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냉면 3종 세트
윤은숙
여름은 젊음의 계절이라는 노래가 있지만, 여름은 냉면의 계절이다. 냉면의 본고장인 이북 지역에서는 한겨울에 뜨끈한 아랫목에서 먹는 것이 제 맛이라고 하는데, 그건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과 동치미가 겨울 식품이기 때문이고 요즘은 식품에 있어 제철이라는 의미가 없다. 그저 더우니 시원한 냉면 한 그릇 생각날 밖에.
나는 냉면광이다. 물냉면 회냉면 할 것 없이 좋아하지만 맛은 가린다. 물냉면은 어느 음식점, 회냉면은 어느 음식점, 하고 정해 놓고 먹었는데 시카고에서는 딱히 찾을 곳이 없다. 그래도 링컨과 포스터 근처 다래정이 회냉면은 맛이 있지만 멀어서 그것 한그릇 먹자고 거기까지 가기가 뭣하다. 운동 후에 시원한 물냉면을 들이킬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내 입에 맞는 것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혹시나 하고 어쩌다 먹으면 역시나 실망감을 넘어 분노가 솟구치는 것은 냉면에 대한 나의 미각이 별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쩌랴, 올해는 일찌감치 냉면 육수를 잔뜩 만들어 얼려 놓았다. 양지머리를 고아 기름 걷어 1회분 씩 지폴락에 얼리고 동치미를 담아 새큼한 맛을 내어 적당히 섞어 먹는데, 면이 직접 뽑은 것이 아니어서 섭섭하지만 그 욕심까지 낼 수야 없지 않은가. 냉면을 음식으로 치지 않던 남편도 밥이냐 냉면이냐 물으면 냉면을 택하니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보람이 있다.
‘사돈 오이 먹는 풍습 다르다'는 말이 있고 입맛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기본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냉면에 있어서 만은 내 식대로 먹는 사람만 친구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선 남편의 냉면 식성도 내게는 한참 멀었다. 겨자유를 듬뿍 넣어 먹기 때문이다. 육수가 맛이 없을 때는 겨자로 맛을 내기도 하지만 겨자맛 때문에 정성껏 만든 육수가 제 맛을 잃는 것이 나는 분하다. 얼마 전 함께 운동을 한 지인에게 ‘나'의 냉면을 대접했는데, 식초를 지나치게 부어 먹는 걸 보고 ‘나'의 냉면이 아까왔다. 나는 심심한 가운데 느끼는 쨍한 맛을 냉면맛이라고 아는데 시중에서 파는 인스탄트 냉면은 달고 시고 강한 맛이 난다. 따라서 대부분 그 맛에 익숙해 있다. 식당에서도 이른바 쨍한 맛을 낸답시고 ‘사이다'를 넣는데 향료 냄새가 입맛 달아나게 하지만 음식 맛이란 시대를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그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니 식성을 두고 논란을 벌일 생각은 없다. 다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냉면만 먹을 수 있으면 한국 생각이 덜 날 텐데 싶을 뿐이다.
며칠 계속 냉면을 먹었더니 다른 맛이 생각난다. 중국식 냉면이다. 중국에는 없단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집에서 먹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혜화동 보성고등학교 뒤에 살던 친구네 갔더니 그 근처 중국집에서 시켜주었다. 그 무렵 우리집에서는 집에 앉아 시켜다 먹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신기했고, 처음 먹는 그 맛이 아주 독특해서 기억이 새롭다. 그 때 먹었던 맛을 ‘원조'라고 한다면 그런 맛을 내는 중국냉면은 서울에서도 거의 없다. 대동각에서 작년에 냉우동이라고 팔았는데 아주 조금 비슷할 뿐이라 나는 기억을 살려 ‘원조' 냉면을 만들어 본다. 사실은 참 간단하다. 닭육수에 피넛버터와 와사비를 적당히 섞어 육수를 만들고 칼국수 용 국수를 삶아 차게 씻은 뒤 오징어 새우 방울도마도 오이를 얹으면 그만이다. 먹어본 적이 없다는 남편 앞에서 대단한 요리를 하듯 우쭐댈 만큼 남편도 좋아 한다.
중국 냉면 해 먹느라 사온 면이 너무 많다. 이번엔 콩국수 차례다. 기구가 발달한 요즈음 음식 하기가 옛날에 비하면 참 편하다. 하지만 콩은 끓으면 부르르 넘쳐 적당히 삶기가 힘이 든다. 나는 바보같이 요리책에 나온대로 물을 넉넉히 넣고 삶느라 애를 먹었었는데 이제야 꾀가 나서 처음에는 아주 조금만 넣어 끓여서 간 후에 농도를 맞추어 먹게 되었다. 깨를 넣어 갈면 고소하다. 이렇게 쉽게 하는 데는 비싼 믹서기의 공이 크다. 시중의 20불 짜리로는 잘 갈리지 않는다. 더구나 껍질이 남아 꺼끌꺼끌하다. 비싼 물건의 장점은 물론 성능이 좋기도 하지만 본전 생각이 나서 자주 사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냉면 육수를 만들어 냉동해 놓고 마른 냉면을 사러 한국 식품점에 갔더니 내가 원하는 상표는 없고 자사(自社) 제품만 있었다. 냉면광인 나로서는 비록 마른 면일지라도 아무거나 살 수는 없어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몇 봉지를 사왔다. 다음날 신문을 보니 또 다른 식품점에서 세일을 한단다. 나는 10불 넘게 손해를 보았다. 냉면 먹을 때마다 10불 10불, 손해 노래를 불렀다. 시원하게 먹으려던 냉면 때문에 열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단돈 10불 때문에 열내는 내 모습에 더 열이 나 삶은 면발을 찬물에 손이 아프도록 씻었다. 면발은 잘 씻어 끈기를 빼야 맛이 있다.
냉면을 준비해 놓으니 올해는 더위가 그리 심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냉동칸을 열어 잘 얼어있는 육수를 보면 마음 뿌듯하다. 모든 준비가 그럴 것이다. 하루 살 인생이 아니니 오늘을 살지만 또 그것이 내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번 폭풍에도 전기가 나가지 않아 냉장고 속의 냉면 육수가 온전하니 여름 준비 잘했다고 하늘이 주는 상이 아닌가 싶다.<2011.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