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도 옷을 벗는 늦은 봄날
고향 강냉이밭에 비료를 주러 갔습니다
바람은 이미 수정 끝난 밤꽃에 집정거리고
하늘은 열 받은 대지에 진한 눈짓을 하는 거였어요
조용한 산골 마을
선머슴 같은 트럭 한 대 숨가쁘게 재를 넘습니다
한 때 질척한 소문을 몰고 다니던 금순 어멈이 손녀들과
밭두렁 오디를 따느라 웃음 몇 알 흩어 놓고 간 뒤
가끔 뒷산 갈까마귀 맥없이 울어대고
앞산 뻐꾸기 호들갑을 떨었는데요
찬찬히 들어보니
아 요놈들 노는 꼴이 수상한 게 아니겠어요
뒷산 갈까마귀 느끼한 목소리로 갈까갈까 하니
앞산 뻐꾸기 벗구벗구 합니다
벗고 오라는 소리인가요
벗고 있겠다는 소리인가요
추정컨대 새가 털을 벗고 날 수 없으니
오호라! 제가 벗고 있겠다는 앙큼스런 저 뻐꾸기
기어이 하늘도 거친 숨을 몰아쉬데요
소나기 한바탕 쏟고 갔지요
급하기도 하셔라
황달 병에 걸려 싹수 노란 강냉이년들
비료 주자 말자 쪽쪽 다 빨아 치우는 거 아니겠어요
마음 밭 분주했던 봄날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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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거미 부동산 / 박창호
죽전교 난간
추락 방지를 위해 처 놓은 철망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짓는다
불법 광고물 단속에 걸려 몸 잘린 나일론끈들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는 이곳
굳은살 박일 새 없이 순간에 몸 잃은 손들이
잘려나간 몸이 못다한 광고 문구를 마구 써대고 있다
역순으로 풀면 반드시 주모자가 밝혀질 것 같은
저 핏기 없는 손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싼 땅 있어요. 아파트 급매
요지 상가 분양하며 아우성을 친다
부동산 경기가 벌어진다
차액 노린 개구리들이 뛴다
세액 올린 정부대책이 럭비공처럼 튄다
덩달아 뛰는 분양가
입수 뒤 수영장처럼 수도권 집값이 파도를 친다
뛰는 만큼 멀어지는 무주택자의 결승점
사기, 반칙, 짜릿한 쾌재도 북적이는 이면
거미는 오늘도 집을 짓는다
꼬리에 줄을 묶고 트랙을 달리는 거미
비인기 종목을 뛰는 거미
분위기 모르고 초혼 재혼, 웨이터 박찬호를 외치는 손길에
밤새 또 부서질지 모르지만
달리다 지쳐 넘어지고 스러져도
늘 일등만 하는 여기
누구 거미집 한 채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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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위 / 박창호
흰 두루마기에 늘 뒷짐진 모습으로
오리 무리에 끼어 사는 거위가 있다
거위가 오리와 살면 오리의 말을 알아듣는 듯한데
절대 오리 말은 하지 않는다
돌을 찍던 굴착기가 형님이라 부를 법한
저 확고히 거만한 모가지
날 수 없는 몸 물에라도 뜨게 하기 위하여
떠다니는 스티로폼이라도 필연코 먹어 두어야 하는 저놈
비록 벼슬은 없다 해도 뚜렷한 관작의 흔적이 있는 걸 보면
어느 시절, 혁명을 꿈꾸다 몰락한 사대부 자손이거나
난리통, 목에 풀칠할 땅 한 떼기 없어 산골로 산골로
화전의 꿈을 옮기던 반가의 지차임이 분명한
언제나 비상의 헛 꿈을 나래 짓 하는 저 거위를
난 할아버지라 부르기로 했다
내가 세상 빛을 보기 전
이미 먼 곳으로 날아가신
한번쯤 뵙고 싶던 내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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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봄을 닦는 여자 / 박창호
