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시(遊仙詩), 초월의 꿈과 환상
1
이카루스는 태양빛에 날개가 녹아 추락해 죽었다. 초월의 욕망은 징벌을 부른다. 돌아보면 현실은 차디차다. 욕망은 시궁창을 이루며 흘러간다. 이루지 못한 꿈은 파편처럼 떠돈다. 장벽과 절벽이 도처에서 발길을 돌려세운다. 인간에 진정 낙원은 있는가? 낙원은 없다.
의식이 한계에 부닥칠 때 비로소 무의식의 세계가 열린다. 상상은 자유롭다. 상상이 날개를 달아 한없이 날아가면 그곳에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환상은 그러니까 잃어버린 꿈의 원형을 재현한다. 그곳은 저 태청허공(太淸虛空), 아홉 겹의 구름을 헤치고 학의 등을 타고 훨훨 날아서야 도달할 수 있는 시원(始原)의 공간이기도 하고, 가시덤불을 뚫고 몇 리를 기어가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복사꽃 핀 동산이기도 하다. 분명히 있지만 갈 수는 없는 곳, 갈 수는 있어도 오래 머물 수는 없는 곳이다.
이 글은 우리 옛 한시, 그중에서도 유선시에서 선계의 상상과 환상이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 유선시는 선계를 노닌 환상의 유력(遊歷)을 노래한다. 조선조의 유자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삶의 가치를 두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꿈을 접지 못했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은 이들이 꿈꾼 유토피아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들의 꿈속에 그려지는 옥황상제의 황금궁궐과 허공을 나는 신선의 세계를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허균(許筠, 1569-1618)은 〈꿈에 대하여(夢解)〉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오래 벼슬길에 있으면서 밥 먹는데 곤란을 받을 때면 틈을 보아 귀인에게 고을살이를 빌어, 그 자리를 엿보아 차지하여 꿈을 문득 이루기도 했다. 나중에는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마음에서 움직임이 깊었던 때문이었다. 변고를 겪은 뒤부터는 명리를 향한 마음을 끊어 없애고, 한결같이 수련에만 뜻을 두었다. 도가의 경전과 비결을 많이 읽고, 잠심하여 연구하였다. 그러자 꿈에 문득 자양(紫陽)과 해경(海瓊) 등 여러 진인을 만나 그 현묘한 비결을 듣게 되었다. 심지어는 정신이 옥경으로 날아가 난새와 학을 타고서 오색 구름 속에서 퉁소 소리를 들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이것은 그 생각에 골몰한 것이 지극했기 때문이었다.
골몰한 생각이 몽유(夢遊)로 이어져, 아예 옥황상제가 사는 백옥경으로 날아가 난새와 학의 등에 올라타 오색 구름 속을 노닌 이야기며, 책에서 만나보던 신선을 직접 만나 깨달음의 비결을 들은 이야기를 말했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꿈에 광산산을 노닌 시의 서문(夢遊廣桑山詩序)〉에서, 자신이 꾼 꿈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유년에 내가 상을 입어 외삼촌 댁에 묵고 있을 때, 밤 꿈에 바다 위 산으로 둥실 날아 오르니, 산은 모두 구슬과 옥이었고, 뭇 봉우리는 온통 첩첩이 쌓여 있는데, 흰 옥과 푸른 구슬이 밝게 빛나 현란하여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무지개 구름이 그 위를 에워싸니 오색 빛깔은 곱고도 선명하였다. 옥 샘물 몇 줄기가 벼랑 사이에서 쏟아지는데, 콸콸 쏟아내리는 소리는 옥을 굴리는 것 같았다.
두 여인이 있어 나이는 스물 남짓한데, 얼굴빛은 모두 빼어나게 고왔다. 하나는 자주빛 노을 옷을 걸쳤고, 하나는 푸른 무지개 옷을 입었다. 손에는 모두 금색 호로병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와 내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시내물을 따라 구비구비 올라가니 기화이초가 곳곳에 피었는데 이루 이름할 수가 없고, 난새와 학과 공작과 비취새가 옆으로 날며 춤을 추고, 숲 저편에선 온갖 향기가 진동하였다.
