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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9구간] 대야산 르포
늘재~청화산~조항산~대야산~장성봉~희양산~이화령 48km
▲ 옅은 구름 속에 지워질 듯 아스라한 여름 백두대간의 봉우리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만큼 맨가슴을 열어 보인다. 여름 백두대간 종주의 고통과 즐거움은 흘린 땀방울의 무게와 비례한다.
한여름 한낮 더위는 청각적이다. 미동도 없는 대기. 깊이를 가늠할 길 없는 연못 같은 땡볕. 훅-, 숨이 막힐 것 같은 정적 속으로 화살처럼 쏟아지는 매미 울음소리. 머리 속이 어찔어찔해지면서, 한순간 정지 모드였던 세상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산천은 안녕하다. 땀방울을 훔친다. 손바닥에 매미 울음소리가 묻어난다.
배낭 위에 한가득 매미울음 올려놓으며 늘재(490m)에 선다. 속리산과 청화산 사이의 고갯마루다. 장승처럼 대간 길목을 지키는 엄나무에 목례를 하고 청화산을 향한다. 이 땅을 사무치게 사랑했던 이중환은 이 산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했다. 그는 이 산을 이렇게 말했다.
▲ 늘재 위 청화산 기슭의 `백두대간 성황당`을 참배하는 취재팀.
“청화산은 내외 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속리산 같이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택리지 복거총론-산수)
이중환은 왜 이토록 청화산을 극찬했을까? 생리(生利)와 인심을 강조한 그의 국토관으로 미루어볼 때, 단순히 산의 빼어남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화산 남쪽 기슭의 용유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뱃속, 이른바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리는 승지(勝地)가 바로 상주시 화북면의 용유리다. 이에 대한 이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속리산과 청화산 일대의 지세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속리산의 남쪽 백두대간은 형제봉에서 갈령쪽으로 가지 줄기를 뻗어 동북쪽으로 도장산(827.9m)을 솟구쳐 올린다. 그리고 청화산에서도 동남쪽으로 가지를 쳐 한 봉우리를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시루봉이다. 마주보고 선 시루봉과 도장산 사이로는 한줄기 물길이 흐른다. 병천(농암천으로 흘러듦)이다.
이들 산줄기를 선으로 그어보면 시루봉~청화산~늘재~문장대~천황봉~형제봉~갈령~도장산이 된다. 흡사 그 모양이 시위를 팽팽히 당긴 활 모양인데, 그 사이의 분지가 바로 용유리다. 외부세계로 열린 곳이라고는 병천밖에 없다. 그래서 소의 뱃속처럼 안온한 곳이라는 것이다.
▲ 청화산을 내려서는 취재팀.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오늘의 십승지
하지만 감결(鑑訣), 혹은 비결서(秘訣書)에서 말하는 안온한 곳, 즉 승지(勝地)란 오늘날 서울 강남 같은 곳이 아니다. 정반대다. 떵떵거리며 잘 살 곳이 아니라 병난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부터 피할 만한 보신(保身)의 땅이었을 뿐이다. 당시 개념으로는 경제적,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 그야말로 근근이 살아갈 만한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곳이 경제적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관광지로, 휴양지로, 혹은 별장지로 자본의 군침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땅에 은자(隱者)들이 살만한 곳은 거의 없다. 옛 풍수가들이 살아난다면 통탄할지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재앙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자본의 탐욕.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을 부정하는 건 기만이지만 탐욕은 문제다. 그렇다면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오늘의 승지는 어디일까? 자연,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십승지를 말하는 건 호사 취미다. 어쩌면 백두대간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오늘의 십승지가 아닐까. ‘백두대간보존법’은 오늘의 십승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해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 주민의 경제적 이익과 법의 공리가 충돌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지역 주민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도시인의 양보(세금)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한 정부의 노력도 더 정교해져야 할 것이다.
▲ 조항산 오름길. 땀방울과 함께 대간 속으로 스며드는 길이다.
한반도 생태축으로서 백두대간의 중요성은 대간 종주 붐 이후 국가적 의제로 떠올랐다. 대표적 훼손 구간인 추풍령 위 금산 채석장이나 이번 구간인 고모치 광산의 개발을 중단시킨 것도 종주 붐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산을 송두리째 뭉갠 자병산의 석회석 채굴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개발의 관성이다.
