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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回 宋莊公貪賂搆兵 鄭祭足殺壻逐主
제11회: 송장공이 재물을 탐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정나라 제족은 사위를 죽이고 임금을 쫓아내다.
卻說,宋莊公遣人致書稱賀,就索取三城,及白璧黃金歲輸穀數。厲公召祭足商議。厲公曰:「當初急於得國,以此恣其需索,不敢違命。今寡人即位方新,就來責償;若依其言,府庫一空矣。況嗣位之始,便失三城,豈不貽笑鄰國?」祭足曰:「可辭以『人心未定,恐割地生變,願以三城之貢賦,代輸於宋。』其白璧黃金,姑與以三分之一,婉言謝之。歲輸穀數,請以來年為始。」厲公從其言,作書報之。先貢上白璧三十雙,黃金三千鎰,其三城貢賦,約定冬初交納。
한편, 송장공이 사람을 보내 축하하는 글을 보내어, 3개의 성과 백옥 및 황금과 매년 바치기로 한 곡식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여공이 제족을 불러 상의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나라를 얻고 싶은 급한 마음에서 송장공의 이런 멋대로의 요구를 감히 어기지 못했소. 지금 과인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사자를 보내 보상을 재촉하니 만약 그 말대로 했다가는 나라 창고가 텅 비겠소. 더욱이 군주의 자리를 이은 처음에 세 개의 성을 잃는다면 어찌 이웃 나라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소?” 했다. 제족이 말하기를, “‘백성들의 인심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땅을 떼어 주면 변란이 날까 두려우니, 원컨대 세 성에서 걷는 부세만을 대신 보내겠다.’고 송나라에 통고하십시오. 흰 벽옥과 황금은 우선 약속한 숫자의 3분의 1만을 보낸다고 하면서 부드러운 말로 사죄하시고, 매년 바치기로 한 곡식은 내년부터 시작하겠다고 청하십시오.” 하니, 여공이 그 말에 따라 문서로 작성하여 송나라에 통지하기로 했다. 먼저 흰 벽옥 30쌍, 황금 3천 일(鎰)을 송나라 사신에게 주어 보내고, 3성의 세금은 초겨울에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使者還報,宋莊公大怒曰:「突死而吾生之,突貧賤而吾富貴之。區區所許,乃子忽之物,於突何與,而敢吝惜?」即日,又遣使往鄭坐索,必欲如數。且立要交割三城,不願輸賦。厲公又與祭足商議,再貢去穀二萬鍾。宋使去而復來,傳言:「若不滿所許之數,要祭足自來回話。」祭足謂厲公曰:「宋受我先君大德,未報分毫。今乃恃立君之功,貪求無厭,且出言無禮,不可聽也。臣請奉使齊魯,求其宛轉。」厲公曰:「齊魯肯為鄭用乎?」祭足曰:「往年我先君伐許伐宋,無役不與齊魯同事。況魯侯之立,我先君實成之。即齊不厚鄭,魯自無辭。」
송나라 사자가 돌아와서 보고하니, 송장공은 대로하여 말하기를, “죽게 될 돌(突)을 내가 살려 주었고, 가난하고 비천한 돌을 내가 부귀하게 해 주었으며, 그가 나에게 바치겠다고 승낙한 것들은 모두가 공자 홀(忽)의 물건이거늘, 제 놈이 무엇이기에 감히 인색하게 군단 말인가?” 하고, 그날로 다시 사자를 정나라에 보내 약속한 수대로 반드시 내놓으라고 하고, 또한 세 성도 당장 할양해 주고 부세 따위는 원치 않는다고 했다. 여공이 다시 제족과 상의하여 곡식 2만 종을 더 보내 주었다. 송나라 사자가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 송장공의 말을 전하기를, “만약 전에 약속한 수량대로 못 보내겠으면 제족이 직접 와서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십니다.” 했다. 제족이 여공에게 말하기를, “송장공은 (지난날 우리나라에 도망해 와서) 우리 선군(정장공)에게서 큰 은혜를 입었지만, 머리털 한 오라기도 갚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주군을 군주의 자리에 세운 공을 믿고 끝도 없이 탐욕을 부리고, 또 이렇게 무례하게 요구하니,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신은 주공의 명을 받들어 제나라와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일을 원만히 주선해 주기를 부탁하겠습니다.” 하니, 여공이 말하기를, “제나라와 노나라가 기꺼이 우리나라를 위해 힘을 써 주겠소?” 했다. 제족이 말하기를, “지난날에 우리 선군(정장공)께서 허(許)나라를 치고 송나라를 칠 적에 제나라와 노나라가 우리를 도왔습니다. 더욱이 (은공을 시해한) 노후가 군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실은 우리 선군이 이루어준 것입니다. 즉 제나라는 우리와 두텁지 못하나 노나라는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厲公曰:「宛轉之策何在?」祭足曰:「當初華督弒君而立子馮,吾先君與齊魯,並受賄賂,玉成其事。魯受郜之大鼎,吾國亦受商彝。今當訴告齊魯,以商彝還宋。宋公追想前情,必愧而自止。」厲公大喜曰:「寡人聞仲之言,如夢初醒。」即遣使賷了禮幣,分頭往齊魯二國,告立新君,且訴以宋人忘恩背德,索賂不休之事。使人到魯致命,魯桓公笑曰:「昔者,宋君行賂於敝邑,止用一鼎。今得鄭賂已多,猶未滿意乎?寡人當身任之,即日親往宋,為汝君求解。」使者謝別。
여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일을 원만하게 처리할 방법이 있겠소?” 하니, 제족이 말하기를, “당초에 화독이 송상공을 시해하고 (우리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공자 풍을 군주로 세울 때, 우리 선군께서는 제나라와 노나라와 함께 송나라에서 보내온 뇌물을 받아들여 일을 무사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노나라에는 고성(郜城)의 큰 솥을 주고, 우리에게도 상(商)나라의 제기를 바쳤습니다. 지금 마땅히 제나라와 노나라에 이 일을 호소하고, (그때 받았던) 상나라의 제기를 송나라에 돌려주면 송장공은 지난날의 소행을 생각하고 틀림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스스로 중지할 것입니다.” 했다. 여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제중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악몽에서 깨어난 듯하오.” 했다. 정여공은 즉시 예물을 들려 사자를 제나라와 노나라에 보냈다. 정나라에 새 군주가 섰음을 알리고 또한 송나라가 배은망덕하여 재물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사정을 호소하도록 했다. 정나라의 사자가 노나라에 도착하여 정여공의 명을 전하자 노환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송장공이 즉위할 때 우리에게 뇌물로 준 것이 솥 한 개에 그쳤는데, 지금 정나라에서 뇌물을 이미 많이 받고,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과인이 마땅히 이 일을 떠맡아 즉시 송나라로 가서 그대의 주군을 구해주리라!” 했다. 정나라 사자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再說,鄭使至齊致命,齊僖公向以敗戎之功,感激子忽,欲以次女文姜連姻。雖然子忽堅辭,到底齊侯心內,還偏向他一分。今日鄭國廢忽立突,齊侯自然不喜。謂使者曰:「鄭君何罪,輒行廢立?為汝君者,不亦難乎?寡人當親率諸侯,相見於城下。」禮幣俱不受。使者回報厲公。厲公大驚,謂祭足曰:「齊侯見責,必有干戈之事,何以待之?」祭足曰:「臣請簡兵蒐乘,預作準備,敵至則迎,又何懼焉?」且說魯桓公遣公子柔往宋,訂期相會。宋莊公曰:「既魯君有言相訂,寡人當躬造魯境,豈肯煩君遠辱?」公子柔返命。魯侯再遣人往約,酌地之中,在扶鍾為會。時周桓王二十年秋九月也。
한편, 정나라 사자가 제나라에 가서 정여공의 말을 전하니, 제희공은 옛날 북쪽 오랑캐를 물리쳐 준 세자 홀의 공에 감격하여, 차녀 문강을 세자 홀과 혼인시키려다가, 비록 세자 홀이 완강히 거절하였지만, 제희공의 마음속에 그를 향한 한 조각의 호감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정나라가 세자 홀(정소공)을 폐하고 돌을 즉위시킨 일에 대해 제희공은 자연히 불쾌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제희공이 정나라 사자에게 말하기를, “정나라 군주가 무슨 죄가 있어서 문득 세자 홀을 폐하고 다시 공자 돌을 세웠는가? 너희 주군이 된 사람도 또한 허물이 없겠느냐? 과인이 친히 여러 제후를 데리고 귀국의 도성 아래로 가서 만나보겠다.” 하고 예물을 모두 받지 않았다. 사자가 돌아와서 정여공에게 보고했다. 정여공이 크게 놀라 제족에게 말하기를, “제희공이 책망하려고 틀림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올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제족이 말하기를, “청컨대 신은 군사를 뽑고 수레를 모아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적군이 도착하면 맞이하여 싸우면 되는 일이지,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다. 한편, 노환공은 공자 유(柔)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송장공과 만날 날짜를 정하게 했다. 송장공이 말하기를, “이미 노환공이 만나기로 했으니 과인이 마땅히 노나라 경계까지 가야지, 어떻게 노환공을 번거롭게 먼 곳까지 오게 하겠는가?” 했다. 공자 유가 돌아가 복명하니, 노환공이 다시 사람을 보내 송공의 약속을 받아오게 하여 작(酌)의 땅 부종(扶鍾)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가 주환왕 20년(기원전 700년) 가을 9월이었다.
