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5일(음3.3) 화요일. 절기로 청명(淸明)이자 식목일이다. 하지만 이날은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약510년 전 영남 현풍에서 호남 영암으로 세거를 옮긴 입향조의 향사를 모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호남파의 입향조이신 9세 총(緫) 선조의 호는 익재(益齋), 자는 자평(字平)이다. 예조참의(禮曹參議) 중곤(中坤) 선조의 손자요,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의 둘째아드님이시다. 백형(伯兄)인 유(紐)에 이어 성종조에서 서반(西班)에 올라 충찬위 어모장군(忠贊衛 御侮將軍:正三品) 및 용양위(龍讓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내신 분이다.
부호군공은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의 숙부이시다. 공은 무오사화(1498) 당시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모부인이신 청주한씨가 조정에 청원한 끝에 1500(庚申)년 고향 가까운 곳인 전남 순천으로 이배(移配) 되셨다. 이때 숙부이신 총(緫) 선조는 조카인 한훤당을 위문하려 순천으로 가셨고 한훤당선현께서는 화를 무릅쓰고 순천까지 찾아오신 숙부님의 안위를 염려하여 처가인 영암으로 피신하도록 권유하신 것이 세거(世居)의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영암 세거지에 정착한 호남의 세손들은 이후 나주, 진안, 해남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학문과 덕업을 쌓았고 500여년을 지내는 동안 이 지역에서 호남 명가의 이름을 얻기에 이른다.
호남파의 후손으로서 입향조 선조의 제향을 모시는 향사에 처음 참례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슴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두근거린다. 이날 새벽4시 진안파 종손 모수(模洙) 자문위원의 안내를 받아 입향조 묘소와 재실이 자리잡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용산리를 향해 함께 길을 나섰다. 네이버의 길안내를 따라 천안-논산 고속도로에서 다시 서해안 고속도로를 거쳐 목포IC에서 영암 학산면 용산리에 도착하다. 쉬엄쉬엄 왔는데도 아침9시를 지나지 않았다.
부호군공의 재실이 자리잡은 용산리(龍山里) 마을. 향양문(向陽門)이라 씌어진 대문을 통하여 재실로 향하면 四間五棟 규모의 재실 익모재(益慕齋)가 있다. 1990(庚午)년 창건한 재실 경내에는 창건의 경위를 밝혀주는 큰 비석 두개가 세워져 있다.
재실에 닿으니 서울과 광주, 나주에서 오신 분들이 벌써 여럿 모여있다. 이분들 중에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분들도 계셨다. 광주에서 희술(熙述)•희우(熙于) 전현직 호남종친회장과 나주에 계시는 대식(大埴)자문위원과 동식(棟埴)호남총무, 서울에서 내려온 재섭(在燮) 부회장, 희경(熙炅)•희창(熙昌) 형제분, 관식(官埴) 종원 등과 인사를 나눈다. 대부분 면식이 있는 분들이지만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시다.
조금 있으니 승합차를 타고 진안에서 오신 분들이 도착했다. 진안향교 전교(典校)를 맡으셨던 명석(明錫)고문과 창현(昌鉉) 전북진안종친회장, 오선(五善) 총무 등 열분 정도가 차에서 내리셨다. 진안에서 오신분들은 오늘 참봉을 지내신 휘 빈(鑌 11세)선조의 묘석이 낡고 훼손되어 쌍분 묘비를 새로 만들어 차에 싣고 왔다. 선영 오른쪽 기슭에 자리잡은 선조의 묘소앞에 비를 세워야하기에 작업을 위해 일부는 용산리 선영으로 먼저 떠났다.
제향을 모시기 앞서 제사를 모시는 분들이 모두 재실 옆방에 모여 헌관(獻官) 등 집사관(執事官)을 분정하고 문중회의를 가졌다. 제향을 모시는 장소가 화두가 되었다. 연로하신 분들과 제수품을 갖고 산에까지 올라가야 하는 불편 등 제반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나 난상토론끝에 문회(門會)를 주관하시는 희우 위원장께서 회의에서 도출된 결론을 발표하신다.
