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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의 침입-9 : 몽골군의 3차 침략
04.09.25
1234년(고종 21년) 10월, 최이는 진양후晉陽候로 책봉되었다. 이는 강화도 천도를 성공시킨 공로를 국왕이 인정한 것이었다. 또한 천도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최이가 진양후로 책봉된 날,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이 최이의 사저로 가서 축하 하례를 올렸다. 천도한 후에도 최고 권력자로서 그의 변함없는 위상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었다.
최이는 진양후로 책봉되자, 대대적으로 개인 사저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미 1234년 1월,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관아 및 공공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으니, 대강 왕도의 기반시설을 마련한 뒤였다.
최이는 자신의 사택을 짓는 데 사병인 도방 군인들과 국가 상비군 4천 명을 동원하였다. 최이가 왕이 거처할 궁궐을 짓는데 2천명을 동원한 것을 보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인력과 자금을 투입했는지 알 수 있다.
건축 목재와 정원수는 대부분 내륙에서 가져와 조성했고, 특히 이것들을 배에 실어 강화도까지 운반하는 일은 난공사였는데, 군졸들이 물이 빠져 죽는 일이 속출했다.
최이는 사저 건축과 조영이 거의 완성된 후에도 계속 정원수나 아름다운 화초를 내륙에서 옮겨와 심었다. 몽골 침략이 뜸한 틈을 이용하려다 보니 겨울철에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심지어는 얼어 죽는 자도 있었다.
게다가 운반하는 연도의 주민들까지 강제 동원하니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최이는 죽을 때까지 틈틈이 사저를 이렇게 조영했고, 뒤를 이은 아들 최항도 그 사저를 물려받아 계속 확장 공사를 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완공된 최이의 사저는 그 원림의 규모가 수십 리에 뻗쳤고, 옛 개경에 있던 자신의 사저를 능가하는 규모였다고 한다. 열두 개의 누각에 붉고 푸른 구슬이 즐비했고, 기화요초들이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옥으로 만든 집에 올라 푸른 구슬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 눈과 귀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최이의 사저는 그 규모나 아름다움으로 볼 때 왕궁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는 궁궐이 있는 송악산이 아니라 견자산의 동쪽 기슭이었는데, 이 최이의 사저를 진양부晉陽府라고 불렀다. 이곳이 바로 강화도 최씨 왕조의 심장부였다.
강화도 천도는 최씨 정권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비록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천도였으나, 그것을 성공시키고 뒤이어 왕도 건설을 신속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최이가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준다.
강화 천도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 아래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최씨 정권이 장기 집권하는 데도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강화 천도 이후 최이 정권은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몽골의 침략도 최씨 정권의 장기화에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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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3차 침략은 당쿠란 장수가 총사령관이 되어 쳐들어왔다. 그는 앞서 두 차례의 침략에서 살리타이의 부장이 되어 참전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몽골로 도망친 홍복원이 그의 부장격으로 따라와 길잡이 역활을 맡았다. 홍복원, 그는 이제 완전한 매국노가 된 것이다.
(나중에 이 홍복원은 직접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군과 싸우기까지 합니다)
몽골군은 1235년부터 1239년까지 5년 동안 이루어진 3차 침략에서 세 번의 파상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이 기간 동안 1237년 한 해는 공격이 별로 없던 소강 상태였고, 세 번의 파상 공격을 나누어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번째 공격은 1235년(고종 22년) 7월에 침공을 개시하여 그 해 말에 철수했다. 이 첫번째 공격에서, 몽골군은 평안 남북도와 황해도를 지나 개경과 남경(서울), 충주, 상주, 안동을 거쳐, 그해 9월에는 경상도 경주 일대까지 침략해 왔다.
두번째 공격은 이듬해인 1236년(고종 23년) 6월에 다시 개시하여 역시 그해 말이나 이듬해 초에 걸쳐 철수했다. 이때는 역시 평안 남북도와 황해도를 지나 개경과 남경을 통과하고, 수주(수원), 죽주(경기 안성), 온수(충남 아산), 공주, 전주를 거쳐, 그해 10월 말 변산반도의 부녕(전북 부안)까지 남진하였다.
