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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성호(三人成虎)
三:석 삼. 人:사람 인. 成:이룰 성. 虎:범 호.
[준말] 시호(市虎).
[동의어] 시유호(市有虎), 시호삼전(市虎三傳), 삼인언이성호(三人言而成虎).
[유사어] 증삼살인(曾參殺人), 십작목무부전(十趵木無不顚).
[출전]《韓非子》〈內儲設〉,《戰國策》〈魏策 惠王〉
세 사람이 짜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
전국 시대, 위(魏:梁)나라 혜왕(惠王) 때의 일이다. 태자와 중신 방총(龐葱)이 볼모[人質]로서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으로 가게 되었다. 출발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방총이 심각한 얼굴로 혜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나이까?”
“누가 그런 말을 믿겠소.”
“하오면, 두 사람이 똑같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나이까?”
“역시 믿지 않을 것이오.”
“만약,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그땐 믿으시겠나이까?”
“그땐 믿을 것이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세 사람이 똑같이 아뢴다면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 되옵니다. 신은 이제 한단으로 가게 되었사온데, 한단은 위나라에서 저잣거리보다 억만 배나 멀리 떨어져 있사옵니다. 게다가 신이 떠난 뒤 신에 대해서 참언(讒言)을 하는 자가 세 사람만은 아닐 것이옵니다. 전하, 바라옵건대 그들의 헛된 말을 귀담아 듣지 마시오소서.”
“염려 마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과인은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방총이 한단으로 떠나자마자 혜왕에게 참언을 하는 자가 있었다. 수년 후 볼모에서 풀려난 태자는 귀국했으나 혜왕에게 의심을 받은 방총은 끝내 귀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 방총 :《韓非子》에는 방공(龐恭)이라고 되어 있고《戰國策》에는 방총(龐葱)이라고 되어 있음.
새옹지마(塞翁之馬)
塞:변방 새. 翁:늙은이 옹. 之:갈 지(…의). 馬:말 마.
[원말]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
[동의어] 새옹마(塞翁馬), 북옹마(北翁馬).
[유사어] 새옹득실(塞翁得失), 새옹화복(塞翁禍福), 화복규목(禍福糾纆), 화복규승(禍福糾繩).
[출전]《淮南子》〈人生訓〉
세상 만사가 변전무상(變轉無常)하므로, 인생의 길흉 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할 수 없다는 뜻. 길흉화복의 덧없음의 비유.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 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馬]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戰死)했다.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한다.
서시빈목(西施矉目)
西:서녘 서. 施:베풀 시. 矉:눈살 찌푸릴 빈. 目:눈 목.
[원말] 효빈(效顰).
[동의어]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矉).
[출전]《莊子》〈天運篇〉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 곧 ① 영문도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의 비유, ②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본뜸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늘 눈살을 찌푸리고 걸었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서시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장자(莊子)》〈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本質)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춘추 시대 말엽의 난세(亂世)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理想政治)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서제막급(噬臍莫及)
噬:씹을 서. 臍:배꼽 제. 莫:아닐‧없을 막. 及:미칠 급.
[원말] 서제(噬臍).
[동의어] 후회막급(後悔莫及).
[출전]《春秋左氏專》〈莊公六年條〉
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
기원전 7세기 말엽, 주왕조(周王朝) 장왕(莊王) 때의 이야기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이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 있었던 신(申)나라를 치기 위해 역시 하남성에 있었던 등(鄧)나라를 지나가자 등나라의 임금인 기후(祁侯)는 ‘내 조카가 왔다’며 반갑게 맞이하여 진수성찬으로 환대했다. 그러자 세 현인(賢人)이 기후 앞으로 나와 이렇게 진언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머지 않아 저 문왕은 반드시 등나라를 멸하고 말 것이옵니다. 하오니 지금 조치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옵니다[噬臍莫及].’”
그러나 기후는 펄쩍 뛰며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어느 날, 문왕은 군사를 이끌고 등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리하여 등나라는 일찍이 세 현인이 예언한 대로 문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선시어외(先始於隗)
先:먼저 선. 始:비로소 시. 於:어조사 어(…에,…에서,…보다). 隗:높을 외.