마침내 산 꼭대기에 오르니 동남편은 큰 바다라 하늘과 맞닿아 온통 파아랗고, 붉은 해가 막 돋아오르니 물결은 햇살을 목욕시켰다. 봉우리 위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아주 맑았다. 연꽃은 빛깔이 푸르고 잎이 큰데 서리를 맞아 반나마 시들었다. 두 여인이 말하기를, "이곳은 광상산이랍니다. 십주(十洲) 중에서도 으뜸이지요. 그대가 신선의 인연이 있는 까닭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를 지어 이를 기념치 않으리오." 하므로, 나는 사양하였으나 한사코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절구 한 수를 읊조리니, 두 여인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완연한 신선의 말씀이로군요." 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한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내려와 봉우리 꼭대기에 걸리더니, 둥둥 북소리에 정신이 들어 깨어났다. 잠자리엔 아직도 연하(烟霞)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무지개 구름에 둘러싸인 흰 옥과 푸른 구슬로 빛나는 봉우리들. 폭포도 옥구슬을 울리며 떨어진다. 노을 옷과 무지개 옷을 입는 선녀는 황금 술병을 들고 마중 나온다. 기화요초가 황홀히 핀 속에서 난새와 학, 공작과 비취새는 너울너울 춤을 춘다. 그녀가 소개하고 있는 상상 속의 나라 광상산의 모습이다. 당시 그녀는 자식을 잃고 상심한 끝에 잠시 외삼촌 댁에 머물고 있었던 듯 하다. 더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 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푸른 빛깔에 큰 잎을 지녔으되, 서리 맞아 시든 연꽃은 곧 그녀의 현재를 암시한다. 꿈 속 선녀가 들려준 신선의 인연은 그저 꿈이었을까? 이 꿈에서 깨어난 뒤 그녀는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서리 달 찬 속에서 붉게 떠지네(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라고 하였다. 그것이 시참(詩讖)이 되어 스물 일곱의 나이로 그녀는 천상 백옥루로 훌훌 올라가고 말았다. 꿈 속의 환상이 완전한 자기 동일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녀의 유선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옥구슬 꽃 바람 타고 청조가 날자
서왕모 기린수레 봉래섬 향해 간다.
목란 깃발 꽃술 배자 흰 봉황 수레 타고
난간에 웃고 기대 요초를 줍는구나.
푸른 무지개 치마 바람이 헤집으니
옥고리 경패 소리 댕그렁 댕그렁.
선녀들 짝을 지어 거문고 연주하자
삼화주 나무에는 봄 구름 향기롭다.
동 트자 부용각서 잔치를 파하고서
청동은 푸른 바다 백학 타고 건너가네.
피리소리 사무쳐서 오색 노을 날려가고
이슬 젖은 은하수엔 새벽별이 지는구나.
瓊花風軟飛靑鳥 王母麟車向蓬島
蘭旌蘂피白鳳駕 笑倚紅欄拾瑤草
天風吹擘翠霓裳 玉環瓊佩聲丁當
素娥兩兩鼓瑤瑟 三花珠樹春雲香
平明宴罷芙蓉閣 碧海靑童乘白鶴
紫簫吹徹彩霞飛 露濕銀河曉星落
〈선계를 바라는 노래(望仙謠)〉다. 선계는 경화(瓊花) 난정(蘭旌) 예피(蘂 ) 홍란(紅欄) 취예상(翠霓裳) 옥환(玉環) 경패(瓊佩) 요슬(瑤瑟) 주수(珠樹) 자소(紫簫) 등 불변과 영원을 상징하는 옥 모티프와 신성과 고결을 나타내는 색채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화려와 사치가 인간의 상상력을 다한다. 청조를 길잡이 삼아 서왕모는 화려한 치장으로 백봉황이 끄는 수레를 올라탔다. 바람은 건듯 불어 그녀의 푸른 무지개 치마를 헤집는다. 그 서슬에 팔찌며 패옥이며 서로 부딪쳐 쟁그랑 쟁그랑 해맑은 음향을 낸다. 선녀들이 짝을 지어 거문고를 연주하면, 삼화주 나무는 향기도 그윽하게 구름에 잠겨 있다.
