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애]
⚫단종 2년(1454) 5월 25일 서울 정능동[貞陵洞, 현 貞洞) 사제私第에서 출생
세조 6년(1460) 5-6세. 활달하고 영기가 발양하여 시가에서 장난할 때 뭇아이들이 두려워 피함 (무례하고 거만한 자는 채찍, 그들이 파는 고기나 두부 등을 갈려 물건을 감춤)
⚫성종 3년(1472) 19세. 순천 박씨와 결혼(합천군 야로현 未谷藍橋洞 처가살이, 서실書室 한훤당寒暄堂) 장인은 대대로 성주 가천에서 살았는데,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과 이웃. 가야산을 왕래하며 글공부를 했는데, 내원사에서 오래 머물렀음. 뒤에 현풍현玄風縣 서쪽 마산리馬山里 솔례촌 率禮村 대니산戴尼山 아래에서 생활(증조부 참의공參議公 김중곤金中坤 살던 곳)
⚫성종 4년(1473) 20세. 딸을 낳음(남부참봉 진주 하박에게 출가)
⚫성종 5년(1474) 21세. 늦은 봄 김종직金宗直의 함양군수 시절 김굉필金宏弼 곽승화郭承華를 처음 만나 시를 지어줌
⚫성종 6년(1475) 22세. • 딸을 낳음(훈련원정 성주 이장배李長培에게 출가, 친구 이승언李承彦의 아들)
• 늦봄, 김종직의 <유두유록遊頭流錄>서문에서 중 무비無比가 김대유金大猶(김굉필의 字) 신정지申挺之와 오른 적이 있었음을 밝힘
⚫성종 8년(1477) 24세 여름. 김종직의 선산부사 시절 이승언李承彦, 원개元槩, 이철균李鐵均ㅡ 곽승화郭承華, 주윤창周允昌 등이 선산향교善山鄕校에서 공부
⚫성종 9년(1478) 25세. 장남 언숙彦塾출생
• 비오는 날, 5월 8일 고령에 유배중인 김맹성(*註3)에게 <奉和止止堂> 두 수를 지어 올림
• 겨울. 김맹성을 찾아가 사흘을 머물고 돌아 온 뒤<伏呈止止堂> 보냄
*註3 : 성종 9년(1478) 5월 8일. 김맹성은 고령에 유배됨. 성종13년(1482) 7월 23일 직첩을 돌려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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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0년(1479) 26세.
• 동우凍雨 내리는 초봄. 서울로 올라와 서울 호현방리好賢坊里의 집에 거처.
• 무더운 여름, 편지와 함께 첫봄 이별의 정회를 담아서 칠언율시 <止止堂>을 지어 보냄
• 7월, 김맹성이 화답하는 7언율시를 지어 보냄
• 12월, 서울에서 다시<述懷 二絶 上止止堂>를 보냄(김맹성이 합격 기대하는 화답시 보냄)
⚫성종11년(1480) 27세.