[출전]《戰國策》〈燕策 昭王〉
‘먼저 외(隗)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전국 시대, 연(燕)나라가 영토의 태반을 제(齊)나라에 빼앗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즉위한 소왕(昭王)은 어느 날, 재상 곽외(郭隗)에게 실지(失地) 회복에 필요한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물었다. 곽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사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천금(千金)을 가지고 천리마를 구하려 했으나 3년이 지나도 얻지 못했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잡일을 맡아보는 신하가 천리마를 구해 오겠다고 자청하므로 왕은 그에게 천금을 주고 그 일을 맡겼나이다. 그는 석 달 뒤에 천리마가 있는 곳을 알고 달려갔으나 애석하게도 그 말은 그가 도착하기 몇 일 전에 죽었다고 하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죽은 말의 뼈를 오백 금(五百金)이나 주고 사 오자[賈死馬骨]’ 왕은 진노하여 ‘과인이 원하는 것은 산 천리마야. 누가 죽은 말뼈에 오백 금을 버리라고 했느냐’며 크게 꾸짖었나이다. 그러자 그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천리마라면 그 뼈조차 거금으로 산다는 것을 안 만큼 머지 않아 반드시 천리마를 끌고 올 것’이라고 말했나이다. 과연 그 말대로 1년이 안 되어 천리마가 세 필이나 모였다고 하옵니다. 하오니 전하께오서 진정으로 현재(賢才)를 구하신다면 ‘먼저 신 외부터[先始於隗]’ 스승의 예를 받도록 하오소서. 그러면 외 같은 자도 저렇듯 후대를 받는다며 신보다 어진 이가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스스로 모여들 것이옵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위해 황금대(黃金臺)라는 궁전을 짓고 스승으로 예우했다. 이 일이 제국(諸國)에 알려지자 천하의 현재가 다투어 연나라로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조(趙)나라의 명장 악의(樂毅)를 비롯하여 음양설(陰陽說)의 비조(鼻祖)인 추연(鄒衍), 대정치가인 극신(劇辛)과 같은 큰 인물도 있었다. 이들의 보필을 받은 소왕은 드디어 제국(諸國)의 군사와 함께 제나라를 쳐부수고 숙원을 풀었다.
[주] 매사마골 : 쓸데없는 것을 사서 요긴한 것이 오기를 기다린다. 쓸데없는 것이라도 소중히 다루면 현인은 그에 끌려 자연히 모여든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
선즉제인(先則制人)
先:먼저 선. 則:곧 즉(…그러면), 법 칙. 制:억제할 제. 人:사람 인.
[대응어]~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
[유사어] 진승오광(陳勝吳廣).
[출전]《史記》〈項羽本記〉,《漢書》〈項籍專〉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大澤鄕:안휘성 기현(安徽省 蘄縣)]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진[秦:하남성 회양(河南省淮陽)]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江東)의 회계군수(會稽君守) 은통(殷通)은 군도(郡都) 오중[吳中: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의 유력자인 항량(項梁)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楚)나라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적[籍:항우(項羽)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강서(江西:안휘성‧하남성)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시운(時運)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 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
“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앆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한왕조(漢王朝)를 이룩한 유방(劉邦)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성혜(成蹊)
成:이룰 성. 蹊:지름길(샛길) 혜.
[원말]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참조] 중석몰촉(中石沒钃).
[출전]《史記》〈李將軍列傳〉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전한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때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흉노족(匈奴簇)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무용담(武勇談)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기(騎)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사기(史記)》〈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소년이로 학난성
(少年易老學難成)
少:젊을 소. 易:쉬울 이. 老:늙을 로. 學:배울‧학문 학. 難:어려울 난.
[출전] 주자(朱子)의《朱文公文集》〈勸學文〉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말.
이 말은 남송(南宋:1127~1279)의 대유학자(大儒學者)로서 송나라의 이학(理學)을 대성한 주자(朱子:朱熹)의《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권학문(勸學文)〉에 나오는 시의 첫 구절이다.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을 이루기는 어렵다
[少年易老 學難成(소년이로 학난성)]
순간 순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一寸光陰 不可輕(일촌광음 불가경)]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도 깨기 전에
[未覺池塘 春草夢(미각지당 춘초몽)]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이 가을을 알린다
[階前梧葉 已秋聲(계전오엽 이추성)]
송양지인(宋襄之仁)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의). 仁:어질 인.
[출전]《十八史略》〈卷一〉
송나라 양공(襄公)의 인정이란 뜻. 곧 ① 쓸데없는 인정을 베푸는 것의 비유. ② 무익한 동정이나 배려.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제‧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수서양단(首鼠兩端)
首:머리 수. 鼠:쥐 서. 兩:두 량. 端:바를‧끝‧실마리 단.
[동의어] 수시양단(首施兩端). [유사어] 좌고우면(左顧右眄).
