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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3-01 18:29:30,에 게시 조회 : 7,107 의 글 입니다.
* 1985年 '해태'와의 입단 협상결렬로 잠시 몸 담았던
실업팀 '韓國化粧品'시절의 宣銅烈 선수
지난 2003년 2월 13일자로 공식 해체를 선언한 바 있는 실업야구 (막내) 팀 "제일유리" 에 이어,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한국전력" 마저 3/5일까지로 마감되어 있는 올 시즌 선수등록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이제 우리나라 실업야구팀은 단 한 팀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며, 반세기 이상의 오랜 연륜에 걸쳐 한국야구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채. 우리나라 야구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에 직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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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막을 내리는 실업야구의 종말을 보면서 40년이상을 야구와 벗해 온. 저 개인적으로도 몹시 아쉽지만,
이러한 사실은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960년대를 통털어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다가 '70년대 들어 고교야구의 열풍과 대학세의 두드러짐에,
점차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프로야구라는 새 물결에 완전히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20년간을 명맥만 유지한 채 근근히 꾸려 엮어온 실업야구의 오랜 한숨과 안타까움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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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實業野球界의 발자취를 돌아보자면...
1905년. 이 땅에 야구가 도입된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8.15 해방까지 40년간 간헐적(間歇的)으로 명멸했던 몇몇 성인야구팀을
선례(필두)로 하여, 해방후 1947년에 태동한 "한성실업연맹"의 결성시 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한 우리나라 실업야구는.
그로부터 10년이 채 안되는 1950년대 중반. 아직 6.25 전쟁의 상흔(傷痕)이 채 가시기도 전의 어수선한 국내정세속에서
이미 성인야구로서의 권위있는 대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으니, 다름아닌 "白虎旗 全國野球選手權大會" 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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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첫 대회가 열렸으며 대회창설의 주역은 "京鄕新聞社" 였지요.
그 전통을 메이저신문사답게 오랫동안 고수해 오다가 '90년대 후반들어 (가령) 대회 참가시 서울과 지방대학간의 출전보조금 (차등)
지급에서의 금액책정건을 포함한 불화로 인하여 대회에 불참하는 지방학교가 생기는 등 이런저런 문제가 불쑥 야기되었고,
그래서 결국 경향신문사가 주최권을 야구협회로 넘기게 되면서, 오늘에 와서는 "全國綜合選手權大會" 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백호기야구가 우리나라 야구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실로 엄청나다고 사료됩니다.
(실업야구의 산 증인이자, 가장 전통있는 대회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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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첫 대회는 春, 秋季로 나눠 한 해에 두번 시행하였으며, 첫 우승은 "陸軍야구단"과 "金融組合聯合會"가 공동으로 차지했습니다.
1959년부터 年 단일대회로 치르기 시작하였고, 야구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해 오다가, 1967년에 창설된 통산 4번째 고교야구 전국대회인
"中央日報社" 주최의 "大統領盃" 전국 고교야구대회및 그로부터 4년뒤. 1971년 "韓國日報社(日刊스포츠)" 가 창설한 "鳳凰(大)旗"
전국 고교야구대회(통산 5번째 전국대회) 등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기존의 "靑龍旗(1946)" "黃金獅子旗(1947)" 의 2개대회와
더불어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서울개최만 4개대회로 늘어나는 등 실업야구의 인기에 점차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대학야구 또한 '7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점차) 張 孝祚, 崔 東原, 金 始眞, 金 勇男, 金 城漢, 李 萬洙 등 이미 고교시절부터 야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던. 청소년대표및 국가대표(급)의 (당시) 만만치 않은 야구기량을 지닌 스타급 선수들이 속속 대학생이 되어
그라운드를 누비게 되니, 춘.추계 대학연맹전을 비롯해서 대통령기 대학야구, 대학선수권 등 (매) 대학야구대회마다