하늘 종소리 맑던 날
식당 종업원인 그녀가 현관유리를 닦는다
핸드볼 골키퍼 형상으로 봄빛을 막아내는 여자
버들가지 물오르듯 원피스가 따라 오르고
슬리퍼는 개 혓바닥처럼 헐떡인다
그녀의 머리는 진공상태이다
그녀가 가끔 비 맞은 강아지처럼 머리를 흔들 때는
찌든 가계부며, 남편의 정답 없는 개똥철학
묵 전 같은 시어머니 인간성이 먼지로 떠다닐 때이다
들어올린 종아리에 쥐 한 마리 잉태하는 새벽
몸서리치는 진통으로 삶을 되짚어 눈물 지울지 모를
그녀에게 봄은 혼탁한 사치일 뿐이다
온몸으로 봄맞이에 나선 꽃봉오리처럼
쓸고 닦고 오로지 맑게 웃는 일
봄을 닦는 여자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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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노란 신호등 하나 / 박창호
봄은 노란색이다
노란 출산을 위해 노란 생각과 노란 꿈만 꾼다
나뭇가지며 잠 덜 깬 씨앗에 싱긋 눈짓을 하면
이때다 싶은 꽃들은 노란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달래며 냉이를 캐던 유년의 일기를 넘기다 보면
따끈한 군감자 냄새도 날 것이다
봄은 늘 졸린 눈을 하고 있다
봄바람 속에는 나비가 날아간 자국과
박새의 간격 좁은 노랫소리가 있다
아기 같은 햇살을 안고 양지에 나와 앉는 봄
웃돈을 건네고 자리를 양도받은 기미가 보인다
불씨 하나 숨기고 목이 탄다
도시락 가득 꽃씨를 담고 속삭이듯 술렁이다가
모두 함께 뚜껑을 열면 펑 터져 나올 것 같은 꽃 폭탄
보라! 모든 꽃이 팝콘의 모의가 아니겠는가
바람과 비와 햇살의 농간 없이
벌 나비를 부릴 수 있겠는가
분뇨 향이 황홀하여 소녀들도 울렁이는 봄
초록 잎을 피우건 붉은 꽃등을 달 건
난 무조건 네 의견에 찬성표 하나 던지고
너만큼 목마르게 너를 기다리는 이 마음엔
노란 신호등 하나 켜 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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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네 집에 살고 싶다 / 박창호
콘크리트 집에 살면
수명이 줄어든다는데
열 가락지 깍지 낀 황진이처럼
온몸으로 콘크리트 기둥 끌어안고
죽어 가는 느티나무가 있다
툭툭 불거진 암세포
피부의 각질은 부스러지고 있다
하늘을 오르고 싶은 의지와 상반되게
우듬지 까치둥지가 되어야 하는 삭정이
긴 세월 살면서 속 썩을 일 없었을까 마는
비우고 또 비워
죽음으로 술렁이는 네 숨결을 본다
고사목이 되고서도 그림으로 남아
기어이 건져야 할 모진 목숨 하나
뿌리는 또 하나의 삶이다
뿌리가 뻗어야 할 그쯤에
두부처럼 잘려나간 콘크리트 벽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던 갈망의 여운이다
어느 봄에 싹 틔움 그만 둘지 모를
소유 무소유의 삶
죽어서도 홰나무로 살아야 할
네 아픔 깊은 곳에
집 한 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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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종지의 (三從之義) / 창호 바보
우리 집 식탁은 자식이 넷이다
그 자식들은 하루종일 식탁 밑에 매달려 빈 젖을 빨다가
가족 만찬에 나와 앉아 잠시 엉덩짐을 지는데
고작 하루 한두 번, 많아야 세 번 드나드는 그 걸음이
경주[競走]에 나선 경마장 말굽보다 더 거칠어
화석에 박힌 공룡 발자국처럼 바닥에 지문을 찍는 터라
보다가 못한 어머니가 모두에게 신발을 신기자