宋莊公與魯侯會於扶鍾。魯侯代鄭稱謝,並為求寬。宋公曰:「鄭君受寡人之恩深矣!譬之雞卵,寡人抱而翼之,所許酬勞,出彼本心。今歸國篡位,直欲負諾,寡人豈能忘情乎?」魯侯曰:「大國所以賜鄭者,鄭豈忘之?但以嗣服未久,府庫空虛,一時未得如約。然遲速之間,決不負諾。此事寡人可以力保。」宋公又曰:「金玉之物,或以府庫不充為辭。若三城交割,只在片言,何以不決?」魯侯曰:「鄭君懼失守故業,遺笑列國,故願以賦稅代之。聞已納粟萬鍾矣。」
송장공과 노환공은 부종에서 서로 만났다. 노환공이 정나라를 대신하여 사례하고 또한 너그럽게 처분하기를 청했다. 송장공이 말하기를, “정여공이 과인의 은혜를 크게 입었습니다. 계란에 비유하면 제가 품속에 품어서 날개를 달아 준 격입니다. 그래서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본심에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귀국하여 군주 자리를 빼앗자 곧바로 약속을 저버리니, 과인이 어찌 나쁜 감정을 갖지 않겠습니까?” 했다. 노환공이 말하기를, “귀국이 정나라에 베푼 일을 어찌 정나라가 잊겠습니까? 단지 군주의 자리를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창고가 텅텅 비게 되어서 일시적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할 따름이지 시간이 지나면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과인이 힘을 다하여 보증하겠습니다.” 했다. 송장공이 또 말하기를, “황금과 백옥은 나라의 창고가 비게 된다는 핑계를 댈 수 있겠으나, 세 성을 할양하겠다고 한 약속은 몇 마디 간단한 말이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해결하지 않습니까?” 하니, 노환공이 말하기를, “정여공이 조상이 이루어 놓은 공업을 지키지 못하여 다른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서 부세로 대신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곡식도 만 종(鐘)을 이미 바쳤다고 들었습니다.” 했다.
宋公曰:「二萬鍾之入,原在歲輸數內,與三城無涉。況所許諸物,完未及半。今日尚然,異日事冷,寡人更何望焉?惟君早為寡人圖之!」魯侯見宋公十分固執,怏怏而罷。魯侯歸國,即遣公子柔使鄭,致宋公不肯相寬之語。鄭伯又遣大夫雍糾捧著商彝,呈上魯侯,言:「此乃宋國故物,寡君不敢擅留,請納還宋府庫,以當三城。更進白璧三十雙,黃金二千鎰,求君侯善言解釋。」魯桓公情不能已,只得親至宋國,約宋公於穀邱之地相會。二君相見禮畢,魯侯又代鄭伯致不安之意,呈上白璧黃金如數。
송장공이 말하기를, “2만 종은 받았으나, 그것은 원래 매년 바치기로 한 곡식(3만 종)의 일부입니다. 세 개의 성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더욱이 약속한 재물은 아직 반도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다음 날의 일은 뻔할 것이라 과인이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군주께서는 과인을 위해서 힘써주십시오.” 했다. 노환공은 송장공이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을 보고, 불쾌한 마음으로 회합을 파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곧 공자 유를 정나라에 사자로 보내 송장공이 전혀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여공이 다시 대부 옹규에게 상나라 제기를 들려서 노환공에 보내 바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의 옛 보물입니다. 제가 감히 가지고 있을 수 없어, 청컨대 송나라 부고에 되돌려 보내서 우리의 세 성과 대신하고자 합니다. 또한 흰 벽옥 30 쌍과 황금 2천 일을 다시 보내니, 전하께서 전하여 좋은 말로 풀어 주십시오.” 하니, 노환공이 인정상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친히 송나라에 이르러 송공과 곡구(穀邱)의 땅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군주가 서로 만나 인사를 마친 후, 노환공이 정여공을 대신하여 불안한 마음을 말하고, 정나라에서 보내온 흰 벽옥과 황금을 바쳤다.
魯侯曰:「君謂鄭所許諸物,完未及半。寡人正言責鄭,鄭是以勉力輸納。」宋公並不稱謝,但問:「三城何日交割?」魯侯曰:「鄭君念先人世守,不敢以私恩之故,輕棄封疆。今奉一物,可以相當。」即命左右將黃錦袱包裹一物,高高捧著,跪獻於宋公之前。宋公聞說「私恩」二字,眉頭微皺,已有不悅之意。及啟袱觀看,認得商彝,乃當初宋國賂鄭之物,勃然變色;佯為不知,問:「此物何用?」魯侯曰:「此大國故府之珍。鄭先君莊公,向曾效力於上國,蒙上國貺以重器,藏為世寶。嗣君不敢自愛,仍歸上國。乞念昔日更事之情。免其納地。鄭先君咸受其賜,豈惟嗣君?」
노환공이 말하기를, “군주께서 정나라가 약속한 재물을 아직 반도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시기에, 과인이 바른말로 정나라를 책망을 했더니 정나라가 알아듣고 온 힘을 다하여 마련한 이 재물들을 가져왔습니다.” 하니, 송장공이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다만 묻기를, “세 개의 성은 언제 할양한다고 했습니까?” 했다. 노환공이 말하기를, “정여공이 선조들이 대대로 지켜 온 영토를 감히 사사로운 은혜를 갚기 위해 가볍게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여기 한 가지 물건을 보내왔는데, 가히 성 세 개에 상당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좌우에게 명하여, 노란색 비단보로 싼 물건을 높이 받쳐 들고, 송공에게 꿇어앉아 바치도록 했다. 송장공은 ‘사사로운 은혜’ 라는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보자기를 풀어 보니 그것은 옛날에 송나라가 정나라에 뇌물로 준 상나라 제기임을 알고, 안색을 갑자기 바꾸었다. 그리고는 모르는 체하며 묻기를, “이 물건은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했다. 노환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국의 부고에 있었던 보물입니다. 정나라 선군인 장공이 살아 있을 때 귀국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귀국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나라에 선물한 보물입니다. 이것은 귀국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며 간직했던 보물이라, 정나라의 새로운 군주가 감히 갖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원래 주인인 귀국에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원컨대 옛날의 지난 정을 생각하시어 세 개의 성을 바치라는 명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정나라 선군(정장공)은 귀국에서 주는 물건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새로운 정여공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했다.
