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무의 동계 비로봉 스키 단독등반에 부쳐
조장빈(근대등반사팀)
그날 폭설이 내린 금강산 비로봉을 향해 세 파티의 원정대가 등반을 하고 있었다. 불과 2년 전에 첫 동계 원정등반이 있었고 직전 시즌인 1931년 1월 1일 외금강코스로 임무, 이이야마의 비로봉 초등에 연이어 당일 시모이데(下出繁雄), 데라시(寺師壽一)와 함께 동반 제2등이 있었다.
1931~32년 시즌인 연말, 연초에 세 팀의 등반대가 다시 비로봉을 향했다. 30일경 눈이 쌓인다는 소식을 들은 임무는 늦게 철원으로 내려가 적설량을 확인한 후 31일 그곳을 출발하여 당일 새벽 3시에 내금강역에 도착하였다. 이이야마와 이이누마(飯沼貢)가 12월 28일 오후 10시 경성역을 먼저 출발하였고 산정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당시 스키‧산악계의 유력인사인 경성제대의 나카무라(中村兩造)와 동양척식의 시모이데(下出繁雄), 센바(仙波泰) 3명이 1일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오후 4시 40분에 내금강역에 도착했다.
임무는 ‘자일의 정’은 영원할 것으로 얘기하면서도 “참된 등반은, 단지 혼자서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하여 그를 실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이야마는 이번 세 번째 동계등반을 “1929년 말에 내금강에서의 산행 시도가 꺾인 때가 최악의 해였고 1930년 11월 및 12월 말일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외금강에서 산행하였기에 이번 일정을 수립”하였다며 클라이머로서의 담담한 목적을 밝혔고 시모이데 또한 “정상에 등정 할 때를 두려워하며 전율하면서도...밝은 태양아래에 혜택받은 스키잉을 그리면서”라고 전 시즌 동반 등정을 회상하며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초기 금강산 비로봉 동계등반 기록
| 연도 | 내용 | 대원 |
1 | 1929~30 | (구)조선산악회의 첫 비로봉 동계 원정등반(내금강), 폭설로 실패 | 임무, 이이야마, 모리타, 이와나카, 미야카와 |
2 | 1930~31 | 1931년 1월 1일. 외금강코스로 임무와 이이야마의 초등에 이어 내금강 코스 대원과 랑데뷰 등반(제2등) | 외금강코스: 임무, 이이야마 내금강코스: 시모이데, 데라시 |
3 | 1931. 1월 하순경 | 임무, 이이야마가 내금강 코스로, 시모이데가 외금강 단독 등반 계획 | 임무, 이이야마, 시모이데 |
4 | 1931~32 | 외금강코스로 올라 폭설로 비박 후 2차 시도에 등정(제3등) | 이이야마, 이이누마 |
5 | 1931~32 | 임무 단독등반 | 임무 |
6 | 1932. 1 | 내금강코스로 등반 중 폭설로 하산하는 임무를 만나 같이 하산 | 센바, 시모이데, 나카무라 |
7 | 1932~33 | 구성동계곡을 올라 외금강으로 하산 | 이이야마 외 |
8 | 1932~33 | 외금강코스로 올라 이이야마팀을 만나 외금강으로 하산 | 이즈미, 하라, 사카이 |
*No.3은 조선스키구락부의 온정리 스키코스 적설량 조사 목적 등반으로 실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고 No.8 등반 대원에 대해 이즈미는 조선철도국 이이야마팀으로 김정태는 이이야마와 이이누마로 기록하였다.
임무는 눈사태에 휩쓸리면서도 등반을 이어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무모했다”고 겸손을 표한 그는 재등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이듬해 3월 삼방산 스키등반에서의 부상으로 산을 떠났다.