• 2월 24일, 생원시生員試에 3등 32인으로 급제(최연손崔連孫의 방)
• 6월 16일, 원각사중을 죄줄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들어 주지 않음(*註4)
• 아들 언상彦庠을 낳음(언상의 아들은 『경현록』을 만들었던 김립金立)
*註4 : 성종11년(1480) 6월16일 성균관 생원으로 있던 김굉필이 원각사 중의 처형에 관해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이 사건은 5월25일 장령 이인석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이후 격렬한 상소가 지속적으로 올라왔음. 김굉필이 상소를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후 논의가 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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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3년(1482) 29세
• 봄, 죽림칠현竹林七賢 결성(남효온南孝溫 · 홍유손洪裕孫 · 이정은李貞恩 · 이총李摠 ·
우선언禹善言 · 조자지趙自知 · 한경기韓景琦 그리고 뒤에 이현손李賢孫 · 노섭盧燮 · 유방柳房 합류) (실록*註5)
• 봄-여름 어름. 성균관에 사장을 비방하는 시가 벽에 나붙음 (윤8월20일 보고 이후, 유생 옥에 가둠)
• 9월 27일 옥에 갇힌 유생 수십여 명을 방면함
• 4월, 김종직에게 시를 주어 김종직이 5수를 화답함(*註6)
• 9월, 딸을 낳음[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조부 정응상鄭應祥에게 출가]
*註5 : [연산군일기 4년8월20일] “홍유손이 공초하되, 지난 임인년 봄에 조자지(趙自知)의 집에 갔었는데, 남효온(南孝溫)·수천정(秀泉正) 정은(貞恩)·한경기(韓景琦)·우선언(禹善言)·무풍정(茂豊正) 총(摠)도 또한 모였으므로, 나는 효온에게 말하기를 ‘현재 세상이 벼슬하기에는 부당하니 우리들이 죽림 칠현 竹林七賢이라 호를 하고 방랑한 놀이나 할 뿐이다.’ 하니, 효온이 ‘그러자.’ 하여 각기 소요건(逍遼巾)을 준비하고 술과 안주를 싸가지고 동대문 밖에 모이기를 약속하여 성 밑 죽림(竹林) 속에서 그 두건을 쓴 다음 효온이 우두머리가 되고 유손이 차석이 되어 수천정·무풍정·우선언·조자지·한경기와 칠현(七賢)이 되었는데, 명양정(明陽正) 현손(賢孫)·노섭(盧燮)·유방(柳房)이 뒤늦게 와서 서로 대해 몇 순배를 마시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예에 의해서 젊은 자에서 윗사람까지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파했다.’ 하였습니다. 효온은 이미 죽었고, 무풍정 총은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니, 그 나머지 조자지·정은·한경기·우선언·현손·노섭·유방 등을 잡아다가 추국(推鞫)하소서.”하니, 그대로 하였다. *註6 : 성종13년 6월27일 홍문관 교리 김흔金訢이 자신의 후임으로 홍문관 응교로 김종직을 추천했으나 윤허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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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4년(1483) 30세.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하다가 이때 이후로 다른 글을 읽고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 가득
⚫성종15년(1484) 31세. 아들 언서彦序 출생 • 서울을 떠나 춘천에 머물던 김시습이<회구懷舊>를 지어 김굉필 등을 그리는 시를 지음 (매월당집)
• 9월말~10월초. 이심원李深源과 남효온이 성서城西/성남城南에서 학동 가르치는 김굉필 방문(성광유고*註7)
*註7 : 연보에는 李深源이 南孝溫과 함께 글을 읽고 있는 城南 別墅를 찾은 것을 38세 때인 성종22년(1491)로 추정하고 있지만, 잘못임. 강원도 이천에 부처되어 있던 이심원이 성종 13년(1482) 7월26일 해배됨. 성종 16년(1485) 2월 4일 이조참판 김종직은 유지광과 이심원의 서용을 모두 찬성했지만, 이후 대신들의 극렬한 반대로 이심원의 서용은 성사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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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6년(1485) 32세.
• 4월 남효온의 금강산 유람 때 송나암松蘿庵에서 대유大猶의 이름과 그의 절구絶句를 봄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 9월 남효온의 송도 유람 때 현화사 석탑에서 대유大猶와 덕우德優 [辛永禧]의 이름을 봄 (송경록)
• 이조참판으로 있던 김종직이 조정에 건의하여 실시하는 일이 없어 시를 지어 풍자
• 7월 17일 김종직이 김지金漬 천거로 탄핵 받아 이조참판 사퇴, 동지중추부사. 첨지중추부사 (실록)
• 겨울, 남효온이 <自詠15수>와 <又>를 지어 김굉필의 김종직 비판과 지향을 비판
⚫성종17년(1486) 33세.
김일손이 스승 비판한 김굉필을 나무라는 시 5수를 지어 보냄(탁영집)
⚫성종18년(1487) 34세.
• 10월, 딸을 출생(강소姜訴의 아들인 진주 강문숙姜文叔에게 출가)
• 9월 30일, 남효온 지리산 유람때 정상 천왕봉에서 김굉필의 이름 확인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 12월 12일, 부친상을 당하여 오설리烏舌里 보로동甫老洞 언덕에 장사지내고 삼년 여묘살이를 함
⚫성종20년(1489) 36세.
탈상한 뒤,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독실하게 강론하며 지냄
⚫성종21년(1490) 37세.
