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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樑文
金啓光 鳩齋
(一 ) (二)
學者有師以傳道難忘育我之恩歿而可祭其在斯, 爰闢妥靈之所辰良日吉而有待天作地藏而以遺
학자유사이전도난망육아지은몰이가제기재사, 원벽타령지소진량일길이유대천작지장이이유
恭惟 苟全先生太白鍾靈東璧揚彩遙遙家世太師, 諫議之雲仍袞袞淵源皐翁川老之徒弟魚游千
공유 구전선생태백종령동벽양채요요가세태사, 간의지운잉곤곤연원고옹천로지도제어유천
里貫穿史漢之文雪立三年契悟圖書之妙退而省, 亦足以發推其有遂及諸人寬閑之野寂寞之濱爰
리관천사한지문설입삼년계오도서지묘퇴이성, 역족이발추기유수급제인관한지야적막지빈원
得我所絃誦之聲禮讓之風樂育英材若將終身肯, 下南山之豹雨無以爲養遂折東堂之桂枝文章自
득아소현송지성예양지풍악육영재약장종신긍, 하남산지표우무이위양수절동당지계지문장자
露於世間溝壑不變於心裡魯衛之頌盈耳符季札, 之觀風齊滕之路不言得孟氏之遺意靑雲紫陌試風
로어세간구학불변어심리로위지송영이부계찰, 지관풍제등지로불언득맹씨지유의청운자맥시풍
濤而驚心墨綬朱幡望鄕園而在目白魚靑竹之異, 饌佳山麗水之窮探戒石在前儼朝冠而朝服蓍龜
도이경심묵수주번망향원이재목백어청죽지이, 찬가산려수지궁탐계석재전엄조관이조복시귀
住近每考德而考言南州之士望傾盡文敎藹藹北, 海之治聲第一璽書煌煌栗里之松菊欲荒倻山之
주근매고덕이고언남주지사망경진문교애애북, 해지치성제일새서황황율리지송국욕황야산지
風雨正急歸舟無恙載琴書而輕遙倦鳥知還釋樊, 籠而自適彤庭暫入本非志於久淹玉節纔宣仍占
풍우정급귀주무양재금서이경요권조지환석번, 롱이자적동정잠입본비지어구엄옥절재선잉점
便於長往瓜田李逕跡不涉於嫌疑蘿月松風興自, 專於閑寂雖當聖作而咸覩其奈年邁而宜休講席
편어장왕과전이경적불섭어혐의라월송풍흥자, 전어한적수당성작이함도기나년매이의휴강석
長虛起名儒之嗟惜緇帷重闢爲後輩之依歸歲在, 龍蛇報賢人之夕夢樓成十二赴巫陽之下招鄕里
장허기명유지차석치유중벽위후배지의귀세재, 용사보현인지석몽루성십이부무양지하초향리
凄凉永斷相杵之響門庭冷落爭抱築場之悲風流, 難作於九原歲月已周於三祀靑衿學子攬遺訣而
처량영단상저지향문정냉락쟁포축장지비풍류, 난작어구원세월이주어삼사청금학자람유결이
翹心白首門生想摳衣而抆淚睠玆槃隱之洞實是, 碩人之寬武夷之泉石依然芬芳可挹西河之遙路
교심백수문생상구의이문루권자반은지동실시, 석인지관무이지천석의연분방가읍서하지요로
不昧精爽猶存丘壑幽深宜小子莊修之地松楸掩, 暎卽當日望思之庵不計時詘而事贏便見人趍而
불매정상유존구학유심의소자장수지지송추엄, 영즉당일망사지암부계시굴이사영편견인추이
士勸松楹栢板彷佛宮墻之像竹苞翬飛備盡工倕, 之巧山蟠龍首接壟雲之靑蒼地盡龜城分竹溪之
사권송영백판방불궁장지상죽포휘비비진공수, 지교산반룡수접농운지청창지진귀성분죽계지
源派讀其書而尙友薰其德而善良吾黨勉哉里仁, 美矣斯陳燕語用擧虹梁兒卽偉抛梁東金輪峰兀
원파독기서이상우훈기덕이선량오당면재리인, 미의사진연어용거홍량아즉위포량동김륜봉올
接靑空山下小泉流不息須將果育擊群蒙兒卽偉, 抛梁西一水逶迤接文溪西山信是夷齊地留得殘
접청공산하소천류불식수장과육격군몽아즉위, 포량서일수위이접문계서산신시이제지류득잔
暉未遽低兒卽偉抛梁南豊樂蒼蒼望裡含千載歐, 翁文字在 先生筆力可同參兒卽偉抛梁北望日
휘미거저아즉위포량남풍락창창망리함천재구, 옹문자재 선생필력가동참아즉위포량북망일
危峰連太白後重不遷實體仁嵐翠玲瓏更可悅兒, 卽偉抛梁上太虛寥廊何淸朗凡爲君子欲希天須
위봉연태백후중불천실체인람취령롱경가열아, 즉위포량상태허요랑하청랑범위군자욕희천수
向心中除慾障兒卽偉抛梁下門前官路連平野寄, 語紛紛冠盖人爭似明牕讀書者伏願上梁之後人
