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Kazakhstan)
☛면적 : 2,724,900.0㎢(남한의 약27배)
☛인구 : 1,800만명
☛수도 : 아스타나
☛독립시기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
☛ 약 120개 민족다민족국가(한민족 약10만명거주)
☛철도궤간길이 : 광궤 1,520mm
➡중앙아시아는 소련에서 독립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일컫는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걸쳐 있는 공화국이다. 카자흐어(국가어) 및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수도는 아스타나이다. 카자흐인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한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로서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 북서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몽골과 가까우나 인접해 있지는 않다.
러시아, 카스피 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이자, 가장 큰 내륙국이다. 1850년경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으며, 1925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36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편입되었다. 1991년 12월 16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했다. 광대한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륙적으로 건조하며 초원·사막이 매우 넓다. 주민은 카자흐인이 절반이다. 에너지자원(석탄·석유·수력) 외에 철, 구리, 납, 아연, 금, 니켈, 크롬, 망간, 보크사이트, 인회토(燐灰土)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발달의 기초는 이들 자원의 채광 야금업이며, 화학공업(카바이드·인조고무·과린산비료·섬유·플라스틱), 기계장치제조업(농기·광산기계·압연기·석유업장치·압착기·펌프)도 발달하고 있다. 북부 카자흐스탄은 1954년부터 광대한 처녀지가 개간되어 밀·귀리·보리 등을 산출하는 곡창지대다. 카자흐스탄은 동유럽에 영토를 일부 두고 있다.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1991년 카자흐스탄의 독립 이후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대통령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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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철도교통
카자흐스탄은 철도 총연장이 13,700 km(2006년)이지만 전체 국토면적에 비하여 대단히 짧다. 유럽과 러시아의 1㎢당 철도 길이가 66km에 비하여 카자흐스탄은 4.9km에 불과하며, 철도망도 주로 전 구소련과의 연결망 위주로 건설되어 있다.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의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한 무역진흥의 최우선과제는 화물 수송로 확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카자흐스탄의 무역은 모스크바를 주거래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모스크바 연결망 이외에는 주변 국가들과의 수송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내륙국인 까닭에 파키스탄이나 이란 등 인접 국가들의 해항(海港)을 이용하든가, 또는 그 외의 철도를 정비하여 터키나 중국(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인접국가로의 수송로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시아 간선철도(실크로드 철도), 즉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북경까지 1만 5천 km를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우선 1차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우루무치와의 1300km를 연결하는 선로 중에서 미개통부분 460km가 건설되어, 1992년 6월에 철도 운행이 개시되었다. 이 철도의 시발점은 중국의 황해 연안 상하이[上海] 북부의 롄윈항[連雲港]이며, 중국측과 중앙아시아측의 철도 궤도의 폭이 다르기 때문에 국경역에서 대차(臺車)의 교환을 해야 하는 불편한 점은 있다. 그러나 1992년 이후 화물수송량이 100만t에서 기하습수적으로 증가하여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시아 횡단철도의 최종목적은 중국연안으로의 출구를 확보하여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을 증대하는 것이다. 아시아 간선철도의 지선은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완성되면 이란의 반다르압바스항과 파키스탄의 카라치 등 대상항(大商港)을 이용하게 되어 화물량은 비약적으로 증대될 것이다.
국내 도로망은 총길이 90,018km 중 포장도로가 84,104km이지만 고속도로가 없고 자동차 여행시설 등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 평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이르티시강,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시르다리아강을 따라 내륙 수로 4,000 km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전국적인 수송로로서의 역할이 크지 않다. 항공로는 주로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서 외국과 연결되었으나, 독립 후 인도의 뉴델리, 이란의 테헤란, 터키의 이스탄불, 그리고 유럽의 프랑크푸르트를 주 1~2회씩 운항하여 주변 국가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편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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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자연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북단은 모스크바, 남단은 한반도의 북부와 대략 같은 위도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원으로 되어 있으나, 서부는 카스피해 연안저지와 투란저지, 중앙부는 카자흐 소화산대지, 북부는 서시베리아 저지로 되어 있다. 동부와 남부 산악지대는 만년설과 빙하로 덮인 해발 5000m가 넘는 톈산, 알타이 양 산맥이 솟아 있다. 그래서 동고서저형의 지세를 이룬다. 전체 면적 중 경작 가능지가 8.28%, 농경지가 0.05%, 기타가 91.67% (2005년)이다. 호소(湖沼)로는 서쪽의 카스피해와 그 동쪽의 아랄해, 그리고 중국과의 국경에 발하슈호(湖)가 있는데 모두 염호이다. 주요 하천으로는 이르티시, 우랄, 시르다리야, 추, 일리 등이 이들 호소로 유입하며, 오비강(江) 유역의 북부 일부를 제외하면 내륙에 광대한 유역 평야을 형성한다.
