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7일, 금요일, Potosi, Hostal Maria Victoria (오늘의 경비 US $17: 숙박료 40, 점심 10, 저녁 10, 식료품 3, 관광 50, 인터넷 6, 기타 10, 환율 US $1 = 8 boliviano) 오늘은 Potosi 은광 관광을 갔다. 광산은 별로 흥미도 없고 좁은 공간에 대한 공포증도 조금은 있어서 안 가려고 하다가 Potosi에 와서 그 유명한 은광을 안 가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집사람은 여행사의 권고로 빠졌는데 잘한 일이었다. 갔더라면 큰 고생할 뻔했다. 내가 가본 미국의 광산과는 달리 모든 게 수동이었다. 수평 갱도를 달리는 조그만 기차 같은 것도 없었고 수직 갱도를 오르내리는 승강기 같은 것도 없었다. 갱도가 너무 좁아서 기어 다니다시피 해야 할 곳이 많았고 수직으로 된 갱도를 오르거나 내려갈 때는 암벽 등반을 하는 식이었다. 고도가 4,500m 이상이기 때문에 혹시 고산증세가 생길까봐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힘들긴 했지만 사고 없이 관광을 끝냈다. 3시간 만에 광산을 빠져나올 때는 딴 세상을 갔다 온 기분이었다. 한 시간 정도면 적당했을 텐데 너무 길었다. Potosi 은광은 볼리비아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Potosi는 볼리비아, 볼리비아는 Potosi, 그런 식이다. Potosi는 두 개의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한때 세계 최대의 은광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계에서 제일 많은 광부들의 목숨을 앗아간 광산이었다는 것이다. 좀 과장된 숫자인지는 몰라도 1545년 생긴 이후 약 800만 명의 광부가 이 광산에서 죽었다. 한번에 8개월 씩 햇빛을 못보고 살았다니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광부들이 죽어 나갔는데 근처에 공동묘지 하나 없고 위령탑 하나 없다. 광부가 죽으면 아마 폐광된 수직갱도에 던져버리고 말았을 거다. Cerro Rico라 (Rich Hill) 불리는 이 은광은 Potosi시 바로 뒤에 위치해 있어서 서울의 북한산처럼 Potosi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은광에 올라가면 Potosi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은광은 1545년에 한 인디언이 잃어버린 가축을 찾다가 밤이 되어 이 산 한 곳에서 야영을 하는 중 추워서 불을 피웠는데 그 불 밑에서 은이 녹아서 흐르는 것을 보고 은광이 발견된 것이다. Potosi가 세계 최대의 은광 도시로 되면서 인구도 16만 까지 불어서 당시 신대륙의 최대의 도시가 되였고 시민들의 생활은 화려의 극치를 이루어서 그야말로 돈을 물같이 썼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별로 시원치 않은 도시로 지금 까지도 그렇게 남아있다. 독일, 뉴질랜드에서 온 청년 둘과 나 그리고 가이드 등 넷이서 팀이 되어 우선 광산 바로 아래 있는 "광부시장"에 가서 우리가 방문 할 광부들에게 줄 선물로 코카 잎 한 봉지,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 각 한 줄, 담배 한 갑을 샀다. 광부들이 일 하는 것을 다가가서 보고 사진도 찍고 질문을 한 다음에 답례로 주는 선물이다. 광산에 들어가기 전에 광부 옷, 장화, 안전모, 랜턴 등으로 단단히 무장을 했다. 안전모 위에 쓰는 랜턴은 지금은 다 사라진 카바이드를 사용하는 랜턴이었다. 카바이드에다 물을 부면 가스가 생기고 그 가스에다 불을 붙이면 랜턴이 된다. 이곳 광부들은 모두 이런 카바이드 랜턴을 사용한다. 배터리를 쓰는 랜턴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현재 이 광산은 과거와는 달리 아주 민주적으로 운영된다. 옛날에 있던 정부 광산이나 부자 소유주의 광산은 다 없어지고 지금은 광부들이 조합을 만들어서 소유하고 운영한다. 30여 개의 조합이 있고 한 조합 당 광부가 10여명부터 500여명까지 있어서 총 6,500여명의 광부가 일하고 있다. 조합에는 조합장과 직원들이 있지만 소유나 운영에 관한 실권은 조합원인 광부들이 가지고 있다. 광부들은 보통 3인조로 움직이는데 조합원인 광부, 제1 조수, 제2 조수다. 광부와 제1 조수는 광맥을 따라가며 광석을 캐내는 일을 하고 제2 조수는 캐낸 광석을 광산 밖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한다. 광석을 캐기 위해서는 쇠로 만든 징으로 70cm 길이의 구멍을 여러 개 뚫고 그 안에다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고 폭파를 하면 약 1입방미터의 광석이 생긴다. 이것을 제2 조수가 손수레에 담아서 광산 밖으로 나른다. 