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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
신앙체험 수기 우수상
엽암 채수엽 동덕
왜! 시천주인가
채수엽_아산교구장
저는 천도교 아산교구 교구장이며
통일포 도훈 엽암 채수엽입니다.
이렇게 신앙 체험담을 쓰려고 하니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야릇한 마음이 듭니다.
저의 기억으로는 오 육세 때에
아버님의 손을 잡고 일정한
장소에서 시일식을 보지 못하고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시일식을 보는
사랑방 식 교당에 다니던 것이
신앙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동덕님들의 힘이 모여
지금은 없어진 아산시 온천동에 소재하였던
새로운 교당을 마련하였으며,
포덕 106년 천일기념일 사진을 보면
교인 수가 백여 명이 넘었습니다.
그때는 천도교 아산교구의 교인이
꽤 많이 계셨습니다.
교당을 가득 채울 수 있었으니까요.
옛적을 기억하니 아버님께서 손수
나뭇가지를 깎아서 염주를 만드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앙이 시작되었으나
실제로 천도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영등포교구와 합동 수련이
교당에서 진행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강령의 체험을 처음 하였으며,
천도교 신앙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학생회가 조직되어서
매주 토요일 저녁에 만나서 토론회와
수련도 하고 때로는 학생회 자체적으로
야유회도 가곤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어두운 교당에 혼자 문을 열고 들어가
수련에 매진하기도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막연한 신앙생활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좀 더 본격적으로 행한 것은
용담수도원이 완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합동수련에 참가하였으며 그때 수련의 주제가
‘시천주 신앙의 확립’이었습니다.
저는 화두로 ‘왜 시천주인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련에 집중하였습니다.
대강령을 모시며 수련에 집중하였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답을 알지 못했습니다.
초조해진 마음에 내가 답을 얻을 때까지는
단식을 하겠다고 마음을 다짐하며
식사 때는 물로 시장함을 달래며
수련을 하여도 답을 얻지 못하자
혼자 용담정으로 가 오후 수련에 집중하는데
영상 속에서 인내천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펼쳐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인내천인가를 화두로 두고
더 수련에 집중하는데『천덕송』의 「오관가」가
저의 귀속에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한울님의 뿌리는 나에게 있고
나의 뿌리는 마음에 있다’는 구절이었지요.
그렇다! 한울님의 뿌리는 나에게 있고
나의 뿌리는 마음에 있음으로
인내천이며 시천주인 것이라는 답을 얻고
용담정에서 내려와 수련생에게 물으니
오후 수련을 끝마치며 부른 천덕송이
오관가란 것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함으로
신앙에 더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단순한 교리의 시작이었지요.
제가 대학생 때에 봄에
꽃가루로 인하여 알레르기 눈병으로
여러 달 동안 고생하였으며
여름방학 때까지 안과에 다녔지요.
여름 하계수련이 화악산에서 있어서
이곳 아산에서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가서
한참 동안 걸어 산길을 올라가는데
여름 장맛비에 산길이 끊어져
신을 벗고 개울을 건너
수도원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여장을 풀고 수련을 하는데
눈병으로 인하여 수련에 집중할 수 없는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수련 도중 문득
청수물로 눈을 씻어 보라는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한 청수 물을 가지고 나가서
두세 번 눈을 닦으니 눈병이 감쪽같이 나은
경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20대 전후로 용담과 화악산을 오가며
여러 번 기도수련을 하였으며
나의 마음이 부족하다 생각되면
수시로 집에서 정해놓고
21일, 49일, 105일 기도를 하며
경전과 교사 공부를 하였으나
동학 천도교의 교리와
수도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고뇌하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교구는 날로 번창하여
지금의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여
교당을 새로 짓고 각 지의 여러 동덕님과
지역의 내외분을 모시고
성대하게 준공식을 하였습니다.
교구 운영과 설교를 담당하는
상주 지도자까지 갖추었고
여러 교인분이 합심하여
환원하시는 분들을 모시기 위해
교구 차체로 운영하는 산을
약 2정(6,000평)을 구입하였으며
나아가 지금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토지까지
마련하였습니다.
1세대 분들의 동학 천도교를 생각하시는
희생과 노고를
제가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 아산교구가 새롭게 바뀌는 것은
그 어른들의 성령이 우리들을
굽어 살펴보시는 결과인 듯싶습니다.
아산교구는 수시로 특별 기도식과
산에 가서 야외 시일식을 보고는 하였지요.