宋公見提起舊事,不覺兩頰發赤,應曰:「往事寡人已忘之矣,將歸問之故府。」正議論間,忽報:「燕伯朝宋,駕到穀邱。」宋公即請燕伯與魯侯一處相見。燕伯見宋公,訴稱:「地鄰於齊,嘗被齊國侵伐。寡人願邀君之靈,請成於齊,以保社稷。」宋公許之。魯侯謂宋公曰:「齊與紀世仇,嘗有襲紀之心。君若為燕請成,寡人亦願為紀乞好,各修和睦,免搆干戈。」三君遂一同於穀邱結盟。魯桓公回國,自秋至冬,並不見宋國回音。鄭國因宋使督促財賄,不絕於道,又遣人求魯侯。魯候只得又約宋公於虛龜之境面會,以決平鄭之事。
송장공은 노환공이 옛날 일을 들먹이자 부지중에 두 뺨을 붉히며 응답하기를, “옛날 일은 과인이 이미 잊었습니다. 돌아가서 부고의 관리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했다. 두 군주가 의논하는 사이에 송나라 관리가 달려와 송장공에게 보고하기를, “연(燕)나라 군주가 송나라에 오셨다가 주공께서 계시지 않아 수레를 여기 곡구까지 몰고 와서 뵙고자 합니다.” 했다. 송장공이 연백(燕伯)을 청해 들여 노환공과 같은 자리에서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연백이 송공을 보더니, 호소하기를, “우리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은 제나라가 일찍부터 우리나라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과인은 군주의 영령함으로 제나라와 화의를 맺어서 사직을 보존하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송장공이 연백의 청을 허락했다. 노환공이 송장공에게 말하기를, “제나라와 기(紀)나라는 대대로 원수이므로 제나라는 항상 기나라를 공격하려는 마음뿐입니다. 송장공께서 만약 연나라를 위해 화의를 주선하신다면, 과인도 역시 기나라를 위해 제나라와 화의를 주선하겠습니다. 각기 수교하여 화목하게 지내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피할 수 있습니다.” 했다. 세 나라 군주가 함께 곡구에서 회맹을 맺었다. 노환공은 귀국하여,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송나라의 회답을 받지 못했다. 그 사이에 송나라 사자는 시도 때도 없이 정나라에 들이닥쳐 재물과 성을 바치라고 다그쳤다. 이에 정여공은 또다시 노환공에게 사람을 보내 도와 달라고 청했다. 노환공은 부득이 송장공에게 청하여 허구(虛龜)의 경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곳에서 정나라 문제를 결정하려고 했다.
宋公不至,遣使報魯曰:「寡君與鄭自有成約,君勿與聞可也。」魯侯大怒,罵曰:「匹夫貪而無信,尚然不可,況國君乎?」遂轉轅至鄭,與鄭伯會於武父之地,約定連兵伐宋。髯翁有詩云:「逐忽弒隱並元兇,同惡相求意自濃。只為宋莊貪詐甚,致令魯鄭起兵鋒。」宋莊公聞魯候發怒,料想歡好不終。又聞齊侯不肯助突,乃遣公子游往齊結好,訴以子突負德之事:「寡君有悔於心,願與君協力攻突,以復故君忽之位,並為燕伯求平。」使者未返,宋疆吏報:「魯鄭二國興兵來伐,其鋒甚銳,將近睢陽。」
그러나 송장공은 오지 않았고, 사자를 보내 노환공에게 전하기를, “과인과 정여공이 스스로 맺은 약속인데, 군주께서는 관여하지 말기 바랍니다.” 했다. 노환공이 대로하여 욕하며 말하기를, “필부도 탐욕스럽고 신의가 없으면 오히려 장래가 걱정스럽거늘, 하물며 나라의 임금인 바에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했다. 노환공은 즉시 수레를 돌려 정나라에 이르러 정여공과 무보(武父)의 땅에서 회견한 후에 병사를 합하여 송나라를 토벌하기로 약속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홀을 쫓아낸 정여공이나 은공을 죽인 노환공이나 군위를 찬탈한 원흉인데, 같은 악당이 서로 돕자고 하니 저지른 죄악이 저절로 드러나는구나! 다만 송장공의 탐욕과 속임이 심하여서, 결국은 노나라와 정나라의 군사를 불러들여 전쟁이 일어났구나!” 했다. 송장공은 노환공이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되었든 즐겁게 끝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제희공도 결코 정여공을 돕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송장공은 공자 유(游)를 제나라에 보내 수호조약을 맺도록 하고, 공자 돌의 배덕한 일을 호소하게 하여, 이르기를, “저희 군주께서는 마음속으로 후회하는 일이 있어서, 원컨대 군주와 힘을 합쳐 돌을 쫓아내고 홀의 군주 자리를 다시 찾아 주고자 하십니다. 아울러 연백을 위하여 화의를 청합니다.” 했다. 사자로 간 공자 유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송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관리가 보고하기를, “노나라와 정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워 머지않아 이곳 수양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했다.
宋公大驚,遂召諸大夫計議迎敵。公子御說諫曰:「師之老壯,在乎曲直。我貪鄭賂,又棄魯好,彼有詞矣。不如請罪求和,息兵罷戰,乃為上策。」南宮長萬曰:「兵至城下,不發一矢自救,是示弱也。何以為國?」太宰督曰:「長萬言是也。」宋公遂不聽御說之言,命南宮長萬為將。長萬薦猛獲為先鋒,出車三百乘。兩下排開陣勢。魯侯鄭伯並駕而出,停車陣前,單搦宋君打話。宋公心下懷慚,託病不出。南宮長萬遠遠望見兩枝繡蓋飄揚,知是二國之君。乃撫猛獲之背曰:「今日爾不建功,更待何時?」
송장공이 크게 놀라 여러 대부들을 불러 모아 적군을 막을 계책을 논의했다. 공자 어설(御說)이 나와 간하기를, “군사들이 강하고 약함은 모두 그 명분이 옳으냐 그르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정나라의 재물을 탐하고 또한 노나라의 호의를 저버렸으니, 저들은 할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죄를 청하고 화친을 구하는 것이 낫습니다. 싸움을 피하고 군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니, 남궁장만이 말하기를, “외적이 성 밑까지 쳐들어왔는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화살 한 개도 쏘아보지도 않고 화의를 청하여 허약함만을 보여준다면 어찌 나라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태재 화독이 말하기를, “장만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송장공이 어설의 말을 듣지 않고, 남궁장만을 장수로 삼았다. 장만이 맹획(猛獲)을 선봉으로 추천하여 전차 3백 승을 이끌고 성을 나가, 군사들을 두 갈래로 나누어서 진을 치게 했다. 노환공과 정여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나와 수레를 진영 앞에 세우고 송장공에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다. 송장공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다. 남궁장만이 멀리 두 대의 비단 덮개가 펄럭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두 나라 군주인 줄을 알았다. 곧바로 맹획의 등 에 대고 말하기를, “오늘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했다.
