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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50분 리투아니아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에 탑승했다. 리투아니아로 갈 수록 날이 흐려진다. 비가 올 거 같은 날씨다. 13시 30분에 리투아니아 국경을 통과하여 리투아니아로 들어왔다 샤울레이 근교에 위치한 십자가의 언덕에 들렀다. 십자가의 언덕은 1830년 ~1860년대 제정 러시아 때 제정러시아에 반기를 든 주동자와 많은 사람들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고 처형을 했다고 한다. 그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꽂아두고 기도를 한 곳이 이 곳이다. 소련에서 4번이나 불도저로 밀어 버렸으나 그래도 또 십자가를 곶아두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소련은 이번에는 이 곳을 수몰시켜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가 독립이 되어 수몰 계획은 무산이 되고 만다.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십자가를 꽂아 두고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나라와 세계평화 그리고 개인적인 소원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십자를 만들어 꽂아두고 있다. 십자가의 언덕을 오르며 나는 우리 나라 공주에 있는 황새바위 성지를 떠올렸다. 비록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한 순교자들을 위한 성지이다. 이 곳에도 십자가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과는 조성된 의미가 조금은 다르지만 아무튼 십자가는 희생과 순교를 의미하는것 같다. 잔뜩 찌푸려져 있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린다. 카우나스에 도착했을 때는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비가 내린다. 비옷과 우산을 쓰고 우리는 카우나스성으로 갔다. 카우나스 성은 방어요새로 14세기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이다. 성에서 내려와 우리는 카우나스 구시가지로 이동하였다. 구시청사광장에서 시청사와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의 건물을 보았다. 시청사는 흰색의 아름다운 자태로 '흰 백조'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씨임에도 백색의 시청사 건물은 이름 그대로 백조를 연상시킨다. 참 아름답다.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는 비가 오는 날 걸으니 더 운치가 있다. 신학대학의 앞 마당에 세워진 나무십자가도 멋있다. 카우나스 입구 주차장에 서있는 천둥과 번개의 신 '페르쿠나스의 석상'이라고 한다. 페르쿠나스의 집은 중세 리투아니아 고딕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재라고 한다. 시가지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카우나스 를 따라 흐르는 네리스강과 네만강이 흐르는 강변이 나왔다. 이 두 강이 합쳐져 발트해로 향하는 곳에 카우나스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비는 내리지만 600년역사를 가진 고도를 걷는 운치 있는 날이 었다.
십자가의 언덕(Hill of three crosses)
18세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 당했던 시절에 사람들이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에 유래됐고,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여기에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14세기로 추정한다.
이곳은 몇 해 전 이문열이 펴낸 장편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도입부에
등장하는 등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주요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종교가 금지되었던 옛 소련 시절 십자가 언덕은 리투아니아
민족정신의 상징인 가톨릭 신앙과 소련의 전제 정치가 맞서 싸우는 장소로 변했다.
십자가를 세우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이 지역에선 밤낮으로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지만 모두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밤에는 몰래 십자가를 세우고 낮엔 철거하는 일명 '십자가 전쟁'이 이어졌다.
이곳의 수많은 십자가들을 정확한 통계가 없으나,
3-4m의 큰 십자가가 24,500여개, 2-3m되는 작은 십자가가 약 41,000개가 넘는다.
해마다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며 십자가뿐 아니라 예수조각상, 성인들의 모형등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볼거리는 순백색의 십자가 세 개가 모여 있는 상징물인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것으로
십자가 언덕 관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는 이 지역을 평화, 사랑, 희생의 상징으로 선포했고
소련 시절 독립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십자가 언덕은 종교적 힘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압제의 권력과 투쟁한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며,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큰 십자가 위에 또 다른 작은 십자가들이 걸려 있다.
이부분만 해도 몇백개의 십자가가 있는 것 같다.
천둥의 신 페르쿠나스 석상
카우나스성
카우나스 성은 1030년에 빌뉴스의 성터에 최초로
방어요새가 만들어지면서 지어지게 된 성 이다.
그 후 14세기 고딕양식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현재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계속되는 침략과 전쟁을 겪으며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였고, 현재 이성은 박물관과 아트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다.
