석들은 통창과 조창을 관리하던 오야붕을 세곡을 싫어나르던 선주들이 업적을 기려 세운비석들이다.
그 외 만어사,여여정사,부은암, 작원관, 5개의 낙동대교, 삼강서원(오우정) 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