세월은 흘러 제가 포덕 136년에
젊은 나이로 교구장에 지명되었는데,
정말로 그 책임감과 중압감으로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으며,
어떻게 하면 동학 천도교의 진리를
알 수 있는가 고민하다가 다시 수련과
교리와 교사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정말로 주경야독이었지요.
낮에는 생활전선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책상 앞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때 새로운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으로
매일 흥분된 날들을 보내던 것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3년이라는 교구장 임기를 마치고 나니
동학 천도교에 대하여 어렴풋이
마음에 와닿는 것을 느끼었으나
저 자신이 생각할 때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많아
교구장의 직책을 내려놓고 교화부장으로
아산교구에 봉사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그 후로는 신앙생활이 게을러지며
점점 교당 시일식에 참석하는 날들이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이때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10여 년이 넘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아산교구를 세우신 1세대 분들은
한 분 한분 환원하시어 교당 관리는 어려워지고
교당은 낡아
거의 폐허의 건물 직전에 이르게 되었으며
시일식에는 두 세분 겨우 참석하시는,
쇠락 되어 가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교구의 운영이 어려운 환경임에도
어르신 동덕님들은
한 번도 시일식을 거르지 않고 모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심고를 드립니다.
저는 용담정에 찾아가 수운 대신사님께
다시 천도교 아산교구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맹세의 심고를 드리고 나서 교구회의를 열어
저 스스로 교구장을 다시 하겠으니
여러 동덕들의 협조를 부탁드리며
교무부장에 길대성 동덕,
교화부장에 차정근 동덕,
경리부장에 최경노 동덕을 지명하고 부탁드리며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습니다.
1세대 분들이 모두 환원하였으나
지금까지 아산교구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 동덕께서 차후에 아산교구가
맥이 끊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시고
각 교호의 자손들을
아산교구청년회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운영하게 하심으로 인하여 그 모임을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교구가 운영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모임이 처음에는 젊은 청년들의 모임으로
천도교 아산교구청년회라 칭하였지만,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산교구 교우회라 변경되었으며,
청년들은 결혼을 하여 내수도 분들도
여성회를 조직하여 운영됨으로
기본적으로 교인이 구성되어 있었지만,
교구 시일식에 참여하지 않아
교구가 쇠락하게 되었던 것에
활력을 불어 넣으므로 아산교구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2세대 동덕들이 모여서
첫 번째로 상의하였던 것은
낡은 교당을 수리하여 신입 교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르신 동덕께서는 교구 재정을 잘 관리하여
상당한 금액을 모아 놓으셨습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신앙심을 돈독히 하고
기존의 교인들이 다시 교당에 나오시게 하고
신입 교인을 포덕하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들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때에 최만정 동덕이 동학 천도교에
관심을 갖고 아산교구를 찾아왔습니다.
저에게는 반갑고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최만정 동덕은 입교를 하고 바로
종학대학원에 입학을 하였지요.
정말 저로서는 다시 신앙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산교구 동덕님들의 마음이 모아져서인지
교당 수리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런대로 잘 진행되었습니다.
어르신 동덕께서 모아 놓으신 예금과
중앙총부의 지원금
아산교구 동덕님들의 성금이 모여
약 일억 이천 만원이 넘는 수리비를 들여
지금의 모습으로
교당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당을 개방하여
많은 분이 교구에 쉽게 접근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1층에 아산시 시민연대 사무실과
동학농민혁명 아산시기념사업회,
3.1운동 아산시기념사업회 등을 유치하여
아산 시민이면 누구나 아산교구에
접근하는데 용이한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2층은 성화실로 사용을 하지만
이들 단체들이 회의도 하고
외부 인사를 초청하여 세미나 등으로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산교구에 가까이하시는 분들이 모여
매년 11월에는 아산시 온양온천역 광장에서
아산 시민 모두와 외부 인사를 모시고
천도교 아산교구와
동학농민혁명아산시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아산시 추모기념대회라 칭하는
문화축제를 충청남도와
아산시의 협찬을 받아 진행함으로 인하여
동학과 천도교를 좀 더 널리 알리는
행사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행사를 주관하는데 아산교구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 행사장에 아산교구 부스를 운영하고
시민에게 차와 음료를 대접하고
천도교 홍보 책자도 나누어 주고 있음은 물론
행사 식순에
청수봉전과 주문 3회 병송을 삽입함으로
많은 대중 앞에서
천도교 의식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올해로 4회째를 진행하는데
행사를 더욱 많은 시민에게 알리기 위하여