[출전]《史記》〈魏其武侯列傳〉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라는 뜻.곧 ① 진퇴‧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태. ② 두 마음을 가지고 기회를 엿봄.
전한7대 황제인 무제(武帝:B.C. 141~87) 때의 일이다. 5대 문제(文帝)의 황후의 조카인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6대 경제(景帝)의 황후의 동생인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같은 외척이었지만 당시 연장자인 두영은 서산 낙일(西山落日)하는 고참 대장군이었고, 전분은 욱일 승천(旭日昇天)하는 신진 재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두영의 친구인 관부(灌夫) 장군이 고관 대작(高官大爵)들이 모인 주연에서 전분에게 대드는 실수를 범했다. 사건의 발단은 관부가 두영을 무시한 한 고관을 힐책(詰責)하는데 전분이 그를 두둔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관부가 한사코 사죄를 거부하자 이 일은 결국 조의(朝議)에 오르게 되었다. 양쪽 주장을 다 들은 무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경들이 판단컨대 어느 쪽이 잘못이 있는 것 같소?”
처음에는 의견이 둘로 나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영의 추종자로 알려진 내사(內史:도읍을 다스리는 벼슬) 정당시(鄭當時)조차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어사대부(御史大夫:감찰 기관의 으뜸 벼슬) 한안국(韓安國)도 명확한 대답을 피했다.
“폐하, 양쪽 다 일리가 있사와 흑백을 가리기가 심히 어렵나이다.”
중신들의 불분명한 태도에 실망한 무제가 자리를 뜨자 조의는 거기서 끝났다. 전분은 화가 나서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구멍에서 머리만 내밀고 좌우를 살피는 쥐[首鼠兩端]’처럼 망설였소? 이 사건은 시비 곡직(是非曲直)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인데…‥.”
수석침류(漱石枕流)
漱:양치질 수. 石:돌 석. 枕:베개 침. 流:흐를 류.
[동의어] 침류슈석(枕流漱石).
[유사어]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 추주어륙(推舟於陸), 궤변(詭辯).
[참조] 영천세이(潁川世耳), 청담(淸談).
[출전]《晉書》〈孫楚專〉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 곧 ①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씀. 억지로 발라 맞춰 발뺌을 함. ② (남에게 지기 싫어서 좀처럼 체념을 안하고) 억지가 셈의 비유.
진(晉:265~317)나라 초엽, 풍익 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孫楚)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대부간에는 속세의 도덕‧명문(名聞)을 경시하고 노장(老莊)의 철리(哲理)를 중히 여겨 담론하는 이른바 청담(淸談)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손처도 죽림 칠현(竹林七賢)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친구인 왕제(王濟)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고 잘못 말했다.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존심이 강한데다 문재(文才)까지 뛰어난 손초는 서슴없이 이렇게 강변했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수적천석(水滴穿石)
水:물 수. 滴:물방울 적. 穿:뚫을(통할) 천. 石:돌 석.
[동의어] 점적천석(點滴穿石).
[유사어] 우공이산(愚公移山), 적토성산(積土成山), 적수성연(積水成淵), 산류천석(山溜穿石).
[출전]《鶴林玉露》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 곧 ①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종내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의 비유. ② 작은 것이라도 모이고 쌓이면 큰 것이 됨의 비유. 큰 힘을 발휘함의 비유.
북송(北宋:960~1127)때 숭양 현령(崇陽縣令)에 장괴애(張乖崖)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관아를 돌아보다가 창고에서 황급히 튀어나오는 한 구실 아치를 발견했다. 당장 잡아서 조사해 보니 상투 속에서 한 푼 짜리 엽전 한 닢이 나왔다. 엄히 추궁하자 창고에서 훔친 것이라고 한다. 즉시 형리(刑吏)에게 명하여 곤장을 치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구실 아치는 장괴애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사또, 그까짓 엽전 한 푼 훔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 말을 듣자 장괴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 이놈! 티끌 모아 태산[塵合泰山]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 하루 한 푼[一文]이라도 천 날이면 천 푼이요,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을 뚫는다[水滴穿石]’고 했다.”
장괴애는 말을 마치자마자 층계 아래 있는 죄인 곁으로 다가가 칼을 빼어 목을 치고 말았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상관을 무시하는 구실 아치의 잘못된 풍조를 고치려는 행위였다고《옥림학로(玉林鶴露)》는 쓰고 있다.
