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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출판된 불교서적 소개 (5)
Lectures on Zen Buddhism By D.T.Suzuki
Daisetz Teitaro Suzuki는 선(禪)을 서양인들에게 널리 퍼지게 한 장본인으로 선을 하는 서양인들에게는 D.T.Suzuki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선이 무엇인가를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외관상 비생산적이고 시간 낭비로 보이는 묵언면벽(默言面壁)의 의미를 암호 해독해주듯 그 진의를 풀어주는데 성공한 몇 안되는 동양 불교인의 하나다. 일부 선승들이 그의 선을 학자의 선이라고 차별화하는 말을 하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음덕에 힘입어 후에 선승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와 Zen center들을 열 수 있었고 선이 세계인에게 알려진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Suzuki는 학자와 선수행자로서의 진실스러움뿐 아니라 견성을 생(生)으로 구현화한 사람의 진솔한 인간성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가슴으로 통했을 뿐 아니라 기라성 같은 각계의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그들 주에는 Thomas Merton, Paul Tillich, Carl Jung, Erich Fromm, Dr.Hu Shi, Allen Ginsberg 등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는 이 순간에 깨어살고 있는 선객(禪客)답게 ‘I really have an aversion to this kind of thing, and as a rule I do not offer anything like an autobiography or a reminiscence’라고 말한다. 그래도 그가 1870년에 태어나 1966년 95세로 돌아가셨음과 대대로 의사지반이었지만 부계쪽으로 단명이었고 그의 부친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빈곤했던 소년기에 자기 업보를 생각하고 ‘나는 왜 어린 나이에 이렇게 불리한 입장에서 생을 출발해야 하나’를 생각하며 철학과 종교를 생각했고 선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다는 이야기와 21세에 지금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고 후에 유명한 철학자가 된 Kitaro Nishida의 설득으로 동경제대로 옮겼고 27세에는 미국 La Salle, Illinois에서 Paul Caruso와 함께 The Gospel of Buddha에 이어 중국원서를 영어로 번역했다는 것과 이후로 유럽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귀국해 영어교수로 일했고 다시 유럽과 미국, 일본을 오가면서도 lecture와 저술 등으로 일어로 90여개의 title과 영어로 30여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만 알려드리겠다.
여기에 소개될 “Lectures on Zen Buddhism”은 D.T.Suzuki가 87세 때 Columbia University 에서 은퇴하고 나서 Mexico에서 1957년 (지난 달 Erich Fromm 소개에는 1968년으로 오기됐었음)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란 제목으로 열린 conference에서 한 lecture를 Fromm이 편집한 책에 수록된 논문이다. 하지만 선에 관한 그의 저술로는 ‘Essays in Zen Buddhism, First Series’, ‘Manual of Zen Buddhism’, ‘Outlines of Mahayana Buddhism’, ‘The Zen Koan as a means of Attaining Enlightenment’, ‘Mysticism Christian and Buddhism’등이 있고 선수행을 살아간 그의 한 생의 아름다운 뒷자취를 볼 수 있는 ‘A Zen Life:D.T.Suzuki Remembered’(1986)가 있다.
“Lectures on Zen Buddhism” 에서 Suzuki 는 우선 일본 17세기의 유명한 시인 Basho의 nazuna 꽃을 보는 동양인의 마음자세와 Tennyson 의 ‘Flower in the crannied wall’에 나타난 서양인의 사고구조를 비교한 뒤 우리가 사물과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세 가지 다른 태도, 즉 과학적, 예술가적, 그리고 선적인식의 자세를 이야기하고는 결국 선을 수행한다는 것은 화가가 하나의 꽃을 그릴 때 그 꽃이 자연의 copy가 아닌 자기의 무의식의 저 안에서 피어 나는 하나의 산 꽃을 그리는 창조인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생을 반 잠의 습관적 생의 틀에서 깨어나 실답게 사는 창조의 길이라고 한다.
D.T.Suzuki 가 동, 서양인들의 각기의 심성과 의식내면을 잘 대변한다고 인용한 시들은 아래와 같다.
Yaku mireba When I look carefully
Nazuna hana sagu I see the nazuna blooming
Kakine kana By the hedge!
왼쪽은 하이꾸 시를 영어로 음표기한 것이고 오른쪽은 D.T.Suzuki의 번역이다.
다음은 Tennyson의 시이다.
Flower in the crannied wall
I plucked you out of the crannies;-
Hold you here, root and all, in my hand
Little flower-but if I could understand
What you are, root and all, and all in all
I should know what God and man is.
그는 Basho 의 이 하이꾸의 일어의 마지막 두 음절(kana)의 감탄사의 감정이 전 15 음절에 흐르는 그 묘한 감성을 영어로 번역이 제대로 될 수가 없지만, 이 시 속에는 늘 보고 지나치던 시골길가에 흔한 그 nazuna 꽃이 눈을 뜨고 보니 그저 하나의 대상일 뿐이고 단지 ‘it’가 아님을 경험하는 경이로움이 잘 담겨져 있다고 칭송한다. 여기에는 Tennyson 의 꽃을 보는 서양인의 의식구조 속에 분석적이고 과학적이고 관념적 지식을 위해 뿌리채 뽑아 짤라 분석하는 내 쪽에서 힘을 휘두르는 대상에 마주선 self-assertive 함과는 다른 동양인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Basho 의 꽃을 보는 도(道)를 찾아가는 조용한 마음은, Tennyson 의 꽃을 보면 intellectual 하고 eloquent 한 수다로 ‘Do I understand you?’ 라 물으며 inquisitive 하지 않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이 하이꾸 속에 동양인의 자연과의 관계는 자연 그대로를(여기에서는 nazuna 꽃) accept 하고 feel 해서 ‘보는 자’ 와 ‘꽃’이 대립적으로 마주서기 보다는 차라리 보는 자가 없어진 듯한 ‘no onlooker; the flower has become conscious of itself and silently, eloquently express itself and this silent eloquence on the part of the flower is humanly echoed’한 상태여서 intellectual 하기 보다는 intuitive(affective)하고 analytic 하다기 보다는 synthetic 하다는 것이다.