빌뉴스 이전 트라카이가 수도였을 당시 독일기사단들의 침공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성으로 현재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리투아니아 국가의 날인 7월 6일에는 뮤지컬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우나스(Kaunas) - 자유와 혁명의 도시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카우나스가 정식으로 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1408년으로,
6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 강과 네리스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이런 입지적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초기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요 거점 지역으로 통하고 있어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 역시 대단했다.
15세기 당시 독일기사단이 유럽 전체로의 팽창을 위해 동방진출을 꾀했을 때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수도인 트라카이와 빌뉴스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의 사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뉴 에이지(New Age/ Naujasis amzius) 계열 성당-조지성당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기존 주류 문화에 반발해 일어난 반(反)문화 운동을 말하는데 태양과 행성들이 황도(黃道)라는 궤도를 돌면서 순환한다고 본 점성술에서 나왔다.
카톨릭에도 스며들어 우주 중심을 하느님 아닌 자연에서 찾자는 교회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카톨릭 교단에서는
뉴에이지가 교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거짓 영성운동, 이단이라고 본다.
카우나스신학대학교 앞 마당에 세워진 나무로 만든 십자가상
카우나스신학대학교
카우나스신학교는 17세기에 창설돼
지금은 카우나스 명문대 비타우타스 마그누스(VMU)의 신학부가 됐다.
학사부터 박사까지 신학과정을 가르친다.
마이로니스 신부(Jonas Maiulis. 1862. 11. 2 ∼1932. 6. 28)
리투아니아 국민시인 마이로니스 신부이다.
민족문학 부흥의 음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로마 가톨릭교 사제였던 그는 카우나스의 신학교와 1888 ~ 18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카우나스에서 2년간 지내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장학관 겸 도덕 신학교수로 근무했다.
그 뒤 모교인 카우나스의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중
1922년 리투아니아 대학교의 도덕 신학교수로 선출되었다.
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리투아니아 민족의 바람과 열망을
자신의 시에 표현했으며 리투아니아의 과거와 시골의 모습, 언어, 전설 등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을 썼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음절수 중심의 시를 강세와 음절수
중심의 시로 바꾸었으며 낭랑하고 음악 같은 시로 생전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
그가 쓴 서정시 전 작품이 선집 “봄의 목소리(Pavasario balsai)”로 출판되었다.
또한 그는 3편의 서사시를 남겼는데
첫 번째 작품인 “젊은 리투아니아(Jaunoji Lietuva : 1907년)”는 매우 서정미 넘치는 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성 베드로 바울 대성당에 안치돼어 있다.
모티에유스 발란시우스(1801~1875)
마이로니스 신부와 함께 리투아니아 지폐에 얼굴이 올라 있다.
그는 사모티지아 교구 주교로 일하며 종교-정치-사회 변혁에 앞장선
사제이자 신학자, 역사학자로 러시아 치하에서 리투아니아어를 못 쓰게 할 때
지하학교를 운영하고 리투아니아 서적을 출간하며 민족 계몽과 반러시아 운동에 앞장섰다. '리투아니아식 산문'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1864년 교구청이 카우나스로 옮길 때 함께 와 여생을 마쳤다.
역시 마이로니스와 함께 성베드로바울대성당에 묻혔있다.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교회
개미와 베짱이
네리스강과 네만강이 합쳐져 발트해로 향하는 곳에 카우나스가 자리잡고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할 때 리가로 들어오리라는 예상을 깨고
네리스강을 건너왔다는데
건너온 그곳에 세워진 고딕양식 비타우타스 교회
'페르쿠나스의 집'
중세 리투아니아 고딕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화재이다.
15세기 중반 독일과 발트해 연안 도시들이 맺은 무역동맹 한자동맹의 상인들이 지어
길드연합회 건물로 출발해 17세기 예수회 예배당이 됐고
버려져 있던 건물을 19세기 초 고쳐 지어 학교 겸 극장으로 썼다.
독일을 비롯한 중동부유럽 교회의 탑 장식을 닮은 박공 장식이 돋보인다.