“6시 40분 사천교 오두막을 출발했습니다. 계곡이 깊기 때문에 쌓인 눈은 5척 남짓이나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 눈사태는 다리를 건너 골짜기를 건너려고 할 때 바람이 불며 나무 위의 눈이 떨어져 그대로 다리 아래로 추락했지만 다행이도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스키를 타고서 등반에 실패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고 “이번에야말로...”라고 생각하며 (내금강역에서) 마하연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비로봉 아랫쪽에 닿았을 때까지 2시간 10분 정도소요 되었고 비로봉을 쳐다보니 워낙 안개가 짙고 눈은 펑펑 쏟아져 내렸습니다. 조금 오르니 큰 눈사태로 눈보라가 휘몰아쳐 아래로 칠팔간(間)을 떠내려갔습니다. 륙색을 벗으려고 했지만 아무리해도 벗을 수가 없었고 마치 구름 속을 헤엄친 듯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고생했습니다....몇 개의 크고 작은 눈사태가 일어나 쏟아지는 눈으로 위험했습니다. 그리고 서툴렀습니다. 온돌 안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고 생각해보니 순간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대로는 도저히 비로봉을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이야마도 쉽지 않았다. 여름철이면 20분만에 오르는 비사문 하단의 120~130m의 급경사를 중간까지 오르는데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지치고 늦은 시간이라 용마석산장을 찾다가 결국 곁에 두고 비박을 하는 사투 끝에도 두 번째 만에 등정을 하였다.
“여기보다 더 앞쪽은 약 60-70도 정도의 급경사이면서 양쪽 절벽으로 인해 V자 형태의 계곡 바닥인데 여름철에 지나다녔던 철계단과 난간은 새로 불어닥친 눈 때문에 모두 밑에 깊숙이 묻혀 발을 디딜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부득이 배낭을 내리고 오른쪽 암장에 매달린 뒤, 앞쪽의 이이누마(飯沼)군의 허리에 자일을 묶게하고 나는 발판을 굳혀서 몸을 확보했다. 홀드가 적은 면이었지만 차갑게 깎인 암장을 별다른 주저함도 없이 약 15미 정도 매달려 올라가 안전한 곳에 도착, 배낭과 스키를 끌어 올리게 한 뒤 나도 올라갔다.”
이이야마와 정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모이데 파티는 5년만의 폭설이라며 등반을 말리는 지인 우토(宇土)의 집에 머물다 다음날 등반에 나섰으나 후퇴하면서 임무를 만나 온정리로 돌아왔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3시 사고를 걱정했던 이이야마와 이이누마가 등정을 마치고 온정리에 도착하면서 세 파티의 1931~32 동계시즌 등반은 끝이 났다.
“표훈사에 도착한 것은 정오경이였다. 여기서 가벼운 식사를 끝내고 하도(夏道)를 따라, 길게 스키 자국을 남기며 나아갔다. 긴 스키를 좁은 계곡 속에서 운반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든 일로 특히나 팔담에 이르러서는 눈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대단히 괴로웠다. 보덕암 근처 전방으로부터 “야호”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이이야마군 일행은 아닌가하고 다가가니 임군이 스키를 등지고 기는 듯이 해서 내려왔다. 임군은 단독으로 비로봉을 넘기를 시도하였으나 폭설 때문에 중도에서 되돌아 왔던 참이었고 여기서부터는 우리들과 함께 마하연까지 재차 돌아가기로 했다. 여러가지 상상을 해보았지만 오늘의 상태로는 3척이나 가까운 신설(新雪)을 밟고 비로봉 등행은 불가능하다.
짧은 겨울날은 곧바로 어두워져 인부를 돌려보내고 외금강과 연락을 취하는 것도 할 수 없을 지도 몰라 단지 만일의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빌면서 암흑의 하늘에서 불어오는 폭풍우를 걱정하면서 잠시 졸았다. 웬지 모르게 불안에 찬 하룻밤이였다.”