[주] ‘수적천석’은 우리 나라의 속담(俗談) ‘낙숫물이 댓돌[臺石]을 뚫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고사 성어임.
구실 아치 : 각 관아(官衙)에서 벼슬아치(官員)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 아전(衙前). 이속(吏屬). 서리(胥吏). 소리(小吏). 하전(下典).
수즉다욕(壽則多辱)
壽:목숨 수. 則:곧 즉, 법 칙. 多:많을 다. 辱:욕될‧욕 욕.
[출전]《莊子》〈天地篇〉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망신스러운 일을 많이 겪게 된다는 말.
전국시대를 살다간 사상가 장자(莊子:莊周)의 저서《장자(莊子)》〈천지편(天地篇)〉에는 다음과 같은 우화가 실려 있다.
그 옛날 성천자(聖天子)로 이름 높은 요(堯) 임금이 순행(巡幸)중에 화(華)라는 변경에 이르자 그곳의 관원이 공손히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장수하시오소서.”
그러자 요 임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장수하기를 원치 않네.”
“그러시면 부자가 되시오소서.”
“부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네.”
“그러시면 다남(多男)하시오소서.”
“그것도 나는 원치 않네. 다남하면 못난 아들도 있어 걱정의 씨앗이 되고, 부자가 되면 쓸데없는 일이 많아져 번거롭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은 법이네[壽則多辱].’”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실망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대듯 말했다.
“요 임금은 성인이라고 들어 왔는데 이제 보니 군자(君子)에 불과하군. 아들이 많으면 각기 분수에 맞는 일을 맡기면 걱정할 필요 없고, 재물이 늘면 는 만큼 남에게 나누어주면 될텐데…‥. 진정한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거처를 가리지 않으며 병아리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잘 먹고, 새가 날아간 흔적 없는 자리처럼 자유 자재이어야 하는 법. 그리고 세상이 정상이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 번영을 누리고, 정상이 아니면 스스로 덕을 닦고 은둔하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한 100년쯤 장수하다가 세상이 싫어지면 그때 신선이 되어 흰구름을 타고 옥황상제(玉皇上帝)가 계시는 곳에서 놀면 나쁠 것도 없지…‥.”
관원은 말을 마치자 마자 그 자리를 떠났다. 허를 찔린 요 임금은 좀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주] 요 임금 : 중국 전설상의 유가적(儒家的) 성제(聖帝).
옥황상제 :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하느님.
수청무대어(水淸無大魚)
水:물 수. 淸:맑을 청. 無:없을 무. 大:클 대. 魚:고기 어.
[원말]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
[동의어] 수청어불(주)서(水淸魚不(住)棲). 수청무어(水淸無魚).
[참조] 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
[출전]《後漢書》〈班超專〉,《孔子家語》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가 (물을 숨기지 못해) 살 수 없다는 뜻으로, 사람이 너무 결백하면 남이 가까이하지 않음의 비유.
후한 시대 초엽,《한서(漢書)》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班固)의 동생에 반초(班超)라는 무장이 있었다. 반초는 2대 황제인 명제(明帝)때(74년)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타림 분지의 동쪽에 있었던 선선국[鄯善國:누란(樓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끊임없이 활약한 끝에 서쪽 오랑캐 땅의 50여 나라를 복속(服屬)시켜 한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는 그 공으로 4대 화제(和帝)때인 영원(永元) 3년(91)에 지금의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의 고차(庫車:당시 실크로드의 요충)에 설치되었던 서역 도호부(西域都護府)의 도호(都護:총독)가 되어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도호의 직책은 한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맹세한 서역 50여 나라를 감독‧사찰(査察)하여 이반(離叛)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영원 14년(102), 반초가 대과(大過)없이 소임을 다하고 귀국하자 후임 도호로 임명된 임상(任尙)이 부임 인사차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다.
“서역을 다스리는 데 유의할 점은 무엇입니까?”
반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 성격이 너무 결백하고 조급한 것 같아 그게 걱정이네. 원래 ‘물이 너무 맑으면 큰 물고기는 살지 않는 법[水淸無大魚]’이야. 마찬가지로 정치도 너무 엄하게 서두르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네. 그러니 사소한 일은 덮어두고 대범하게 다스리도록 하게나.”
임상의 반초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묘책을 듣고자 했던 기대와는 달리 이야기가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이다. 임지에 부임한 임상은 반초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자기 소신대로 다스렸다. 그 결과 부임 5년 후인 6대 안제(安帝) 때(107년) 서역 50여 나라는 모두 한나라를 이반하고 말았다. 따라서 서역도호부도 폐지되고 말았다.
