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사의 어머님은 곡산 한씨 부인이시다.
이 한씨 부인은 부친 근암공의 셋째 부인이 된다.
즉 근암공은 세 번 결혼하였는데
첫번에는 17세(1778년 10월)에 흥해 매곡(梅谷)에 사는
21세인 오천(烏川) 정씨(鄭氏, 1758∼1797)와 결혼하였다.
정씨 부인은 원래 몸이 약해 여러 차례 병석에 누웠는데
근암공이 36세(1797년) 되던 해의 여름에
다시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가산이 기울 정도로 병을 치료해보았으나
11월 7일에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아들을 낳았지만 곧 사망하여 후사를 잇지 못하고 다만 딸 하나만 길렀다.
당시 관습에 후사가 없으면 1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할 수 있었다.
즉 사대부가 상처하면 3년 상을 치르고 나야 재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는 예외규정으로
“나이 40이 지나 자식이 없을 때엔
부모의 명이 있으면 만 1년 후에 재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근암공은 이런 관습에 따라 1년 상을 치르고 난 1798년 12월에
25세의 달성(達城) 서씨(徐氏, 1773∼1811)와 재혼하였다.
이 서씨 부인 역시 장수하지 못하고 39세의 나이에 별세하고 말았다.
근암공이 50세가 되던 1811년 여름에
유방암에 걸려 참혹한 병고로 고생하다가
10월 4일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서씨 부인도 딸만 둘을 낳고 아들을 낳아 후사를 잇지 못하였다.
고통스럽게 돌아간 서씨 부인의 상을 당한 근암공은
나이 이미 50이 되어 조용히 여생을 마감하기로 작정하였다.
둘째 동생인 규(珪, 1770∼1832)에게 이런 뜻을 전하고
23세에 이른 큰조카인 제환(濟 , 1789∼1851)을 양자로 들였다.
서씨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살림살이도 모두 양자에게 맡겨버렸다.
공은 세 형제 중 맞이였다.
그런데 둘째 규만 아들 넷일 뿐
공과 막내인 섭(1777∼1856)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둘째 동생인 규의 장자인 제환을 근암공의 양자로 입양시켰고
셋째 제완(濟完)을 막내인 섭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용담서사의 내력
근암공은 늘 서사(書社)를 마련하여 학문을 연수하고
제자를 양성하려는 꿈을 꾸어왔다.
54세에 이르러
드디어 용담서사(龍潭書社)를 지어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즉 『근암유고(近庵遺稿)』의 <용담서사상량문>에는
을해년(乙亥, 1815년)에 상량(上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근암집』 <용담이십육영 병서(龍潭二十六詠 幷序)>에는
용담정의 유래와 용담서사를 지은 경위를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지난 무술년(戊戌, 1718년)간에
복령(福齡)이란 산승이 이 곳 북쪽 벼랑 위에 처음으로 암자를 세우고
원적암(圓寂庵)이라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은 흩어지고 암자는 폐사(廢寺)가 되었다.
나의 부친(先君, 돌아간 부친)이 이 암자와 밭 수백 평을 사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르기를
너희 젊은이들이 독서하며 학업에 힘쓰도록 하리라 하였다.
나의 스승인 기와공(畸窩 李象遠)은
이 집을 와룡암(臥龍庵)이라 이름하였다.
경주부윤 김공 상집(金公尙集)에게 와룡암기를 청하였더니
김공은 와룡암 석자는 천년동안 사람의 눈을 뜨게 할 곳이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지나치게 사람의 출입을 막았으나
지금 (30년 후인 지금)은 산골 백성의 농장이 되어버렸다.
… 조그마한 집이라도 지어 아버님과 스승님의 유지를 이루려는
굳은 일념을 마음 속에 간직한 지 30년이 흘러갔다.
과장에 드나드느라 그 짐을 벗지 못하였으며 또한 이루어 낼 힘도 없었다.
몇 해 전에 두 동생과 의논하고 나서
나와 더불어 벗하던 한 두 동지와 힘을 합쳐 기획하여
먼저 연못 위에 집을 지으니 모두 5간이다.
두세 분의 중(衲子)를 불러 보살피게 하였고
그 뒤쪽을 개척하여 서사(書社)를 지으니 4간이었으며
주인 늙은이가 거처하였다.
매우 좁게 지었지만
무릎을 움직일 수 있으니 넓어야만 한다고 적합한 것은 아니다.
판액의 이름은 본시대로 와룡암이라 하려 했으나
최익지(崔翊之)가 천룡산(天龍山, 내남면)에 암자를 짓고
와룡암이라 하였으므로 겹치게 할 수 없어
용담서사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근암공은 이곳에서 엄동기(嚴冬期)를 빼고 거의 기거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짬을 내어 계곡 일대에 꽃나무를 모아다 심어 꽃동산을 만들었다.