향심중제욕장아즉위포량하문전관로연평야기, 어분분관개인쟁사명창독서자복원상량지후인
才菀興文運大啓誠意以享豈文具之徒爲正學是, 崇無技藝之橫騖灝灝爾噩噩爾咸工古文于于焉
재울흥문운대계성의이향개문구지도위정학시, 숭무기예지횡무호호이악악이함공고문우우언
濟濟焉鼎來同好庶光明之永錫則堂室之共躋.
제제언정래동호서광명지영석칙당실지공제.
상량문(上樑文)
구제(鳩齋) 김계광(金啓光)
배우는 사람에게는 스승님이 있어서 도(道)를 전(傳)하게 하였으니, 나를 육성(育成)시킨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시자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기에 이에 위패(位牌)를 봉안할
곳을 지어 모시게 됐으니, 좋은 날과 좋은 시(時)를 기다림이 있었고,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두었다가 물려주셨습니다.
삼가 생각하니,
구전(苟全)선생은 태백산(太白山)의 영기(靈氣)를 모아서 <문장(文章)을 주관하는>
동벽성(東璧星)의 문채(文彩)를 드날리셨습니다.
아득히 먼 가세(家世)는 태사공(太師公: 金宣平)과 간의공(諫議公: 定獻公 寶白堂 金係行)의
후예(後裔)이시고, 이어진 연원(淵源)은 소고(嘯皐: 朴承任)선생과 월천(月川: 趙穆)선생의
문도(門徒)셨습니다.
물고기가 천리를 헤엄치듯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문장을 꿰뚫고,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만에 도서(圖書)의 오묘한 관계를 깨달으시고,
물러나서는 성찰(省察) 또한 풍족하게 하여 이를 미루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는 여러 사람들과 한가한 들판과 적막(寂寞)한 물가를 언급하면서 이에 나 자신이 해야 할
거문고 타며 시 읊는 소리와 예양(禮讓)의 기풍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영재(英材)를 기르는 것을 즐기며,
장차 종신(終身)토록 하려고 하셨습니만 어찌 남산(南山)의 표범이 비가 온다고 먹이를 구하려고
내려올까만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어서 마침내 동당시(東堂試)에서 계림일지(桂林一枝)를
꺾으[及第]셨습니다.
문장(文章)은 절로 세상에 드러났지만 <바른 말을 하다가 배척당하여 시체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내버려져도 굴하지 않겠다는 지조는>마음속에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대한 칭송이 귀에 가득해서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풍물을 관람한 것[구전(苟全)선생이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신 일]과
부합되고, 제(齊)나라와 등(滕)나라로 가는 길에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맹자(孟子)가 남긴
뜻[맹자가 왕환(王驩)과 등(滕)나라에 가면서 한마디도 의논을 안 한 고사에서 같이 간
정사(正使)인 허균(許筠)과 같은 소인과는 말을 안 한 것을 비유함.]을 터득함이셨습니다.
