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160.4]
동학마을탐방
내포동학전투지를 누빈 비밀 연락꾼 함한석(박성묵)
박성묵_예산교구장, 예산역사연구소장
동학조직에는 전투상황이나 비밀첩지, 각포의 소식통을 전달할 연락책이 필요했다. 내포동학농민군 출신 중에 장대한 기골에다 신출귀몰할 정도로 빠른 발걸음의 지낸 동학농민군 함한석(1870~1938)의 활동이 특출하다.
그는 태안군 소원면 송현리에서 1870년 10월 26일 출생하여 동학혁명 발발 바로 직전인 1893년 24세 때 동학에 입도하였다. 박인호선생의 10월 1일 기포명령이 전해지자 송현리에 동학농민군을 결집시켜 태안관아 점령봉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관군의 예포대도소 습격 이후 관군의 계속되는 탄압과 체포 학살을 일삼아 급기야 서산 태안지역의 농민군이 혁명전쟁의 본격화를 위해 해미군 여미벌에 총집결하였다.
이때 죽기 살기로 재무장한 동학농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교도들을 이끌고 온 함한석도 농민군을 무장을 시켰다. 이후 벌어지는 24일 승전곡전투, 27일 신례원관작리 전투, 28일 홍주성전투 까지 대오에서 이탈없이 항상 맹렬히 공격하며 선봉에 섰다.
동학농민군 비밀연락책 함한석
홍주성 전투에서 함한석은 예포대접주 박덕칠의 홍주성 동문폭파공격을 위해 결사대 200여명을 구성하는데 참여하여 일본군의 기관총을 난사를 뚫고 성문 공격을 감행하다 좌측팔에 총상을 입고 패퇴할 때도 마지막까지 남았던 부대였으며 갈산방향으로 후퇴하다가 총상이 심해 어떤 농가집 할머니의 도움으로 응급조치를 받고 해미성에 잠시 주둔했다가 심한 부상으로 인해 고향 집으로 돌아와 치료했다.
소원면 일대에 관군이 유회군을 앞세워 농민군을 색출하여 참살하니 함한석은 원북면 방갈리로 피신해 조석헌, 문장준과 함께 목선을 타고 안면도 앞바다를 지나 보령지역에 상륙하였다. 천안 광덕산 만복골에 정착 움막을 짓고 생활하였다.
함한석의 손자 선길의 증언에 따르면 “조부께서 경상북도 고성산 밑 소야마을에서 농민군 지도자 최맹순, 장복극 어른을 만나 장군 휘하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을 선길씨 25세때 조모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맹순(1853~1894)은 강원도 춘천 출생이고 동학의 관동대접주로 경북 예천군 동로면 소야리에 대도소를 두고 1894년 6월에는 교도가 수만 명에 이르고, 그 세력은 충청북부와 강원도 일부에 까지 미칠 정도였다. 이 해 가을에 일본군의 출동으로 세력이 크게 무너져 강원도 평창까지 밀려가 11월 민보군의 싸움에서 패하여 체포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장복극(1840~1894)은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소야리에서 출생, 동학에 입교하여 접사가 되어 최맹순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다 체포되어 함께 처형된 인물이다.
11월 4일 평창전투에서 패퇴한 농민군은 사실상 와해된 점으로 보아 함한석은 홍주성 패퇴 이후평창전투일과의 사이인 5일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생사가 걸린 도피과정 중인 점으로 보아 이때 최맹순 휘하에서 전투에 참여하기란 시기적으로 너무 촉박하므로 이 때 참여한 것이 아니고 내포동학혁명이 전면전으로 치닫기 전인 8월 28일 예천지역 향리로 구성된 민보군의 기습 공격으로 벌어진 예천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여지며 예천전투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해 최맹순, 장복극 강원도 남부 평창쪽으로 이동 주둔하였다.
함한석은 9월 18일 해월의 기포명령에 따라 서산 태안지역에서 기포명령이 내리자 고향 송현리로 돌아와 농민군을 이끌고 내포동학농민혁명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여진다.
함한석의 손자 함선길(예산읍 간양리 거주)
을사늑약과 의병전쟁으로 동학농민군 수색과 지목이 줄어들자 1910년경 조석헌, 문장준 등과 함께 간양리로 정착하여 천도교 예산교구에서 활동하다 1911년 시천교로 분리되어 초창기 예산 시천교에서 활동하다 구암 김연국의 상제교에서 활동하였다.
상제교 교당은 예산 산성리 무한산성이 있는 산성산 중턱에 있었다. 한때 동학농민군 김지태의 동생 김인태가 운영했던 산성리 강습소 옆에 8.15해방 전후시기까지 있었다. 함한석의 동학활동 이야기는 손자 함선길로 이어져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을 받아 동학선양사업에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