성동원두를 뜨겁게 달구기에 이르러, 마침내 실업이 오랫동안 혼자 누려왔던 인기(강세)에 고교.대학이 협공작전(?)을 펴며
찬물을 끼얹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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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1960년대 당시만 해도 고교졸업후. 대학으로 진학하는 선수에 비해, 곧바로 실업팀으로 입단하는 선수가 더 나은 대접을
받았으며 야구기량면에서도 한수 위로 인정했을 정도였는데, 어느새 이젠 거꾸로 역전되니 실로 격세지감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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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앞서) 몇년전부터 위기의식(?)을 느껴온 "백호기"측은 자구책의 일환으로 1974년 제 24회 대회부터 대학팀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게 됩니다만, 역시 아직은 한 수 높은 실업야구의 수준에 대학팀들이 계속 밀려오다가(?) 1982년 제 32회 대회에서 마침내
"仁荷大學" 이 대학팀으로선 감격적인 첫 우승을 일궈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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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야구연맹으로선 연맹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하여 또 다른 몸부림(?)을 하게 되어 實業團리그, 金融團리그로 분리해
각 리그 1위팀끼리 최종적으로 맞붙게 한다든지, 라이언즈리그와 타이거스리그로 나눠 최종승자를 가리기로 하는 등
별별 방안 모두를 강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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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서울개최대회의 운동장여건이란 게, 서울운동장 야구장(現 동대문운동장) 한 곳 뿐인지라,
늘어난 야구대회까지를 성동원두 한군데서 모두 감당하기에는 대회일정 짜기에 있어 애로사항이 많았으며,
그에 따라 다른 운동장을 섭외하여 함께 사용하며 대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역할(?)을 매번 담당해야 했던 건
고교야구, 대학야구도 아닌 실업의 몫이었지요.
결국 실업은 농협구장, 제일은행구장 등을 전전하며 경기를 치르게 되면서 차츰차츰 실업야구에 대한 열기도 식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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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리그전과 토너먼트는 각기 스타일이 다릅니다.
리그야, 오늘 패한다 쳐도 내일 다시 이기면 순위변동이 있을 수 있고, 그래서 여유가 생기기도 하지만 토너먼트 방식은 패하면
바로 탈락이라는 녹다운 게임인지라, 매 경기가 결승일 수밖에 없기에 사실상 흥미가 배가된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고교, 대학이 펼치는 (每) 토너먼트 전국대회가 실업연맹전(리그) 경기보다는 박진감이 더하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당연히 야구팬들의 구미를 한층 당기게 된다는 그런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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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나라 실업야구의 공식기록은 1964년 시즌부터가 되겠습니다.
물론 1956년부터 이미 실업야구대회가 열려 (매년) 대회를 치러오긴 했지만,
단일시즌제를 도입한 첫 해를 뜻합니다.
바로 한 해 전인 1963년에는 우리나라 성인야구사상,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첫 우승이라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지요.
1956년. 실업야구 첫 대회(추계)에서는 "農業銀行(현 농협)" 이 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감독은 (故) "金 永祚" 씨(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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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기록 원년(?)인 1964년의 연맹전 우승은 "企業銀行" 이었으며,
감독직은 "金 洋中"씨(님)가 맡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꽤나 많은 게임수였던 48경기나 치렀고,
32승 5무 11패(승률 : 0.744) 라는 호성적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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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그 해의 개인상 수상자를 살펴본다면 :
* 最優秀選手賞 : 申 鎔均 (크라운맥주 투수)
* 最多勝利投手 : 申 鎔均 (24승 5패) * 당시로선 대단한 승수입니다(승률 0.828 역시)
* 防禦率 優秀投手 : 金 永悳 (해운공사 소속 투수로 0.32) *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대 기록임.
* 打擊賞 : 裵 壽讚 (기업은행 소속으로 0.336)
* 홈런賞 : 陳 元柱 (제일은행 소속으로 6개) * 하지만 당시엔 목재배트 사용에다 수준급 투수들이 즐비했습니다.