“내년부터 제향은 묘소앞에서 모시는 묘제로 한다. 묘제에 앞서 전날 저녁 용산리 익모재에 도착 하루밤 묵으며 문중회의를 갖는다. 문회에서는 이밖에도 문중분들이 많이 참제할 수 있도록 익모재 숙식환경을 개선하고 훼손된 재실의 기와, 기둥, 도색상태의 유지보수 및 멧돼지들의 출몰로 열악해진 묘지관리상태에대한 대책 또한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입향선조를 위해 정성껒 마련된 제수상이 올려지고 명석(明錫) 고문의 집례(集禮)에 따라 초헌(初獻) 재섭(在燮) 부회장, 아헌(亞獻) 희우(熙于) 부회장, 종헌(終獻) 광식(光埴) 이사가 헌작(獻酌)·재배(再拜)의 예를 올렸다. 이어 참제한 후손들이 10세 유(愉)와 흔(忻) 선조, 11세 감(鑑)과 빈(鑌) 선조님께 제향을 차례대로 모시고 선조님들께 흠향(歆饗)하시길 기원하여 강복(降福)을 빌었다. 이날 제향에는 대축(大祝) 대식(大埴)자문위원, 봉향(奉香) 홍식(洪埴 시인)이사, 봉로(奉爐) 희창(熙昌)이사, 사준(司樽) 관식(官埴)종원, 전작(奠爵) 근영(釿永) 종원이 맡았다. 산신제도 모셔졌다. 희술 호남종친회장과 동식 총무가 맡아 제를 올렸다.
일행은 제향을 모신 후 뜰에 나와 기념촬영. 희술 종친회장과 재섭부회장 등 일부 참제자들은 참봉 빈(鑌) 선조의 묘비가 세워지는 선영 현장을 지켜보려 진안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산으로 올랐다. 묘비의 글은 전교(典校)이신 명석(明錫) 고문께서 직접 찬술(撰述)하셨고 비용은 대동보 잉여금 중 진안에 배분된 잉여금으로 충당하였다. 큰 돌 비석들을 산위로 옮겨야 하기에 이 작업은 트랙터가 이용되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모수자문위원과 입향조 선조님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로 오르는 길에 학룡제로 이름 붙여진 용산수원지가 나타난다. 월출산 봉우리들의 신령스런 바위(靈巖)에서 흘러나오는 물들이 고인 큰 저수지다. 입향선조의 묘소를 보려면 수자원공사가 직접 관리하는 이 수원지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출입문이 있어 통행이 제한되어 있다. 오늘은 제향을 모시는 특별한 날이라 문중참제자들을 위해 출입이 개방되었다.
저수지 둑이 나타나고 주지봉 쪽으로 길이 나있다. 얼마를 걸으니 큰 비석이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瑞興金氏世葬山(서흥김씨세장산)이라 씌어졌다. 세장산 앞으로는 월출산의 남쪽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있다.
입향조 9세 부호군공 휘 총(緫) 선조님의 묘소는 월출산 주지봉(490.4m) 기슭에 쌍분으로 있는데 큰 봉분 두 기가 왕릉처럼 보였다. 난생 처음 찾은 선조님 묘소앞에 엎드려 절하고 둘러본다. 총 할아버지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묘소아래 장남 건공장군 유(愉) 선조의 묘가 쌍분으로 있고. 차남 참봉공 흔(欣) 선조의 묘는 합장되어 있다.
선영에서 얼마간 떨어진 오른쪽 기슭에 유(愉) 선조님의 장자이신 참봉공 11세 감(鑑) 선조의 묘소가 쌍분으로 있고 거리를 두고 조금 떨어진 아래쪽에는 흔(欣) 선조의 아드님이신 참봉공 11세 빈(鑌) 선조의 묘소가 쌍분으로 있다. 모수씨와 나는 선조님들 앞에도 엎드려 절한다.
매년 봄 음력3월3일 모시는 호남입향조 향사는 이제 경관이 수려한 묘소에서 묘제로 지내게 된다. 산위에서 내려다 보는 저수지는 산세와 어울려 山高水明의 산수경관이 장관이다. 일정의 여유가 있다면 묘제를 모시고 국립공원 월출산 천황봉(809.8m)을 오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면적은 작지만 전국의 명산들이 갖춘 모든 것들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전해지는 월출산에는 700여종의 식물과 800여종의 동물이 서식하는 그야말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차 있어 명산중의 명산이란 생각이 든다. 신령스런 바위이라 이름 붙여진 염암(靈巖)의 월출산 자락에 자리잡은 호남입향조 총(緫)자 할아버지가 영암에 세거를 하게 되기까지 500년 전의 영암과 월출산의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본다.■
첫댓글 기후 대부님,그리고 희창 아재님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앞으로는 시간을 내어 함께 참석하고 싶습니다.
대종보에 반드시 기고하시고, 6월 서흥회 정기 모임 때 다시 한번 실감있게 참배 소감을 부탁드림니다. 병국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로에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보답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오선
수고많으셨습니다 많은도움이되었고 항상가슴깊이새기고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