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南平文氏) 화원읍(花園邑) 본리리(本里里, 인흥리, 仁興里) 마을
대구수목원(大邱樹木園) 들머리 정부대구지방 합동청사 앞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화원, 옥포 가는 길을 주행하다 보면 금방 왼편으로 남평문씨세거지(南平文氏世居地), 인흥서원(仁興書院)으로 드는 표지판을 만난다. 그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200여 미터 들어가면 본리동(本里洞 ) 문씨세거지 입구가 된다. 거기서 서쪽으로 올려다보는 낮은 산허리에 추계추씨(秋溪秋氏) 노당(露堂) 추적(秋適) 선생을 모신 인흥서원이 있다.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시조(始祖)는 호남(湖南)의 나주(羅州) 남평(南平) 고을 대택(大澤) 가 높은 바위 위에 수신(水神)이 점지한 금궤(金櫃)에서 난 탄생신화의 인물이란다. 왕에게 거두어져 성을 문(文), 이름이 다성(多星), 자(字)를 명원(明遠)으로 삼고 장성하여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輔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傅)에 이르렀으며 수 98세, 시호(諡號)가 무성(武成)이란 사람이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화원읍) 인흥(仁興) 마을은 고려말의 충신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후손인 남평문씨가 세거하는 집성촌이다. 문익점의 18세손 문경호(文敬鎬, 1812∼1874)라는 분이 19세기 중엽 터를 잡아 만든 마을이란다. 남평문씨의 중시조로 알려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이 대구에 입향한 것은 대체로 500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곳 인흥에 자리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라는 분이었다. 그는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원래 고려의 대찰인 인흥사(仁興寺)가 있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오늘의 인흥마을을 새로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을의 개창(開創)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단다. 그것은 곧 마을의 개발에 앞서 일단의 택지계획을 마련한 후에야 건축을 실행한 점이라 한다.
세거지에 최초로 건립한 건물은 1920년을 전후해서 지은 재실 용호재(龍湖齋)로 현재 광거당(廣居堂)이 있는 곳이다. 저택이 들어선 것은 1800년대 후반으로 처음에는 초가로 시작했으나 그 후 100년에 걸쳐 지금의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현재 70여 채의 기와집이 한울 안에 정연히 들어서 있는 이 마을은 건축 연대가 200년 미만이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 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세거지 구성과 주위 경관의 조화는 어느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마을이라 한다.
마을 초입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건축물은 우리 고건축 가운데 하나의 빼어난 전형이자 근세 목조 건물의 정수라는 평가를 듣는 수봉정사(壽峰精舍)이다. 1936년 수봉공을 추앙하기 위해 세운 정사로 일면 수백당(守白堂)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一)자형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현판은 위창 오세창(吳世昌)의 전서체(篆書體) 글씨다. 건축 비용만도 당시 논 2만 평분이란다. 수봉은 문영박(文永樸, 1880-1930)의 아호다.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의 아들이고 이곳의 지킴이를 자처하는 중곡(中谷) 문태갑(文胎甲)에게는 조부가 된다. 혹은 수백당이라는 자호를 쓰기도 하였는데, 자는 장지(章之)로 학행일치를 강조한 유학자이자 애국지사이다. 그리고 광거당은 사우강론(士友講論)의 장으로 각종 문헌을 간행하는 문화의 산실 구실도 했다. 오약산만고(吳藥山漫稿), 이대산실기(李大山實記), 이기휘편(理氣彙編), 제양록(制養錄) 등이 이곳에서 편찬되었다. 광거당은 영남에서 연수(淵藪)가 되다시피 문풍을 크게 떨쳤고, 많은 수의 장서는 수봉(壽峰)의 영구 보고(寶庫)일 뿐 아니라 원근의 사람이 이용하는 도서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문씨 세거지의 중심축이 되는 건축물이 수봉정사(壽峰精舍)와 광거당(廣居堂)이고, 부속 건물로 보기 드믄 문중문고(門中文庫)인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는데, 이 문고의 당초 이름이었던 만권당(萬卷堂)을 개칭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들을 중심축으로 하여 삼대소가(三大小家)와 아홉 제택(第宅) 등 열두 집, 70여 채 2백 50여 칸의 기와집이 계획적으로 조성돼 있다. 집들은 일(一)자, 기역자, 디귿자, 미음자 등 저마다의 필요에 따른 크기와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정확한 축에 따라 구축된 가기(家基)는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주거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배치여서 우리나라 취락 중 아주 드문 예가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의 남평문씨들은 후손들을 위하여 중국에서 수많은 책을 수입하여 인수문고라는 사재서고(私財書庫)를 만들어 보관하여 후손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남평문씨 세거지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지금으로 말하면 도서관 역할을 했던 인수문고다. 1910년에 만들어 졌는데 전부 한문으로 된 책이다. 이 책들을 모두 중국에서 구해서 배로 목포로 가져와 목포에서 마차로 이곳 대구 달성까지 운반했다니 그 정성에 감복해서라도 후손들이 열심히 공부했을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일보에 한국의 명문가에 대해 연재한 조용헌쌀롱에서 인용했다.
인수문고는 1910년 나라가 망한 뒤에 세운 문중문고(門中文庫)로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중문고이다. 나라가 망한 뒤에 총 들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 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자존심을 죽이고 일본사람 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남평문씨들이 선택했던 삶의 방식은 제3의 길이었다.
책을 수집해서 만권당을 세우는 일이 그것이었다.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고, 문씨 자녀들을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였다. 인수문고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는 8500여 책에 달한다. 권수로 환산하면 2만 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도산서원의 장서가 약 4400책이니까, 양으로만 따진다면 도산서원보다 더 많은 분량이다.
문씨들은 전 재산을 털어서 국내는 물론 해외의 귀중도서들을 구입하였다. 중국에서 구입한 책들은 상하이에서 배편에 선적하여 목포에 도착하곤 하였다. 당시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에 수백 권 분량의 비싼 책들을 운반하는 일은 큰일이었다. 전라도 한쪽 끝인 목포에서 경상도 대구까지 운반하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운반하는 코스보다 몇 곱절 더 힘든 일이었다. 88고속도로 이전까지는 영호남을 횡단하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달구지로 고개를 넘어야만 하였다. 책을 실은 소달구지가 목포를 출발하여 남원을 거친 다음에 함양, 거창의 험난한 산길을 넘어 대구 인흥리까지 오는 길은 빨리 와도 보름이 걸리는 일정이었다.
인수문고는 이처럼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투자한 결과이다. 만권당은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수문고는 해방 이전부터 전국의 호학(好學)하는 명사들이 즐겨 찾았던 살롱이기도 하였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간에 편안하게 머무르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문씨들이 편의를 제공하였다. 근래에도 고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방문하면, 오래도록 후손인 문태갑(82)씨가 내방객을 맞이하였다고한다. 국회의원과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한 문태갑씨가 팔순이 넘도록 노구를 무릅쓰고 이곳에 거주 하면서 내방객들을 맞이하고 인수문고를 안내해 주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