백두대간 상의 도로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더 입체적이어야 한다. 개발론자든 보존론자든 도로 그 자체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는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흔히 생태계 단절만을 문제 삼으며 생태이동로를 만드는 것으로 친환경인 양 하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좋은 예로, 지리산의 정령치 도로의 경우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문제의 실상은 관광버스로 쉽게 지리산에 접근하는 사람이 폭증하면서 산을 마구잡이로 대하는 데 있다. 케이블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모든 구성원이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를 바란다. 땀과 사랑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백두대간 보존을 위한 한 방법은 지역별로 자원봉사자를 활용해 등산로를 관리하는 것이다. 최적의 장소에 최소한의 캠프사이트(헬기장 등을 이용)를 공인하는 것도 종주 산행에 따른 훼손을 최소화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청화산 초입에는 근년에 새로 세운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의 내력을 밝힌 비문에는 아예 ‘백두대간 성황당’이라고 새겨두고 있다. 늘재가 한강과 낙동강 수계를 가르는 남쪽 최초의 분수령(실제로는 속리산 천황봉 이후부터)이라는 점도 허름했던 옛 성황당을 허물고 새롭게 짓게 된 이유다. 이곳부터 백두대간의 남한 부분 끝까지 왼쪽으로 흐르는 모든 물은 한강을,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을 살찌운다.
▲ 대야산 정상의 암릉.
성황당을 뒤로 하고 30분쯤 지나자 또 하나의 비석이 보인다. 비석의 몸돌 중앙에는 ‘정국기원단(靖國祈願壇)’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백의민족중흥성지’?‘백두대간 중원지’라는 글자가 한자로 병기돼 있다.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제단이라는 얘기이겠다. 누가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았지만 이제 백두대간은 현대적 산악신앙의 경배대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실감하게 한다.
이중환이 스스로를 청화산인이라 한 까닭
늘재에서 청화산(984m)은 2.5km 정도지만 2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 표고차 500m 정도로 제법 가파르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짧은 암릉이 있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특히 원적사가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 조망처의 눈맛은 보통이 아니다. 청화산인 이중환이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고 한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겠다.
청화산 정상으로 다가가자 미리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진주의 종주팀 김종현씨와 정인숙?신동국(진서산악회)씨가 수박을 쪼개 놓고 기다리고 있다. 감정 표현이 곰 발바닥 같은 사람도 이런 경우는 코끝이 시릴 것이다. 한여름 장기 산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젓가락도 반 토막만 가지고 다닌다는 무게 공포에서 수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야채 샐러드를 곁들인 빵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다음 조항산을 향한다. 부드러운 오르내림을 반복하지만 갓바위재까지는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옅은 구름이 끼긴 했지만 조망도 괜찮은 편인데, 연신 땀을 훔치느라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다. 송글송글 맺혔다 주루룩 흐르는 땀방울이 아니라 땀구멍 하나하나가 열린 수도꼭지 같다. 눈으로 흘러드는 땀은 소나기 속에 맨몸으로 선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애초의 목적지인 밀재까지는 어림없는 상황이다. 갓바위재에서 일찍 산행을 끝내기로 한다.
▲ 저녘노을에 물든 백두대간. 청화산에서 갓바위재로 가다가 만난 풍광이다.
갓바위재 위 헬기장에 배낭을 부린 다음 반은 조항산 서쪽 계곡 임도를 따라 물을 뜨러 가고 나머지는 저녁 준비를 한다. 어둠보다 더 빨리 허기가 밀려든다. 그런데 물을 뜨러 갔던 사람들이 감감 무소식이다. 한참을 내려간 모양이다.
언젠가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휴대 전화기가 들썩거린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멀뚱히 마주 앉은 사람을 바라본다.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전화를 건 것이다.
“술잔 비었어.”
술자리에서 웃자고 한 일이었지만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한없이 가까운 듯하지만 섬처럼 고립되어 가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함축하는 듯도 했다.
인간관계의 내구성은 힘든 상황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상 속에서 대표적인 경우는 장기 산행이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내구성은 쉽게 결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배려다. 그것이 무너질 때 산행의 즐거움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종주팀 김종현씨의 동료들은 이런 경우 최고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덕분에 우리는 퉁퉁 불어터져서 국물이라고는 없는 수제비를 산해진미보다 더 달게 먹었다. 단순함에서 오는 행복. 빼놓을 수 없는 산행의 즐거움이다. 저녁을 먹고 사각 플라이로 대충 집을 짓고 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할 일이다.