밤새 즐겁던 잔치는 먼동이 트면서 끝이 난다. 날이 새기 전에 그녀는 천상의 선계로 복귀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엔 백학을 탄 청동들이 푸른 바다 위로 앞장 서 날아가고, 그네들이 부는 피리 소리는 허공에 사무쳐 오색 노을도 덩달아 나부낀다. 이때쯤 이슬에 젖은 은하수엔 새벽 별이 져서 인간의 세상은 광명한 아침을 맞이한다.
이렇듯 유선시에서 선계는 상실했던 낙원, 충만함이 넘치는 공간으로 관념된다. 선계는 현재의 모든 결함을 보상해 줄 수 있는 완전으로 가는 입구다. 불완전한 현재와 완전한 과거 또는 미래와의 접점에 존재한다. 공간묘사를 통해 구체화되는 선계상은 이들의 동경과 갈망, 현실에 대한 불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역으로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 준다.
이수광(李 光, 1563-1628)도 자신의 〈꿈이야기(記夢)〉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계축년(1613) 9월 17일 밤, 꿈에 한 궁실로 들어갔다. 제도가 지극히 장엄하고 화려하였다. 뜰은 몹시 넓고도 깨끗했다. 검은 옷을 입은 도사 천 백명의 무리가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나를 보더니 기뻐하면서 이끌어 집 가운데로 데려 갔다. 서로 손을 모두어 예를 올리니 지극히 공경스러웠다. 한 그릇의 다탕(茶湯)을 올리며, "반야탕(般若湯)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마셔보니 향기와 맛이 아주 좋았다.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는 것이 보통과 다른 것을 느꼈다. 뜰 앞에는 화로가 하나 놓였는데 향기가 집에 가득하였다. 잠에서 깬 뒤에도 또렷히 기억할 수 있었다. 아아! 나는 명교(名敎) 가운데 사람이다. 꿈 꾼 것은 평소 생각하던 바가 아니다. 어찌 도를 믿음이 전일하지 아니하고 헛된 생각이 아직도 남았더란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장차 묵은 인연이 스러지지 않아 신령스런 경계가 이렇게 드러났더란 말인가? 옛날 백락천은 이름이 도산(道山)에 있었고, 왕안국(王安國)은 꿈에 신선이 되었다 한다. 내가 두 사람에 견줄 바는 못되나, 잠시 그 기이함을 기록해둔다.
여성인 허난설헌이 선녀들과 만나 수작했다면, 남성인 그는 신선들에게 반야탕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둘 다 같은 꿈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미워하는데, 신선들은 나를 보고 반색을 한다. 세상에서는 미관말직을 전전하고 있는데, 선계에서는 나를 집 가운데로 모셔 앉히고 귀한 음료를 받들어 내온다.
뒤의 이야기는 습관처럼 붙은 자의식의 발로일 뿐이다. 나는 유자(儒者)인데 왜 선계를 꿈꾸는가? 헛 생각이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전생의 묵은 인연이 절로 드러나 나의 전신(前身)이 신선이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인가? 아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후자 쪽이었을 것이다. 꿈에서 깬 뒤 읊은 그의 노래는 이렇다.
자궁(紫宮)의 한 밤, 신선들 모여
낯빛도 기쁘게 날 맞아 절하며,
궁 가운데 칠보상(七寶床)에 앉으라 하니
아득히 이 몸 청련계(靑蓮界)로 들어왔네.
반야탕(般若湯) 한 잔을 따라 주면서
옥제(玉帝)의 경장(瓊漿)이라 일러 주누나.
마시자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진토에 찌든 속을 깨끗히 씻어주네.
