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이북교회 사진 수집 마쳤던 감격
노정빈 ( 魯貞彬, Josephine Roberts) 여사
1959년 9월 어느날, 내가 탄 배가 부산항에 도착했고, 이날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와의 첫 만남의 날이었다.
영국 어머니연합회는 한국의 여성과 가족들을 위해 나를 보냈다.
당시 활동의 조건은 열악했고, 아이들에게는 특히 많은 도움이 거주하면서 내가 보았던 많은 집없는 어린이들은 항상 여자 어린이 보다 남자 어린이가 많았고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먹고 잠을 잤다.
나는 이 어린이들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후에 데일리(John Daly, 한국명:김요한)주교와 이야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서울대성당의 외국인교회에서는 지하실에 난로 설치를 요구해 왔다.
겨울을 맞기 위해 80여명의 소년들을 위한 집이 완성 되었다.
그들은 매일 껌을 팔고, 구두를 닦거나 때로는 소매치기를 하고도 했으며 밤이 되면 성당 지하실에서 잠을 잤다.
어떤 고아들은 대부분 그들이 있던 곳에 있기를 원했지만 후에 그들은 군대에 보내지거나 직업을 가졌다.
나는 연세대학교 외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있는 동안,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보았고, 콘세트 막사에서 발견된 많은 불편한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세브란스병원의 의사들은 그들을 치료하고 건강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일거리를 주고 교육을 시키기까지 하였다.
한국에서 맞은 첫 크리스마스날은 세브란스에서 근무하는 몇몇 간호원들과 함께 캐롤송을 준비해서 한강다리 밑에서 누추하게 살고 있는 60여 집을 찾아 다녔다.
그 지역은 그해 봄 홍수가 나서 많은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익사한 곳이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의복,이불,우유,비타민,그리고 의약품 구입을 위해 세계 여러나라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고 한국의 선교단체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집 잃은 몇 가족들에게는 집을 새로 마련해 주었고, 또 전세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으며, 일자리를 찾아 주거나,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학교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재민들은 남산으로 이주하여 큰 시멘트 배수관에서 거주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그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배수관 아래에 불을 지피며 살아 가야만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불과 옷가지 등을 숫자대로 나누어 주었다.
성베다관(현 대학로 성당)은 1960년에 설립되어 몇 몇 학생들은 러트(R.Rutt, 한국명 :노대영)신부 (후에 대전교구장 주교)와 살면서 학교시간을 제외하고는 장애자 어린이들을 의욕적으로 보살피는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신자들과 매주 마석에 있는 성생원을 방문하여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을 했다.
성생원은 음성나환자들을 위해 성공회에서 세운 자활을 돕는 기관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내가 그곳에 살고 있는 동안 돈을 모아 작은 성후란시스교회를 지었고 또한 교회주일학교를 위해 쓰기도 하였다.
후에 그들은 자립을 하게 되었다.
그후에 경험한 부산에서의 일도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부산에 내려가 부산교회의 뒷산에서 기거하는 많은 빈민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에 나는 간호원들과 의사들 그리고 진료소 등을 갖추었고 건강과 위생을 위한 센터를 마련했으며 가족계획에 대한 강의와 매일 주일학교 운영, 그리고 밤에는 슬라이드 상영도 하였다.
그후 성미가엘신학교에 영어선생으로 있는 동안 세명의 사제 사모들을 가르쳤고 그들은 이마리아와 함께 살았다.
그들은 유치원을 시작했고 매주 나를 불러 어린이 건강을 돌봐 주도록 불러주었다.
거기에는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한 성가나안이라는 공동체가 있었다.
김요한 주교가 강원도 횡지리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한달에 한번씩 찾아가 집집마다 다니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병원에서 일하는 기독교인 간호원들과 우호적인 의사들의 도움으로 진료소를 운영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병화자들을 발견했고 그들이 기거할 수 있는 집과 의약품을 제공했다.
길가에서 만나는 걸인들에게 옷가지와 음식을 나누었다.
그 지역 주민들은 몹시 가난했고 어느 겨울에는 20여 가구가 온기없는 차디찬 바닥에서 추위에 떠는 아이들과 사는 것을 보았다.
주엘리사벳은 유치원을 시작했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했다.
늦은 밤 그 집에 한소녀가 찾아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산 기슭 오두막 집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아기를 죽이고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아기를 죽이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우리들 몇몇은 깊이 쌓인 눈을 뚫고 직접 산기슭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나는 무서운 광경을 보았는데 깊은 계곡 사이에서 시체를 보았다.
그 시체는 얼음과 눈으로 덮여있었고 서로 뒤엉켜 있었다.
우리는 오두막집과 생각했던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 아버지는 그 아이를 더 이상 돌볼 수 없기 때문에 데리고 가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그러한 딱한 처지를 보고 더 이상 어쩔수 없어 아이들 중에 한 아이를 데리고 이요한 씨가 아이를 업은 채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 이 아이는 세례를 받았고 요한 씨 댁에 입양 되었다.