아산 시민과
관내에 있는 학생들도 참여하게 하여
새로운 세대들이 함께하는 아산시의
중요한 문화행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당을 변화시키고 나니
그동안 시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동덕님들이 나오시는 것은 물론이고
신입 교인으로 나오시는 분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동학 천도교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신입 교인으로 나오시게 되었는데,
강봉준 동덕과 이형은 동덕,
최만정 동덕과 제가 함께
교리 연구모임을 결성하여
매월 첫째 일요일 시일식 후와
매월 넷째 토요일 오후 8시에 만나서
동경대전, 용담유사, 도원기서,
학회 논문 등을 연구하고
열띤 토론의 시간을 가짐으로 인하여
교리·교사·수련에 대하여
많이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한 구성원으로 배우고 이끌기 위하여
또다시 주경야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계기로 좀 더 교리·교사를
깊이 있게 접근하기 위하여
동양철학은 물론 근현대사에 대하여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인용되고 설명되는 내용과
대신사님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며
스승님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숨결을 느끼고
고뇌를 함께 함으로 동학 천도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영감과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아산교구 동덕님들이
저의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교리·교사·수련에 정진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렇게 교리·교사·수련을 함께 함으로 인하여
시일설교도 처음에는 저 혼자 도맡아 하였지만,
지금은 여러 동덕께서 분담하여
시일설교를 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고정된 설교자의 편중된 설교를 벗어나
다양한 여러 분의 깊은 내용의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산교구의 운영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저희 교구는 교구장, 교무부장 길대성 동덕,
교화부장 차정근 동덕, 경리부장 차상근 동덕,
사화문화부장 최만정 동덕,
여성회장 김혜영 동덕, 우리 교구의 음식과
복지를 담당하는 복지부장 정연화 동덕,
감사장 정재순 동덕, 포덕단장 박영미 동덕,
포덕 부단장 이혜숙 동덕,
모든 동덕분의 이름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여러 동덕이 각자의 책임을 맡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동덕에게 책임을 맡게 함으로서
보다 더 교구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하시는 관계로
교구의 운영이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는 3개월에 한 번씩
통일포 합동시일을 보는데,
1월에는 의정부 교구,
4월에는 성지순례 및 야외시일,
7월에는 마포교구,
10월에는 아산교구에서 시일식을 봄으로 인하여
통일포 전체 동덕들이 서로를 알 수 있으며,
통일포 단합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의 교구에서 통일포 합동시일을 본 후에는
내수도 분들의 적극적인 헌신과 봉사로
수련장 겸 식당으로 운영되는 3층에서
통일포 전체가 식사와 다과를 함께하고 있으며,
지난 종의원 합동시일식 후에도
전국의 종의원분에게
식사와 다과를 제공하였습니다.
교구 자체적으로
봄에는 염치읍 산양리에 있는 산에서
환원하셔서 모셔진 분들의
위령제 겸 야외 시일식을 보고,
여름철에는
모든 교인들이 금 토요일을 택하여
외부에서 단합대회 행사를 하며,
가을에는
모든 교인들이 교구 산에 모여서
벌초작업 및 주변정리 작업을 합니다.
시일에는 내수도들께서 일찍 나오셔서
접심식사 준비를 하시고, 시일식 전에
30분간 합동수련 시간을 가지며,
시일식이 끝난 후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교인 동덕님들은 토론 시간과 운동 등을 하고,
내수도 분들은 야외로 나가서
포덕을 위한 시간을 갖곤 하는데,
교구에서는 내수도 분들에게 포덕 장려금으로
매월 금일봉을 전달함으로 인하여
포덕을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해월신사께서도
부인 포덕이 먼저라고 말씀하셨듯이
내수도 분들의 단합과 포덕은
교구를 활성화시키는데
매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우리 동학 천도교인들은
내수도 분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저의 교구도
내수도분들의 희생과 단합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교구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교구가 날로 발전하여 가는 것은
모든 동덕님께서 교구에 나오심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느낍니다. 행복을 느낍니다.
희망을 느낍니다.
신앙을 통하여 나를 변화 시켜
나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사랑과 행복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입니다.
동학은 왜 창도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온 세상 사람들이 경천명 순천리하지 않으며
각자위심하여 불순천리하고 불고천명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천도를 밝히고
천덕을 닦음으로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되고
지성至聖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즉,
사회의 변화를 통하여 더불어 함께하는
지상천국을 만들고자 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그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만들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변화하는 방법은
『동경대전』과『용담유사』에 있습니다.