* 新人賞 : 柳 永洙 (제일은행 투수) 선수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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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실업야구계는 1976년 "롯데 자이언츠" 야구단과, 이듬해 "韓國化粧品"의 잇단 창단으로 인기몰이에 있어
확연히 고교. 대학세에 밀리지는 않았습니다. 위에 언급한 신생팀들의 신선한 바람과 더불어 黃 圭奉, 李 光殷, 李 善熙, 金 在博,
尹 東均, 朴 哲淳 선수 등 걸출한 스타선수들의 맹활약. 그리고 1977년 "제 3회 大陸間컵 野球大會" 에서 우리나라 야구사상
첫 국제대회우승이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실업 코리안시리즈"엔 만원관중이 연일 성동원두를 뒤덮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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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옛 명성을 되찾고자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1979년~'81년까지 3년간은 "野球大祭典" 이라는 기발한(?) 대회도 있었습니다.
출신고등학교별로 고교, 대학, 실업팀에 소속된 선수들을 학교별로 총 망라하여 학교의 명예를 걸고 자웅을 겨뤘던 대회였는데,
1~2회대회 우승은 "慶南高가" 2연패(連覇)했고 3회때는 "仁川高" 가 왕좌에 올랐습니다.
당연히(?) 각 팀마다 실업선수들이 매 경기 주전멤버로 나왔고, 대학선수조차 겨우 간간히 뛰는 마당에 고교선수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그라운드를 밟는다는 건, 사실상 언감생심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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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1시즌을 보내고 올해로 22회째 시즌을 맞은 프로야구도,
1970년대 중반쯤에 (이미) 태동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젊은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여기서 잠깐> 당시 '프로야구 창단권유' 제1후보였던 6개 그룹을 얘기하겠습니다.
서울-롯데, 부산-럭키, 대구-삼성, 인천-현대, 대전-동아건설, 광주-삼양사(이상 6개 그룹)
그리고 제2후보로는 : 서울-대우, 대구-포철, 인천-대한항공, 대전-한국화약, 광주- (광주만) 금호, 해태, 미원 등 3개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걸림돌이 많아 그로부터 7~8년을 더 기다려 마침내 1981년말. 프로야구 6개팀이 탄생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정식 출범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따라 자연스레 스타급 선수들이 실업에서 프로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20년간을 실업야구는 앞서 언급한대로
실업. 대학이 함께 맞붙는 백호기대회를 제외하곤, 관중석에 빈자리가 점점 늘어가더니,
급기야 선수 가족. 친구. 애인 등 몇몇사람만 관중석에 자리한. 그야말로 썰렁한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여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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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 백호기 대회만큼은 스탠드가 그런대로 꽤 찼었지요.
왜냐하면, 실업과 대학이 동시출전하는 유일한 대회인지라, 흥미진진(?) 했으며
대학 재학생 응원단이 매 경기시. 자리를 메워줬기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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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그렇게 보낸 실업야구는 199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잇단 팀 해체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전통을 자랑하던 商業銀行, 農協 등이 해체라는 수순을 밟았습니다.
일례로 1994년 당시의 실업팀 면모를 살펴본다면, 第一銀行, 韓一銀行, 韓國化粧品, 포스콘(후에 포스틸로 변경), 尙武, 韓電의
6개팀이 남아 있었는데, 軍팀인 상무를 제외하면 5개 팀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전 실업야구 전성시대중 한 때는 오늘날의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팀수와 같은 14개나 되는 팀이 서로 용호상박(龍虎相搏)하며 치열한 접전을 펼치던, 복에 겨운(?)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 다음해엔 한국화장품이 해체되었고 새로 "現代電子"가 신규가입했습니다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단을 출범시키기위한 현대그룹의 물밑작업내지 우선 발판성(?) 창단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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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전후하여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실업대회도 3개나 됩니다.