우리나라의 산악스키는 1929년 임무가 비로봉 첫 동계원정의 실패를 스키등반으로 극복하고자 1930년 삼방스키장에서 스키를 배운 것이 그 출발이다. 그해 연말 다시 등반에 나서 초등을 하였고 이후 당시 등산·스키계의 유일한 단체였던 조선스키클럽의 간사로 금강산의 강설 상태를 조사하는 등 비로봉 스키등반에 열정을 보였다.
1931~32년에는 비로봉 단독 스키등반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후 신문사 인터뷰에서 “장안사 부근은 2척, 마하연 부근은 4척이나 비로봉은 1장 8척으로 설붕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위급한 비상상황이었다. 심설로 스키턴이 곤란하여 내년에 4척의 스키로 인부를 써서 짐을 싸고 캠핑을 준비하면 금강산횡단도 가능하다”며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의 등반은 비로봉 스키코스의 개발에 영향을 미처 1934년 철도국의 이이야마 등에 의해 2개의 스키 코스로 개발되었다. 아마추어용으로 내금강에서 비로봉을 올라 비사문 구룡연을 거쳐 온정리에 이르는 코스와 상급자용으로 비로봉에서 구성동, 온정령을 경유하여 온정리로 내리는 코스로 모두 마하연에서 스키를 타고 표식을 따라 도중에 구미산장에서 1박한 후에 당일 온정리에 내려 2박을 하는 코스다. 1930년대 중반 이후 “銀領行”의 비로봉 스키등반에는 임무의 앞 선 비로봉 스키등반의 노력이 그 출발점이었다.
금강산 비로봉 스키종주 코스도(1937)
임무의 동계 단독등반 자취가 남아있는 “銀嶺行” 비로봉 산악스키 코스다.
임무가 1933년 초 삼방산 스키등반으로 산을 떠나기까지 그의 적설기 금강산 비로봉 등반은 북한산 인수봉 초등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클라이머들은 전통적인 알피니즘에 충실하여 적설기 고산 원정등반에 의미를 두고 비로봉에 이어 눈 덮인 관모봉 일대의 고산을 ‘조선의 알프스’라 부르며 최고의 등반 대상지로서 여겼다. 경성은 물론 히말라야를 목표로 한 일본 학교 산악부의 원정 동계등반 성행하였고 이는 우리나라 근대등반의 여명기를 마감하는 최고, 최난의 등반으로 회자되는 적설기 마천령종주 백두산 등반으로 이어졌다.
인수봉 등반이 소수의 클라이머들에게 알려졌다면 비로봉 적설기 원정등반은 첫 원정부터 임무의 단독등반에 이르기까지 등반기사가 일간지에 게재되어, 임무의 존재와 함께 ‘알피니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제고되었다. 임무와 아처의 1929년 10월경 북한산 인수봉 초등과 1931년 1월 1일 그와 이이야마의 비로봉 동계 초등은 이 땅에 ‘알피니즘’의 신기원으로서 기억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그는 짧은 스키 경력에도 불구하고 1930년 설립된 조선스키구락부의 이사(1931)를 역임하고 금강산 온정리 스키장 개발에 초석을 놓았으며, 스키계 유력인사가 참여한 京城日報 스키간담회(1932)에 초정인사로 참여하는 등 당시 일인들이 주도하는 스키‧산악계에서 ‘조선인’임에도 무시할 수 없었던 그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그는 우리나라 산악스키의 원류이기도 하며 이는 스키역사에서도 언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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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초등 연도에 대해 아처의 등반기도 오류가 있고 일부 초등 연도를 달리 보는 의견과 임무의 인수봉 첫 등반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으나 이이야마는 임무와 아처의 인수봉 등반기록을 남겼고 이즈미는 조선의 ‘스포츠 알피니즘’이 임무에게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조선스키구락부는 정관 제3조에 “본회는 스키 및 등산에 관한 연구 및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한다.”고 하여, 1931년 10월 설립의 조선산악회 이전에 스키와 등산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