경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수운 대신사께서 아주 자세히 가르치고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문을 이해한다면
주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문은 한울님을 위하는 글입니다.
주문은 다짐하는 글입니다.
강령주문은 한울과 내가 하나임을 알고
하나 되기를 기원하는 글입니다.
본주문에서 시侍는 어떻게
한울님이 모셔져 있음을 아는 글입니다.
정定은 한울님의 덕에 내가 합하여져 있음을
옮기지 아니하고 마음을 정하는 글입니다.
지知는 천도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앎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글입니다.
강령주문과 본주문의 내용을
아주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한울과 내가 하나 되어 있음을 알고
천도의 뜻에 따라 실천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주문을 통하여 나를 알아가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할 줄 알면
나 밖의 세상을 보며
끊임없이 더 넓은 곳으로
나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편견, 고집,
내 생각에 가두어진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만의 생각이 가장 옳고
나의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자부하기도 하며,
나의 삶이 부족하고 실패한 삶이라고
자신을 낮추고 학대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수운 대신사님의 득도의 시작은
대신사님의 마음속에 고정관념과
편견의 울타리 속에서 벗어남으로 인하여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으셨다고 봅니다.
『동경대전』 「수덕문」에
“擺脫世間之紛撓파탈세간지분요
責去胸海之弸結책거흉해지붕결,
세상의 잡되고 어지러운 것에서 벗어나고
가슴속에 가득하게 맺혔던 것은
풀어버렸노라”고 말씀하시고
『용담유사』「교훈가」에 “흉중에 품은회포
일소일파 하온 후에” 라 말씀하셨으며,
「몽중노소문답가」에 “흉중에 품은회포
일시에 타파하고” 라고 말씀하신 후에
새로운 반전의 시작이 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동학 천도교인들은 현재 천도교가
어려운 형국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종의원 3년, 중앙감사 3년을 하며
중앙총부의 사정과 아산교구를 벗어나
좀 더 다른 교구의 실정을 알 수 있었는데,
천도교가 침체한 가장 큰 원인은
저의 교구를 비롯하여 모든 교구의
포덕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열거했지만,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하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 천도교는 과연 천도교인들에게
천도교에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게 하고 있는가를 질문해 봅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천도교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지 못함으로 인하여
앞으로 후천 오만년을 이끌고 나갈 진리임에도
점점 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동학 천도교가 발전할 수 있는가?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그 흐름에 적응하여
그 시대에 맞는
포덕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천도교는
현대인이 요구하는 포덕을 하고 있는지
모든 천도교인에게 묻고 싶습니다.
답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포덕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동학은
수운 대신사님의 시대, 지금의 시대도
앞으로의 시대도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모든 인간과 만물이
시천주侍天主 되어 있음으로
인간평등 수평적 평등이지요.
그 평등을 느끼며 삶에 행복을 느끼며
더불어 함께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수운 대신사님의 시대는
그 시대의 민중이 요구하는 것이 있었고,
해월신사님의 시대에는
그 시대의 민중이 요구하는 것이 있었고,
의암성사님의 시대에는
그 시대의 민중이 요구하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 스승님들은 그 시대의 민중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그에 맞는 포덕을 하였기에
수백만 교도들이 운집하였던 것인데,
지금 우리 시대의 민중이 과연
그 스승님 시대의 민중들이
요구하는 것과 같은지 생각하면,
지금의 천도교는 현시대의 민중이 요구하는
포덕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찬란했던 스승님들 시대의 환상에 빠져
과거의 이야기를 되새기고 자랑하며
그것으로 포덕의 밑천으로 삼고 있으며,
많은 천도교인 특히 중앙총부를 비롯하여
소위 지도자라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스스로 칭하시는 분들이 스스로 수련을 통한
내면의 세계를 닦고 단련하고
교리·교사를 연구하고 그 내면에서
스승님께서 우리 후학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고민하고 찾고
그 요구하신 것을 찾아
실천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왜 쇠락의 길로 가는지
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천도교가 다시 과거 영광의 길보다
더 영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천도교인 한 분 한 분 모두가
스스로 수운 대신사, 해월신사,
의암성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과거 우리 스승님 선배님들이 걸었던
목숨을 내놓으시고
험난한 길을 걷지는 않을지라도
스스로 모두가 수련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닦고 단련하고
교리·교사를 연구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으며,
그 행복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신앙을 통한 행복함을 나누어 줄 때
동학 천도교는
모든 인류가 행복을 함께하는
종교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