얼려 온 캔맥주 마시는 모습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번지기 시작한다. 다행히 비는 멎었다. 서둘러 조항산(951m)을 오른다. 괴산군 청천면과 문경시 농암면에 걸쳐 있다. 몸을 돌려 세우자 문장대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불꽃같은 암릉이 이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북쪽으로는 대야산과 동쪽으로 둔덕산의 우람한 자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선다.
▲ 대야산 암릉(정상에서 북쪽).
조항산에서 고모치까지는 경쾌한 내리막이다. 아직 산은 열기를 내뿜고 있지 않지만 땀방울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고모치 옆의 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물의 순환 혹은 윤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물은 끊임없이 돌고 돈다. 지금 우리가 고모샘에서 마신 물도 땀과 오줌 등의 형태로 순환한다. 아니 우리의 순간순간 호흡도 크게 보면 물의 순환과 무관하지 않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은 여러 형태의 물’이라고 했다. 우리 인체도 3분의 2가 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고모샘에서 백두대간을 마신 셈이다. 백두대간 종주자들끼리 교감하는 모종의 연대감은 그래서 육친적이다. 우물이 수돗물로 바뀐 후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진 건 당연한 일이다. 자, 여기서 정치권에 제안을 하나 한다. 선거제도나 권력구조를 바꾼다고 지역 간의 벽이 허물어지는 건 아니다. 진정 지역 구도를 깨고 싶으면 전국민에게 정중하게 백두대간 종주를 권하시라.
이제 온전히 백두대간과 한몸이 되어 대야산(931m)을 오른다. 백두대간의 남한 부분 중 지리산과 설악산 사이에서 으뜸의 산악미를 보여 주는 산이 바로 이번 구간의 대야산과 희양산이다. 특히 대야산은 기슭 곳곳에 빼어난 계곡을 빚어놓고 있다. 선유동 하면 흔히 괴산의 선유동을 떠올리기 쉽지만 대야산의 동쪽인 문경에도 선유동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대야산 아래에 내선유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 운무에 싸인 희양산을 바라보는 취재팀.
선유동 말고도 대야산은 서쪽으로 화양골, 동쪽으로 월영대, 용추계곡, 용소와 같은 가경을 빚어 놓았다. 정상 부근의 기묘한 바위와 북동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암릉은 울창한 수림과 조화를 이루며 산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관을 압축해 놓고 있다.
대야산 정상에서 하루 산행객들이 얼려 온 캔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행여나 속 좁은 신이 있어 저분에게만 당신의 가호를 빠뜨리는 일이 없기를…. 우리는 맹물에 안주(간식)만 먹고 촛대봉을 향한다. 촛대봉에서는 취재팀의 일원인 김석우씨가 문경산악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인연으로 조령산구조대의 김칠석씨가 식수를 떠 와서 기다리고 있다. ‘감로수’라는 말은 이런 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약사여래가 따로 없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바로 그다.
촛대봉에서 1시간쯤 지나 곰넘이봉을 넘어 다시 30분쯤 내려서자 버리미기재다. ‘벌어먹이다’의 경북 내륙지방의 사투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손바닥만한 땅뙈기에 목숨을 의탁해야 했던 궁벽한 산골 살림살이가 굳은살처럼 박혀 있다. 고갯마루에 배낭을 부린 다음 고개 옆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잠시 신선놀음에 빠진다.
백두대간 종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숨은 명산인 장성봉을 오른다. 정상으로 오를수록 참나무숲이 무성하다. 희양산, 백화산의 자태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정상의 조망은 부연 이내 속에 갇혀 있다. 장성봉에서부터 경북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북쪽으로 곧장 내달리다 악희봉에서 동남쪽으로 심하게 휘어돌며 은치(540m)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우리는 길게 숨을 고르기로 했다. 또 하루를 백두대간에서 묻는다.
무게와 거리에서 오는 고통만큼 즐거움도 크다
밤새 내린 빗줄기가 아침에는 더욱 몸집을 부풀린다. 하지만 산행 마지막 날의 비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더욱이 여름인 경우는 더위와 맞바꾸면 되기 때문에 하늘 탓할 일도 아니다.