뜰 앞 화로에선 가는 연기 오르더니
삼생의 온갖 일들 환히 알게 되었도다.
요대 허공 생(笙) 불던 학, 깨어보니 간 곳 없고
만리 가득 안개 또한 꿈속의 일일래라.
바다 위 봉래산엔 오래동안 주인 없고
백락천은 인간의 괴로움을 실컷 겪었다오.
돌아갈 지팡이를 급히 만들자.
봄 바람 삼화수 꽃잎 떨구기 전에.
紫宮半夜群仙會 群仙色喜迎我拜
坐我堂中七寶床 然身入靑蓮界
餉我一杯般若湯 云是玉帝之瓊漿
罷精神頓淸爽 洗盡十年塵土腸
庭前有爐烟細起 令我了悟三生事
瑤空笙鶴覺來失 萬里烟霞造夢裏
海上蓬萊久無主 樂天偶餉人間苦
唯須作急理歸 東風吹老三花樹
꿈에 자궁(紫宮)에 이끌려 간 그는 여러 신선들의 환영 속에 옥례천(玉醴泉)의 경액(瓊液)을 달여 빚은 반야탕(般若湯)을 마시고, 속세에서 찌든 내장이 깨끗해지는 환골탈태를 경험한다. 대궐 앞 화로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라, 전생과 현생과 내세의 일을 모두 환히 보여준다. 원래 있던 봉래산을 떠나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겪었던 것은 신맛 나는 인간의 괴로움뿐이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원래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자.
아마 꿈속의 상상은 그가 실제로 꾼 꿈이었을 터이다. 유자로서의 자의식과 이를 인정해 주지 않는 현실 사이의 모순이 그로 하여금 유자임을 되뇌이면서도 자꾸 현실을 부정하는 상상세계로의 탈출을 꿈꾸게 한 것이다. 탈출의 근저에는, 개인의 힘의 한계를 훨씬 웃도는 한계상황에 대한 우울한 비관주의가 잠재되어 있다.
3
적선(謫仙)은 귀양 온 신선이다. 나는 적선이다. 본래는 천상 선계의 신선이었으되, 선계에서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 귀양 온 신선이다. 현실의 삶이 이토록 고단하고 서글픈 것은 지상에서의 삶이 징벌의 시간인 까닭이다. "꿈에 한 사람이 달다려 닐온말이 그대를 내 모르랴 상계의 진선(眞仙)이라. 《황정경》 일자(一字)를 엇디 그릇 읽어두고 인간에 내려와서 우리를 따르난다." 정철의 〈관동별곡〉의 한 구절에서 익숙하게 만나게 되는 이러한 적선의식(謫仙意識)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남녀 주인공의 운명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공식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적선, 즉 귀양 온 신선으로 관념할 때, 유선 행위는 언젠가 자신이 속해 있었던 잃어버린 낙원, 또는 본향으로의 귀환인 동시에 불완전한 현재에서 완전했던 과거로의 회귀이다. 꿈 속에서의 낭만적 몽유와 허망한 각몽 사이에 존재하는 단층은 현세에서의 불우에 대한 자기 보상적 합리화의 소산이다.
만리라 푸른 바다 깊기도 한데
바람 파도 눈 물결 가이 없구나.
적성(赤城)은 겹겹으로 둘러싸 있고
노을 빛 안개 그림자 허공에 가물대네.
금모래 휘황하게 옥지(玉地)를 덮어 있고
요화 떨기 기수(琪樹) 위서 밤에도 밝다.
굽어보면 허무하여 팔극을 곁에 두고
위로는 옥경과 은하수로 통해있네.
천년된 반도에다 삼수(三秀)의 영지는
무성히 잘 익어 뜨락에 늘어섰네.
아홉겹의 영금(靈禽)과 금색 사자가
닭인 듯 개인양 울며 짖는다.
구슬 궁전 푸른 허공 기대어 있고
은 궁궐은 노을 아래 번쩍이누나.
검은 우물 붉은 샘엔 이무기와 용이 서려있고
공작 비취 깃을 털며 처마 끝서 울며 난다.