猛獲應命,手握渾鐵點鋼矛,麾車直進。魯鄭二君看見來勢兇猛,將車退後一步。左右擁出二員上將,魯有公子溺,鄭有原繁,各駕戎車迎住。先問姓名,答曰:「吾乃先鋒猛獲是也。」原繁笑曰:「無名小卒,不得污吾刀斧,換你正將來決一死敵。」猛獲大怒,舉矛直到原繁。原繁掄刀接戰。子溺指引魯軍,鐵葉般裹來。猛獲力戰二將,全無懼怯。魯將秦子梁子,鄭將檀伯,一齊俱上。猛獲力不能加,被梁子一箭射著右臂,不能持矛,束手受縛。兵車甲士,盡為俘獲,只逃走得步卒五十餘人。
맹획이 장만의 명을 받아 혼철점강모(渾鐵點鋼矛)를 손에 꼬나 쥐고 전차를 휘몰아 앞으로 돌진했다. 노나라와 정나라 군주는 자기들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적장을 보고 전차를 뒤로 한 걸음 물리자 그 좌우에서 두 사람의 장수가 뛰어나오는데, 노나라의 공자 익(溺)과 정나라의 상장 원번이었다. 두 장수가 각기 전차를 몰고 나가, 달려오는 적장을 맞아 먼저 이름을 물었다. 맹획이 대답하기를, “나는 선봉 맹획이다!” 하니, 원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름 없는 졸개에게 내 칼을 더럽힐 수야 없지. 속히 돌아가서 너희 장수에게 나와서 한번 대결하자고 해라.” 했다. 맹획이 대로하여 창을 들고 원번을 향해 달려들었다. 원번이 칼을 휘두르며 맞이하여 싸웠다. 공자 익이 노나라 군사들을 끌고 와서 쇠 비늘처럼 빽빽하게 포위했다. 맹획이 힘을 다하여 두 장수와 싸우는데, 전혀 두려운 빛이 없었다. 노나라 장수 진자(秦子)와 양자(梁子), 정나라 장수 단백(檀伯) 등이 일제히 달려와 싸움에 합세했다. 맹획이 힘에 부쳐 오른쪽 팔에 양자가 쏜 화살을 맞고 창을 잡을 수가 없어서 손이 결박되었다. 맹획이 거느린 전차와 군사들도 모두 사로잡히고, 단지 보졸 50여 명만이 도망쳐 돌아올 수 있었다.
南宮長萬聞敗,咬牙切齒曰:「不取回猛獲,何面目入城?」乃命長子南宮牛,引車三十乘搦戰:「佯輸詐敗,誘得敵軍追至西門,我自有計。」南宮牛應聲而出,橫戟大罵:「鄭突背義之賊,自來送死,何不速降?」剛遇鄭將引著弓弩手數人,單車巡陣,欺南宮牛年少,便與交鋒。未及三合,南宮牛回車便走,鄭將不捨,隨後趕來。將近西門,砲聲大舉,南宮長萬從後截住,南宮牛回車,兩下夾攻。鄭將連發數箭,射南宮牛不著,心裏落慌,被南宮長萬躍入車中,隻手擒來。鄭將原繁,聞知本營偏將單車赴敵,恐其有失,同檀伯引軍疾驅而前。
남궁장만은 맹획이 싸움에 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빨을 갈며 말하기를, “맹획을 구해내지 않고는 무슨 면목으로 성에 들어오겠느냐?” 하고, 장자 남궁우에게 명하여 전차 30대를 끌고 나가 싸움을 걸도록 명하면서 말하기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면서 적군으로 하여금 서문으로 쫓아오도록 유인하라. 나에게 계책이 있다.” 했다. 남궁우가 명을 듣고 나가 극을 비껴들고 큰소리로 욕하기를, “배은망덕한 정나라 돌이라는 도적놈아! 스스로 죽으러 왔으면서 어찌하여 속히 항복하지 않느냐?” 하니, 마침 궁노수 몇 사람과 전차 한 대를 몰아 진영을 순찰하던 정나라 장수 한 명이 남궁우가 어린 것을 얕잡아 보고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3합도 미처 나누기 전에 남궁우가 전차의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나라 장수가 놓치지 않고 뒤를 쫓았다. 이윽고 서문에 이르자 포성이 크게 들리더니 남궁장만이 뛰어나와 뒤에서 막았다. 남궁우도 전차를 돌려 양쪽에서 협공했다. 정나라 장수가 화살을 재어 남궁우를 향하여 연달아 몇 발을 쏘았으나, 모두 빗나가자 마음이 황망해졌다. 그 사이에 남궁장만이 정나라 장수의 전차에 뛰어들어 손으로 사로잡았다. 정나라 장군 원번이 본영의 비장 한 명이 전차 한 대를 몰아 적군을 쫓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적에게 해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단백과 같이 한 무리의 군사를 끌고, 질풍과 같이 앞으로 달렸다.
只見宋國城門大開,太宰華督自率大軍,出城接應。這裏魯將公子溺,亦引秦子梁子助戰。兩下各秉火炬,混殺一場,直殺至雞鳴方止。宋兵折損極多。南宮長萬將鄭將獻功,請宋公遣使到鄭營,願以鄭將換回猛獲。宋公許之。宋使至於鄭營,說明交換之事。鄭伯應允,各將檻車推出陣前,彼此互換。鄭將歸於鄭營,猛獲仍歸宋城去了。是日各自休息不戰。卻說公子游往齊致命,齊僖公曰:「鄭突逐兄而立,寡人之所惡也。但寡人方有事於紀,未暇及此,倘貴國肯出師助寡人伐紀,寡人敢不相助伐鄭?」公子游辭了齊侯,回復宋公去訖。
원번과 단백이 보니, 송나라 도성의 문이 크게 열리면서 화독이 대군을 친히 이끌고 성을 나와 정나라 군사들과 맞붙어 싸웠다. 이쪽의 노나라 대장 공자 익도 역시 진자와 양자를 이끌고 와서 도왔다. 양쪽 진영은 각각 횃불을 밝히고 한바탕 뒤섞여 싸웠다. 다음날 닭이 울 때가 되어서야 싸움을 멈췄다. 송나라 진영의 손실은 매우 컸다. 남궁장만은 정나라의 장수 한 명을 사로잡은 공로를 세운 뒤에, 송장공에게 정나라 진영에 사신을 보내어 정나라 장수와 맹획을 교환하자고 청했다. 송장공이 허락했다. 송나라 사자가 정나라 진영에 이르러 두 사람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정여공이 응락하여 각기 함거를 진영 앞으로 끌고 나와서 서로 맞바꾸었다. 정나라 비장이 자기 진영으로 돌아오고 맹획은 송나라 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날은 각자 싸우지 않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한편, 공자유가 제나라에 가서 보고하니, 제희공이 말하기를, “정나라 돌(突)이 형을 쫓아내고 군주 자리에 앉은 행위를 과인은 매우 미워하오. 다만 과인은 지금 기나라에 일이 있어 아직은 송나라를 도와 정나라를 정벌할 여유가 없소. 만약에 귀국이 먼저 군사를 내어 과인이 기나라를 정벌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과인이 어찌 송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는 데 돕지 않을 수 있겠소?” 하니, 공자 유가 제희공을 이별하고 송장공에게로 돌아갔다.
