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10)
부드러운 여름밤
우리나라는 산수와 기상이 좋기로 유명하다.
곳곳마다 산수가 둘러 있어서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곡에서 흘러내리는 샘물이나,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물은 한없이 신선하고, 새맑고, 맛 좋은 음용수가 되는 것이다.
중국이나, 유럽의 음용수는 얼마나 흐리고 탁한가.
또 하나의 신이 주신 혜택은 춘하추동의 네 계절이 뚜렷하게 그 절기를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혜택 속에서 반만년의 긴 역사를 기록해오고 있는 우리 민족의 존재는 세계 어느 나라의 민족사와도 부끄러움 없이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 경주에서 80리밖에 안 되는 동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포항에는 봄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겨울에는 난류에서 불어오는 바다의 훈훈한 기류로 도리어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경주에서는 눈이 내리는데, 포항에서는 비가 내린다.
하나는 대륙성 기후권 내에 들어 있고, 하나는 해양성 기후 내에 들어 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포항에 봄이 오면, 한류로부터 불어오는 동북풍인 ‘샛바람’이 얼마나 차갑고 쌀쌀한지, ‘빙풍氷風’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외투와 스웨터를 입하立夏가 지나서도 벗지 못한다.
“포항에는 봄이 없다.”
늙은이들도 봄이 아쉬워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장미의 계절인 6월이 되면, 수은주는 갑자기 30도를 넘어선다.
봄을 가로막던 ‘빙풍’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봄의 따스함이 없었던 대신인지, 여름은 무더위를 재빨리 몰아다 준다.
식당에도, 다방에도 선풍기와 에어컨이 장치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는 더위를 물리칠 수 없는지, 길가에 나다니는 행인들 중에는, 티셔츠나 러닝셔츠 바람으로 오가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다.
좀 더 세월이 변하면, 미니도 쇼트도 아닌 해수욕복을 그대로 걸치고 다니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낙조가 지고 어둠이 깃들 때가 되면 밤의 대기가 얼마나 싱싱하고, 새롭고, 부드러운지 형언할 수가 없다.
고인이 된 노춘성(1900-1940)의 시구가 연상된다.
부드러운 여름밤
껴안고 싶은 여름밤
이렇게 시원스럽고
새뜻한 여름밤이여.
좀 센티멘털한 듯하나, 포항의 여름밤을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과연, 포항에는 봄이 없다.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있을 뿐이다.
- 한흑구(1909-1979) 『동해산문』(복간본), 득수,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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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산문 한편을 소개합니다. 한흑구 작가의 산문입니다. 오늘 소개한 산문이 실린 한흑구 작가의 산문집 『동해산문』과 『인생산문』 두 권의 산문집이 몇 달 전에 복간되었습니다. 복간집을 펴낸 곳은 ‘도서출판 득수’로 포항 양덕동에 소재를 둔 문예전문서점인 ‘책방 수북’에서 차린 지역 출판사입니다. 이야기를 듣자니 한흑구 작가의 책을 내려고 준비하면서 여의치 않아 아예 출판사를 냈다고 합니다. 한흑구 작가는 태어나기는 평양에서 태어났으나 1948년부터 말년까지 30여 년을 포항에서 산 ‘포항사람’입니다. 수필가로 알려져 있는데 시인으로도 번역가로도 활동했습니다. 현재 호미곶에 한흑구문학관이 있습니다. 이 산문은 1970년 《수필문학》에 발표되었습니다. 1970년이라면 제가 어릴 때 살았던 우리 동네(경북 울진 매화)에서는 아직 호야를 켜고 살 때입니다.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온 것이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이었고, 그때 처음 본 ‘테레비’ 드라마가 <여로>였습니다. 그 드라마를 우리는 마당에 자리 깔고 앉아 단체로 봤습니다. 250여 가구가 살던 동네였는데, 전기가 들어온 뒤 두 집이 바로 TV를 들였습니다. 그중 한 집이 우리집과 가까운 곳에 살던 요즘말로 하면 여사친, 여자친구네 집이었습니다. 그때 텔레비전은 여닫이문과 자물쇠가 달린 가구였지요.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기도 전이었는데 멀지도 않은 포항에 여름이라고 ‘선풍기와 에어컨까지 장치된다’는 문장을 읽으니 기분이 묘합니다. 사실 멀지도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 멀기는 했지요. 제 기억으로는 대구까지 가는데 버스로 포항을 거쳐 거의 예닐곱 시간을 갔던 것 같습니다. 한흑구 작가는 포항의 풍경을 그리면서 ‘포항에는 봄이 없다’고 하는데 그때부터도 포항에는 봄이 없었나 봅니다. 최근에는 포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봄이 사라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포항의 봄날의 ‘빙풍’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언젠가부터 여름이 6월이 아니라 5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봄만 없고 여름 가을 겨울은 다 있다고 하는데, 요즘은 봄뿐만 아니라 가을도 갈수록 실종 추세에 있는 것도 그때와 달라졌다면 달라진 생태일 겁니다. 여름이 무더운 거야 당연한 거겠지만, ‘그러나, 낙조가 지고 어둠이 깃들 때가 되면 밤의 대기가 얼마나 싱싱하고, 새롭고, 부드러운지 형언할 수가 없다’는데, 온 여름을 열대야로 헉헉거리며 지내는 요즘 작가가 묘사한 대기의 느낌이 혹 상상은 되나요. ‘껴안고 싶은’ ‘시원스럽고/새뜻한’ 그런 여름밤이 떠올려지기는 하나요. 불과 반백 년의 세월에 우리는 엄청 나게 변화된 생태계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포항만의 일은 아니지요. 계절이 갈수록 당겨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올해는 유난히도 더 앞당겨지는 것 같습니다. 매년 벚꽃 피는 시기가 한 사나흘씩 빨라진다고 느끼고는 있었는데 올해는 보름 이상이나 빨라졌습니다. 기후 위기가 재난 수준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과학기술로 많은 재난을 극복하고 살아왔는데 이 기후위기도 과연 과학기술로 극복할 수 있을런지요. 과학기술에 기대야 하는 것은 기댈지라도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리라고 보는데 이것저것 자꾸만 미루는 세태가 아쉽고 걱정스럽습니다. (20230906)
첫댓글 1970년 [수필문학]에 발표된 한흑구 선생의 "부드러운 여름밤" 잘 읽었습니다. 노춘성 시인도 알게 되었구요. 1970년대 포항 다방에는 여름에 에어컨을 켰네요. 도서출판 득구에도 응원을 보냅니다!! 호미곶의 한흑구문학관을 가보지 못했으니 포항사람으로 아직 여물지 못한 열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