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 홀린다는 것은?
- 작품을 통해서 본 시창작의 고통
이 순 권 (시조시인)
1. 시혼(詩魂)에 대하여
(1) 시란 사물의 존재를 육화시키는 행위
여러 시인이 시를 정의하는 것을 보면, 시 쓰기란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라거나 ‘시적 경험은 존재의 샘을 여는 행위’라고 말한다.
존재란, 철학적인 의미는 논외로 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실체로서의 대상을 이르며 다른 사물과 구분되는 그만의 생명의 본질이라고 본다. 따라서 같은 꽃이라도 정원에서 자태를 뽐내는 장미와 꽃다발에 묶인 장미는 꽃자체가 지니는 본질적 형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어찌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원로시인 오탁번 선생은 시란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설파하였다.
(2) 시인은 영혼의 모성(母性)이다.
시조문단의 원로이신 정완영 선생은 ‘시인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손질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시인이 과연 무엇을 창조하는가 하는 것은 지난한 과제이지만 이 말뜻 속에는 시인도 어떤 생명의 창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만큼 뼈를 녹여내는 진통이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또 조지훈 선생도 ‘시인은 영혼의 모성’이라고 말하고 시인의 요건은 시를 생산해낼 수 있는 시정신의 소유자라야 함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시인을 묘사한 시 두 편을 감상하자.
「시인」 - 이영유
분노는 질 좋은 양식이다
별로 말이 없는 기억은 옷을 벗고
벗은 옷들의 흐트러짐 속의 몸을 벗고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까지를
속속들이 언어의 무덤에 바친다
별달리 내놓고 자랑할 만한 직업도
못 된다 분노는 이기심이나 수치
파렴치까지도 알뜰히 먹어치우는
또는 게워내는 질 좋은 밥상이다
시인에게는 현재가 없다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위 두 편의 시를 보면, 시인을 둘러싼 환경이 얼마나 척박하며 또한 이 세상이 정신적 황폐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점점 여위어 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역설적으로 ‘분노’를 좋은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만연된 정신적 병폐를 먹어치우면서 모든 기억을 언어의 제단에 바치지만 어디 발 디딜 곳이 없는 존재로 보인다.
이쯤에서 실토하지만 필자는 학자도 아니고 일개 풋내기 시인으로서 이 글은 학문적 접근과는 아예 거리가 먼 극히 주관적인 기술에 불과하다. 따라서 학술적인 논거와 다르더라도 너그럽게 접어주시기 바란다. 다만 시정신이 깃들이지 않은 작품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이러한 사실을 마음속에 가다듬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뜻으로 쓴 것이다.
홍윤기 시인은 ‘저급한 시는 문학사에 남지 않는다. 평생 한 편만 쓴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쓰자’고 우리를 채찍질 한다.
2. 시창작의 고통
(1) 핏빛 자해의 울음소리
먼저 시 두 편을 살펴보자.
「자화상」 - 이수익
제 몸을 부수며/ 종이 운다.
울음은 살아있음의 명백한 증거
마침내 깨어지면 울음도 그치리.
지금/ 존재의 희열을 숨차게 뿜으며
하늘과 땅을 느릿느릿 울려 퍼지는
종소리,/종소리,
그것은 핏빛 자해의 울음소리
「시」 - 이우걸
무릇 시란 정신의 핏빛 요철이므로
장님도 더듬으며 읽을 수 있어야 하리
집나간 영혼을 부르는 성소의 권능으로
얽힌 말의 실타래 같은 이미지의 굴레 같은
그 터널을 절뚝거리며 내 독자는 걸어 왔구나.
그러나 양파속이여 아 드러날 허방이여!
〈자화상〉에서 제 몸이 부서지는 아픔이 없는 곳에서 시는 태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고통이란 실은 ‘존재의 희열’이 아닌가? 시는 고통의 발설이며, 그 울음소리에의 동참이 바로 시의 시작인 것이다.