맨 위 감실엔 벽돌로 만든 독수리상을 모셨다.
한자동맹 문장(紋章)이 쌍독수리인데 연관이 있을 것같다.
19세기 말 보수 공사 때 벽에서 리투아니아 토속 신 가운데 최고의 신으로
천둥을 관장하는 페르쿠나스의 조각상이 발견된 뒤 페르쿠나스의 집,
또는 '천둥의 집'이라고 부른다.
천둥과 번개의 신이 내려 칠 때부터 물이 데워져서 물에 들어가 목욕할 수 있다고 한다
구시청사(Rotušė)
백색 이미지 때문에 ‘흰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542년 최초로 그 자리에 들어선 이래 성당, 감옥 등 여러 가지 기능으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18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말에는 백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들과 들러리들로 주변 광장이 가득 찬다. 건물 한쪽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베드로 바울 성당(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 카우나스 대성당)
전쟁과 화재를 겪으면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증축되어
리투아니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된 이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Maironis)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성당 내부
리투아니아와 벨기에 학자-기업인이 1999년에 세운 '생명의 외교관-스기하라재단'이
일본 영사대리 스기하라를 기려 2000년 이곳 옛 일본 영사관에 개설했다.
일본이 60여년 전 유럽에서도 외진 이곳에 영사관을 낸 것은 2차대전의 전운이 짙어가던 때 독일과 소련이 첨예하게 맞부딪친 발트 지역에서
전쟁에 관한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스기하라가 부임했을 무렵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양분해 점령하자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 중 12만명이 나치를 피해
그때까지는 독립국이었던 리투아니아로 피란 온다.
리투아니아에도 이미 20만 가까운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곧 닥칠 나치의 학살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카우나스에 있는 여러 나라 영사관을 쫓아다녔지만 벨기에 영사관만 빼고는
출국에 필요한 비자를 내주는 곳이 없었다.
1940년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외국 공관을 쫓아내기 시작하자 사정은 더 급박해진다. 일본 영사관에도 유대인들이 몰려오자스기하라는 이들이 일본을 거쳐
3국으로 갈 수 있는 통과 비자를 주기로 결심하고 본국에 세 차례 거듭해 전문을 보낸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체결을 눈앞에 둔
일본 군국주의 정부는 비자 발급을 번번이 불허한다.
스기하라는 결국 훈령을 어기고 아내와 함께 비자를 내주기 시작한다.
잠을 하루 몇 시간도 못 자며 일일이 손으로 쓰느라 하루 수백장이 고작이었다.
한 달 뒤 영사관이 강제 폐쇄되고 호텔로 옮겨 묵으면서도 부부는 비자 발급을 계속한다. 리투아니라를 탈출하는 마지막 열차 안에서도
비자를 써 플랫폼까지 따라온 유대인들에게 던져준다.
그렇게 떼어준 비자가 2139장, 한 장으로 한 가족이 떠날 수 있어서 6000여 유대인이
소련 거쳐 일본으로 갔고 다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정착하게 된다.
1941년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은 유대인 25만명을 학살한다.
그에 앞서 탈출해 재앙을 면한 유대인들에게 카우나스 일본 영사관의 문은 '희망의 문'이었고 스기하라의 비자는 '생명의 비자'였다.
스기하라는 전쟁이 끝나자 일본 외무성 압력을 받고 사실상 면직된다.
'카우나스의 불복종' 을 문책한 것이다.
그는 빼어난 러시아 실력을 밑천 삼아 번역-통역을 하고 무역업도 하며 살아간다.
일본 외무성은 2000년에야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복권시킨다.
유대인들에게 발급해준 '생명의 비자'를 확대해 붙여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일본이 팽개친 스기하라에게 1969년 훈장을 줬고
1985년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최고 영예 야드바셈상도 수여한다.
'스기하라의 집' 브로셔에 그가 남긴 말이 적혀 있다.
'그들도 인간이었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 그
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결심한 용기가 내게 있다는 게 반가웠다.'
스기하라사진
카우나스투어를 마치고 빌늬우스로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은 빌니우스에 있는 중국식 레스토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