세번째 공격은 기록이 미비하여 확실히 알 수 없는데, 1238년(고종 25년) 8월 초 공격을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 공격이 시작된 시기인 그해 10월, 경주의 황룡사가 몽골군의 공격으로 불에 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그해 8월쯤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같은 몽골군의 공격에 견디다 못한 고려 조정은 1238년(고종 25년) 12월,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골에 보내 화친의 표문을 올린다. 다시 신하의 나라로서 복종을 약속하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239년(고종 26년) 4월, 황제의 조서를 지닌 몽골의 사절단 20여명이 새로운 수도 강화도에 들어온다. 천도 이후 강화도에 온 최초의 몽골 사신단이었다. 이들은 고려 국왕의 친조, 즉 고종이 직접 몽골로 찾아와 대칸을 알현하라는 요구를 하고서 돌아갔다. 이후 몽골군이 철수하면서 5년에 걸친 3차 침략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덧붙임)
몽골군이 남진하면서 처음 저항에 부딪친 곳은 동주성(황해도 서흥)이었다. 첫번째 공격 때인 1235년(고종 2년) 10월의 일이었다.
동주성은 자비령 남쪽에 있는 지금의 대현산성이다. 이 동주성이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된 시기는 10월 12일인데, 기록이 미비하여 자세한 전황은 알 수 없다. 아마 대부분의 대몽항쟁이 그랬듯이, 그 곳의 현지 주민이나 지방 관리들을 중심으로 저항하다가 함락된 것으로 보인다.
계속 남진하던 몽골군 본대는 동주성 함락 이후 지평현(경기도 양평)에서 고려군의 저항에 직면한다. 동주성을 함락시키고 열흘 후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처음으로 큰 피해를 입는다.
지평 전투는 야별초와 지평현 사람들이 합세하여 밤중에 몽골군을 기습해 승리한 것이었다. 몽골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고 포로와 노획물까지 얻는 전과를 올렸는데, 유격전에 의한 승리였다. 다만, 이때 패배한 몽골군은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 분견대로 추측된다.
야별초는 중앙에서 파견되기는 했지만, 매우 적은 소규모 부대여서 정규전보다는 유격전을 주로 구사했다.
최씨 정권의 대몽항쟁은 늘 그런 식이었다. 대규모 출정군을 편성하여 정면으로 몽골군에 맞서는 전면전이 아니라, 소규모 군대로서 국지전을 위주로 하고, 정규전보다는 유격전을 통해 몽골군에 대항했던 것이다. 물론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최이가 몽골의 3차 침략에서 최초로 내린 조치는 야별초 지휘관인 이유정에게 고작 160명밖에 안되는 병사들을 주어 몽골군 선발대를 저지하라고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 해 8월 하순에 접어든 무렵으로 몽골군의 침략 소식을 접한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이유정은 최이의 사병집단인 도방에 소속된 지휘관이었는데, 이 조치도 그나마 이유정이 몽골군과 싸우고 싶다고 강력히 자원한 결과였다.
사병집간인 도방 소속인 이유정이 국가 상비군인 야별초의 지휘관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벌써 야별초가 사병화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상비군이 사병화되고 있었다면 국가의 군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병화된 상비군은 국가보다는 권력자 최이에게 복무할 것이고 즉, 상비군(야별초)이 곧 최이의 사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상비군이 최이의 사병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비군을 동원한 대규모 전면전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규모의 전면전을 벌일려면 사병화된 상비군을 동원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권 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최이는 대규모로 출정군을 편성하여 전면전을 벌이는 것을 애써 기피했던 것이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대규모 출정군을 편성하여 방어전에 나선 적은 1차 침략 때 외에는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려에 침공한 몽골군은 결코 대규모 군대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수천, 가장 많을 때도 2~3만을 넘지 않았다!
고려의 모든 상비군을 총동원하여 싸운다면 대적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최이는 상비군에게 사병 역활만을 강요하여 전쟁에 동원하는 것을 기피했던 것이다.
동주성을 함락시킨 몽골군은 본대로 보이고, 그 선발대는 그보다 남진하여 이미 경상북도 지방을 통과하고 있었다. 한반도 내륙의 한 중심을 침략군이 종횡무진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데도 최이 정권은 별다른 대응책을 내놓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내륙은 몽골군의 말발굽에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
경상 북부 지방에 들어선 몽골군 선발대는 안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 안동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몽골군이 안동에 접근하자 안동 사람들이 꾀를 내어 몽골군을 동경(경주)쪽으로 쳐들어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자기 마을의 피해를 막겠다는 애향심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몽골군의 향도를 자청했다는 점에서 민심 이반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최이가 두려워한 것은 몽골군의 침략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런 민심의 이반이 아니었을까. 최이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상장군 김이생을 동남도 지휘사로 삼고, 충청도 안찰사 유석을 그 부장으로 삼아 경상도로 급파했다.
또한 최이는 몽골군의 3차 침략이 시작되자 전투보다는 민심 이반에 더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가벼운 죄로 옥살이하는 자들은 모두 사면하고 멀리 귀양간 자들도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는 한편, 천도한 이후의 체납된 조세도 면제해 주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천도 이후 이반된 민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백성들의 불만과 최이 정권에 대한 반감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의 조판이었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상세히 살펴보겠다.