부산시장기(부산)를 비롯하여 서라벌기(대구), 그리고 회장기(마산) 실업야구대회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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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주저앉을 수 만은 없다는 실업야구계의 몸부림은 결국(?) 1997년 7월 22일~ 26일까지 5일간 주중에 열렸던
"제 15회 實業, 社會人 野球選手權大會" 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15회째 대회였지만, 사실상 14회 대회까지는 오로지 실업팀들만 참가해 왔던
實業選手權大會였다는 것 쯤은 여러분도 잘 아실 거예요.
15회 대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社會人野球 팀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던 것이지요.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나라 야구사상 처음으로
실업팀과 사회인팀이 맞붙는 역사적인 대회였지요.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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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출전했던 사회인야구팀들은 :
豊起産業 , 豊星電機 , 現代海上(火災保險) , 第一유리의 4개팀이었습니다.
* 大宇自動車까지 5개팀이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대우자동차가 기권함으로써 4개팀만 출전.
풍기산업 : 상무에 1-15 패배
풍성전기 : 포스틸에 2-8 패배
현대해상 : 한일은행에 5-10 패배
제일유리 : 1회전 부전승. 2회전에서 포스틸을 3-1로 꺾고 4강진출 !(사회인야구팀의 첫 승)
* 준결승에서는 한일은행에 2-14로 대패함.
* 제 15회 대회 우승은 상무가 한일은행을 8-5 로 누르고 차지했습니다.
@ 저도 뜻깊은 대회를 보고자, 개막일에 (당연히?) 성동원두에 앉아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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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98년 "제 16회 대회" 에는 '95년보다 3개팀이 더 늘어난 7개팀이 참가하였는데,
그 팀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SK 에너지 , 현대해상 , 삼성전자 , 기아자동차 , 대우자판 , KCC , 제일유리 (이상 7개팀)
이 대회에서 사회인야구의 자존심 제일유리는 결승까지 진출하게 됩니다만,
결승전에서 상무에게 2-16으로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 다음해인 1999년부터 제일유리와 현대해상의 두 팀이 실업야구로 흡수되어 각 실업대회에 출전하게 되면서,
자연히 실업및 사회인선수권대회는 두번의 대회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른바 "外換危機" 라는 상황의 어려운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두 팀의 (용기있던) 참여는 야구계에서 가히 충격적이었으며,
우리나라 스포츠계에서 한동안 화제거리로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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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이 시기를 전후하여
어려운 여건에서
大韓野球協會 會長(직)을 맡아
2001년 1월 물러나기까지의 재임 4년간.
무려 30억원이라는 막대한 사재를 털어넣으며
야구협회 살림을 책임져 온
鄭 夢允(1955) 회장(님)의 노고를,
야구인이라면, 어느누구라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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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000년이 되자, 상무팀이 "프로 2군리그"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하였고, 결국 실업에서는 더 이상의 존재가치를 둘 수 없다는
판단하에 (시들해진) 실업에서 빠져나간 뒤. 남은 팀이라고는 이제 4개뿐. 그나마도 현대해상이 겨우(?) 3시즌만을 뛰고
2001년 시즌을 끝으로 실업에서 다시 사회인야구로 궤도수정(탈퇴)하였고,
20 여년 전통의 포스틸마저 지난해로써 해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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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결국) 실업의 마지막시즌이 되고 말았던, 지난 2002 시즌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실업야구대회가 (정말) 열리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신문. 방송에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슬그머니 사라진 3개대회를 제외하고도 해마다 실업야구는 5개대회를 치러왔습니다.
春, 夏, 秋季리그 및 實業選手權. 그리고 대학팀과 함께 출전하는 綜合選手權(舊 白虎旗)까지.
하지만, 프로야구와 해외진출 선수들의 활약상에만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는 매스컴에.