벼슬길에서 뜻이 맞지 않은 일로 풍파(風波)에 시험당하여 마음이 놀라기도 했으며,
검은 인끈차고 붉은 깃발 펄럭이며 고향의 지방관을 의망(擬望)함이 목전에 있었습니다.
백어(白魚)와 청죽(靑竹)의 특이한 반찬을 아름다운 산과 고운 물에서 끝까지 찾으셨고,
경계석(警戒石)이 앞에 있으니 엄연히 조관(朝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고 집무하셨으며,
시귀(蓍龜)가 가까이 머물고 있으니,
매번 덕(德)을 고찰하고 말을 상고하셔서 남쪽 고을 선비들의 인망(人望)이 모두 <선생에게로> 기울어
문치(文治)의 교화가 성대하고,
<공융(孔融)이> 북해상(北海相)이 되어 문치(文治)를 했듯이 <구전선생의 선정을 베푼>
명성이 제일이어서 옥새(玉璽)가 찍힌 글발[고과표(考課表)와 자급(資級)] 빛났습니다.
<도연명의>율리(栗里)의 소나무와 국화가 황폐해지려는데,
<歸去來辭> 가야산(가야산)의 바람과 비[합천(陜川)서 요집조권(遙執朝權)하고 있던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비판]는 급박하기만 하여 금서(琴書) 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는
가벼워서 흔들렸고, 돌아갈 곳 아는 새는 늦게나마 깨달아 새장을 벗어나듯 잠시 조정에서
벼슬하기는 했지만 본래 오래 머물겠다는 뜻이 아니었고,
지방관이 되어 겨우 왕화(王化)를 폈던 것은 길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셨습니다.
참외밭과 오얏나무가 있는 길에서의 자취는 혐의스러운데 관계하지 않으셨으며,
칡넝쿨에 걸린 달과 소나무에 부는 바람의 흥취(興趣)는 한적(閑寂)함을 스스로 오로지 하셨습니다.
비록 성인(聖人)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때를 당했더라도 그 나이가 많아 당연히
쉬어야 하는 데야 어찌 하리오?
의당 강의하던 자리[講席]가 오래도록 비게 되자 명유(名儒)들이 한탄하며 애석히 여기고 있다가
학문을 닦던 곳이 다시 열려서 후배(後輩)들이 의귀(依歸)하게 되었습니다.
<현인(賢人)이 죽는다는> 용사(龍蛇)의 해에 현인(賢人)의 저녁 꿈[운명이 다함.]을 알렸고,
12곳의 백옥루(白玉樓)가 완성[문사(文士)의 죽음.]되자
무양(巫陽)을 보내 혼(魂)을 불러들였습니다.
향리(鄕里)는 처량(凄凉)하게 <애도로> 절구질 소리도 오래도록 끊겼고,
집안[門庭]은 냉락(冷落)하여 다투어 마당을 다지듯 슬픔을 다졌습니다.
풍류(風流)는 저승[九原]에서 일으키기 어렵고, 세월은 이미 48년[周於3紀]이 지났습니다.
<급제하여> 푸른 깃의 옷을 입은 학생들은 물려주신 비결[訣]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벼슬안한 백수(白首)의 제자[門生]들은 옷을 걷어 올리고 경의를 표하던 때를 생각하며
눈물을 닦습니다.
돌이켜보니 이곳 반은동(槃隱洞)은 실제로 석인(碩人: 賢人)의 너그러움으로
<주자(朱子)의> 무이(武夷)의 천석(泉石)처럼 의연(依然)하게 향기로움을 잡아당길 수 있고,
<자하(子夏)가 은거하여 강학(講學)한> 서하(西河)로 통하는 오솔길은 막히지 않아
정상(精爽: 精靈)이 계신 것 같고, 언덕과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어서 우리들이 학문을
수습(修習)하는 곳으로 마땅하며, 소나무 호두나무[松楸]가 막아서 가려주는 즉 당일(當日)에
우러르며 사모하는 집입니다.