우리는 나머지 아이들은 부산에 있는 그들의 할머니 집에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 일은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또한 황지 지역의 모든 탄광들을 방문했고 진료활동을 시작하였다.
공휴일 날을 이용해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데리고 노대영 신부님(후에 주교)과 함께 여러 곳에서 많은 진료활동을 벌였다.
그 당시 진료활동을 벌인 가운데 가장 큰 규모는 강화에 세워진 진료소였다.
진료소는 강화군내 면단위 마다 배치했다.
진료소는 학교에 설치되어 교실에서 먹고 자고 하였다.
진료소에는 약 백여 명의 환자들이 몰려와 줄을 세우거나 티켓을 나누어 주고 기다리게 할 정도 였다.
진료와 함께 아이들에게는 성서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한문을 가르쳤다.
한편에서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가족계획이나 위생법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우리는 한 장소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렀고 다음 장소로 옮겨가 다음날 아침 9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그럴 때면 우리의 잠자리는 항상 강이나 개울 근처였고 음식은 소녀들이 만든 한국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어린이나 성인들은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으로 차를 이용해 이송 해야만 했다.
어느날 밤 우리는 강화도의 북쪽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모두 지쳐있었고 허기져 있는데 그들은 우리를 반기지 않았고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 마을의 주민들은 즉시 동네 사람들을 모아 우리 외국인들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 하였다.
그러자 우리 중에 누군가 제안하기를 마을 변두리에 있는 버려진 작은 교회를 사용하자고 했다.
우리는 그곳을 깨끗이 치워 매우 아늑하게 꾸몄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교회가 지난 몇 년 동안 신부의 방문이 없었던 교회라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이곳에서 발견한 것 이외에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캄캄한 밤에 겪은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한국교회 역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매우 자세히‘모닝캄’(Morning Calm) - 고요한 주교가 1890년 한국선교에 앞서 영국교회에 한국을 소개하기 위한 잡지 - 을 읽기 시작했다. 그
리고 나서 나는 그날 밤 경험한 지역을 조사하였는데 교회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마을에는 곳곳에 기도방을 가지고 있는 집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이후로 나는 방문하는 곳마다 나이 많은 분들을 만나 옛날 선교사들과 성 베드로수녀회의 수녀들이 하던 일, 여성들을 가르치고, 주일학교와 성서연구반을 이끌고 여성지도자를 훈련하던 전도의 활동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일찍이 방방곡곡을 다니는 여행을 통하여 내가 일해야 할 십여 군데를 발견했다.
그곳들은 매우 낯선 이름들 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선교기록들은 한국 사람들끼리 알아 볼 수 있는 지명으로 적어 놓았기 때문 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묵방리’가 ‘목방지’나 ‘목발리’로 되어 있는 경우였다.
이것은 처음 지명을 대하는 나에겐 매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였다.
‘무기장’이란 이름은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의문점을 갖게 했다.
얼마후에 나는 ‘무기장’에서 ‘장’이란 시장을 뜻하며 무기를 찾기 위한 것이거나 그와 비슷한 뜻이라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음성 근처에서 찾았고 그것은 버스터미널 이었다.
무기교회를 찾는 나에게 한 할아버지가 옛 교회는 장터자리에서 작은 집으로 있었다고 증언을 하여 나는 그곳으로 갔다.
교회자리는 당시 상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을 담은 건물이 있었다.
또한 다른 마을의 교회들은 주로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어 내가 도착했을 당시는 그 작은 건물이 모두 부숴져 버린 직후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사진으로 밖에 담지 못했다.
이렇게 방문한 마을의 세례를 받은 나이든 남자와 여자들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는데 그들은 50여년 이상 미사집전 신부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성공회는 영국 신사들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나는 기대해오던 북한의 모든 교회들의 사진과 유래를 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며 나는 사랑에 찬 많은 주민들을 사진에서 보았고, 몇년 전에 미사가 드려졌을 성당을 보고 매우 기분이 좋았으며 심지어 지상의 평화가 이룩된 것 처럼 느껴지기 까지 하는 감동을 느꼈다.
노정빈 여사 약력
1924년생.
호주, 뉴질랜드, 영국에서 간호사 시무
1959-76 대한성공회 어머니연합회 간사
사회사업가 봉사.
1998.10.30. 영국에서 별세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어머니연합회에서는 매년 노정빈 여사의 별세기념 감사성찬례를 드려오고 있다
출처및 참고: 선교백년의 증언, 대한성공회 출판부
첫댓글 노정빈 여사의 활동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위 기록을 통해 더 확실히 많은 활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나라의 상황이 심히 어려울 때 노정빈 여사님은 참말로 훌륭하고 고마운 일을 많이 하셨군요. 천국의 안식과 축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