신발 신은 자식들은 어디론가 하나 둘 떠나가고
한 놈만 남아 말 궁둥이 같은 어머니를 모시는데
어머니 육중한 엉덩이에 눌려 관절을 뻐걱대는 그놈은
누군가 냄비를 올려놓아 상판마저 죽을상이 되었는지라
병들고 못난 자식이 못마땅한 어머니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며 흩어진 자식들을 찾으나
너도나도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떠난 놈들이, 한 놈은
깁스[Gips]를 한 채 다용도실 벽에 기대어 끙끙대고
남의 새끼 된 딸년은 제 아비 제사에 얼굴도 안 내밀고
책상 앞에 다리 걸고 이유 없이 불목[不睦] 하는 놈에
삭풍 가슴 뚫던 하루종일 말벗 없던 마른 입에
따슨 밥 한술 소록소록 넣어 주는 놈이 없는 거라
쇠다리 짚고 좁은 집도 넓게 보였을 어머니는
아릿한 허기가 어둠같이 밀려오는 저녁때가 되면
뒤웅박 팔자에 삼종지의[三從之義]가 여자의 길이라 우기며
못난 자식과 저녁 한 끼 하겠다고
여윈 그림자 더 길게 늘이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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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아내와 가래떡
창호 바보
설이 다가오면 아내의 걸음은 바빠진다
평소 직장에 다니는 아내는 그럴 때마다
빌려 입은 듯 어색한 애교를 비틀면서
내게 심부름을 시킨다
오늘도 난 매력 없는 아내의 몸짓에
불만과 권태를 툴툴 섞어 떡을 빼다 주고
화난 척 한숨 자고 나니
어느 만큼 차례 상 준비를 끝낸 아내가
개구리 형상으로 퍼 질러 앉아
가래떡을 훑으며 기름칠을 하고 있다
좋아도 않는 떡, 굼뜬 입질 한 번 하려는데
아니 그 말랑말랑하던 놈들이 모두
뻣뻣하게 발기를 시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나는
아내에게 칼과 도마를 달라 하여
이를 갈고 칼바람 불러 칵칵 떡을 썰면서
내가 모를 매력이 아내에게 있었구나 하는
걸음 더딘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원수 같은 떡을 다 썬 내가 아내에게
다시 살아도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귓속말을 하고 나니
어느 떡 하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설 앞, 잠들면 눈썹 하얀 그믐밤
어디서 방아 찧는 소리 들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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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신부[新婦]가 된 할머니
창호 바보
할머니 염[殮]하던 날
할머니 몸에 핀 꽃을 보았습니다
여인에게 있어 한 달에 한 번 피는 꽃
오랫동안 막혔던 혈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열 세살 적 두려웠던 초경[初經]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꽃을 피웁니다
할머니 몸 닦고 분단장을 하십니다
속 옷 두 벌에 치마 저고리
새 버선에 새 옷을 갈아입습니다
먼길 가다 허기질까 노자 몇 닢 입에 물고
행여 꽃향기 흩어질까
세 벌 맷베*로 일곱 번을 묶습니다
원삼[圓衫] 족두리에
골 깊은 그리움은 면모*로 감추고
꽃가마에 오르듯 조심조심 관[棺]에 들어
오래 전 먼저 가신 할아버지를 만나러 갑니다
고목이 꺾이면 새순이 돋듯
세상 끝에서도 꽃은 핍니다
입은 옷이 단호[斷乎]하여
할아버지 가슴은 까맣게 탈지도 모르지만
초야[初夜]에 들 때 꽃 바침 하라고