▲ 버리미기재 직전의 낙엽송 숲길.
구왕봉(877m) 오름길은 아주 가파르다. 구왕봉은 달리 구룡봉으로도 불렸는데, 지증대사가 봉암사 터를 잡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연못을 메울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아홉 마리 용을 쫓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봉암사 스님들은 이 봉우리를 날개봉이라고도 부른다. 지도를 놓고 보면 희양산 좌우로 구왕봉과 시루봉이 봉암사를 향해 날아드는 새의 날개와 거의 흡사하다.
비가 그치면서 희양산 위로 구름이 비껴가고 있다. 언뜻언뜻 시야가 열리면서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언저리가 참선 삼매에 빠진 고승의 풍모를 보여준다.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봉암사가 별천지인양 아스라하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고기를 잡고 야호를 외치는 바람에 82년부터 희양산 등산로는 폐쇄되고 말았다.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취지를 헤아리고 보면 경박한 산행문화에 떨어진 장군죽비로 새길 일이다.
신라 헌강왕 3년(879) 지증 도헌(智證 道憲?824-882) 국사가 창건한 봉암사. 오늘날 희양산문으로 불리는 9산 선문의 하나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문'에 전하는 창건의 내력은 이렇다.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지증대사를 찾아가 ‘봉암용곡’을 희사하며 절 짓기를 간청했다. 이에 지증대사는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가면서 산세를 두루 살폈다. 이 때의 모습을 최치원은 그림을 그리듯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산이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 있으니 마치 봉황이 날개로 구름을 헤치며 오르는 듯하고, 백 겹 띠처럼 흐르는 계곡물은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에 (지증국사가) 감탄조로 말하기를 ‘어찌 하늘이 내린 땅이라 하지 않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였다.”(옮긴 우리말은 지관 스님의 역주를 바탕으로 하였음.)
▲ 희양산 정상에서 조망의 즐거움에 빠진 취재팀.
이렇게 열린 희양산문은 후삼국 격변기에 폐허가 되었고, 935년에 정진 긍양(靜眞 兢讓.878-956)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조선에 이르러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된다.
이후 1947년 겨울 성철 스님의 주도로 ‘봉암사 결사’로 불리는 일대 사건을 통해 혁신의 싹을 움틔우고 불교 교단을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오늘날 산문 폐쇄도 그 정신의 연장으로 볼 수 있겠는데, 모쪼록 그것이 우리 사회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준엄한 경책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양산을 벗어난 백두대간은 시루봉(914.5m)까지 북진하다가 이만봉(990.1m)에서 백화산(1063.5m)까지 동남진, 다시 황학산(915.1m)과 조봉(671m)을 지나 이화령까지 북서진하며 야속할 정도로 휘돈다. 하지만 이만봉에서 백화산까지는 오르내림의 표고차가 작고 백화산에서 이화령까지는 평원 같은 분위기이기 때문에 숲길 걷기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번 구간 늘재에서 이화령까지는 실거리 약 48km로 상당히 먼 거리지만, 빼어난 조망처와 암릉, 그리고 산책길 같은 분위기를 고루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무게와 거리에서 오는 고통만큼 즐거움도 크다.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7)
먹는 즐거움과 무게의 고통을 화해시키자
겨울 산행에 비해 여름 산행은 상대적으로 무게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더위 때문에 쉽게 지치기 때문에 체감 고통 지수는 별 차이가 없다. 특히 여름 산행은 물 무게가 부담스럽고 음식 보관이 쉽지 않은 불편이 따른다. 식단 짜기에서 해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여름 산행에서는 라면도 물 부담 때문에 결코 간편한 끼니가 아니다. 그렇다고 행동식으로만 해결하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금방 허기가 지기 때문이다. 이 때 가장 좋은 먹을거리가 누룽지. 어떤 종주자는 식사 후 출발할 때 물병에 누룽지를 넣어 다음 끼니 때 적당히 불은 누룽지로 해결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은 미숫가루보다 영양이 풍부한 선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한두 끼는 그것으로 해결할 만하다. 포만감이 문제가 된다면 번거롭긴 하지만 오곡을 불렸다가 반쯤 말린 상태에서 볶은 다음 믹스로 살짝 갈아서 가져가면 훌륭한 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