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차대전이 끝나고 실질적인 승리자 미국의 경제는 대 호황이었습니다. 비록 우드로 윌슨 대통령 말년에 이런저런 사건으로
정치가 불안해졌긴했지만 살림 살이가 좋았거든요
-우드로 윌슨은 마지막에 병으로 쓰러져 부인이 대신 대통령직을 수행했을정도로 건강이 악화 되었습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당연히 여론의 악화를 불러왔고, 결국 정권은 공화당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뒤를 이은
2명의 공화당 정권 대통령들 워렌 하딩, 캘빈 쿨리지시대는 특색없는 시대였고, 지극히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인기 투표서 언제나 꼴찌를 놓치지 않으시는 워렌 하딩(左)
그리고 그의 부통령이었다가 하딩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이된 캘빈 쿨리지(右)-
그리고 미국의 항공 산업은 영국과 마찬가지로 군용 항공기가 아닌 민간 항공기 쪽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말씀드렸던
슈나이더 컵의 1회 우승국이 바로 미국이었으니, 뒤쳐졌던 미국의 항공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시죠??
-제 1회 슈나이더 컵 우승자 미국인 지미 둘리틀-
그리고 1927년에는 불가능의 도전이라 불리우던 대서양 횡단을 무착륙으로 횡단하는 것이 미국인 찰스 린드버그에 의해 성공
했습니다. 뉴욕에서 이룩한 찰스 린드버그와 그의 비행기는 무려 33시간을 날아서 파리에 착륙했고 이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배를 타고 몇일씩 가야하는 대서양 횡단을 비행기로 2일이면 갈수 있었으니까요.
-대서양 횡단으로 스타가 된 찰스 린드버그-
이렇듯 모든것이 잘 되어가는 듯해보이고 경제는 호황이었지만 점점 미국 사회는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악명 높은 금주법
이 시행되어 마피아들이 활개를 펼치던 시대였고,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적절히 통제하던 미국의 기업연합체 트러스트는 이 시기
공화당 정권 아래서 제 세상을 만난듯 활개를 치고 있었고, 아무것도 안하던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그냥 평화로운 시대를 지낼
뿐이었죠.
-미국 재벌의 적 시어도어 루즈벨트-
결국 인기가 떨어진 걸 직감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공화당과 국민들은 광산 엔지니어 출신이자 유능한
각료였던 허버트 후버 후보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원래 공화당 출신이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도 그 유능함을 인정받아 장관을 지냈을정도 였습니다-
그는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이라는 구호로 192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습니
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들 알다시피 1929년 -_- 대공황이 찾아왔죠.
-1929년 10월 미국의 증시는 붕괴되었고, 이는 전 세계적인 대공황이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 미국의 항공산업 또한 된서리를 맞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_-; 이미 이때부터 B-17의 싹이 피어나고 있었습니
다. 민간항공기를 개발하던 보잉사는 주로 여객기와 우편물 수송기를 만들었는데 아시다시피 여객기나 화물기나 상당한
크기를 요구했기에-크면 클수록 좋으니까요-이미 대형 비행기를 만드는 것에는 어느정도 노하우가 쌓인 회사였습니다. 그러던
중 대공황이 찾아오자, 보잉사는 민간사업이 아닌 군대 납품에 뛰어들었고, 육군 항공대는 대형 폭격기를 배치하고 싶었기에
보잉사의 진출에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육군 항공대는 보잉사의 제품을 시험기 몇대만 사들였고 최종 경합에 우승
한건 마틴사의 B-10이었습니다. 보잉사는 다 이긴 싸움에서 진듯한 느낌에 낙담했지만 다시 '이 길이 아닌가보다'하고 민간
항공기쪽으로 돌아섰고, 그리고 B-17의 어머니뻘이 되는 여객기를 생산합니다. 전금속제에 저익 단엽을 가진 모델 247은 최초의
근대적 여객기이자 후에 개발되는 보잉의 모든 기체의 영향을 끼친 대단한 걸작이었습니다.
-모델 247기 10명의 승객을 태우고 날아다니는 여객기, 후에 미국의 폭격기 B-17, B-29등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편 천조국 미국은 2년전 B-10을 발주하고도 맘에 차지 않았는지 2년만에 새로운 차기 폭격기 사업을 진행합니다. 이 사업에
다시 보잉, 마틴, 더글라스사가 뛰어들었고 1935년 드디어 시제기 모델 299를 만들어 냈습니다.
-B-17의 시작 모델 299-
한편 대부분의 폭격기가 쌍발이었던 시절 엔진을 4개나 탑재한 보잉의 모델 299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시제기 공개
날 모델 299를 처음 본 시애틀 타임즈의 기자 리처드 윌리엄은 거대한 동체와 여러대의 기관총을 탑재한 모습을 보고 감탄
하여 "날아다니는 요새(Flying Fortress)라고 별명을 지어주었고, 이는 B-17이 그대로 이어받아 애칭이 되었죠. 미국 육군도
모델 299의 성능에 감탄했습니다. 마틴사나 더글라스사 모두 쌍발기였지만 B-17은 4발 중폭격기였으니 마치 해군이 거대한
전함 바라보듯 모델 299를 바라봤으니까요. 당시 모델 299를 지켜보던 육군 항공대의 프랭크 맥스웰 앤드류스 장군은 경합이
끝나기도 전에 이 모델 299를 65대나 선주문 했습니다.
-프랭크 맥스웰 앤드류스 장군, 그가 모델 299를 보고난뒤 "어머 이건 사야돼"-
프랭크 맥스웰 앤드류스 장군은 4발 중폭격기가 육군 항공대의 기본 이론 즉 전편에 소개한 빌리 미첼이 이탈리아서 가져온
전략 폭격 이론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고, 다른 기업의 2발 기체보다 이 보잉의 4발 중폭격기의 성능이 월등했기에 아주 흡족해
했습니다. 하지만 보잉사에 불운이 찾아옵니다. 최종평가 시험에서 모델 299가 추락해버린것이었습니다.
-추락한 모델 299-
가뜩이나 4발 중폭격기라 다른 두 기업에 비해 비싼 입찰가격에 고개를 저었던 육군 관계자들 앞에서 이렇게 추락해 버렸으니
보잉사는 또 다시 더글라스사에 패해서 도전적이었던 4발 중폭격기 사업을 접어야했습니다. 선주문한 모델 299 65대 역시 취소
되어버렸죠. 보잉은 크게 낙담했습니다. 하지만 희망의 빛은 남아있었는지 4발 중폭격기가 꼭 필요하다고 느낀 육군 항공대의
헨리 아놀드 장군이 보잉에게 시험기 명목으로 YB-17이란 코드명을 준뒤에 13대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지요.
보잉은 1937년 정식 계약을 맺고 대대적인 개보수를 거친뒤에 YB-17을 육군에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전략 폭격이
한걸음 나아가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쑥재배 하려면 4발 중폭격기는 꼭 필요해-
첫댓글 쑥농사의 달인 ㅋㅋ
보잉은 본래 단순한 목재회사였었지요...ㅋ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서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한 케이스...
어머 이건 사야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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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발 중폭격기........괜히 보잉이 아니군요;
과연 쑥재배의 달인이구나!
"어머 이건사야 돼"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