난 할머니 허리춤에
베 한 조각 찔러 주었습니다
2005.2.5
*맷베 : 염할 때 베옷을 입히고 묶는 베로 된 끈
*면모 : 염할 때 시신의 얼굴을 싸는 베로 된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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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래 / 창호 바보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판교 나들목을 나가다 보면 이빨에 낀 시금치 같은 사금파리를 반짝이며 새벽을 기다리는 고래가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보다 차들이 속도를 내는 새벽이 그는 즐겁다 술 짝을 높이 실은 트럭이 P 턴을 할 때 개미귀신처럼 함정을 파고 기다리다가 트럭의 원심력을 슬쩍 당겨 술 한 차 꿀꺽하는 고래, 새벽 장을 보고 가는 트럭에서 야채도 두어 다발 안주하는 그는 가끔 맥주로 입가심을 한다 언제는 음료수가 생각났던지 음료수트럭을 엎어놓고 깨지지 않는 페트병에 쓴맛 다신 적도 있다
그는 이미 술 맛을 알고 있다 문학의 심사를 독식한 어느 작가는 한동안 비틀걸음을 친다 너의 내 것이 나의 남의 것이 되고 남의 축제는 내 눈엣가시가 된다 학연, 지연, 모작, 금전의 팥죽은 늘 밑에서 끓어오른다 처벌할 법이 없는 도로 음주 처벌할 법이 없는, 처벌할 법이 없는 모두가 입을 닦는다 폭주 뒤의 시간은 늘 체증에 시달린다
알에 있어 온도가 생명이라면 삶은 달걀은 병아리가 되어야 한다
프라이는 털 없는 통닭이 되어야 한다. 뼈 없는 닭발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 생명이라면 오래 두어도 골지 말아야 한다
어미 닭이 되어야 한다. 노계가 되어야 한다
온도와 시간이 생명이라면 어미 품이 자궁이라면 탯줄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알이 며칠 동안 탯줄로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탯줄을 끊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아내도 한 달에 한 번 무정란을 낳는다
자신의 알이 몇 줄 남았는지 아내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예비군 훈련 한 번 빼먹은 대가는 무정란의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따듯한 불의 알을 좋아한다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우린 가끔 산란과 방정을 한다
산란과 방정은 착상이 되고
정자는 애벌레처럼 흰자와 노른자를 먹고
온도와 시간은 피와 살과 뼈와 털을 만들고
알은 그로써 생을 마감해야 하고
예수는 부활했다
주여!
알의 뼈는 어이하여 밖에 있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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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월의 푸른 초상
창호 바보
나는 능수버들이라네
안간힘을 다 해 움켜쥐고 있는
몇 닢 남지 않은 푸름도
한파가 몰아치면 모두 끝이야
더 늦기 전에 머리 풀어
아직은 파란 내 자화상이나 그려 봐야겠어
큰 기대는 하지 마
태양 가운데에 붓대를 겨누고
늘어진 붓끝은 바람에 맡겨
내 그림자나 그리면 되지
아직은 푸른 기억이 남아 있을테니
그림을 그리려면 바람이 좋아야 해
바람이 없으면 붓을 놀릴 수 없어
바람이 거세어도 그림이 어지럽지
그림이 거칠면 붓이 다 헤어지고 말아
흐린 날엔 그림을 그릴 수 없단다
