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 산청 사건 등에 관한 보상법」통과의 의미
- 시인. 경상대교수 강 희근 -
국회는 2일 오후 ‘거창사건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중 개정법률안’을 통과 시켰다. ‘친일 진상 규명법’과 ‘6·25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법’의 논란 가운데 통과되는 바람에 시선을 끌지 못했지만 이 법의 통과는 역사상‘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 보상법’,‘제주 4·3사건 특별법’과 더불어 국가 공권력이 빚어낸 사건에 대한 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공권력이 국민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었을 때 ‘진상 규명→명예회복→배상 또는 보상→후세에 대한 경계교육’이라는 과정을 밟는 것이 정도라 본다면‘거창 사건 등’(산청·함양 포함) 에 관한 국가 차원의 대처는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창 사건 등’처럼 법적인 확인절차가 끝난 사건에 대해 국가 보상이 이루어지고 다시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한(恨)서린 학살 사건등이 규명이 되고 적의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아시다시피 ‘거창사건등’은 1951년 2월 7일(산청·함양)과 9일∼11일(거창)에 일어난 사건으로, 후방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군 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가 중심이 되어 ‘작명 5호’라는 작전(이른바 ‘견벽청야’)으로 양민 1천4백여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거창 국회의원이었던 신중목의원이 이 사건을 국회에 보고하여 국회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군법회의에까지 이르는 눈부신 활동을 펼친바 있다. 오늘날 국회가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면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지역구민들의 권익을 위해 몸으로 뛰었던 신중목 의원의 활동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1960년 ‘4·19’가 일어나자 당시 거창신원 면장의 살해 사건 등으로 ‘거창사건’은 다시 부상하면서 은폐되어 있던 ‘산청·함양’의 양민학살 사건까지 불거져 나오게 되었다. 진실은 탄압과 힘으로 덮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건은 우리에게 극명히 보여주었다. 국회에서 전반적인 양민학살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다시 양민학살 문제는 수면하로 잠기고 신원면의 위령비는 군부의 완력으로 넘어뜨려졌다.
80년대 중반이후 거창·산청·함양 유족회는 긴 침묵의 살얼음판을 지나 다시 명예회복의 깃대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1996년 1월 국회는‘거창사건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사건 발생 45년 만에 일어난 쾌사였다. 주민이 몰살당한 마을에는 머리푼 원혼만 우글거렸고 어쩌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통비분자에다 연좌제에 걸리어 숨도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명예회복이 되면서 거창 신원과 산청 금서에서는 묘역사업과 위령탑건립이 마지막 공정을 앞두고 있는 터에 보상을 위한 개정안이 통과를 보게 된 것이다. 거창, 산청·함양에서 있었던 양민학살은 동일부대, 동일시기, 동일작전 계획아래 이루어진 동일사건이므로 시행령에 따라 이루어질 보상도 무리없이 ‘하나로 가는’것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동안 거창사건 유족회가 앞장서서 만난을 무릅쓰고 투쟁해온 노력에 대해 후발주자인 산청·함양사건 유족회는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3개군 행정과 의회, 그리고 지역유지들의 노력에도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을 사건이게 만들어준 당시의 고(故) 신익희 국회의장, 고 서민호 의원등의 협조와 역대 당해 국회의원들, 특히 고 김동영의원의 협조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두분의 현역 국회의원의 독립운동과도 같은 활동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거창, 산청·함양사건! 사건은 53년만에 종결의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교훈은 이제 만대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언제나 옷깃을 여며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경남도민신문 칼럼 게재. 200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