밝은 별빛 옥녀들은 아래에 늘어섰고
뜬 해와 솟는 달이 그 가운데 지나가네.
구름 창 수놓은 문 어두움을 젖히니
신선들 낯빛이 복사꽃인양 환하구나.
진결 비급 읊조리니 옥소리 같더니만
껄껄껄껄 웃으니 우레 번개 울리는 듯.
무지개 옷을 입고 무지개 빛 허리차고
신선 수레 몰려들어 서로 모여 기뻐하네.
바람은 펄럭이며 수레 굴대 붙들고
안개도 자옥하다 수레 덮개 이어있네.
얼룩무늬 기린이 고삐 당겨 높이 날자
오색의 학도 따라 서서히 비상한다.
용호를 꾸짖어 날뜀을 경계하고
흰 붕새 길들여 타고 푸른 바다 소요하네.
해뜨는 양곡에서 적오(赤烏)를 맞이하고
해지는 약영(若英)에선 한토(寒兎)를 전송하네.
정신을 모아 보고 넋으로 교감하나
선선들 손짓하며 기뻐하지 않는구나.
옥동을 돌아보며 좋게 말을 돌리어서
신신당부 가르치며 밝게 일깨우네.
빠른 길을 지름길로 삼지 말라 하며
내가 신선이요 속인이 아니라네.
옥동은 말 마치자 급한 일이 있다는데
홀연히 정신이 들며 잠에서 깨어났지.
그 소리 그 그림자 모두다 아득해라
이 내몸 여태도 티끌 세상 있는 것을.
오고 감에 정신만을 기다리지 않으리라
훗날 큰 약으로 금단을 이루게 되면
가벼히 날아 올라 선부로 들어가리.
신선과 나 사이엔 내남이 없거니
신선술을 배워서 신선의 벗이 되리.
신선들과 무리지어 나란히 날아 오르면
신선의 즐거움을 가눌 길이 있으랴.
滄海深萬里 風濤雪浪無涯
赤城繞幾重 霞光霧影空瞳
金沙照爛被玉地 琪樹夜明瑤花叢
下俯虛無旁八極 上與玉京銀河通
千歲之桃三秀芝 羅榮騈熟排軒
九苞靈禽金色獅 爲鷄爲犬鳴吠之
珠宮倚虛碧 銀闕耀霞脚
玄井紫泉蛟 蟠 孔翠刷 飛鳴 角
明星玉女充下陳 日浮月湧經 桭
雲 繡 啓 冥 列眞顔色桃花明
眞吐秘爭 玉 笑啞啞兮雷電激
霓之衣兮帶虹光 集羽盖兮欣相악
風 兮扶轄 霧 兮承
班麟控高 彩鶴仍徐翔
呵龍叱虎戒飛躍 馴騎白鵬擾靑鯨
邀赤烏於暘谷 送寒兎於若英
余精 而魂交 衆仙目以不謔
顧玉童而委辭 詔申申其明飭
母捷逕以徑造兮 我乃仙而非俗
童辭訖而稱遽 神寤而形覺
尋聲索影却無端 此身猶在塵埃間
不須來往只精神 他時大藥成金丹
輕擧入仙府
仙乎我乎無賓主 學仙之術爲仙朋
與仙作隊同飛昇 爲仙之樂不可勝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의 〈꿈에 선계를 노닌 노래(夢仙謠)〉다. 전 49구의 장편이다. 푸른 바다 저편 거센 파도 출렁이는 그 끝에 적성(赤城)이 솟아 있다. 옥지(玉池)엔 금사(金沙)가, 기수(琪樹)엔 요화(瑤花)가 찬연하다. 그 아래는 허무하여 아무 것도 없다. 위는 백옥경과 은하수에 통한다. 주궁은궐(珠宮銀闕)에는 천년반도(千年蟠桃)와 삼수영지(三秀靈芝), 구포영금(九苞靈禽)과 금색사자가 늘어서 있다. 현정자천(玄井紫泉)엔 교룡이 잠겼고, 처마 모서리에선 공작 비취가 고운 깃을 푸득인다. 그 가운데 옥녀와 여러 신선이 늘어서서 진결과 비급을 읊조린다. 동해바다의 무지개 실을 자아 만든 예의(霓衣)에는 홍광(虹光)의 띠를 둘렀고, 반린채학(班麟彩鶴)은 제멋에 겨워 날고, 백붕(白鵬)을 올라타고 양곡(暘谷)과 약영(若英)을 지나며 마음껏 노닌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선계의 신선들이 영 나를 반기지 않는 눈치다. 속계의 침입자를 경계하는 것이다. 어쩔줄 몰라 쭈볏대자 옥동이 나를 달랜다. 그대는 속인이 아니요, 본래는 이곳에 있던 신선입니다. 그러니 바른 길을 닦아 이곳으로 다시 오십시오. 말을 마치고는 바쁜 일이 있다며 훌쩍 가버리고 만다. 그 말을 듣는데 그만 잠이 깼다. 깨고 보니 방안이다. 찌든 삶의 근심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4