눈 내리는 날 푸른 잎을 그릴 수 있겠니
햇살이 얼어붙으면 물감을 찍을 수 없어
젊음이란 푸름이라 했지
젊은 날을 기억하고 싶어
햇살 좋고 바람 좋은
오늘은 그림 그리기 좋은 날
푸른 잎 한 올이라도 더 그려 넣어야 한다
오늘 밤은 달을 내다 걸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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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굴뚝에는 굴뚝새가 산다
창호 바보
굴뚝에 저녁연기만 피어올라도 살만 한 때가 있었다
에미야 오늘도 앞집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구나
할머니 말씀에 우리 집 저녁은 또 흰죽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어머니는 죽 한 사발 들고 앞집을 다녀오셨다
얼른 봄이 와야 할 텐데
치맛자락 걷어 올리고 콧물을 훔치시던 어머니
아파트 비상계단에는 늘 굴뚝 냄새가 난다
저녁을 끝낸 가장들이 비상계단에 쫓겨나와 한 모금씩 키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굴뚝새
고1짜리 아들놈도 친구들과 어울려 굴뚝의 추억을 만들던 그 계단에는
길고 반짝이는 휘파람을 부는 굴뚝새가 산다
아내 몰래 집안에서 담배를 피웠다가 계단으로 쫓겨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엔 굴뚝새가 있다
굴뚝 없는 아파트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면
이제는 살만도 하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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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난쟁이의 조상
창호 바보
난쟁이의 조상은 원래 거인이었다고 하는데요 우리 고향에 가면 산꼭대기에 난쟁이 할머니가 잃어버렸던 반지 자국이 있는데요 그 반지름이 50 미터는 되는데요 반지를 잃어버린 난쟁이 할머니가 반지를 찾느라고 땅을 긁는 바람에 산이 생겼다는데요
난쟁이 부부는 주로 사냥을 해서 먹고살았다는데요 아 그때 무슨 총이 있어 포수 질을 했겠어요? 철사가 있어 올무를 놨겠어요 할머니 난쟁이가 산밑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있으면요 할아버지 난쟁이가 거시기 막대기로 툭툭 산을 털면요 산돼지, 노루, 곰, 호랑이가 할머니 난쟁이 거시기로 우르르 들어가면요 그냥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와서는요 시시한 토끼, 다람쥐 같은 것들은 놔주고요 큰놈들만 개구리처럼 구워 먹었다는데요 그래서 우리나라 야생동물이 멸종위기에 처했다는데요
어릴 때, 우리 동네에 난쟁이가 살았는데요 나이가 꽤 들도록 혼자 살았는데요 아이들은 가끔 난쟁이를 놀리며 따라다녔는데요 근데요 그 난쟁이가 오줌 누는 걸 딱 한 번 봤는데요 고추가 옆으로 뻗치니까 전봇대만 해지는데요 그 난쟁이는 오줌을 누러 가지 않았는데요 그냥 방안에서 화장실까지 고추를 뻗치고 오줌을 누었는데요 그런데요 그런데요 그 난쟁이는 결국 장가를 못 가고 말았는데요
산, 나무, 고층아파트
떠나지 못한 철새의
머리만 드러난 희미한 기억
그의 방패는 투명한 비닐조각 같아서
결국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추락할 염려 없는 구름 속
그러나 속도는 줄여야 한다
죽으면 안개 속에서 꿈을 꾸는 거라는
그 말씀이 맞아
그러니 귀신은 꼭 안개 속에서만 나타나잖아
안개 냄새에 코가 맵다
친구야 이제 그만 시동을 꺼 주겠니?
