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왕국 비류백제(1)
-비류는 죽지않고 백제를 세우다
<대해상제국의 위용(농담) 『대쥬신제국사』2권 p57 (김산호, 동아출판사(1993))>
"비류백제설" 이라고 하면, '그게 뭔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많으실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비류' 는, 바로 백제 건국담에 나오는 비류-온조 형제 가운데 형쪽인, 바로 그 비류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에서 백제의 시조왕이 되는 사람은 동생인 온조였다. 그런데 '비류백제' 라니, 이것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80년대에 나온 소수 견해 가운데 하나인데, 재야 계열에서 주로 인용, 부연되어 왔다.[1] 요즘에 와서 보면 확실히 그 영역에서의 명성이 환단고기 같은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8,90년대를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나름대로 유명한 이야기였고, 화제성도 충분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비류백제설' 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인지 그 배경과 함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려 한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삼국사기』백제본기로부터 온조왕의 건국담을 취재해보자.
A. 온조의 백제 건국
(1)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 졸본에 왔을때, 이곳에는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차였는데, 마침 주몽이 오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그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형의 이름은 비류, 동생은 온조였다.
(2) 왕이 죽은 뒤, 주몽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부여에 있을때 얻은 아들(유리)이 오자, 주몽은 그를 태자로 삼았다.
(3) 이에 비류와 온조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떠났다.
(4)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처음 온조는 나라 이름을 '십제' 라고 했다.
(5) 결국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좋은 곳이 못됨이 드러났고, 비류는 위례성에 와서 동생의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편안히 사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비류의 백성들은 위례에 흡수되고, 온조는 나중에 나라 이름을 백제로 바꾸었다.
그런데 사실『삼국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 온조의 이야기 말고도 또 다른 형태의 백제 건국 전승이 하나 더 실려 있다. 바로 여기에는 온조가 아닌 비류가 백제를 세웠다고 나오는 것이다. 사료에서 해당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B. 비류의 백제 건국
(1)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라고 한다. 그 어머니는 연타발의 딸 소서노로 북부여왕의 서손 우태와의 사이에서 비류, 온조 형제를 낳았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 와서 살고 있었다. 주몽이 처음 졸본에 와서 고구려를 세웠을 때, 소서노와 결혼했다. 소서노는 고구려의 창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주몽은 비류, 온조 형제를 친아들처럼 대우했다.
(2) 그러나 부여에서 주몽의 친아들인 유류(유리)가 오자, 주몽은 그를 태자로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3) 비류는 온조에게 "여기 살면서 울적하게 근심하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좋은 땅에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낫겠다." 라고 하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를 떠났다.
(4) 비류는 패(浿), 대(帶)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
위 두 이야기에는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특히 (A)온조 건국의 전승은 (B)비류 건국의 전승에 후일담이 붙은 것 같은(A-(5)) 인상도 준다. 그러나 어쨌건 비류와 온조는 동일 인물이 아니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두 이야기, '비류의 백제 건국' 과 '온조의 백제 건국' 은 서로 모순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백제의 기원에 대해서는『북사』등 중국 사료에 나오는 구태(仇台)의 건국 전승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C. 구태의 백제 건국(『북사』에서)[2]
(1) 구태는 부여왕 동명(東明)의 후손이다.
(2) 구태는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는데, 요동 태수 공손탁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3) 처음에 1백 가구(百家)가 물을 건넜(濟)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했다.
이것은 앞의 두 이야기와는 또 상당히 달라보인다. 백제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여러가지 서로 다른 건국담이 전해진 것인가?
사료간에 불일치가 나타날때 이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수 있다. 어쩌면 '불일치한다' 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한 진상을 드러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백제 건국이 여러가지 형태로 전해온다는 점은 오랫동안 연구대상이었고, 일정부분 여기에서 착안한 연구 가운데는 기념비적인 것들도 있다.
'비류백제설' 도, 기본적으로는 여러 종류의 백제 건국 전승 사이에서 보이는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다. 1982년에, 재야사학자 김성호 박사는『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이라는 저서를 통해 '백제의 기원' 을 설명하는 독자적인 가설을 제기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중국 사료에 나오는 구태는 비류와 동일인물이다.