再說魯侯與鄭伯在營中,正商議攻宋之策,忽報:「紀國有人告急。」魯侯召見,呈上國書,內言:「齊兵攻紀至急,亡在旦夕。乞念婚姻世好,以一旅拔之水火。」魯桓公大驚,謂鄭伯曰:「紀君告急,孤不得不救。宋城亦未可猝拔,不如撤兵。量宋公亦不敢復來索賂矣。」鄭厲公曰:「君既移兵救紀,寡人亦願悉率敝賦以從。」魯侯大喜,即時傳令拔寨,齊望紀國進發。魯侯先行三十里,鄭伯引軍斷後。宋國先得了公子游回音,後知敵營移動,恐別有誘兵之計,不來追趕,只遣諜遠探。回報:「敵兵盡已出境,果往紀國。」方纔放心。
한편, 노환공과 정여공이 진영에서 송나라를 공격할 계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보고하기를, “기나라에서 사람이 와서 위급함을 알립니다.” 했다. 노환공이 불러 접견하니 기나라 사자가 국서를 바쳤다. 국서에 이르기를, “제나라가 우리 기나라를 공격하여 나라의 존망이 조석에 달렸습니다. 원컨대 혼인으로 맺은 우호관계를 생각하시어, 한 무리의 군마를 보내어 급한 불을 꺼 주십시오.” 했다. 노환공이 크게 놀라 정여공에게 말하기를, “기나라 군주가 위급함을 알려왔는데 제가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송나라 도성도 졸연히 파할 수 없으니 철군하느니만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송장공도 앞으로 다시 뇌물을 독촉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정여공이 말하기를, “군주께서 이미 군사를 움직여 기나라를 구하겠다고 하니 과인 역시 폐읍의 군사를 이끌고 따르겠습니다.” 하니, 노환공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명을 내려 영채를 걷고 일제히 기국을 향해 출발했다. 노환공이 먼저 30리쯤 앞서가고, 정여공은 군사를 이끌고 뒤를 경계했다. 송나라에서는 먼저 공자 유의 회답을 듣고, 적 진영이 이동했다는 것을 늦게 알았지만, 그것이 유인책이 아닌가 의심하여 뒤를 쫓지 않고 단지 탐마만을 보내어 멀리 동정을 살폈다. 탐마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병은 이미 모두 우리나라 국경 밖으로 나가서 기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니, 비로소 겨우 마음을 놓았다.
太宰華督奏曰:「齊既許助攻鄭,我國亦當助其攻紀。」南宮長萬曰:「臣願往。」宋公發兵車二百乘,仍命猛獲為先鋒,星夜前來助齊。卻說齊僖公約會衛侯,並徵燕兵。衛方欲發兵,而宣公適病薨。世子朔即位,是為惠公。惠公雖在喪中,不敢推辭,遣兵車二百乘相助。燕伯懼齊吞並,正欲借此修好,遂親自引兵來會。紀侯見三國兵多,不敢出戰,只深溝高壘,堅守以待。忽一日報到:「魯鄭二君,前來救紀。」紀侯登城而望,心中大喜,安排接應。
태재 화독이 아뢰기를, “제나라는 이미 우리가 정나라를 공격할 때 돕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또한 마땅히 원병을 보내 기국을 공격하는 제나라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남궁장만이 말하기를, “신이 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송장공이 남궁장만에게 전차 2백 대를 주어, 맹확을 선봉으로 삼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제나라를 돕게 했다. 한편, 제희공은 위후(衛侯)와 만나기를 약속하고 아울러 연나라 군사를 불렀다. 그러나 위나라에서는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위선공(衛宣公)이 노환으로 죽었다. 위나라 세자 삭(朔)이 즉위하였는데, 이가 위혜공(衛惠公)이다. 위혜공은 비록 상중이었지만 감히 제나라의 출군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전차 2백 대를 보내 제나라를 돕게 했다. 제나라가 자기 나라를 병탄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던 연백도 이 번 기회를 이용하여 우호 관계를 맺을 생각으로, 친히 연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제나라를 돕기 위해 왔다. 기나라 군주가 세 나라의 수많은 군사를 보고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해자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올려 굳게 지키면서, 노나라의 원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갑자기 보고가 들어오기를, “노나라와 정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고 있습니다.” 하니, 기나라 군주가 성 위에 올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접응할 준비를 했다.
再說魯侯先至,與齊侯相遇於軍前。魯侯曰:「紀乃敝邑世姻,聞得罪於上國,寡人躬來請赦。」齊侯曰:「吾先祖哀公為紀所譖,見烹於周,於今八世,此仇未報。君助其親,我報其仇,今日之事,惟有戰耳。」魯侯大怒,即命公子溺出車。齊將公子彭生接住廝殺。彭生有萬夫不當之勇,公子溺如何敵得過?秦子、梁子二將,並力向前,未能取勝,剛辦得架隔遮攔。衛燕二主,聞齊魯交戰,亦來合攻。卻得後隊鄭伯大軍已到,原繁引檀伯眾將,直衝齊侯老營,紀侯亦使其弟嬴季,引軍出城相助,喊聲震天。
한편, 노환공이 먼저 도착하여 제희공과 군영 앞에서 서로 만났다. 노환공이 말하기를, “기나라는 곧 우리나라와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제가 들으니 기나라가 상국에 죄를 지었다고 하여, 과인이 이렇게 몸을 굽혀 대신 용서를 구하려고 왔습니다.” 하니, 제희공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 애공(哀公)께서 기나라 군주의 참소를 받아 주나라에 잡혀가서 삶겨 죽은 후 지금까지 8대에 이르렀으나 그 원수를 아직 갚지 못했소. 군주는 그 친척을 돕고자 하고, 나는 그 원수를 갚고자 하니 오늘의 일은 오로지 싸울 수밖에 없겠소!” 했다. 노환공이 크게 노하여 즉시 공자 익을 앞세워 전차를 출진시켰다. 제나라에서도 장수 공자 팽생(公子彭生)이 나와서 대적했다. 팽생은 만 사내가 당할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 있으니, 공자 익이 어찌 대적하겠는가? 노나라의 진자와 양자 두 장수가 힘을 합쳐 앞으로 나섰으나, 자기들 앞가림밖에 못했다. 위나라와 연나라 군주가 제나라와 노나라가 싸운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제나라와) 함께 공격했다. 뒤따라온 정여공의 대군이 이미 당도하여, 원번이 단백을 위시한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직접 제나라 본영을 엄습했다. 기나라 군주도 또한 그 아우 영계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돕게 하자, 함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公子彭生不敢戀戰,急急回轅。六國兵車,混做一處相殺。魯侯遇見燕伯,謂曰「穀邱之盟,宋、魯、燕三國同事。口血未乾,宋人背盟,寡人伐之。君亦效宋所為,但知媚齊目前,獨不為國家長計乎?」燕伯自知失信。垂首避去,託言兵敗奔逃。衛無大將,其師先潰。齊侯之師亦敗,殺得屍橫遍野,血流成河。彭生中箭幾死。正在危急,又得宋國兵到,魯鄭方纔收軍。胡曾先生詠史詩云:「明欺弱小恣貪謀,只道孤城頃刻收。他國未亡我已敗,令人千載笑齊侯。」
공자팽생은 감히 더 이상 싸우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진으로 회군했다. 여섯 나라의 전차가 한 곳에서 뒤섞여 서로 죽였다. 노환공이 우연히 연나라 군주를 보고 말하기를, “지난날 곡구(穀邱)에서 노나라, 송나라, 연나라 삼국이 서로 만나 맹약을 맺을 때, 입술에 바른 피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송장공이 맹약을 어겨 과인이 정벌했소. 그대도 송장공이 하는 짓을 본받아 제희공 앞에서 아첨만 부릴 줄 알고 어찌 나라를 위한 긴 계책을 생각할 줄 모르시오?” 했다. 연나라 군주는 자기의 신의를 지키지 못한 것을 알고, 머리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여, 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 철수해 버렸다. 위나라도 대장이 없어서 그 군사가 먼저 흩어졌다. 제희공의 군사들도 역시 싸움에서 져서, 전사한 군사들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 차고 흐르는 피는 강을 이루었다. 공자 팽생도 적군이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이 위급한 순간에 송나라 군사가 당도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노나라와 정나라 군주들이 겨우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호증(胡曾) 선생의 영사시(詠史詩)에 이르기를, “약하고 작은 나라를 속여 멋대로 탐욕을 부리면, 외로운 성을 단번에 집어삼킬 줄 알았지만, 그러나 다른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자기 군사가 먼저 패하니, 제희공은 천 년 동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도다.” 했다.
