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10)
87. 그 눈빛 2
지진 속에서 구조된 후
아이는 말을 잃었다.
순간에 사고무친이 된 아이의
멍한 눈빛
돌아가실 무렵부터
장모님은 눈으로만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부터
어머니는 혀가 점점 굳어져
말을 만들지 못하셨다.
어머니 눈빛을 보며
소년은 처음으로
혼자가 되는 두려움과
억장이 무너지는 걸 배웠다.
이제 겨우 다섯 살 혹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절망에서 구조된 절망
소년의 눈빛도 저랬을까?
억장이니, 실어증이라는 단어는
들어보지도 못했을 아이의
지워지지 않는
그 눈빛.
88. 소문
죽었다는 소문을 남기고
사라진 그가 잊혀질 때쯤
속초 근처 산길에서
건강한 노인의 모습으로 카메라에 잡혔다.
한때 세상을 채식 열풍으로 이끌었던
그에 대한 짧은 기사와 사진,
재혼한 젊은 아내의 권유로 달걀은 먹는다고 했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날 찾지 않으니
구태여 숨거나 잠적할 필요가 없는
서울 변두리에서 나는
여전히 고기도 먹고,
종종 전철 속에서 흔들리며
병원에도 다니고,
이혼도 하지 않았다.
89. 다행이다
이곳이 캐나다가 아니어서
이곳이 미국이 아니어서
이곳이 미세먼지가 거의 없는
삼척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사십여 년 가족들을 끌고
해외로 떠돌다 귀국한 지 7년
고향도 아닌 삼척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이 서툰
아이들은 둘 다 결혼해 미국에 남았다고,
갑자기 아내가 병이 들어
삼척집을 급하게 정리해서
서울 변두리, 가능한 병원이 가까운
허름한 빌라로 이사 왔다고 했다.
종종 병원 대기실이나
흡연 부스에서 마주치곤 하는
내 또래의 사내
수술 경과가 좋다고
했다.
다행이다.
90. 위태롭다
누군가 위태롭다
귀를 찢는 경적을 울리며
좁은 골목길 응급차가 당도했다.
경적이 위태로운가,
경적에 실린
누군가가 위태로운가,
경적에 휘둘리는 내가 위태로운가,
잘 모르겠다.
날카로운 경적이 골목을 빠져나간 후에도
예리한 칼날이 한동안 귓속을 후볐다.
내 유년의 친구
인혁이를 싣고 간 지도
삼 년이 지났다.
91. 지금은 없다
투명한 햇살도
금방 내린 커피도
양평, 양수리, 강화도의 노을,
몇 번 못 가본, 툭하면 산불 터지는,
강원도 고성, 눈부시게 아름답고
긴 해변,
살을 에는 바람 속에 서 있던
사내의 뒷모습도 흐려지는
지금은 새벽 세 시,
내 조그만 서재
내 의지와 관계없이
지금은 없다,
지나가는 중일 뿐
먼저 손 내민 사람이 거의 없던 세상
성질 급한 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
마지못해 잡던 의혹에 젖은
까칠한 손들의 감촉도
지금은 없다
다만 지나가는 중
"운이 나빴을 뿐
누구의 잘못은 아니야!"
제목도 배우도 작가도 생각나지 않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도
오래 입원했던 안암동
고려대학병원,
흡연구역의 새벽, 그믐달도,
암울한 시간들도
지금은 없다,
지나가는 중 그러니까
지금은 언제나 없군
지나가고 있을 뿐
92. 대전블루스
2월에
는개가 짙게 내리면
3월이 오는 거야
그러니 우울해하지 마
아니, 우울해도 좋아
생의 대부분을 유럽을 떠돌며
모국어로 시를 쓴 허수경 시인의
"조금 우울해도 좋아"라는 싯귀를
떠올려도 좋아
2월의 는개는
봄이 온다는 징후니까
많이 우울해도 좋아,
는개 내리는 기차역
기적(氣笛)은 울지 않고
기적(奇跡)처럼 고속철이 오가지만
환청처럼 기적소리가 들리는 건
늙은 탓이라더군
는개 내리는 양평역, 아니면, 강릉역
내 고향 대전역은 안 가본지
삼십 년이 넘었군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
<안동역에서>라는 노래 한 곡으로
스타가 된 가수도 간혹
<대전블루스>를 부르더군
하염없이 누군가 기다리던 소년의
대전역전의 블루스
는개와 기적소리가 온몸이 젖어 들던
93.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 접어본 지 오래되었다
딱지 접기도 오래되었다
종이학은 한 마리도 접어본 적이 없다
그대를 접는다는 말은
기대를 접는다는 말이지
사랑을 접는다는 말은 아니다
종이학 접듯
사랑은 의지대로 접히는 게 아니므로
드디어 내 사랑은 한계를 벗어나서
허공이 되었다
허공을 날으는 종이비행기가 되었다
94. 마술
눈속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빠져든다
뻔한 노래 가사도 그의 목소리에
얹히면 마술이 된다, 소름이 돋는다
이 음악이라는 마술!