봄, 야성冶城에서 오산鼇山으로 김일손을 찾아가 함께 가야산 해인사에 놀러감 (내원사 조현당기內院寺釣賢堂記). 연보에서는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이때로 봄
⚫성종22년(1491) 38세.
• 3월 무렵 밀양으로 낙향한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다 <노방송路傍松>을 지은 것으로 보임
• 6월, 아들 언학彦學 출생
⚫성종23년(1492) 39세.
절교했던 남효온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 갔으나 돌아 눕고 보지 않음
⚫성종24년(1493) 40세. 딸을 출생(동래 정성린鄭成璘에게 출가)
⚫성종25년(1494) 41세.
5월 20일, 경상감사 이극균이 유일遺逸의 선비로 생원 김굉필을 천거,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됨(*註8)
*註8 : 성종 25년(1494) 5월 20일 慶尙道觀察使 李克均이 隱逸의 선비를 천거하여 아뢰기를 “생원 金宏弼은 性理學에만 專一하게 마음을 집중하며 조행[操履]이 방정하여 굽혀서 기용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하니, 남부참봉에 제수되었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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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1년(1495) 42세.
• 2월 13일 이전, 김굉필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실록, 임희재 편지(*註9)
명양부정鳴陽副正 이현손李賢孫이 모친을 모시고 현풍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했다는 것이 이때로 보임. 안음현감으로 있던 정여창을 비여천에서 만났다는 것도 이 무렵일 것으로 보임
• 10월, 연보에서는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 종8품)으로 옮겼다고 함 .(실록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 11월 18일. 이의무가 유일로 천거된 김굉필은 참봉, 정철견鄭鐵堅은 아직 초야에 있다고 아룀(실록)
• 12월 28일. 합천 일민逸民, 김굉필을 기용하여 북부주부北部主簿를 제수除授(*註10)
*註9 : 연산4년(1498) 7월 14일, 이목 집을 수색하여 연산 1년 2월 13일 직후에 씌어진 임희재가 이목에게 보낸 편지 발견됨. *註10 : 연산군 1년(1495) 12월 28일 “慶尙道 善山 逸民 鄭鐵堅을 기용하여 軍資監主簿, 陜川 逸民 金宏弼을 기용하여 北部主簿를 제수하였다. 철견은 학식이 있으되 벼슬길을 구하지 않고 시골에 물러앉아 자제들을 옳은 길로 가르쳐서, 그 아우 錫堅과 아들 鵬이 모두 일시의 이름난 사대부였으며, 宏弼은 식견이 넓고 지조가 굳으며 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淸하면서 좁지 않고 화하면서 시속에 흐르지 않는 지경에 거의 도달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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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2년(1496) 43세.
• 1월 5일. 김굉필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종6품)로 삼음(실록*註11)
• 2월 9일. 사간원에서 정철견•김굉필에게 인견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를 물으라 함(실록)
• 12월 28일, 사헌부감찰(정6품)인 김굉필이 청천군(김포현) 한환의 옥사를 국문하게 함 (실록*註12)
*註11 : 연산군 2년(1496) 1월 5일 “權景禧를 漢城府右尹으로, 金宏弼을 軍資監主簿로 삼았다. 이에 앞서 경상도 관찰사 李克均이 宏弼을 遺逸로 천거하니, 명해서 參奉을 재수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참 봉의 직품이 낮다 하여 발탁해서 위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註12 : 연산군 2년(1496) 12월 28일 “이보다 앞서 淸川君 韓懽이 良人 金哲山의 밭을 빼앗아 나무를 심고 밭 갈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강제로 鄭秋의 논을 사드렸고 金浦邑의 아전을 구타하니, 司憲府가 탄핵하여 監察 金宏弼을 보내어 그를 국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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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3년(1497) 44세.
1월 9일,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는데(*註13) 옥송을 판결함이 한결같아 모두 복종했다고 함.
*註13 : 연산군 3년(1497) 1월 9일 “呂自新을 永安道 관찰사에, 朴處綸을 형조 참의에, 李守恭을 사헌부 장 령에, 金宏弼을 刑曹佐郞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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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4년(1498) 45세.