이 작업에 필요한 장비는 (징, 곡괭이, 다이너마이트 등) 광부 각자가 부담하고 광산 아래 있는 "광부시장"에서 구입한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인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용은 별로 들지 않은 것 같다. 갱도가 수평일 때는 손수레로 광석을 실어 낼 수 있지만 수직일 때는 자루에 광석을 담고 등에 지고 실어 나른다. 뼈 빠지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한 트럭을 채우고 (8,000kg) 돈을 받는데 광부들의 월수입은 $50 내지 $250이다. 양질의 광맥을 찾은 광부는 토요다 트럭을 굴리며 잘 산다. 첫 번째 만난 광부는 58세인데 20세부터 38년째 광부노릇을 하고 있는데 대학에 다니는 아들도 있고 제법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광부 일을 10년만 하면 죽어 나갔다는 말은 과장된 말이거나 옛말인 것 같다.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하건 일주일에 며칠을 일하건 광부들의 자유니 어떻게 보면 그렇게 편한 일이 없는 것 같다. 3명의 조원이 마음만 맞고 좋은 광맥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광맥이 나쁘면 조수들도 떠나버리게 되어서 광부 혼자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최소 월 $50 수입은 되니 최저 임금은 충분히 되는 셈이다. 운이 좋으면 월 수백 불도 벌 수 있으니 희망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다. 광맥 말고도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한 가지는 이들이 파내는 광물의 국제 시장가격이다. 그거야 광부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곳 광산의 안전 상태는 허술하다. 갱도도 좁고 수십 수백 미터의 구멍들이 아무 경고 표시도 없이 산재해 있다. 광부들은 광산 안의 탁한 공기 때문에 점심을 거르고 대신 항상 코카 잎을 씹는다. 그리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데 거의 100% 도수의 알코올이다. 나도 조금 얻어서 맛을 보았는데 너무 독해서 맛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많이는 안 마시는 것 같았다. 두 번째로 만난 광부는 마침 폭파 작업을 할 때라 폭파하는 것도 구경했다. 몸을 피해서 폭파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 무엇이 잘 못되는 게 아닌 가해서 좀 겁이 났다. 폭파 소리는 귀를 막고 있었는데도 매우 컸다. 폭파 후에는 먼지가 사라질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리고 그 동안은 광부의 휴식시간이다. 이 광산에는 400여 개의 출입구가 있다. 그리고 매 출입구 안에는 광산 보호 신을 모셔놓고 매일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에는 코카 잎, 담배, 술을 올리고 때로는 야마 (혹은 라마) 피를 올린다. 광산 관광이 끝나고 관광 요금에 포함된 점심 식사를 같이 간 다른 두 관광객과 함께 했다. 독일에서 온 친구는 의사인데 이제 막 수련기간을 끝내고 정식 의사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1년 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여행 중이다. 그 동안 일로 너무 지쳐서 환경을 확 바꿔서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의사 생활은 남보다 1년 늦어지게 되어서 좀 걱정이란다. 여행지도 Potosi 시내에서 올려다 보이는 은광이 있는 Cerro Rico 산, 800만의 노예 광부들이 묻힌 공동묘지이기도 하다 시내 중심가에서 보이는 Cerro Rico 산 광산 바로 밑에 있는 광부 마을에 광부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있다 광산 입구에서 내려다보이는 Potosi 시내 광산의 발견 얘기를 담은 그림, 왼쪽에 야마, 오른쪽에 캠프 불과 인디언이 보인다 광산에 들어갈 준비가 다 되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광부에게 줄 선물 담배, 코카 잎, 다이너마이트, 폭파선 등이다 돌을 깨트려서 자갈을 만들고 있는 할머니, 하루에 얼마나 벌까? 