안개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단 말야
새벽은 또 왔지만 난 어디로 갈 것인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도깨비는 다리가 없다고 했지
어느 날인가 내 다리도 없어지고 말 거야
난 무덤 속에 있단다
거울 속 태양엔 눈이 멀지 않아
그래도 널 사랑해 아가야
형장에서 사라질 명치 끝 주먹만 한 담배 한 모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습 (濕)
그 작은 목숨의 반란
노씨는 공사현장 잡부다 그가 하는 일은 시간을 줍는 일이다 하루 종일 폐 못 한 근도 못 줍고 퇴근할 때도 있다 고물로 팔면 몇 천 원 안 되는 폐 못을 줍다가 합판 몇 장 나르는 척 하다가 반장 몰래 낮잠도 자다가 하루 일당을 받았으니 흐흐 오늘 얼마가 남은 것이냐 퇴근길 소주 한 잔 마셔도 일당은 거저 줍는 셈
그의 안전모에는 매직으로 별 하나 그려져 있다 작업반장 장씨의 안전모에는 별 넷이 그려져 있다 별 넷 그려진 장씨는 하루 종일 놀다 간다 노씨에게 망을 보라며 잠자기가 일쑤다 저 놈은 밤마다 무슨 짓을 하기에 매일 잠만 자빠져 잘까 한 번은 소장이 왔는데 깨우지 않았다가 장씨한테 시퍼렇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 장씨는 자다가도 소장만 나타나면 전기 맞은 사람처럼 일어나 열심히 일하는 척 한다 별 하나인 노씨가 소장한테 굽실대는 건 당연하나 별 넷을 단 장씨가 소장한테 설설 기는 건 구역질이 난다
노씨도 별 넷을 달고 싶다 그래서 소장한테 거만하게 굴고 싶다 노씨는 매직으로 별 셋을 더 그려 넣었다 해 하나 더 뜬 듯, 온 현장이 훤하다 그런데 반장 장씨 가 좀 보자고 한다 그래 아마도 승진을 축하해 주려는 게야 노씨는 내심 기뻐하며 따라갔다 노씨는 장씨한테 또 얻어터졌다 이 새꺄 니 맘대로 별을 더 다냐 것두 하루아침에 세 개씩이나 더 하며 죽도록 팼다 실컷 터진 노씨는 꺼이꺼이 울면서 별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니란 걸 배웠다
그래도 노씨는 별을 많이 달고 싶었다 노씨는 하나밖에 없는 별 위에 별 셋을 덧칠해 그렸다 장씨는 전혀 눈치를 못 챘다 노씨는 빙그레 웃으며 장씨더러 바보라고 속으로만 실컷 욕했다
노씨는 말조심을 하였다
바람이 몹시도 차던 날 여자는 버스를 기다린다
긴 부츠에 스커트 차림의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
한 뼘 남짓 남겨 놓은 무릎에서 포근한 살 내음이 난다
여름내 흰 살을 파먹고 살던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내들의 시선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왔다
술이 덜 깬 샐러리맨의 눈에서 비틀비틀 송충이가 걸어 나왔다
중년의 눈에 어른거리는 벌레
어린이의 눈에 비친 무지갯빛 딱정벌레까지
두 눈 부릅뜨고 우글대는 벌레들
스멀스멀 무릎 위를 기는 벌레들
급기야 여자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하는 벌레들
숨이 멎은 듯
벌레에 싸여 한 장, 사진이 되어버린 여자
그녀의 무릎은 수액 멈춘 나무처럼 감각마저 얼었다는 것인지
시선마저 잃었다는 것인지
볏짚 두른 가로수에 눈을 둔 여자는
스모선수 같은 나무의 체취에 흠뻑 취해 있었다
바람에 낙엽이 날리는 것은
바람이 낙엽보다 무겁기 때문입니다
낙엽이 저 홀로 가볍다면 야
아마도 별나라로 떨어졌겠죠
낙엽은 떨어져 두엄이 되고
쌀은 썩어 자손이 마실 물이 됩니다
낙엽이 쌀이라면 삶의 무게가 줄어들까요?
농부에게도 쌀은 무겁고
서민에게도 쌀은 무겁습니다
쌀가마를 진 짐꾼에게
젖은 쌀 한 가마니와 마른 쌀 한 가마니 중
어느 것이 더 무겁습니까 물었다가
개새끼 소릴 들은 적이 있나요?