宋軍方到,喘息未定,卻被魯鄭各遣一軍衝突前來。宋軍不能立營,亦大敗而去。各國收拾殘兵,分頭回國。齊侯回顧紀城,誓曰:「有我無紀,有紀無我,決不兩存也!」紀侯迎接魯鄭二君入城,設享款待,軍士皆重加賞犒。嬴季進曰:「齊兵失利,恨紀愈深,今兩君在堂,願求保全之策!」魯侯曰:「今未可也,當徐圖之。」次日,紀侯遠送出城三十里,垂淚而別。魯侯歸國後,鄭厲公又使人來修好,尋武父之盟,自此魯鄭為一黨,宋齊為一黨。時鄭國守櫟大夫子元已卒,祭足奏過厲公,以檀伯代之。此周桓王二十二年也。
송나라 군사들이 이제 막 도착하여 가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노나라와 정나라가 각각 한 떼의 군사를 보내어 충돌해 들어갔다. 송나라 군사는 진영을 세우지도 못하고 크게 꺾여 물러가 버렸다. 각국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제희공이 기성(紀城)을 돌아보며 맹세하기를, “내가 있으면 기나라는 없을 것이며 기나라가 있으면 내가 없을 것이다. 결단코 둘이 함께 살지는 않을 것이다.” 했다. 기나라 군주는 노나라와 정나라의 두 군주를 성안으로 영접하여 잔치를 열어 대접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상을 주었다. 영계(嬴季)가 나와서 말하기를, “제후가 싸움에서 이득 없이 물러갔으나, 우리나라에 대한 원한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지금 두 나라 군주께서 이곳에 계시니, 원컨대 우리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방도를 세워주셨으면 합니다.” 하니, 노환공이 말하기를, “오늘은 결정하기 어렵겠습니다. 다음에 천천히 도모하도록 합시다.” 했다. 다음날 기후가 성 밖 30리까지 전송을 나와 두 나라 군주들과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노환공이 귀국한 지 얼마 후에 정여공이 또 사신을 보내어 지난날 무보(武父) 땅에서 맺은 맹약을 말하고 우호관계를 확인했다. 이때부터 노나라와 정나라가 한편이 되고, 송나라와 제나라가 한편이 되었다. 이때 정나라 역(櫟) 땅을 지키는 대부 공자 원이 죽자 제족이 여공에게 말하여 단백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다. 이것은 주환왕 22년(기원전 698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齊僖公為兵敗於紀,懷憤成疾。是冬病篤,召世子諸兒至榻前囑曰:「紀吾世仇也,能滅紀者,方為孝子。汝今嗣位,當以此為第一件事。不能報此仇者,勿入吾廟!」諸兒頓首受教。僖公又召夷仲年之子無知,使拜諸兒。囑曰:「吾同母弟,只此一點骨血,汝當善視之。衣服禮秩,一如我生前可也。」言畢,目遂瞑。諸大夫奉世子諸兒成喪即位,是為襄公。宋莊公恨鄭入骨,復遣使將鄭國所納金玉,分賂齊、蔡、衛、陳四國,乞兵復仇。齊因新喪,止遣大夫雍廩,率車一百五十乘相助。蔡衛亦各遣將同宋伐鄭。
제희공이 기나라 정벌에 나갔다가 패배하고 돌아와서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병이 들었다. 이어서 겨울철이 다가오자 그 병세가 더욱 위독하게 되었다. 희공이 세자 제아를 침상 곁으로 불러 당부해 말하기를, “기나라와 우리나라는 누대에 걸친 원수지간이다. 능히 기나라를 멸하는 자라야 비로소 효자라고 할 것이다. 네가 지금 나의 뒤를 이으면 마땅히 이것을 제일의 사명으로 삼아라. 이 원수를 갚기 전에는 내 묘당에 들어오지 말아라!”고 하니, 제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유언을 받들었다. 희공이 또 이중년의 아들 무지(無知)를 불러 제아에게 절을 올리게 한 후에 (제아에게) 당부하기를, “나의 동모제(同母弟) 이중년의 일점혈육이다. 너는 마땅히 잘 보살펴 주고 의복과 예의 절차를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행하도록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곧 눈을 감았다. 제나라의 여러 대부들이 세자 제아를 받들어 상례를 지내고, 군주의 자리에 나아가게 했다. 이가 제양공(齊襄公)이다. 송장공이 정나라에 대한 한이 뼈에 사무쳐 또다시 사자를 정나라에 보내 황금과 벽옥을 약속대로 바치라고 하고, 제나라,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 등 네 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군사를 빌려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그때 제나라는 상중이라는 이유로 대부 옹름(雍廩)에게 전차 150대만을 거느리고 송나라를 돕게 했다. 채나라와 위나라 역시 각각 장수를 보내 송나라가 정나라를 치는 데 함께 했다.