광산 입구 폭파 작업을 위한 구멍을 뚫고 있다, 항상 코카 잎을 씹기 때문에 입술이 파랗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산 갱도 광부들이 광산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광산 보호 신" 광석을 손수레에 담고 있는 광부 조수, 제일 힘든 일이다 폭파를 기다리고 있다 광석을 트럭에 다 실으면 광부들은 돈을 받는다 2003년 11월 8일, 토요일, Potosi, Hostal Maria Victoria (오늘의 경비 US $24: 숙박료 40, 점심 29, 저녁 22, 식료품 10, Uyuni 버스표 50, 여행기 미국 우송 23, 책 교환 3, 버스 2, 비누 곽 3, 기타 10, 환율 US $1 = 8 boliviano) 아침에 우체국에 가서 그 동안 쓴 여행기 100여 페이지를 미국 딸네 집으로 우송했다. 다행히 무게가 많이 안 나와서 $3 정도밖에 안 들었다. 여행기를 넣을 큰 봉투를 사서 딸네 Utah 주 Salt Lake City 집 주소를 적고 있는데 봉투를 판 사람이 내가 쓰고 있는 주소를 보고 있다가 영어로 자기 여동생도 Utah 주 Provo에 산다고 한다. Provo는 Salt Lake City 남쪽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인데 내가 7년 동안 다닌 Novell 본사가 있는 곳이다. 이 친구 딸은 물몬 교인으로 Provo에 있는 물몬 교에서 운영하는 Bringham Young University를 나오고 미국인과 결혼해서 애를 낳고 Provo에서 살고 있는데 자기도 두어 번 다녀왔단다. 그는 Provo에 머무는 동안에 그곳에 있는 RC Wiley란 전자 제품 상점에서 (한국의 전자랜드 비슷한) 일했다 한다. 잠깐 다녀온 것이 아니고 제법 오래 묵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다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터미널에 가서 다음 가는 도시 Uyuni 버스표를 샀는데 25 boliviano가 들었다. 시내에 있는 여행사에서 사면 30 boliviano인데 5 boliviano는 여행사 커미션인 셈이다. 그 정도 커미션이면 문제가 아닌데 때로는 바가지를 푹푹 씌우는 여행사가 있으니 믿고 살수가 없다. 오후에는 Cerro Rico 사진 촬영을 갔다. 시내 풍경도 찍었다. 800여만 명의 노예 광부들이 죽어서 묻혔다는 Cero Rico는 영어로 “Rich Hill"이 아니고 마의 산처럼 보였다. 장사를 제대로 지내주었을 리 만무하고 광산 내에 있는 폐 광구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런 곳에 아직도 6,500 명의 광부들이 밥줄로 삼고 일을 하고 있다니. 저녁에는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영국 친구 Matt, 그리고 인터넷 카페 겸 음식점에서 만난 호주인 James와 같이 저녁을 들었다. James는 한국에 관해서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김치와 소주도 알고. 호주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도 여러 명 안단다. 여행객이 아니고 화가인데 얼마 후에 있을 자기 전시회에 전람할 작품 제작을 위해서 이곳에 와있다 한다. 그래서 매일 광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간다고 한다. 이 음식점 음식은 싸고 맛있었다. 15 boliviano에 네 가지 음식을 나왔는데 Appetizer로 Vegetable Crepe (야채 튀김), 수프로 Sopa de Quinua, 메인코스로 제법 크고 맛있는 spinach pie (시금치 파이), 그리고 후식으로 바나나 케이크였다. 마시는 것은 우리가 가져온 홍차가 안성맞춤이었다. Matt, James와 함께 주로 이곳 볼리비아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두 사람 다 이곳 데모대 충돌이 있었을 때 이곳에 있어서 2주 동안 이곳에서 지낸 얘기가 많았다.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긴 것 같았다. 아주 평화적인 데모가 갑자기 험악해 질 때 재수 없으면 당하게 되는 것 같다. 데모가 끝나면 그 다음 날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간다. 전혀 80여명의 사상자가 난 격렬한 데모가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그런 인상을 받았다. 볼리비아는 원주민 사람들이 착취를 많이 당해온 나라, 주위 나라들과 (페루, 칠레, 파라과이) 사이가 안 좋은 나라, 반미적이고 외국인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라, 한마디로 불행한 나라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Che Guevara가 이곳에서는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가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볼리비아 사람들은 자기네들을 열등민족으로 대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싫어한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