순망치한(脣亡齒寒)
脣:입술 순. 亡:망할‧잃을 망. 齒:이 치. 寒:찰 한.
[대응어] 보거상의(輔車相依)~.
[동의어] 순치지국(脣齒之國), 순치보거(脣齒輔車).
[유사어] 조지양익(鳥之兩翼), 거지양륜(車之兩輪).
[출전]《春秋左氏專》〈僖公五年條〉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 곧 ① 이웃 나라가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온전하기 어려움의 비유. ② 서로 도우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또는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되는 관계의 비유.
춘추 시대 말엽(B.C. 655), 오패(五霸)의 한 사람인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아버지 헌공(獻公)이 괵(虢)‧우(虞) 두 나라를 공격 할 때의 일이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헌공은 통과국인 우나라의 우공(虞公)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財寶)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우공이 이 제의를 수락하려 하자 중신 궁지기(宮之奇)가 극구 간했다.
“전하,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덧방 나무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란 말이 있사온데, 이는 곧 괵나라와 우나라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옵니다. 그런 가까운 사이인 괵나라를 치려는 진나라에 길을 빌려준다는 것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옵니다.”
“경은 진나라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소. 진나라와 우나라는 모두 주황실(周皇室)에서 갈라져 나온 동종(同宗)의 나라가 아니오? 그러니 해를 줄 리가 있겠소?”
“괵나라 역시 동종이옵니다. 하오나 진나라는 동종의 정리를 잃은지 오래이옵니다. 예컨대 지난날 진나라는 종친(宗親)인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초(楚)나라 장공(莊公)의 겨레붙이까지 죽인 일도 있지 않사옵니까? 전하, 그런 무도한 진나라를 믿어선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재보에 눈이 먼 우공은 결국 진나라에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자 궁지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일가권속(一家眷屬)을 이끌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 해 12월, 괵나라를 멸하고 돌아가던 진나라 군사는 궁지기의 예언대로 단숨에 우나라를 공략하고 우공을 포로로 잡아갔다.
시오설(視吾舌)
視:볼 시. 吾:나 오. 舌:혀 설.
[동의어] 상존오설(尙存吾舌).
[참조] 계구우후(鷄口牛後), 고침안면(高枕安眠).
[출전]《史記》〈張儀列傳〉
‘내 혀를 보아라’는 뜻. 곧 혀만 있으면 천하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
전국 시대, 위(魏)나라에 장의(張儀)라는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다. 언변과 완력과 재능이 뛰어난 그는 권모 술수에 능한 귀곡자(鬼谷子)에게 배웠다. 따라서 합종책(合從策)을 성공시켜 6국이 재상을 겸임한 소진(蘇秦)과는 동문이 된다. 장의는 수업(修業)을 마치자 자기를 써 줄 사람을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초(楚)나라 재상 소양(昭陽)의 식객이 되었다.
어느 날, 소양은 초왕(楚王)이 하사한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진귀한 구슬을 부하들에게 피로(披露)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연석에서 구슬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모두가 장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가난뱅이인 장의가 훔친 게 틀림없다’고
그래서 수십 대의 매질까지 당했으나 장의는 끝내 부인했다. 마침내 그가 실신하자 소양은 할 수 없이 방면했다. 장의가 초주검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쩌다가 그래, 이런 변을 당했어요?”
그러자 장의는 느닷없이 혀를 쑥 내밀며 보인 다음 이렇게 물었다.
“‘내 혀를 봐요[視吾舌].’ 아직 있소, 없소?”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혀야 있지요.”
“그럼 됐소.”
몸은 가령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나 혀만은 상(傷)해선 안된다. 혀가 건재해야 살아갈 수 있고 천하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의는 그 후 혀 하나로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연횡책(連衡策)으로 일찍이 소진이 이룩한 합종책을 깨는 데 성공했다.
[주] 합종책 : 전국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6국 동맹책.
귀곡자 :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모사). 성명‧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반 지식에 통달했다고 함. 그가 숨어살던 귀곡(산서성 내)이란 지명을 따서 호를 삼고 종횡설의 법(法)을 적은《귀곡자(鬼谷子)》3권을 지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음.
연횡책 : 6국이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상국으로 섬기게 하는 정책.
안서(雁書)
雁:기러기 안. 書:글‧쓸‧편지‧책 서.
[동의어] 안찰(雁札), 안신(雁信), 안백(雁帛).