유독 실업야구만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는 말씀이지요(하다못해, 고교야구 전국대회 기사마저 朴 贊浩, 金 炳賢 선수에 비해
1/10 쯤으로 작게 실리는 판인데, 하물며 실업야구야 오죽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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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근래 들어 야구의 종주국임을 자처하는 미국이. 아마아닌 아마야구(?) 세계최강수준을 자랑하는 쿠바에게 번번히 덜미를
잡힘으로 인하여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 왔기 때문에 마침내 국제무대에서 발 빠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러,
결국 국제대회에 프로선수(마이너리거 위주)를 내보내는 등 획기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게 되었고 그 여파로 각 나라마다
얼떨결에(?) 프로.아마의 개념이 갑작스레 사라지는 등. 급변하는 세계야구 추세에 발맞추다 보니,
우리나라 야구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일테면. 아시안 게임, 대륙간컵,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선수 명단을 매 대회
당연히(?) 프로선수위주로 뽑는다든지 함으로써, 어느새 아마(대학선수)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가뭄에 콩 나듯 함을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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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잠시 방향을 돌려 *****
세계적인 추세가 이렇듯 달라진 가장 큰 이유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부터 야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배경이
결정적으로 자리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끝으로 야구는. 올림픽 시범종목이라는 --- 전 세계 야구인및 야구팬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너무도 가슴아팠고 사실, 아무런 지은 죄도 없이 수십년을 붙어다녔던 지긋지긋한 꼬리표인 --- 야구 주홍글씨(?)를 떼게 되었으니까요.
긴 세월동안 야구에 무관심해 온(?) 유럽제방(諸邦)들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고나 할까요?...
그간 야구 불모지였던 유럽대륙 내에서도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탈리아. 네델란드를 비롯해서 스페인. 프랑스 등 몇몇 나라가
소리소문 없이(?) 야구에 관심을 보여, (종종) 국제대회에 숨어있던 모습을 나타내면서 유럽지역에도 야구가 점진적으로 확산.
보급되다가 올림픽 정식종목이라는 거대한 타이틀에 (그만) 눈을 크게 부릅뜨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1938년. 제 1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었고 원년우승을 안았던 영국만큼은 지금까지 요지부동인 채로
야구를 외면해 왔다는 것이지요.
영국뿐 아니라, 독일을 포함하여 북구 유럽 여러나라들에선 아직도 야구와는 담을 쌓고 지내고 있습니다.
이젠 이 지구상에서 야구의 마지막 불모지(?)인 아프리카 대륙마저 야구가 전파되고 있는 시점임에 불구하고.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또 다른 일면인. 야구가 올림픽 메이저종목으로 정해진 뒤
이제 겨우 3번의 대회를 치렀을 뿐인데, 다음 2004년 올림픽부터 또다시 야구를 제외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몇차례에 걸쳐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거예요.
하지만, 야구가 정말 어렵게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된 만큼, 이대로 밀릴 순 없다는 국제야구연맹의 대처방안 강구.
또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임원들 중 야구옹호론자(?) 끌어 모으기와 편 만들기. 그리고 (국제)회의석상에서.
야구 종주국으로서의 자존심을 건 미국의 강력한 입김 등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한 끝에 간신히(?) 야구폐지론자들의
큰 목소리를 일단 차기 올림픽까지 억눌러 달래놓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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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돌아와서 *****
어찌됐든, 그리되고 보니 자연히(?) 아마야구. 특히 스타플레이어 한사람조차 없는(?) 실업야구는 신문.방송에서도 관심권밖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지요. 세인들의 뇌리에서도 무관심 일변도로 점점 멀어지고 잊혀져 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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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까지가 지루하게(?) 늘어놓은 실업야구의 변천사(?)였고 대략 살펴보았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오늘도 즐기고 있는 사회인야구시대입니다.
어쨌거나, 이제 실업야구가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춘만큼.
여러분이 뛰고 있는 야구가, 이 땅의 야구에서 프로를 제외하고는
성인야구로서의 마지막 종착지(?)인 것입니다.
물론, 사회인야구가 예전의 실업야구처럼 자리를 잡아가려면 아직 미흡한 부분,
산적해 있는 문제거리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쯤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예전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탈피해
한 단계 발돋움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만족해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긍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최근 [대한야구협회]에서는 올 시즌은 비상체제로 끌고 가고
내년부터는 보다 권위있는 각종 대회를 열겠노라며
사회인야구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선은. 실업팀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여 전국적으로 산재한 각 리그에서 추천을 받아
최강수준의 8개팀 정도를 선별. 리그전및 실업선수권대회를 치르겠다고 합니다.