• 7월 14일, 이목 집을 수색하여 연산 1년 2월 13일직후의 임희재 편지 발견(실록)
[내용] 물론物論이 심해 착한사람들 가버리니 시 짓지 말고 사람 방문하지 말라. 생명 보전 어려움. 정석견鄭錫堅 파직, 강혼姜渾 사직하고 하동 수령, 강백진康伯珍 사직하고 의령 수령, 권오복權五福 사직하고 수령이나 도사가 될 모양, 김굉필 사직하고 시골 떠남. 이철견李鐵堅•윤탄尹坦 이 의금부지사가 되는 것을 대간이 간언해도 듣지 않음(*註14)
• 종류鐘樓에 이극돈李克墩의 탐취耽聚 사실(*註15)이 방으로 나붙음. 임희재任熙載 자신도
낙향하여 지낼 생각이니, 이목李穆(*註16) 그대도 공주에서 올라오지 마라.
• 7월17일, 김일손金馹孫이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수업했다고 아룀 (실록)
• 7월 19일, 윤필상尹弼商 이 김굉필은 김종직이 더욱 애중히 여겨 석방할 수 없다고 함(실록)
• 7월 26일, 김굉필은 붕당을 지었으니 장 80대를 때려 먼 지방으로 부처하라 함(실록)
• 7월 26일, 윤필상이 김굉필을 희천으로 정배하라고 아룀(실록)
• 8월 16일, 김굉필 사평: 입신의 바름과 제행의 높음은 옛사람과 방불(실록)
*註14 : 연산군1년(1495) 2월 13일 사헌부 지평 최보가 이철견, 윤탄, 그리고 정석견에게 국문을 청함. 하지만 이철견과 윤탄을 그대로 의금부지사에 임명하고, 정석견은 성균관동지는 사표에 해당되니 개임改任 하겠다고 함. 그리고 윤탄은 지속적인 탠핵을 통해 연산 1년 11월 1일에 이르러 체차시킴. *註15 : 성종 25년 10월 12일, 이조판서 1년 이상을 지냈고 천재지변에도 음주한 사실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사직을 청함 *註16 : 연산군 1년(1495) 1월 27일 이목을 공주로 귀양 보냄. 연산군 2년(1496) 12월 15일 이조에서 사가독서 14인 가운데 이목을 선출. 연산군 3년 12월 21일 이목에게 성종실록 편찬의 공으로 향표리 한 벌을 상으로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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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6년(1500) 47세.
5월7일, 평안도가 흉년으로 유배온 사람 구휼하기가 어려워 순천으로 옮김(실록*註17)
*註17 : 연산 5년(1499) 모친의 상소로 잠시 집에 와서 모친을 보고 갔다거나 이듬해 유배지가 옮겨진 것이 “모친의 상소로 가까운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거나 “여름에 비가 오지 않고 천둥이 일어나 대궐앞에서 사람이 죽자 감등減等되어 순천으로 옮겨졌다”는 연보의 기록은 사실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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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8년(1503) 50세.
조위曺偉와 유배지에서 함께 어울렸으나 시 짓는 것을 일삼지는 않았다고 함
⚫연산10년(1504) 51세.
• 9월 26일, 김종직의 문도로 장형 받고 부처된 김굉필을 참형에 처하라 함(실록)
• 9월 26일, 김굉필의 아들 및 형제를 결장하여 외방으로 내쫓으라 함(실록)
• 10월 7일, 김굉필을 철물 저자에서 효수하라 함(실록)
• 10월 8일, 김굉필이 죽으며 무슨 말을 했나 물으니 한 마디 말없이 죽었다고 아룀(실록)
• 11월 9일, 김굉필과 형제를 장 100대에 먼 변방으로 보냄.(실록*註18)
*註18 : 연보에서는 아들 언숙• 언상• 언학, 사위 하박• 이정배• 정응상 등이 김굉필을 현풍 오설리 노보동 선영에 장사지냈고, 뒤에 언숙은 하동, 언상은 사천으로 귀양가고, 언학은 어려서 귀양을 면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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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년(1506) 언사言事로 중죄를 입은 김굉필 등에게 관작을 내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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