鄭厲公欲戰,上卿祭足曰:「不可!宋大國也,起傾國之兵,盛氣而來。若戰而失利,社稷難保,幸而勝,將結沒世之怨,吾國無寧日矣!不如縱之。」厲公意猶未決。祭足遂發令,使百姓守城,有請戰者罪之。宋公見鄭師不出,乃大掠東郊。以火攻破渠門,入及大逵,至於太宮,盡取其椽以歸,為宋盧門之椽以辱之。鄭伯鬱鬱不樂,歎曰:「吾為祭仲所制,何樂乎為君?」於是陰有殺祭足之意。明年春三月,周桓王病篤。召周公黑肩於牀前,謂曰:「立子以嫡,禮也。然次子克,朕所鍾愛,今以託卿。異日兄終弟及,惟卿主持。」言訖遂崩。周公遵命,奉世子佗即王位,是為莊王。
정여공이 싸우고자 했으나. 상경 제족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송나라는 대국입니다.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군사를 일으켰으니, 맹렬한 기세로 왔습니다. 어렵게 싸워 승리하지 못하면 사직을 보전하지 못합니다. 다행히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들과는 세상을 같이 할 수 없는 원한을 쌓아, 우리나라는 편한 날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굳게 지키고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했다. 정여공이 뜻을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제족이 곧바로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성을 굳게 지키게만 하고 싸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겠다고 했다. 송장공은 정나라 군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동쪽 교외를 크게 노략질하면서 진격하여 화공으로 거문(渠門)을 깨트렸다. 성안으로 들어가 큰길로 태묘에 이르러 서까래들을 전부 벗겨내어 돌아가서, 송나라 노문(盧門)의 서까래로 삼아 정나라를 욕보이려고 했다. 정여공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제족에게 제어되는데 무슨 군주의 즐거움이 있는가?” 했다. 이에 마음속으로 몰래 제족을 죽일 뜻을 갖게 되었다. 다음 해 봄 3월에 주환왕이 병이 들어 위독하자 주공 흑견을 침대 곁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적자를 후사로 세우는 것이 예법이다. 그러나 차자 극(克)을 짐이 사랑하고 있으니 이제 경에 부탁하오. 훗날 형이 죽게 되거든 아우에게 물려주도록 경이 맡아서 처리하시오.” 했다. 말이 끝나자 곧 붕어했다. 주공이 환왕의 명에 따라 세자 타(佗)를 받들어 왕위에 앉혔다. 이가 주장왕(周莊王)이다.
鄭厲公聞周有喪,欲遣使行弔。祭足固諫,以為:「周乃先君之仇,祝聃曾射王肩,若遣人往弔,祇取其辱。」厲公雖然依允,心中愈怒。一日,遊於後圃,止有大夫雍糾相從。厲公見飛鳥翔鳴,淒然而歎。雍糾進曰:「當此春景融和,百鳥莫不得意。主公貴為諸侯,似有不樂之色,何也?」厲公曰:「百鳥飛鳴自繇,全不受制於人。寡人反不如鳥,是以不樂。」雍糾曰:「主公所慮,豈非秉鈞之人耶?」厲公嘿然。雍糾又曰:「吾聞『君猶父也,臣猶子也。』子不能為父分憂,即為不孝;臣不能為君排難,即為不忠。倘主公不以糾為不肖,有事相委,不敢不竭死力!」
정여공이 천자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조문을 하려고 했다. 제족이 강경하게 간하기를, “주나라는 곧 선군(정장공)의 원수입니다. 일찍이 축담이 왕의 어깨를 쏘아 맞혔습니다. 만약 사람을 보내어 조문을 해도 그저 욕이나 얻어먹을 것입니다.” 했다. 여공이 비록 허락을 했지만, 마음속으로 더욱 노여웠다. 하루는 여공이 후원에서 노닐고 있는데 대부 옹규(雍糾)가 따라 나왔다. 여공이 하늘을 날며 우는 새를 보고 마음이 처연하여 탄식했다. 옹규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지금 봄 경치가 어우러지고 뭇 새들도 마음대로 노니는데, 주공께서는 귀하기가 제후이면서, 기쁘지 않은 기색을 하시니 무슨 일이 있습니까?” 했다. 여공이 말하기를, “온갖 새들도 자유로이 날며 노래하고 사람에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구나. 과인은 도리어 새보다 못하니 그래서 기쁘지 않구나.” 했다. 옹규가 말하기를, “주공께서 염려하시는 것은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하니, 여공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옹규가 다시 말하기를, “ 저가 듣기로는, ‘군주는 아버지와 같고 신하는 그 자식과 같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그 아비의 근심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불효입니다. 신하로서 능히 그 주군을 위해 어려운 일을 마다하면 그것은 곧 불충입니다. 만약에 주공께서 이 옹규를 불초하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일이 있어 맡긴다면, 감히 죽을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했다.
厲公屏去左右,謂雍糾曰:「卿非仲之愛婿乎?」糾曰:「婿則有之,愛則未也。糾之婚於祭氏,實出宋君所迫,非祭足本心。足每言及舊君,猶有依戀之心,但畏宋不敢改圖耳。」厲公曰:「卿能殺仲,吾以卿代之,但不知計將安出?」雍糾曰:「今東郊被宋兵殘破,民居未復。主公明日命司徒修整廛舍,卻教祭足賷粟帛往彼安撫居民,臣當於東郊設享,以鴆酒毒之。」厲公曰:「寡人委命於卿,卿當仔細。」雍糾歸家,見其妻祭氏,不覺有皇遽之色。祭氏心疑,問:「朝中今日有何事?」糾曰:「無也。」
여공이 좌우를 물러가게 하고 옹규에게 말하기를, “경은 제중(제족)의 사랑하는 사위가 아니오?” 하니, 옹규가 말하기를, “사위이기는 하지만 사랑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옹규가 제씨와 혼인한 것은 사실 송장공이 강제로 시킨 것이지, 제족의 본심이 아닙니다. 제족은 항상 옛날 군주의 이야기만 하고 아직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나, 단지 송나라를 두려워하여 다시 도모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했다. 여공이 말하기를, “경이 능히 제족을 죽일 수 있다면, 내가 경을 제족의 자리를 대신 하도록 하겠소. 단 이 계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소.” 하니, 옹규가 말하기를, “지금 도성 동쪽 교외가 송나라 병사들에게 약탈당하여, 민간의 주거지가 아직 복구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내일 사도(司徒)에게 명하여 곡식 창고를 수리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제족에게 곡식과 피륙을 가져가 백성들을 안무하도록 지시하십시오. 신은 동쪽 교외에 잔치를 베풀고 그에게 짐독(鴆毒)을 탄 술을 권하여 죽이겠습니다.” 했다. 여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경에게 모든 일을 맡기겠으니 경은 마땅히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시오.” 했다. 옹규가 집으로 돌아와서 처 제씨를 보니,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을 띄웠다. 제씨가 마음속에 의아한 생각이 들어 묻기를, “오늘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옹규가 말하기를, “아무 일도 없었소.” 했다.