벌써 대회일정까지 나와있고요.
문제는 선수출신들만 대회에 참가시킨다는 것이지요.
비선수 여러분들 중에도 선수출신 못지않은 기량을 지닌 사람도 꽤나 많을텐데,
그렇다면 선수개인적으로는 몹시 서운한 조항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또한, [국민생활체육협의회]는 [대한야구협회]가 소속되어 있는 [대한체육회] 산하 단체이며,
[국민생활체육 전국야구연합회]는 [대한야구협회] 소속 단체인지라,
양 단체 상호간 (혹여) 서로 맞물리는 부분이 야기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과연 [대한야구협회]의 통제에 따라줄 것인가...
라는 문제도 대두되어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적으로 3,000~ 혹은 4,000 (餘) 팀이나 된다는 사회인야구팀을
[國民生活體育 全國野球聯合會] 또는 [國民生活體育協議會] 에서 관리한다는 게
사실. 여간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社會人野球에 몸 담고 계신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와 참여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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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면...
* 선수출신이라면 :
여러분은 현역시절 자신이 못다 이룬 야구를 다시 꽃피우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예전 현역못지않은 기량으로 (거듭) 돌아가야겠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군요.
다시깔게 된 야구마당인데, 야구쟁이(?)로서 그저 대충대충 뛰놀 수는 없잖겠어요?...
어려서부터 죽어라 매달려온 야구인데 말이지요.
* 비선수라도 :
뭔가 모르게 달라질 사회인야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아니, 선수출신만 받겠다는 조항을 반드시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열심히 땀 흘려, 마침내 당당하게 함께 뛸 수 있는
그런 날이 하루빨리 오게 되길 바란다는. 그런 부탁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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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실업팀 "韓國電力" 야구단의 최고참 "白 宰宇(1963)" 선수가 오랫동안 정들었던.
그러나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전성기에 프로의 유혹을 뿌리치면서까지 고수해온,
실업 유니폼을 벗으며 토로(吐露)하던 얘기가 생각납니다.
"요즘은 회사업무를 새로익히느라? 무척 분주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이다.
야구는. 내 어린 시절부터 오늘까지 나의 모든 것을 바쳐온 운동이었기에..."
"그리고,
내 젊음을 아낌없이 살랐던 야구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간다는 서글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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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한국야구 발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다가
이제 수명이 다하여(?)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빛 바랜 실업야구의 안타까움을,
이 나라 야구 100년사 에서
그 오랜 세월동안 명멸해 간,
숱한 실업야구선배들 몫 까지
白 宰宇선수 혼자 외롭게 짊어진 채
예전의 팔팔했던 국가대표선수.
또는 대학졸업시 프로에 지명됐던
일급선수로서가 아닌,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어
실업야구의 마지막을
그저 눈물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마저도 정든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우울한 선수자격으로
그래도 난,
내 포지션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노라면서
그늘진 얼굴로
오늘 이 시간.
더없는 아쉬움을 가슴에 안고
어쩌면... 白 宰宇선수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 프로야구만 야구냐? "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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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baseball 123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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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吟... (카암캄한 밤중, 심야에) 어릴 적~ 구거채게 실렸던 "의좋은 형제의 비하인드 스톨이" 마냥, 이렇듯~ 남 모올래 애쓰신 "알디라"님께 증말루 감사드려요...^^ *^_^*
★ㅋ 의좋은 형제...^^* 늘 좋은 모습들만 봐 주셔서 감사드리며, 몇 년이 흘러서 더 역사적인 사실로 느껴집니다. 좋은 글들을 계속 게시하여 주셔서 꾸준히 옮겨올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 吟... '사횐약우'에 대한 글 소재가 거덜났습네당... /// * (하여) 에효~ 플러스, 으이구우우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