-비류는 패, 대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도달했다. 여기서 나오는 패수는 예성강에 비정되는데, 만약 고구려에서부터 미추홀에 도달할때까지의 여정을 표현한 것이라면 어째서 압록강이나 대동강같은 다른 큰 강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패, 대 두 강을 건넜다" 는 것은, 이 여정의 출발지는 고구려가 아니라 예성강에 바로 인접한 북쪽, 즉 황해도 지역의 재령강 유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기사이다. 즉,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는 일단 황해도 지역에 한번 정착했다가 다시 남하하여 미추홀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북사』에 나타나는, 구태가 "대방의 옛 땅" 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2. 비류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웅진이다.
-『주서』백제전에서 웅진에 "시조 구태의 묘" 가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구태(=비류)는 웅진에 묻혔다. 즉, 비류는 마한을 공격하여 금강 일원까지 세력을 넓히고, 웅진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는 온조왕 36년에 나오는 "고사부리성" 축조 기록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3. 온조와 비류는 따로 나라를 세웠다. 한강 유역은 "온조 백제" 였고, 충남을 중심으로 한 "비류 백제" 가 따로 있었다. -온조는 처음에 직산에 도읍했으나, 비류가 보낸 군대에 패하여 한산으로 옮겨갔다. 이 사건은『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 13년에 "호랑이 다섯마리가 성에 들어왔다" 고 비유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온조 백제는 한참 뒤까지도 남쪽으로는 웅천까지만 차지하고 있었다. 웅천은 안성천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마한을 토멸하고 웅진에 자리잡은 세력은 역시 비류 백제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이 이론에 나름대로 근거와 논리가 갖추어져 있다는 점에 놀라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가설들은 추리소설처럼 읽히는 경우가 많으며, 독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진실을, 증거와 이성적 논리에 입각하여 찾아가는 과정에 동참하며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추리소설이 아니므로, 가설에 나오는 증거는 사실은 증거가 아닐 수도 있고, 동원된 논리는 틀렸을 수도 있다.
당장 독자분들께서는, 위에 정리한 김성호 박사의 주장 가운데 '참으로 이상한 점' 을 몇개라도 찾아내실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이 글의 목표는 그런 점들을 세세하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주장이 그리하여 어디로 귀착되는가 살피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은 "비류백제의 역사" 와 "일본의 국가기원" 을 다루고 있다. 부록을 제외하고도 3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필자의 능력으로 제대로 요약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우나, 앞서 기술한 '비류백제의 존재' 에 관한 가설로부터 이어지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일단 아래와같이 축약해 보았다.
<1> 고대 한반도에는 고구려, 신라, (온조)백제 외에도 지금까지 잘 모르고 있던 '제 4의 왕조' 가 존재했으며, 비류가 건국한 (비류)백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왕국은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서남부를 지배했다.
<2> 비류백제는 지방 통치 체제로 담로제를 시행했다. 또한 비류백제는 대해상왕국으로, 전성기에는 요서와 일본 열도의 일부 등 해외도 그 범위에 들어갔다.
<3> 한반도의 비류백제 정권은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인해 멸망당했다.
<4> 그러나 그 중심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마침내 기내 정권을 세우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천황국가' 의 기원이 되었다.
비류백제설을 다룰때 <4>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주장이 꼭 비류백제설 전체의 핵심 주제는 아니지만, (두가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일 수는 있겠다) 끝내 인용되고, 부연되며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논리로 보면 결국 이 "비류백제 잔존 세력의 일본 건국" 이라는 것은, 비류백제의 존재가 분명히 입증되고 중심세력의 "피난" 도 입증되어야만 비로소 그 최소한의 전제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비류백제설에서는 과연 이를 해결했는가?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문제에 중점을 두고, 비류백제설에서 설명하는 "일본의 국가 기원" 을 소개해보기로 하겠다.
[1] 예로, 컷을 인용한『대쥬신제국사』에서는 비류백제설을 스토리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다. 이 책에서 비류백제설에서 어느 부분을 중시하고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것은 이론이 실제 수용된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의된다.
[2] 구태 전승도 사료에 따라 다르다. 이에 대한 분석은 윤용구,「仇台의 백제건국기사에 대한 재검토」(백제연구 39집, 2004)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