심의(沈義, 1475-?)의 〈꿈 이야기(記夢)〉는 소설이다. 꿈 속에서 그는 문장 왕국에 올라간다. 그것은 꿈 속 신선의 나라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그 왕국은 문학의 재능만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나라다. 현세에서 불우만을 곱씹던 그는 이 왕국에서 당당히 역량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친다. 그러나 꿈은 언젠가 깨게 마련이다. 소설의 마지막 끝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이색(李穡)이 등을 어루만지며 좁은 방으로 나를 데려 갔다. 난탕(蘭湯)에 목욕을 시키더니, 쇠칼로 배를 가르더니 먹물 몇 말을 들이부었다. 그가 말했다. "마땅히 사십여 년을 기다려 다시 이곳에 와 함께 부귀를 누릴 터이니 근심하지 마시오." 배가 둥그렇게 불러왔다. 칼로 찌르듯 아팠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배는 불러 북과 같고, 가물대는 등불은 꺼지려 하고, 병 든 아내는 곁에 누워 끙끙 신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때 아마도 30대의 젊은 나이였던 모양이다. 사십여년 뒤에 다시 만나자는 말은 앞으로 자신이 이 티끌 세상에서 이 만큼은 더 살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진창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는 했지만, 정작 그는 빨리 그 선계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난탕의 향기로운 목욕도 잠깐, 꿈을 깬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속병을 앓아 두둥사니처럼 불러오른 배와 가물대는 등불, 끙끙 신음하는 병든 아내 뿐이었다. 꿈 속의 득의는 정말 한바탕 꿈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둥그렇게 불러오른 배가 사실은 이색이 날더러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쓰라고 넣어준 먹물이라고 자부했다. 이 자부가 읽는 이를 슬프게 한다.
간밤 꿈에 푸른 동자 나를 이끌고
문득 구름 안개 깊은 곳까지 갔네.
선악(仙樂)은 제소(帝所)에서 바람결에 나부끼고
백옥루 열 두 기둥 하늘까지 솟았네.
오색 구름 피어올라 안개인듯 아닌듯
번드쳐 날아오르니 몸은 나부끼는듯.
금지(金支)와 취개(翠盖)는 앞 뒤로 이어 있고
양 옆엔 패옥 두른 신선들 늘어섰네.
나는 상제 앞서 길게 무릎 끓고서
향 살라 삼가 장생편(長生編)을 받으니
한 번 읽어 삼천년을 살 수 있다네.
처마 사이 제비는 재잘거리고
부서진 창 비가 새어 찬 기운 스며드네.
초혼(招魂)함에 무함(巫咸)을 번거롭게 할 것 없네
이 몸은 이렇듯 세간에 있는 것을.
눈 앞 온갖 일들에 머리털만 세려하니
어느 때나 신선 사는 뫼에 깃들꼬.