초여름이면 경주 부윤도 용담의 경치를 즐기려 찾아왔다 하며
고결한 공의 인품을 대하고자 많은 선비들도 찾아왔다 한다.
한편 인근에서 공부하려는 20대 젊은이들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였다.
공은 60세가 넘었으나 건강은 50대처럼 많은 제자를 가르칠 수 있었다.
학문도 깊어지고 인품도 고결해졌다.
그러나 공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일점 혈육이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며
조상님들에게 죄송하게 여겼다.
어머니 한씨의 결혼
1823년 12월 어느 날
제자들은 스승님을 재혼시키는 일을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스승님은 건강하니 결혼을 시켜주는 것이 도리라고 입을 모았다.
제환도 결혼시켜 드리는 것이 효도라며 제자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가까운 친척들이나 벗들도 모두 찬동하였다.
이들 중에 건천면 금척리에 사는 한 모(韓某)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고모가 스승님을 모실 만하다고 추천하였다.
한 모의 고모는 곡산(谷山) 한씨(韓氏 1793∼1833)이며
경주군 건천면(乾川面) 금척리(金尺里)에 살고 있었다.
한 번 시집을 갔으며 20세에 부군과 사별하여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10년이 지났다하므로 당시의 나이는 30세였다.
모두가 찬성이었으나
근암공에게 누가 이런 말을 드릴 것인가가 문제였다.
또한 모라는 제자가 이 일도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다.
어느 날 한 모는 근암공을 찾아가 자신의 고모를 소개하고
결혼을 권해 보았다.
권병덕(淸菴 權秉悳)은
한 모 제자가 공에게 찾아갔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문도 중에 한 모가 산림공에게 고하여
왈 제자의 고모가 상부(喪夫)하고 친가에 와 있으니
선생은 재취하심이 어떠하십니까?
산림공이 이 말을 듣고
왈 최씨 집안이 한씨 집과 혼인을 맺을 체모가 아니라 하며
거절 불응하였다.
한 생이 또 정절을 지키는 자기 고모에게
최 선생의 도덕과 그 집 상황을 말하고 고모의 개절을 진실로 권하니
한씨 부인이 변색 대노하여 그 조카를 질퇴함에
조카는 황공 무안하여 가정리로 질주하였다.
근암공이 거절한 이유 중에
‘최씨 집안이 한씨 집과 혼인을 맺을 체모가 아니라 하며
거절 불응하였다’는 대목은 어색해 보인다.
가문이 귀천을 따져 거절했다면 끝까지 거절했어야 하나
결과는 그렇지는 않았다.
동학 초기기록에는 두 분의 결혼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다.
1920년에 편찬한
『천도교서(天道敎書)』에서 처음으로 자세한 기록이 나타난다.
1920년대만 해도 해월신사를 모시던 어른이 많아
대신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구전으로 들은 이가 적지 않았다.
『천도교서』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두 분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이보다 10여 년 후에 간행된
『천도교회사초고』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즉 “문도 중 한 모가 근암공에게 고하기를
제자의 고모가 과거(寡居)하오니 선생은 재취하심이 여하오니까 한대
근암공이 거절하였더니 일일은 근암공이 내실에 입하여 보니
일 부인이 내정에 입좌(入座)어늘
심이 파이(頗異)하여 그 유래를 문한대
대답하기를
첩이 금년 30에 금척리 친가에서 과거 하더니
홀연히 정신이 혼미하여 사몽비몽 간에 태양이 회중에 입하여
또한 이기(異氣)가 신을 휴(携)하여 부지중 차처에 지(至) 하였노라.
근암공이 차언을 문하니 그 부인은 즉 한 모의 고모라.
차는 천연(天緣)이라 하고 수(遂)히 동거하니
잉(仍)히 임신이 유하다”고 하였다.
권병덕은 결혼을 권했다가 거절당한 내용을 기록하였고,
『천도교서』는 결혼한 경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두 기록에는 의문점이 없지 않다.
권병덕의 기록에는 가문에 차이가 있어 결혼을 거절했다 하였고,
『천도교서』에는 생면부지의 한씨 부인이 내실에 있었는데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서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 하여 결혼했다고 하였다.
가문을 따지며 거절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으며,
낯모를 여자가 어떻게 안방에 들어와 있게 되었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중에 전해지는 또 다른 속설에는
한씨 부인이 이 해 1월 15일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근암공의 집 대문 밖까지 와서 대추나무 아래 주저앉아 밤을 새웠다 한다.
밤에 눈이 내려 한씨 부인을 덮어버렸으며
이튿날 아침에 마당을 쓸다가
눈 속에 어떤 여자가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곧 안방으로 모셔갔다.
안정시킨 다음 근암공을 방으로 들게 하여 사연을 듣게 하였다.
한씨 부인은 『천도교회사초고』의 기록대로 경위를 말하자
이를 들은 근암공은 천연의 연분이라 하며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을 모아 합리적으로 재해석해 보면
진실이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다.