때가 어려움에도 도리어 넘치는 일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한편 사람들이 따라주고 선비들의
권면함을 보게 되어, 소나무 기둥과 잣나무 판자는 궁장(宮墻)의 모양과 방불(彷佛)하고,
신축 건물의 하부의 견고함은 더부룩한 대나무 같고,
상부의 치밀함은 휘치(翬雉)가 날듯이 화려하여 공수(工倕)와 같은 공교(工巧)함을 다 갖췄습니다.
산은 서려 있는 용(龍)의 머리가 도산서원 농운정사(壟雲精舍)의 푸른 하늘과 닿아있고,
땅은 귀성(龜城: 영주) 끝 죽계(竹溪: 紹修書院)를 원류(源流)로 지파(支派)가 갈라졌습니다.
그 글을 읽고 옛날의 어진 이를 벗으로 삼아 그 덕(德)에 감화되어 선량(善良)하게 됐습니다.
우리들은 힘쓸지니! 살고 있는 곳에 어진 이가 많아야 아름답게 되는 법입니다.
이에 터놓고 재잘거리는 말[燕語]을 늘어놓으며 무지개 같은 대들보를 들어 올립니다.
兒卽偉抛梁東 아즉위포량동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金輪峰兀接靑空 김륜봉올접청공 금륜봉(金輪峰)이 우뚝하게 푸른 하늘 닿아있네.
山下小泉流不息 산하소천류부식 산 밑의 작은 샘물 쉬지 않고 흐르듯
須將果育擊群蒙 수장과육격군몽 반드시 장차 과감히 길러 뭇 어리석음 깨뜨리세.
兒卽偉抛梁西 아즉위포량서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一水逶迤接文溪 일수위이접문계 한 물줄기가 구불구불 문계(文溪)에 닿아있네.
西山信是夷齊地 서산신시이제지 서산은 바로 백이 숙제의 땅이라 믿고
留得殘暉未遽低 류득잔휘미거저 지는 해를 머물게 하여 뉘엿뉘엿 거리게 하네.
兒卽偉抛梁南 아즉위포량남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豊樂蒼蒼望裡含 풍락창창망리함 풍락산은 푸르러 바라보니 가슴 와 닿네.
千載歐翁文字在 천재구옹문자재 천년의 구양수(歐陽脩) 기문(記文)이 있으니
先生筆力可同參 선생필력가동참 선생의 필력(筆力)도 동참(同參)할 만 하겠네.
兒卽偉抛梁北 아즉위포량북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望日危峰連太白 망일위봉연태백 날마다 보는 우뚝한 봉우리 태백산에 이어졌네.
厚重不遷實體仁 후중부천실체인 후중함은 변함없이 인(仁)의 실체라
嵐翠玲瓏更可悅 람취영롱갱가열 푸른 아지랑이 영롱해 새삼 즐겁게 하네.
兒卽偉抛梁上 아즉위포량상 어영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리니
太虛寥廊何晴朗 태허요랑하청랑 텅 빈 허공은 어찌 그리도 맑은지
凡爲君子欲希天 범위군자욕희천 모든 군자들 하늘 본받고 싶어 하는데
須向心中除慾障 수향심중제욕장 모름지기 마음속 욕심의 장애 제거해야지
兒卽偉抛梁下 아즉위포량하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내리니
門前官路連平野 문전관로연평야 문 앞의 관아 길은 평야로 이어졌고
寄語紛紛冠蓋人 기어분분관개인 분분한 갓 쓴 사람에게 전할 말은
爭似明牕讀書者 쟁사명창독서자 밝은 창가에서 다투어 책 읽는 자가 되게나.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樑)후에 인재(人才)가 무성하고 문운(文運)이 흥성하게 크게 열리고
성의(誠意)로 제향(祭享)해야지만 어찌 겉만 꾸며[文具]서야 되겠는가?
또 바른 학문[正學]을 숭상하여 기예(技藝)가 제멋대로 날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없이 넓고도 엄숙하게 모두들 고문(古文)을 공부하여 학문에 뜻을 같이 하는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와서 광명(光明)을 길이 내려 준다면 당실(堂室)이 함께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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