홍역 하다 청솔 잎이 된 어린 누이는
쌀 한 톨도 못 먹었다는데
있어도 못 먹고 배곯는 나는
성인병 환자란 이름이 붙었네요
한 살 박이 개만큼도 쌀을 못 먹고
요강에 좁쌀 가득 시집오신
갈바람에 낙엽 되신 어머니
낙엽 밟는 발걸음이
낙엽의 기억보다 무겁습니다
낮은 곳에 깃들어 서로 덮어두는
그대의 마음이 따사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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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단풍나무
창호 바보
그녀는 가끔 숨이 차다고 했다
무안 당한 사람처럼
볼을 토닥인 적도 있다
모를 일이다
여자는 정녕 모를 일이다
다 늦은 나이에 누구를 유혹하려
저토록 고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일까
포도주를 한 잔 따른다
붉은빛을 음미한다
신열이 오르는 얼굴
지난밤 내린 비에
붉은 잉크가 섞여 있었다
이산 저산 붉게 물들이는
그녀는 아마
몹시 초조한 갱년기일 거야
매 번 화려하기만 한 그녀의 가을
더 늦기 전에
바람이 더 차지기 전에
그녀는 아예
훌훌 벗고 세상에 나서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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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달빛 도둑
창호 바보
벌초 가는 길목에 집 한 채 있다
살림살이 하나 건드리지 않고
주인만 떠난 빈집
헛간이며 여기저기를 기웃대다가
뒤란 처마 밑 포장된 박스를 보았다
목까지 차 오른 궁금증
묶은 끈을 푼다
(세계걸작문학선)
오랫동안 침묵했을 이야기들이
얼굴에 먼지를 털며 부스스 실눈을 뜬다
돈키호테가 쥐 오줌처럼 젖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 도둑이 되었다
뼈 굳은 표지를 열고 책장을 넘긴다
푸르르 곰팡이 냄새 가득한 입들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 단숨에 풀어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숨쉬고 있었고
채털리부인은 아직 사랑에 빠져 있었다
초라한 처마 밑
그 많은 이야기가 잠들고 있을 줄이야
땅거미가 책장을 가렸다
벽에 걸린 시계는 45초 오르막에서
헛 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어둠이 딸각딸각
달빛을 훔치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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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시인들이여
창호 바보
어떤 시인이 말하길 시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한다
밥도 못 먹고 이발도 못 하고 수염도 못 깎고 목깐도 못 하고 갈아입은 팬티는 사흘이 넘었는데 달랑달랑 거시기 같은 (여류 시인은 빼고) 동전 한 푼 없어 깡 술을 마시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동지섣달 길거리에서 얼어죽을망정 저마다 높다높다 자존심만 강한 시인들이여
성황당 터 늙은 고로쇠나무 밑
하늘소 한 마리
검은 안경에 지팡이 두 개 더듬거리며
세상 구경을 나왔다
나무 위에서 수액을 마시며
신선처럼 살던 저놈
온몸에 갑옷으로 무장하고
가위처럼 쩔꺽이는 주둥이로 허세를 부리지만
굼뜬 몸놀림으로 보아, 어디
개미새끼 한 마리라도 잡겠나 싶어
우스운 생각에
더듬이를 잡고 들어올리는 순간
어라? 이놈
발바닥을 바위에 딱 붙이고
하늘을 베고 벌러덩 눕더니
으랏차!
지구를 번쩍 들어올리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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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술병의 비밀 병기
창호 바보
구멍가게 주류품 냉장고
산뜻한 군복차림의 신병들
부동자세로 서있다
어여쁜 아가씨
냉장고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춰 봐도
상큼한 아카시아 향 코끝을 어지럽혀도
군기 든 어깨 떡 버티고
눈알 굴리는 소리도 없다
무슨 혹독한 훈련을 받았는지 꾹 다문 입
도무지 기밀 누설할 기미를 안 보인다만
너희 신병들 쯤이야 하고
손가락 사이에 소주 두어 놈
머리채를 잡아채고
한 놈씩 앞에 놓고 목을 비틀어
술잔에 머리 처박고 고문을 하니
알코올 23도의 비밀을
꼬올 꼴 털어놓는다
짜식들 겨우 23도 가지고 까불어
깔보고 한 잔 두 잔 기밀을 취조하던 나
채 두 놈도 처치하지 못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사랑사랑
난 술 채우고 뒹굴고
넌 술 비우고 뒹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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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입
창호 바보
꾹 닫고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입
가로 세로 한 뼘도 안 되는 입으로
태산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