[참조] 인생조로(人生朝露). [출전]《漢書》〈蘇武專〉
철따라 이동하는 기러기가 먼 곳에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를 일컫는 말.
한(漢)나라 소제(昭帝)는 19년 전, 선제(先帝)인 무제(武帝) 때(B.C. 100)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匈奴)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당한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의 귀환을 위해 특사를 파견했다. 현지에 도착한 특사가 곧바로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에게 소무의 석방을 요구하자 선우는 ‘소무는 벌써 여러 해 전에 죽었다’며 대화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상혜(常惠)라는 사람이 은밀히 특사의 숙소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무를 따라왔다가 흉노의 내란에 말려 일행이 모두 잡힌 뒤 투항한 사람 중하나요. 그런데 그때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 소무는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당한 뒤 아직도 그곳에서 혼자 어렵게 살아가고 있소.”
이튿날 특사는 선우를 만나 따지듯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황제께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는 헝겊이 감겨 있었소. 그래서 풀어 보니 ‘소무는 대택(大澤:큰 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소. 이것만 봐도 소무는 살아 있는 게 분명하지 않소?”
안색이 변한 선우는 부하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잘 모르고 실언을 한 것 같소. 그는 살아 있다고 하오.”
꾸며댄 이야기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며칠 후 흉노의 사자(使者)가 데려온 소무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의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이 고사에 연유하여 그 후 편지를 안서라고 일컫게 되었다.
안중지정(眼中之釘)
眼:눈 안.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釘:못 정.
[동의어] 안중정(眼中釘). [출전]《新五代史》〈趙在禮專〉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 곧 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비유. ②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의 비유.
당나라 말, 혼란기에 조재례(趙在禮)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가 있었다. 그는 하북 절도사(河北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의 수하 무장이었으나 토색(討索)질한 재무를 고관대작에게 상납, 출세길에 오른 뒤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
송주(宋州:하남성 내)에서도 백성들로부터 한껏 착취한 조재례가 영흥(永興) 절도사로 영전, 전임하게 되자 송주의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놈이 떠나가게 되었다니 이젠 살았다. 마치 ‘눈에 박힌 못[眼中之釘]’이 빠진 것 같군.”
이 말이 전해지자 화가 난 조재례는 보복을 하기 위해 1년만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조정에 청원했다. 청원이 수용되자 그는 즉시 ‘못 빼기 돈[拔釘錢(발정전)]’이라 일컫고 1000푼씩 납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미납자는 가차없이 투옥하거나 태형에 처했다. 이처럼 악랄한 수법으로 착취한 돈이 1년간에 자그마치 100만 관(貫)이 넘었다고 한다.
암중모색(暗中摸索)
暗:어두울 암. 中:가운데 중. 摸:더듬을 모. 索:찾을 색.
[준말] 암색(暗索). [동의어] 암중모착(暗中摸捉).
[유사어] 오리무중(五里霧中). [출전]《隋唐佳話》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찾는다는 뜻으로, 어림짐작으로 찾는다(혹은 추측한다)는 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690~705) 때 허경종(許敬宗)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경망한데다가 방금 만났던 사람조차 기억하지 못할 적도로 건망증이 심했다. 어느 날, 친구가 허경종의 건망증을 비웃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자네 같은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이야 기억할 수 없지만 조식(曹植)이나 사령운(謝靈運) 같은 문장의 대가라면 ‘암중모색’을 해서라도 알 수 있다네.”
[주] 조식 :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 뛰어난 시재(詩才)를 시기하는 형 문제[文帝:후한을 멸하고 위(魏)나라를 세운 조비(曹丕), 220~226]의 명을 받고 지은〈칠보시(七步詩)〉는 특히 유명함.
사령운 : 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시인. 별명 사강락(謝康樂).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치적(治積)을 쌓지 못하자 그의 글재주를 아끼는 문제(文帝:424~453)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 이후 막대한 유산으로 연일 수백 명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산야(山野)에서 호유(豪遊)하다가 반역죄에 몰려 처형됨. 서정(抒情)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문화 사상에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어 놓음에 따라 ‘산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함.《산수시》《산거적(山居賊)》 등의 시집을 남김.(385~433).
양금택목(良禽擇木)
良:어질‧좋을 량. 禽:새 금. 擇:가릴 택. 木:나무 목.
[동의어] 양금상목서(良禽相木棲).
[출전]《春秋左氏專》〈衷公十八年條〉,《三國志》〈蜀志〉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遊說)하기 위해 위(衛)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세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魯)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