당신의 맑고 따스한 눈빛에
매료되곤 했지, 비록 마술일지라도
그 순간이
내 일생의 전부인 듯!
95. 너무 집에만 머물면
연세대학생 시절, 4.19가 터져
경무대 앞까지 시위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는
무용담의 주인공 박선생님께서는
약속 없는 주말엔 종종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가신다
여든을 넘기고도
당뇨, 혈압, 고지혈도 없고
코로나에도 끄떡없는 박선생님은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아들과 함께 싸이클로
서울 상도동에서 경기도 양평까지 가곤 했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대단하시네요, 라고 맞장구를 쳐주니
너무 집에만 머물면,
저승이 보이는 것만 같아 종종
태극기를 들고 나서는 거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다
다만 정치 따윈엔 별 관심이 없다고 하셨다
코로나 이후 친구들의 부고에도
온라인으로 부조금만 보낸다고 하셨다
다음은 꼭 내 차례일 것만 같아 그렇다고는
말씀하시진 않으셨다
96. 폐업정리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일몰 전, 햇살 속을 걷고 싶어
오후 4시 45분, 햇살 아직 눈부시다
'고독은 나의 직업' 이라고 쓸까 하다가
햇살도 갑자기 고독해 보여서
피식 웃었다, 물론
고독은 직업이 아니지, 돈 한 푼 주지 않으니
개업한 지 일 년도 채 못 채우고
폐업정리에 들어선 옷가게 앞에서
잠시 어슬렁거렸다
쇼윈도우에 붙어있는 <폐업정리> 옆에
늙은 사내의 얼굴이
슬그머니 비추어지고 있었다
97. 詩人이란
지난 일에 집착하는 건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배웠지만
인생이 배운 대로 되는 건 아니지
詩人이란 본디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
아무리 운치 있게 현재와 미래를 노래해도
추억을 채굴하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무모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에 스스로 속고
그 거짓말을 노래하는 사람이다
詩人이란!
98. 투명한 얼음장
투명한 얼음장 밑으로
커다란 잉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자고 있다. 잠자는지,
얼어 죽었는지, 어떻게 아냐고?
배를 뒤집진 않았고
서로 꼭 붙어서 미동도 없다.
잉어들도 시달리며
잉어의 생을 살아내겠지
위험시기는 지났다
왜가리도 가마우지도 백로도
찍어 먹을 수 없을 만큼 덩치가 커졌고
인간들도 잉어찜으로 해먹을
생각을 접은
서울 도봉구, 강북구, 노원구, 중량구에
걸친 우이천이 고향인 잉어들
조금만 모험심을 가지면 중량천을 거쳐
한강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우이천 산책길 투명하게 얼어붙은
겨울을 걸치고
사람들이 걷고 있다.
북극에서 내려왔다는
혹독한 일기예보 속을 한 사내가
그들 틈에 섞여 있다.
99. 대부분 나의 관객은 취객들이었다
술 한잔 마시지 못하는 나의 관객은
대부분 취객 들이었다.
내가 노래하는 곳이 주로 카페거나
하우스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술 한잔 권하지 못하는 나의 노래는
취객들의 소음 속에 묻히곤 했다.
그래도 규모가 있는 음악회나
큰 행사장에 가서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두 곡 하고 내려오는 것 보다
더 정겨운 까닭은 무얼까?
술 한잔 마시지 않아도
늘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100. 봉투 두 장
그의 설교에 매료된 여자는
처음 갈릴리에서 예수를 만난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놓고,
아니, 가족 공동의 재산까지 들고
그를 따라 신흥종교로 야반도주했다.
홀아비의 손에 자란
그 여자의 젖먹이 아들이
오늘 결혼을 한다.
그의 설법에 불같이 깨달은 청년은
다니던 명문대를 그만두고
그에게 머리를 깎았다.
다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홀어머니가
오늘 입적(入寂)했다.
나는 무수한 설교와 설법을 들었으나
아귀 혹은 마귀의 목소리에
휘둘리며 살아왔고
당분간 더 비틀거리겠지.
그 이후는
내 소관이 아니다.
구세대인 나는 지금
축의금 조금, 조의금 조금
나누어 넣은 봉투 두 장
섞이지 않게 주머니에 넣고
내 허름한 집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