〈시〉에서 작가는 시란 정신적 고통에 못 이겨 부딪치고 자빠지면서 새겨놓은 피로 얼룩진 요철인데도 독자가 난해한 말과 이미지의 미로 같은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위 두 작품에서 보듯 제 몸을 부딪치며 번지는 핏빛 자해의 흔적이 번득이는 곳에서 시가 태어난다.
(2) 고졸(古拙)의 경지
정완영 선생은 그의 시론에서 시는 오뇌의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와야한다. 그러나 다 된 것은 읽기 쉽고 듣기 쉬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처음에는 어렵다가 다음에는 기교를 부렸다가 마지막에는 고졸의 경지로 들어가야 좋은 시가 나온다고 가르친다.
서숙희 시인의 시조 한 수를 보자.
「밥 같은 시를 쓰고 싶다」 - 서숙희
흐릿한 상(像) 하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밤
밤은 깊어가고 시의 문전은 멀고도 높은데
허기만 둥글게 부풀어 밥 생각이 간절하다
중략(…‥)
시린 공복의 손으로 밥솥을 열 때 만나는
저 지순하고 뜨거운 한 사발의 찰진 욕망
그득히 고봉으로 퍼 담는/ 아, 밥 같은 시 쓰고 싶다
시린 공복을 채워주는 찰진 욕망의 고봉밥 같은 시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가슴에 와 닿으며 작품 자체로도 고졸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3) 시마(詩魔)
시인의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감질만 내는 작품, 시인이 쫓아가면 도망쳐버리고 시인이 포기하면 다시 손짓해대며 어지간히 애간장 태우기 때문에 시인들은 시 쓰기를 마치 마가 낀 것처럼 시마라고 부른다.
‘시마’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일찌기 <취음(醉吟)>이라는 시에서 “주광(酒狂)에 더하여 시마까지 끌어와 한낮부터 슬피 읊다 저물녘이 되었네.”라고 노래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조 한 수 감상해 보자.
「가을 시마」 - 윤금초
각을 뜨고/ 살을 바르는
번제의 시간인가?
활활 타는 불 지짐의
끝물 단풍/ 제단 같은,
이 지상/ 슬픈 목록을
다 사르는/ 연기 같은
모든 생명들이 몸을 태우고 고난을 견디며 시마에 젖고 있다.
(4) 고통과 각성의 의미
T. S. Eliot의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이라는 의미는 불모의 황무지 주민들에게 4월의 봄비와 꽃향기가 주는 자극은 잔인하며 그것은 ‘고통을 동반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무지는 무의미한 인생에 대한 불평으로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정신적 황폐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라고 말한다.
시 두 편을 다 같이 살펴보자.
「금풍생이」부분 – 김영애
시 한 편 쓴다는 일이
물고기 이름에 환장하여 미치는 일일까
중략(·····)
시 한 편 쓴다는 일이/ 가시 다 발라내고 나면
입에 들어갈 무엇도 별로 없건마는
샛서방질에나 족할 특별한 맛으로
탁월한 미각을 지닌/누군가를 홀릴 수 있어야 하리
「시작(詩作)」 - 임성구
너무도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불안한 밤 추위에 떨며 달력을 뜯어낸다.
별자리/더듬는 키 작은 바람/모로 누운 여러 날
가슴 졸이며 쓴 시가 빗물에 번지던 날
번득이던 부호마저 낙뢰로 묻혀버리고
그런 날/낮도 밤 같아/이정표가 안 보인다.
수렁을 빠져 나온 아프리카 난민촌에서
물기둥을 보았다, 까만 얼굴 환한 웃음도
한 됫박/별 물을 퍼 올리면/갈증도 저리 빛난다.
창작과정의 좌절과 고통을 잘 담고 있으며 새로운 눈을 뜬 뒤 이를 희망의 각성제로 삼을 것을 함의하고 있다.
3. 시창작의 방향 모색
(1) 시조는 빛나는 은유
먼저 두 편의 시조와 시 한편을 감상하자.
