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2일 오후7시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어둠이 채 밀려오기 전이라 제주대 입구와 산천단 주변의 하이얀 벚꽃들을 감상하며 연신 감탄의 말을 꺼내야 했다. 역시 소리공부 하기에는 좋은 위치라고 생각하며 선생님이 사시는 곰솔휴게소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한국민속예술연구원제주지원'이라는 간판이 옆 기둥에 걸려 있었다.
김주옥선생님은 언제나 밝게 인사를 받아 주셨다. 아담한 방에 텔레비젼 한 대, 녹음기, 그리고 벽 한켠에는 선생님의 젊었을 적 사진과 상장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니 상당히 미인인데다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고향은 월정리, 외가는 하도리라고 하시며 얘기를 꺼내셨다.
어렸을 때는 구좌면 유지의 손녀로 상당히 호세있게 살았다. 할아버지의 권세가 있는데다 3녀1남 중 장녀이자 집안의 첫 손자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선생은 말괄량이 삐삐보다 더한 개구쟁이로 남의 집 장독 깨기, 오줌항아리 깨기 등 온 동네에 말썽을 부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면 어머니는 집집마다 장도 퍼다 주고 독도 사서 변상하느라 애쓰시곤 했다.
친구들끼리 산에 솔잎이나 말똥을 주으러 가면 선생은 노래를 부르거나 심방 흉내를 내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선생의 소리를 듣는 대신 그의 몫까지 다 해놓을 정도로 친구들은 그의 소질을 인정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월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홍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공부에는 뜻이 없어 거으 안다니다시피 했다. 열 네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의 권유로 친척들이 있는 일본의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도 공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그의 끼를 확인하고 예술인으로서 살아가게 될 운명적인 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무용인 최승희씨가 학원을 운영하며 무용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느날 학원 앞길을 지나다 창문 너머로 본 최승희의 춤에 매료된 선생은 그날부터 학교는 안가고 매일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창문 유리창을 통해 최승희와의 춤 속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었다.
선생이 매일 창문 밖에 와 서서 눈동냥을 하는 사실을 알게 된 최승희가 하루는 그를 불러들여 구경한 만큼 추어보라고 했다. 곁눈질로 배운 솜씨 치고는 아주 잘 추자 선생에게 무용을 본격적으로 배워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집안의 반대로 결국 포기해야 했다.
아쉬운 맘을 달래려 공원에 나가 혼자 노래를 불렀다. 제주도에서 배운 노동요에서부터 이난영, 이화자씨의 창부타령 등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는 노래를 있는대로 부르다 보니 어느덧 공원에는 관객들이 들어차고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를 본 부모님은 유화책을 써 무용을 포기하는 대신 목청이 좋으니 공부를 마치고 나서 레코드를 취입해 준다고 달래 선생을 공부에 전념토록 했다.
17살 나던 해 부모님이 보고 싶어 결국 귀향한다. 집안일을 도우며 살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리고 꼭 1년후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졸지에 부모를 모두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좀녀 모집에 참가하여 소완도로 물질을 가게 된다.
이때 바로 4.3이 발발하고, 하나 뿐이던 남동생이 군경과 산사람 사이에서 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그 소식을 이웃 친척에게 전해들은 선생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만다.
제주에서의 처참한 기억을 잊기 위해 선생은 여동생 둘을 이끌고 서울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여동생들도 결혼시킨 후 장사를 시작한 것이 번창하여 왕십리 간장공장과 충무로 태흥관이라는 요정을 경영하기에 이른다. 동향인 제주사람을 먼저 고용한다는 방침으로 고향의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던 이 시기에 그는 국악인들과 접촉하며 취미로 소리와 춤을 배우게 된다. 물론 이 당시 전문적인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본격적으로 소릿길로 접어드는 데 있어 이 때의 소리수업이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은 선생에게 지금까지 삶 중에 가장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시며 시험을 해 보이신다.
선생에게는 아들 4형제가 있었다. 그 때 당시 15살, 13살, 11살, 9살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었다. 태흥관 식구들끼리 야유회를 떠나기로 한 어느 주말이었다. 토요일에 가정교사와 아들들을 먼저 인천으로 보내 제일 좋은 여관에 묵게 했다. 선생 부부는 다음날 바로 내려가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밤 사이에 연탄가스로 아들 4형제가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선생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거의 미치다시피 했다.
네 아들의 죽음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과 네 아들을 자신이 죽게 했다는 죄책감 사이를 오가며 절에서 요양을 하던 어느날 아들 4형제가 큰 거북이를 타고 나타나서는 머리 위를 몇 번이고 빙빙 돌다 휑하니 하늘로 사라져 버리는 꿈을 꾸고 나서는 죽은 아이들이 좋은 세상으로 갔으리라는 위안을 받고 비로소 절을 내려왔다.
그 후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만 1년을 허송세월한다. 결국 남편의 고향인 전북 순창에 정착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깔끔한 마을의 풍경이 마음을 안정시켜 줄 것 같았고, 아들 4형제를 죽인 어미라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정착하여 1,2년 살았다.
그러나 선생에게 또 다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하늘같은 남편마저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진 것이다. 마지막 희망인 남편마저 쓰러지자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다 갖은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10여일 후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인덕이 있어서인지 마을 사람이 모두 모여들어 일을 도왔다. 상여를 메고 장지로 가는데 상여에 맨 연꽃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저절로 높이 날아 사라져 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영혼이 좋은 데로 갔다며 위로했다.
선생은 모든 것을 잃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이때 나이 마흔 살. 그때부터 못마시던 술과 담배를 배웠다. 제주 사람들을 만나 민요를 함께 부르게 되면서 차츰 아픈 기억들을 잊었다. 그리고 제주민요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민요는 먼저 저세상으로 가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늘 그의 가슴 속에 살아있듯 민요는 그의 삶과 함께 했다.
그러면서 박순천 선생으로부터 홍애기소리, 김금년 선생으로부터 봉지가, 산천초목, 고창민 선생으로부터 조밭 볼리는 소리, 홍애기소리, 이화 선생으로부터 오돌또기, 서상경 선생으로부터 이야홍소리를 사사받게 된다. 현재 그의 스승들은 모두 돌아가셨다. 다만 고창민 선생님만 살아계셔서 가끔 찾아가 뵙곤 한다.
선생은 무대에 서면 살아온 내력과 그동안 보고 느낀 감정을 실어 소리를 한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과 한맺힌 삶이 지금 선생의 소리를 만든 것이다. 제주에서 처음 소리를 하고 다닐 때 춤쟁이, 노래쟁이 간다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지금은 소리가 좋다고 인정받는 예술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도 열심이다. 선생은 아무리 가치있는 민요도 그것들이 후세들에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소리왓에서도 제8회 민요교실에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제주민요를 배운 바 있지만 민요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시는 대선배 소리꾼의 모습이 우리들에겐 무척이나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1,2차 소리꾼 탐방으로 이루어진 이번 탐방은 참으로 의미가 깊은 시간이었다. 선생의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오는 느낌과 선생이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김주옥 선생님께 시간을 내주신 데 대해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내내 건강하시길 빈다. [경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