夜夢靑童引我去 忽到雲霞最深處
仙樂風飄自帝所 玉樓十二高入天
五色靄靄烟非烟 攝身飛上身飄然
金支翠盖相後先 左右環佩羅群仙
余乃長 玉皇前 焚香敬受長生編
一讀可度三千年 間語燕聲
破 透雨寒삼삼 招魂不復煩巫咸
此身兀兀仍世間 眼前萬事頭欲斑
幾時長往巢神山
권필(權 , 1569-1612)의 〈꿈 이야기(記夢)〉다. 11구까지는 선계에 노니는 몽유의 정황을, 12구 이하 끝까지 꿈 깬 뒤의 허전함을 술회했다. 청동(靑童)의 인도를 받아 하늘에 올라 신선들이 늘어선 가운데 옥황상제에게서 《장생편(長生編)》을 받았다. 한번만 읽어도 삼천년을 살 수 있다는 책이다. 막 읽으려는 참에 그만 재잘거리는 제비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백옥루의 웅장함도 늘어선 신선들의 장관도 간 데 없이 고작 깨진 창으로 비가 새어드는 초라한 방 안에 누운 자신이 있을 뿐이다. 세간에서의 뜻같지 않은 삶은 `안전만사(眼前萬事)`, 즉 눈 앞의 온갖 일에 시름겹다. 이러한 몽유란 가슴 속의 무료불평(無聊不平)을 꿈에서나마 마음대로 놀아 해소하고 자기 위안으로 삼으려는 잠재적 욕구의 표현인 셈이다. 현실에서 어찌할 수 없었던 좌절을 꿈에서나마 초극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식이 대부분 엇비슷하다. 그들의 상상은 다분히 도식적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면서 똑 같다. 이러한 상상력의 도식성은 사실 오늘날에도 양태만 다를 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도식성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는 코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5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짓누른다. 하지만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도 열린 세계를 꿈꾼다. 갈등도 없고 모든 것이 조화로 충만한 세계는 현실에는 없다. 인생은 슬프고, 인간은 나약하다.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사람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이다.
그들은 왜 이런 작품들을 남겼을까? 유선시에서 그려지는 선계는 온갖 화려한 색채와 원형적 상징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공간의 묘사는 중국 고대의 신선전설에서 끌어왔다. 거기에 신선과 선녀들이 등장한다. 나는 그 공간 속에 직접 참여하기도, 구경꾼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꿈은 깨게 마련이다. 깨고 나면 찬 현실만 남는다. 그러나 그는 선계의 꿈을 품는다. 희망을 갖는다.
유선시 작가들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선계 유력(遊歷)은 경세(經世)의 포부가 좌절된데 따른 강개지지(慷慨之志)의 표출 또는 방외적 일탈의 자취와 표리의 관계에 놓인다. 암담한 현실에서 상상의 세계를 관념하고 추구함은, 혼탁한 현실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하다. 결국 이들이 낭만적 상상력을 빌어 도달하고자 했던 세계는 궁극의 목표일 수는 없다.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방편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바로 잡아야 할 현실과, 밖으로 내모는 현실 사이의 갈등은 시인의 내면에 커다란 좌절과 패배의 앙금을 남긴다. 현실에 저항하면 좌절만 커지고, 좌절이 커지니 저항감은 더욱 커지는 악순환 속에서 이들은 파국적 대립으로 치닫는 대신, 현실을 이탈하는 유선의 모식을 빌어 상실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회복코자 했던 것이다.
상상은 달콤하다. 노님은 즐겁다. 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위안은 없다. 품은 뜻은 큰데 세상은 그것을 몰라준다. 꿈속에 달려간 선계에서는 날 더러 속인이 아니라 본래 신선의 비범한 자질을 타고 났다고, 그러니 자중하라고 일러준다. 하지만 언젠가 선계로 복귀하리라는 그 꿈, 그 희망은 날조된 것이다. 그래서 유선시의 끝에는 슬픔이 남는다. 그러나 그 꿈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만은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개조는 있을 수가 없다." 김현의 이 말은 바로 유선시의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