「시조 1」 - 김해인
주인 떠난 빈집의 헛간에 버려진
녹슨 농기구 정도로 모두 다 생각하지
누구도 넘보지 못할 빛나는 은유인 걸
숨겨놓은 명검도 임자를 만나야만
빛나는 검으로 세상에 거듭나지
아무나 캐내지 못할 언어의 보석인 걸
「바위」 - 이영도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귀 먹고 눈 먼 너는 있는 줄도 모르는가.
파도는 뜯고 깎아도 한번 놓인 그대로…
「시인의 사랑」 - 윤제림
잘 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그대의 이름을 써보네
만년필을 고르면서,/ 가느다란가, 굵다란가
나의 이름을 적어보네/ 시라고 써보네
새 만년필로/ 시 한 편 잘 써서
지갑에 넣네.
<시조 1>에서는 절제와 여백 위에 빛나는 은유와 더불어 언어의 연금술을 몰라보고 아직도 시조를 고리타분한 담론 정도로 생각하는 한심한 작태를 꾸짖고 있으며
<바위>에서는 사랑은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는 사랑의 말이며 드러내지 않고 말할 때 사랑의 외연은 한없이 넓어진다고 하겠다.
<시인의 사랑>을 보면 어느 날 만년필을 고르면서 무심히 써보는 그대의 이름, 새 만년필로 써보는 나의 이름이 바로 시인 것이다.
(2) 시(시조)는 변용의 미학
청나라 문인 오교는 그의 평론집 「위로시화(圍爐詩話)」에서 ‘산문은 밥, 시가는 술’이라고 비유했다고 한다. 산문은 쌀로 밥을 짓듯 재료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시는 쌀로 술을 빚듯 재료의 형태와 성질이 변한다. 밥과 산문만 있으면 세상은 너무 건조할 것이다. 마땅히 술과 시를 곁들여야 인생이 윤택해진다고 그는 서술하였다.
‘조이스 킬머’의 「나무들」이라는 시에 ‘나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를 본 적이 없다. (중략 ·····) 시는 나처럼 어리석은 자가 만들고 하느님께서만이 나무를 만들 수 있다.’고 토로하였다. 위의 시적 진술을 보면서 누군가 ‘시인은 시라는 한 양식이 지닌 생명감각인 리듬을 사랑한다. 그리고 진정한 리듬은 시인이 발견한 시적 진실의 힘에 의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 의미를 음미해 본다.
우리는 시를 창작할 때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자 이미지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어느 시인이 기술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염두에 두자고 말하고 싶다.
‘시적 상황이나 배경을 설명하는 언어나열을 줄이고 투박하고 묵직한 속뜻 하나를 명징하게 세우는 함축에 힘쓴다면 행간에 숨겨놓은 의미의 파장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3) 시조의 아름다움 (빛깔과 향기)
「사과에게 말 걸기」 - 졸작
- 시마
뉘엿한 빛살 아래 발그레 물든 두 볼
허브 향기 그윽한 금단의 열매 감싸고
베돌다 찾아든 둥지,/ 은유의 새 깃들인다.
속 떨리는 고요 속에 시의 날개 조탁하다,
아픈 생살 추스른다, 불콰한 껍질 깊이
질척댄 늪을 헤치고/ 저며 가는 하얀 밤
한 평생 기댈 그대 낯익은 손 내밀지 않고
앙상한 몸 삭은 자리 몇 톨 씨앗 움이 틀까.
주린 입 가슴에 묻고/ 별빛 수액 긷는다.
<시작노트> 잘 익은 사과는 붉은 뺨과 달콤한 향기가 마치 농익은 여인 같다. 필자는 이 금단의 열매(시조)를 훔쳐 날개를 달고 피안의 기슭에 가 닿고 싶다. 투박한 손으로 날개를 조탁하다 속살만 베어내고 온밤을 지새워도 머릿속은 하얘질 뿐 손 내밀어도 잡히는 건 없다. 필자에게 시마란 창공을 훨훨 나는 ‘날개 달린 사과’를 빚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역의 등짐일 뿐이다. (필자 : 2010. 월간문학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