祭氏曰:「妾未察其言,先觀其色,今日朝中,必無無事之理。夫婦同體,事無大小,妾當與知。」糾曰:「君欲使汝父往東郊安撫居民,至期,吾當設享於彼,與汝父稱壽,別無他事。」祭氏曰:「子欲享吾父,何必郊外?」糾曰:「此君命也,汝不必問。」祭氏愈疑。乃醉糾以酒,乘其昏睡,佯問曰:「君命汝殺祭仲,汝忘之耶?」糾夢中糊塗應曰:「此事如何敢忘?」早起,祭氏謂糾曰:「子欲殺吾父,吾已盡知矣。」糾曰:「未嘗有此。」祭氏曰:「夜來子醉後自言,不必諱也。」
제씨가 말하기를, “첩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낭군님의 기색을 보니 금일 조정에서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첩이 마땅히 알아야겠지요.” 했다. 옹규가 말하기를, “주군께서 그대의 부친을 시켜 동교에 가서 백성들을 안무하게 하였소. 때맞추어 나도 그곳에 잔치를 마련하여 그대의 부친에게 축수하기로 한 일 말고는 다른 일은 없었소.” 하니, “당신이 내 아버지를 위한 잔치를 왜 반드시 교외에 차립니까?” 했다. 옹규가 말하기를, “이것은 주군의 명이오. 당신은 더 묻지 마시오.” 했다. 제씨는 더욱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술상을 차려 옹규를 취하게 하여, 그가 혼수상태가 된 틈을 타서 넘겨짚어 묻기를, “주군이 당신에게 제중을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벌써 잊었습니까?” 했다. 옹규가 꿈속에서 얼떨결에 응답하기를, “그 일을 내가 어찌 감히 잊겠소!” 했다. 다음날 옹규가 일찍 일어나자 제씨가 옹규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다 알았습니다.” 하니, 옹규가 말하기를,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했다. 제씨가 말하기를, “어젯밤 당신이 취중에 스스로 한 말인데 구태여 숨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했다.
糾曰:「設有此事,與爾何如?」祭氏曰:「既嫁從夫,又何說焉?」糾乃盡以其謀告於祭氏。祭氏曰:「吾父恐行止未定。至期,吾當先一日歸寧,慫恿其行。」糾曰:「事若成,吾代其位,於爾亦有榮也。」祭氏果先一日回至父家,問其母曰:「父與夫二者孰親?」其母曰:「皆親。」又問:「二者親情孰甚?」其母曰:「父甚於夫。」祭氏曰:「何也?」其母曰:「未嫁之女,夫無定而父有定;已嫁之女,有再嫁而無再生。夫合於人,父合於天,夫安得比於父哉?」
옹규가 말하기를, “만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당신은 어찌하겠소?” 하니, 제씨가 말하기를, “이미 출가했으면 남편을 쫓아야 합니다.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했다. 옹규가 결국 제족을 죽이려는 모의를 제씨에게 모두 이야기했다. 제씨가 말하기를, “내 아버지가 동교에 행차하는 날짜를 아직 정하지 않았으니, 때맞추어 내가 마땅히 먼저 친정에 들려 행차를 하시게 권하겠습니다.” 했다. 옹규가 말하기를, “만약 일이 성사되면 내가 그대 부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당신도 함께 영화를 누리게 될게요.” 했다. 제씨가 과연 그날로 먼저 친정에 가서 그 모친에게 묻기를, “부친과 지아비 중 누가 더 친합니까?” 하니, 그 모친이 대답하기를, “모두 친하다.” 했다. 제씨가 또 묻기를, “두 사람 중에서 정은 누가 더 깊습니까?” 하니, 그 모친이 말하기를, “부친이 남편보다 더 깊다.”고 했다. 제씨가 말하기를, “어째서입니까?” 하니, 그 모친이 말하기를, “출가하지 않은 딸은 지아비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부친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출가한 딸은 재가하면 다시 지아비를 얻을 수 있지만, 한번 죽은 부친은 다시 살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지아비는 사람이 결합했지만, 부친은 하늘이 결합했다. 어찌 지아비를 부친과 견줄 수 있겠느냐?” 했다.
其母雖則無心之言,卻點醒了祭氏有心之聽,遂雙眼流淚曰:「吾今日為父,不能復顧夫矣!」遂以雍糾之謀,密告其母。其母大驚,轉告於祭足。祭足曰:「汝等勿言,臨時吾自能處分。」至期,祭足使心腹強鉏,帶勇士十餘人,暗藏利刃跟隨。再命公子閼率家甲百餘,郊外接應防變。祭足行至東郊,雍糾半路迎迓,設享甚豐。祭足曰:「國事奔走,禮之當然,何勞大享。」雍糾曰:「郊外春色可娛,聊具一酌節勞耳。」言訖,滿斟大觥,跪於祭足之前,滿臉笑容,口稱百壽。
그 모친이 비록 무심하게 한 말이지만, 제씨는 유심히 듣고 마음에 깨우쳤다.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제가 오늘 아버지를 위해 지아비를 돌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마침내 옹규의 음모를 그 모친에게 고했다. 그 모친이 크게 놀라 제족에게 가서 전했다. 제족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해서는 안 된다. 조만간 내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겠다.” 했다. 때맞추어 제족이 심복 강서(强鉏)를 시켜 예리한 단도를 숨긴 무사 10여 명을 이끌고 뒤를 따르게 하고, 다시 공손 알(公孫閼)에게 문중의 무장병 백여 명을 인솔하여 교외에 잠복시켜 변란에 대비하게 했다. 제족이 동교에 이르자 옹규가 중도까지 와서 맞이하고, 잔치를 아주 풍성하게 준비했다. 제족이 말하기를, “국사에 분주한 것은 예의 당연함인데, 이렇게 수고롭게 큰 잔치를 차렸는가?” 하니, 옹규가 말하기를, “교외에 봄기운이 가히 즐길 만합니다. 잠시 머물러 술 한 잔 드시면서 노고를 푸십시오.” 했다. 말을 마치자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제족 앞에 꿇어앉아, 만면에는 웃음을 머금고 백수를 기원하면서 권했다.
祭足假作相攙,先將右手握糾之臂,左手接杯澆地,火光迸裂。遂大喝曰:「匹夫何敢弄吾!」叱左右:「為我動手。」強鉏與眾勇士一擁而上,擒雍糾縛而斬之,以其屍棄於周池。厲公伏有甲士在於郊外,幫助雍糾做事。早被公子閼搜著,殺得七零八落。厲公聞之,大驚曰:「祭仲不吾容也!」乃出奔蔡國。後有人言及雍糾通知祭氏,以致祭足預作準備。厲公乃歎曰:「國家大事,謀及婦人,其死宜矣!」且說祭足聞厲公已出,乃使公父定叔往衛國迎昭公忽復位,曰:「吾不失信於舊君也!」
제족이 술잔을 받는 척하다가 먼저 오른손으로 옹규의 팔을 붙잡고, 왼손으로는 술잔을 빼앗아 땅에 쏟았다. 쏟아진 술에서 화광이 쪼개져 튀었다. 제족이 큰소리로 옹규를 꾸짖기를, “필부가 어찌 나를 우롱하는가?” 하고, 좌우에게 호령하기를, “나를 위해 손을 써라.” 하니, 강서와 여러 용사들이 일제히 올라와 옹규를 잡아서 참수하고 그 시체는 주위의 연못에 던져버렸다. 여공이 옹규를 도우려고 교외에 잠복시킨 무장병들은 일찌감치 공손 알에게 발각되어 십중팔구는 잡혀 죽었다. 여공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제중이 나를 용납하지 않겠구나!” 하고, 곧 채나라로 도망쳐 버렸다. 후에 어떤 사람이 (정여공에게) 말하기를, 옹규가 제씨에게 모의를 알려주어, 제족이 미리 준비를 했다고 했다. 여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대사를 그 부인과 상의하였으니 죽어 마땅한 놈이로다.” 했다. 한편, 제족은 여공이 이미 도망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공보정숙(公父定叔)을 위나라에 보내어 소공 홀(忽)을 영접해 오게 하여 복위시키면서 말하기를, “나는 옛날 군주에게 신의를 잃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不知後事如何,且看下回分解。
뒷이야기가 어찌 될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의 이야기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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