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공 이종준 선생 이야기
이제민
1. 출생과 성장
<1>
안동 금계(金溪)에서 태어난 용재공(慵齋公)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다.
아버지 금호공 이시민은
용재공이 한양에서 유학할 때
재주가 앞서는 것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언행을 삼가고, 좋지 않은 친구를 사귀지 말며
학업에 힘쓸 것을 거듭 당부하였다.
아버지 금호공의 생애를 돌아보면
유배와 정속, 그리고 사면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금호공의 이복형 이명민이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금호공도 연좌되어
예안현에 정속되었다.
1458년 세조가 사면하자
아버지는 드디어 안동으로 돌아왔다.
<2>
1472년에는 인수왕대비의 칠촌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금호공이 특별히 면방되었다.
그러나 용재공이 과거에 나아가려 하자
아버지의 연좌 문제로
응시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용재공은 뜻을 펴지 못한 채
글을 읽고 밭을 갈며
수년 동안 학문에 힘썼다.
1473년 6월에는 부친상을 당하고
모친의 명으로 죽림사에 들어가
독서하며 학문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사면된 뒤
용재공도 성은을 입어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3>
부친은 대청 앞에 은행나무를 심고
“훗날 군자와 함께 강학하여라.”라고 하였다.
은행나무 아래 벗들과 어울려
학문을 논하고 시를 읊었다.
1498년 의성 현령을 마치고
안동 금계 집에서 망헌 이주 선생과 바둑을 두던 날,
동네 어귀에서 금오랑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직 나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듣지 못했다”라며
태연히 바둑을 두고
금오랑이 찾아와 체포 명을 전하자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올리니
“피하지 말고 의롭게 맞으라”며
담담히 당부하셨다.
자취는 사라졌지만
이야기는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2. 학문과 관직
1486년 내자시 직장을 시작으로
두루 관직을 거쳤다.
일본 사신의 호송사로 동래에 가고
평안 평사가 되어
상원군에서 삼소도 시를 지었다.
1491년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으나
사간원에서 서경을 하지 않자
그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1492년에는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의 영예를 누렸으며,
1493년에는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며
그 시명을 널리 알렸고,
사율원에서는 율문을 가르쳤다.
1494년 의성 현령으로 부임한 이종준은
퇴락한 향교를 옮겨 세우고,
문소루를 세우는 등
고을의 교육과 문화를 일으켰다.
1495년 연산군 때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어
소릉의 복위를 청하였다.
그의 삶은 곧은 선비의 길이었고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충절의 마음을 끝까지 지켰다.
3. 무오사화와 유배
<1>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던 중
단천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러
역참 벽에 시 한 수를 썼다.
‘고충자허중불여(孤忠自許衆不與)’로 시작하는
송나라 이사중의 시를 빌려
자신의 뜻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이 벽서가 발견되자
용재공은 단천에서 국문을 받고,
함경도 관찰사 이승건이 조정에 보고하자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2>
1499년 3월, 홍귀달이 이종준의 죄를 다시 살펴
죽이지 말 것을 간언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여
“수양산은 아득하구나!
나를 묻을 곳이 없구나”
라고 말하였다.
4. 학문과 예술
경상도 도사로 재임할 때는
이극돈과 함께 《유양잡조》, 《당송시화》,
《유산악부》 등을 간행하였고
의성 현령으로 재임할 때는
《전적벽부서첩발》을 쓰고
1497년에는 의서인 《신선태을자금단》을 간행했으며,
경상도 좌도 지도를 그렸다.
또한 사우들과 시를 읊으며 교유하였고,
특히 학을 잘 그려
시·서·화에 뛰어난
삼절의 선비로 일컬어졌다.
글과 그림, 저술은
오늘날에도 여러 곳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5. 죽음 이후의 일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려는 일은
오랜 세월 이어졌다.
1507년 중종 때
김흠조와 박원종 등의 청으로
용재공은 복관되었고
1509년에는 아우 이홍준의 아들인
이덕장이 상언하여,
이종준의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1518년 중종 때에는
용재공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였다.
묘소를 정비하고 묘도문자를 짓는 일이 이어졌으며,
1686년에는 경광서원을 세워
배상지·이종준·장흥효 세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렸다.
1689년에는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1824년 순조 때에는
후손 이창욱이 용재공의 흩어진 유문을 모으고
아우 눌재공 이홍준의 글을 함께 엮어
《용재선생유고》를 간행하였다.
1901년에는 전승된 기록과 여러 현인들의 글을 더하여 중간하였고,
1911년에는 유문과 후현들의 글을 다시 증보하고
체제를 정비하여
《용재눌재양선생유고》를 간행하였다.
사화와 세월 속에 흩어졌던 글들은
사후 3백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한데 모이기 시작했고,
완비된 문집이 간행되기까지
다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용재공과 눌재공의 글과 행적은 다시 모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그들의 학문과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6. 남겨진 작품과 후대의 평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종준이 그린 장식화풍의
《송학도》가 소장되어 있고,
성암고서박물관에는
그가 저술한 의서
《신선태을자금단》이 전하며,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는
그가 쓴 삼구정 편액이 남아 있다.
또한 《용재유고》를 비롯한
그의 글과 관련 자료가 전해져
용재공의 시문과 서화, 학문을
오늘날까지 살펴볼 수 있다.
5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무오사화의 참변 속에서도 굽히지 않은
용재공의 충절과 학문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그가 남긴 글과 그림, 그리고 학문은
한 시대를 살다 간 선비의 삶을 넘어
학문과 절의를 지키려 했던
조선 선비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