몽골군의 선발대를 처음 맞아 싸운 사람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도방 지휘관 이유정이었다. 그가 몽골군과 조우한 것은 9월 22일, 해평(경북 선산)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이유정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몰살당하고 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불과 160명의 군대로 어떻게 수천명의 적을 개활지에서 상대할 수 있겠는가? 이유정에게 이런 쥐꼬리만한 병력을 주어 보낸 최이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몽골군 선발대는 이후 더 이상 멀리 내려오지 않고 대구나 경주 인근에 머물렀다. 본대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의 3차 침략 중 두번째 공격은 1236년 6월이었다. 개주(평남 개천)전투는 그 해 7월 6일에 있었다. 몽골군이 개주에 이르자 중앙에서 파견된 별초군이 개주의 지방군과 연합하여, 역시 유격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유격전은 평안도 서해안의 여러 지역에서 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 정주(평북) 석도(대동강 하구의 섬)에서도 몽골군 병사들이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이 있었다.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의 결과였다.
그해 8월에는 자주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자주성은 몽골군의 1차 침략 때 부사 최춘명이 끝까지 방어해 몽골군을 격퇴시켰던 유명한 전승지다. 그런데 이 자주성은 이때 8월 13일,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7월 18일 자주성 근교에 나타나 추수하던 농민 20여명을 죽이고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자주성에서는 최소한 20여 일간 공방전을 벌인 셈이다.
당시 자주성에서는 부사 최경후와 판관 김지저, 그리고 인근의 은주(평남 은산) 부사 김경희 등이 들어와 있었다. 자주성은 천연의 요충지였는데,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자주성을 찾아 인근의 지방 관리들과 주민들이 들어와 있었다.
1차 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성안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끝까지 항거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는지, 아니면 작전의 실패였는지, 8월 13일 결국 성이 함락되고 그 안에서 싸우던 성 안의 사람들은 몽골군에게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3차 침략에서 북계의 여러 지역은 쉽게 적에게 장악되었다. 두 번의 침략을 거치면서 성곽을 비롯한 여러 방어기능이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주성(경기도 안산) 전투는 역시 두번째 공격 때인 1236년 9월 8일 시작되었다. 이때 참가한 군대는 아마 자주성을 함락시키고 내려오던 몽골군이었을 것이다. 몽골군이 죽주에 이르렀을 때 죽주는 방호별감인 송문주가 지키고 있었다.
송문주는 1차 침략 때 귀주성 전투에 참가해 박서, 김경손 장군과 함께 싸우며 몽골군을 끝끝내 물리친 명장이었다. 그 공을 인정받아 낭장(정 6품)으로 특진하였고, 이제 방호별감으로 죽주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몽골군은 죽주성에 이르자 소수의 군대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성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퍼부어 쫓아냈다.
몽골군은 이후 투석기로 포격을 해 성벽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짚에 불을 붙인 다음 성 안에 던져넣기도 하였으나, 송문주는 포격에는 똑같이 포격으로 대응하고(이때 고려군에도 투석기가 있었나 봅니다), 적이 화공을 퍼부으면 잠자코 있다가 일시에 모든 병사들이 출격하여 몽골군을 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몽골군 사상자는 늘어났다. 몽골군은 이후 보름 동안이나 수많은 공성법을 동원하여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귀주성 전투에 참전했던 송문주는 몽골군의 공성법을 이미 파악하여 적의 움직임만을 보고도 어떤 공성기를 사용할 지 알고 있었기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죽주민들의 공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주는 귀주성 대첩의 영웅이었던 유명한 박서 장군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서는 귀주성 전투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했는데, 아마 이때 자주성 전투에도 참가해 죽주민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지 않았을까?
죽주성은 현재 경기 안성군 이죽면 매산리에 위치한다. 이 주변의 불교 유적 가운데는, 처인성에서 살리타이를 쏘아 죽인 김윤후 장군과 죽주성 승첩의 송문주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높이 5.7미터의 태평미륵불상이 세워져 있다. 죽주성 전투의 승리가 인근 주민들에게 강인하게 기억된 결과이리라.
죽주성에서 격퇴당하고 물러난 몽골군은 경기도 남부를 거쳐 충청도의 온수(온양)을 지나고 있었다. 몽골군은 전주, 고부를 거쳐 그해 10월 말 부녕(전북 부안)까지 내려온다. 최초로 호남지방을 침략 방향으로 잡은 이들은 선발대로 보인다. 이들은 여기서 더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후방에 아직 함락시키지 못한 고려의 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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