Amazon.com 의 독후감난을 읽어보면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 속 D.T.Suzuki 의 글이 동, 서양문화의 차이와 자연과 세계를 보는 의식내면세계의 다른 눈길에 대한 설명에 많은 흥미와 인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학자이며 선객인 이 분의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기계문명 속에 복잡한 현대인들이 자신들이 보는 세상이 실은 얼마나 ‘encased in his fragmentary, limited, restricted ego-centric’ 한지를 알아차려 불교에서 말하는 ‘망상의 세계’를 벗어나 생의 참다운 well-being 을 회복해 살아야 한다는 그 본뜻을 위한 전제의 설명으로 읽을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자세를 그는 세가지를 든다. 과학적, 예술가적, 그리고 선적인 방식이다. Suzuki 는 반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그는 ‘Scientific approach to reality’ 가 analytic, objective and inductive 해서 문자 그대로 과학적이긴 해도 이 방식 하나로는 ‘reality can not be reached by dissection’이라며 이 점에서 선은 ante-scientific 혹은 meta-scientific 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artists 들은 그런 analytic dissection 과 수량적 계측이 주가 되면 그 세계는 personal contact 도 affection 도 없는 세계라 온전한 세계라 보지 않는다.
Suzuki가 보기에 선은 우리가 사물과 세상을 보는 눈길이 관념적 사고의 틀에 오래 젖어 있어 실재(實在)의 세계가 굴절돼 있음을 일깨워 세상과 자신을 바로 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상을 마주해 그 사물을 보는 禪的 방식은 ‘enter right into the object itself and see it, as it were, from the inside’하는 것이라 한다. 예로 하나의 꽃과 마주할 때 그 꽃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꽃이 되는 것이라고 ‘To know the flower is to become the flower, to bloom the flower.’ 이렇게 선에서 모두를 비우라(方下着)는, 그 ‘나’가 비워지면 ‘the flower speaks to me and I know all its secrets, all its joys, all its sufferings’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끝나지 않고 ‘along with my “knowledge” of the flower I know all the secrets of the universe, which included all the secrets of my own Self, which has been eluding my pursuit all my life into a duality, the pursuer and the pursued.’ 이게 참으로 나를 발견했는데 이는 바로 ‘by losing myself in the flower I know my Self as well as the flower’ 라고.
나를 비워서 얻는 이 세계는 기독교인에게도 ‘to love God’ 한다는 것은 ‘to have no self’이어야 하고, 이 ‘to have no self’는 불교에서는 무심(無心) ‘to be of no mind’로 조그만 나를 잃어야 얻어지는 세계라고 이를 위해 화두참구하고 견성해야 한다며 Suzuki는 화두문답의 한 예를 보여준다. 중국에 한 원님이 사찰을 찾아와 전대의 선승들의 초상화를 보며 주지스님께 ‘여기 초상화는 있는데 그 본인은 어디 있습니까?’ 물었는데 그 스님이 답을 못하게 되자 객승으로 머물러 있던 기이한 수도승을 불러오니 그 원님이 같은 질문을 하자 그 수도승이 ‘원님!’ 소리쳐 부르니 원님이 ‘예, 스님’ 하고 답하니 직바로 ‘그 본인이 어디 있습니까?’ 했다는. Suzuki는 여기서 알아 차리라 한다. 일상 속에서 ‘나’라고 생각했던 그 것이 아닌, 생각과 관념의 새장을 떨쳐나와 깨어난 그 본래의 자기를. - ‘waking him from a dreamlike world of concepts… We see here the whole person leaping out of the chamber of analysis, abstraction, and conceptualization.’
아직 이런 선문답과 종교언어의 은유성이 애매하고 면벽수행의 의미가 확신이 가지 않더라도 그래도 진실로 신실한 마음이 될 때 한번 앉아보라고 Suzuki는 권한다.그러면 한 가지 remarkable 한 점을 발견할 것이라고- ‘it is the feeling every one of us has when he sits quietly and deeply looks into the inmost chamber of his being, Something is moving there and would whisper to him in a still, small voice that he is not born in vein’ 이라는. 이것만으로도 선은 신실하게 시도해 앉아볼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이루어지면 ‘he is not lonely, forlorn and deserted’라는 것이다. 이제는 세상 끝에 버려진 무용지물의 고아가 아님을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생의 기본적인 existential anxiety 가 해결되면 이차적인 것들은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Suzuki 는 단언한다. 그래서 선(禪)은 바로 ‘What turns one’s humdrum life, a life of monotonous, uninspiring commonplaceness into one of art, full of genuine inner creativity.’ 그렇게 우리의 생을 바꿔준다고. 허전했던 생이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책 소개의 설명이 길어졌다.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단도직입의 직접 경험의 세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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