기후는 대륙성으로, 덥고 건조한 여름과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 교차한다. 북부가 엄동인 시기에 남부의 산록분지에서는 과수원의 꽃이 피는 등 기온의 차이도 상당하다. 1월 평균기온은 북부에서 -18℃ 전후이고, 남부에서는 -6~-2℃이며, 7월 평균기온은 북부에서 20~22℃이고, 남부에서는 26~30℃에 이른다. 강수량은 특히 적어서 전국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내외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적어지며 사막에서는 100mm 미만이고 산악지역에서는 1,000m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우계는 3~4월 경이며 이 기간 중에 일년 강수량의 대부분이 내린다. 아랄·카스피해의 대평원을 투란저지라 하는데, 강수량이 적어 대부분 스텝(短草草原) 또는 반사막을 이룬다. 이에 따라 여름의 고온과 풍부한 일조량을 이용한 농업이 행해지며, 건조에 대한 관개농업이 일찍부터 보급되었다. 시베리아로 연속되는 북부는 토양이 밤색토양과 갈색토양으로 부식되었으나, 다른 대부분의 평야는 부식이 적은 회색토로서 알칼리성 토양이다. 이에따라 식물도 반사막이나 사막성의 저목류이고, 동물은 야생토끼, 마르모트 등의 설치류와 여우, 늑대, 야생당나귀, 영양 등이 서식한다.
남부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며,시르다리아강 등의 과도한 관개로 아랄해가 축소되고 주변 도시가 오염되고 있다. 카스피해도 과도한 살충제 사용 등으로 오염이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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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극동)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들은 구소련의 국경 소수 민족 중 큰 무리에 해당되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은 일본의 강제 점령 하에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주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4] 고려인의 이주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1917년 ~ 1926년에는 고려인들이 거의 170,000명으로 3배로 늘어났고, 블라디보스토크 농촌 인구의 1/4을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으로 러시아 동부의 고려인 단체에 대한 고려인 자치령이 모스크바에서 논의되었으나, 토지에 대한 경쟁을 우려한 지역 러시아인의 반대와 일본에 대한 정치적인 고려로 1925년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정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고려인 자치구는 허가되었고, 한국어 학교와 신문이 설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 노선은 국경 너머의 일본의 속박과 대조되는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모범적인 정책으로서 제시되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1926년 12월 6일 채택된 비공개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는 구소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는 하바롭스크 북부에 거주하는 88,000의 고려인의 절반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정치적, 재정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1930년 이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1930년을 시작으로 충성심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고려인들은 북쪽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초기에는 작은 숫자였으나[5] 이것이 종종 구소련의 첫 번째 민족 청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소련당국은 1935년부터 3년 동안 2,500명의 고려인을 "일본 간첩"이란 혐의로 총살하기도 했다.[6] 대규모의 이주는 일본의 침략의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1937년까지 연기되었다.
1937년 9월에서 10월까지, 구소련 당국은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으로부터 이주되었다. 그 법적 근거는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 극동 러시아 국경 한민족의 이주에 대한 것이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7] 이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겐리프 류시코프가 로스토프로부터 전임되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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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日帝)때 만주로 간 사람들은 조선족이고 연해주로 간 사람들은 고려인이다. 고려인동포는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자 들로서, ‘고려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등 독립국가연합 내에 거주하는 한은 교포들의 총체적 용어로, 러시아어(語)로는 ‘까레이스키’라고 하며, 고려인 또는 고려족이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했다. 이어 1865년(고종 2년)에 60가구, 그 다음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여명에 달하는 한인이 이주했다.이후로도 이민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이 농업이민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다.
1863년 한인 연해주 이주 시작
1914년 교민 수 63,000명으로 신한촌 건설 (블라디보스톡)
1923년 재소 한인 공식 10여만 명 거주. 실제 25만 명 이상 거주
1937년 (9월 21일~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이주 당함
1931년 스탈린은 일본군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인들을첩자로 이용하여 정보를 수집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구실로 삼아 1937년 고려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에 대한 강제 이주정책을 실시하여 지식인은 처형하고 예고 없이 화물차와가축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어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에 중앙아시아에 버렸다. 낮선 땅에 도착한 이들은 살기 위해 토굴을 파고 한민족의 강한 생명력으로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 집단 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잘사는민족으로 뿌리내렸다.
그러나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 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어 직장에서 추방 당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어 다시 연해주 지방으로 모여 들었으나 연해주마저 어려움에 처하자 조상의 땅 한국으로 입국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고 있다.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