첫째로 공은 학덕이 높고 예의가 바른 선비인데다
나이가 이미 63세에 이른 분이다.
이런 분이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한 모의 제자를 대하여
가문을 따져가며 거절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근암유고』에는 일찍이
<허개가사의(許改嫁私議)>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홀로 살아가는 미망인들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개가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근암공이 거절한 진짜 이유는 가문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절하는 부인을 훼절(毁節)시키는 것이
선비로서 온당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초면부지의 부인이
정신이 혼미해지며 해와 달이 품안으로 들어왔다는 말과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정신없이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내려준 인연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들을 재구성하여 보면
한씨 부인과 근암공의 결혼은 제자들과 제환이 뜻을 같이하여 꾸며진
강권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허락 받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편법을 썼던 것이다.
1824년 2월초 어느 날을 결혼 날로 정하고 은밀히 잔치를 준비하는 한편 금척리에서 한씨 부인을 모셔다 안방에 모셔놓았다.
그리고 가족들이 나서서 근암공을 안방에 들라고 권하였다.
근암공도 일을 꾸미는 것을 짐작하였으나
제자들과 식구들이 권유를 뿌리칠 수가 없어 방에 들어갔다.
근암공은 30대인 한씨 부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보니
한 모의 고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근암공은 결국 이들이 꾸민 결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신사 10세에 환원
결혼 후 10개월이 지나 1824년(純祖 24年) 10월이 되었다.
이 해에는 7월에 윤달이 들어 10월 28일(양 11월 18일)은
한씨 부인의 해산날이다.
새벽 먼동이 틀 무렵부터 온 집안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가정리 안쪽에서 드디어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63세인 근암공은 첫아들을 보게 되자
그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 마당에 나와 서운이 깃든 마을을 서성거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날부터 구미산이 3일간을 연달아 묘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한다.
7대조인 정무공(貞武公) 잠와 최진립(潛窩 崔震立) 장군이 탄생할 때에도, 부친과 가까웠던 하구리에 사는 외와 최림(畏窩 崔琳)이 탄생할 때에도
구미산은 세 번 울었다(三鳴)고 전한다.
『경주시지』에는 구미산은
손씨 시조 대수촌장(大樹村長) 구마례(具馬禮)가 강림한 산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경주 최씨 가문에서는
자신들의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으로 알고 있다.
“구미산기 기장하다 거룩한 가암(佳巖) 최씨 복덕산 아닐런가”라고 한
대신사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씨 부인은
수운의 아명을 생각한 끝에 ‘북슬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경주 지방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복슬’이라고 아명을 짖는 습속이 전해온다 한다.
김기전(金起田)은
“북슬이라 함은 삽살개의 별명인데 그 지방에서 하인을 부를 때
대개 북슬이라고 부르며
또는 집안의 귀동자를 부를 때 역시 북슬이라 부른다.
한자로 대개 복술(福述)이라 쓰는데
수운 선생 역시 그 예의 하나로
최복술(崔福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운구(鄭雲龜)의 장계와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의 장계에도
복술(福述)이란 아명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죄인에게는 성씨를 쓰지 않으며
폄하하기 위해 아명도 쓰는 예가 있다고 한다.
아명을 기록한 것은 대신사를 죄인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대신사의 본명은 원래 제선(濟宣)이었고,
자는 도언(道彦)이었으며,
호는 무엇이라 했는지 모른다.
1859년 10월에
울산에서 구미산으로 돌아온 그 달에 이름은 제우(濟愚)로,
자는 성묵(性默)으로,
호는 수운(水雲)으로 고쳤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신사의 출신신분에 대하여 일부 학자 중에는 서자라고 보는 이가 있다.
첩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대신사는 첩의 아들이 아니다.
어머니가 한 번 출가했다가 재혼한 재가녀(再嫁女)일 뿐이다.
성종(成宗 1470∼1494) 때에
『경국대전』을 만들고 그 후 수정을 가하면서
예전(禮典)에 재가녀자손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다.
재가한 여자의 오라비나 그 아들과 손자에게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시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대신사는 재가녀자손(再嫁女子孫)에 해당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근암공은
정씨 부인이나 서씨 부인의 제문은 남겼으나
한씨 부인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1843년에 큰 불이 났을 때 소실되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찬제한 『근암행장』에
아들 제선(濟宣)과 사위 김진구(金振九)의 이름이 올라 있다.
한씨 부인은
두 남매 즉 대신사와 누이동생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한씨 부인의 내력을 알아보고자
금척리의 곡산 한씨 문중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누구의 딸인지, 생일이 언제인지, 돌아간 날이 언제인지 알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돌아간 연대는 『천도교회사초고』에
“대신사 10세에 모부인(母夫人)이 졸하고”라 하는 기록에 따라
40세(1834년)가 되어 환원했음을 짐작할 뿐이다.
묘소는 현재 대신사 태묘가 있는 산줄기 남쪽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