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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1) - 양동마을
경주에서 신라가 아닌 조선을 만나다.
경주는 신라의 도읍지이고 경주에 가면 보통 사람들은 신라를 보고 온다. 하지만 경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이 있다. 양동마을은 단일 성씨 집성촌이 아니라 손씨와 이씨 성이 공존하는 마을이라는 고유성과 함께 조선중후기의 촌락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마을이다. 오늘부터 총 4회에 걸쳐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동방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의 삶과 철학에 대해서 집중 조명하는 답사를 해보고자 한다.
먼저 간단하게 양동마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010년 7월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깊은 양반마을이다.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되어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하였다.
1코스(하촌) :안락정→이향정→강학당→심수정(20분 소요) 2코스(물봉골) :무첨당→대성헌→물봉고개→물봉동산→영귀정→설천정사(1시간 소요)
3코스(수졸당) :경산서당→육위정→내곡동산→수졸당→양졸정(30분 소요)
4코스(내곡)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서백당→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5코스(두곡) :두곡고택→영당→동호정(30분 소요)
6코스(향단) :정충비각→향단→관가정→수운정(1시간 소요)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재산 상속에서 나눈 기록)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마을의 유래
양동민속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청동기 시대 묘제(墓制)의 하나인 석관묘(石棺墓)가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산 정상의 구릉지에 100여기나 있었다는 고고학자들의 보고로 보아 기원전(B.C. 4세기 이전)에 사람의 거주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또 이웃 마을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확인할 만한 자료는 없다.
경북 지방 고문서집성(영남대 발간)에 의하면 여강 이씨(驪江 또는 驪州 李氏)인 이광호(李光浩)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으며, 그의 손서(孫壻)가 된 풍덕 류씨(豊德 柳氏) 류복하(柳復河)가 처가에 들어와 살았고, 이어서 양민공(襄敏公) 손소공이 540여년 전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결혼한 후 청송 안덕에서 처가인 양동으로 이주하여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곳에서 살게 되었고, 후에 공신이 되어 고관의 반열에 올랐다.
또,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생원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이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결혼하여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고 이들의 맏아들이자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되었다.
양동민속마을이 외손마을이라 불리는 것도 이러한 연유이며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실제 남자가 처가를 따라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풍덕 류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손소 선생 결혼해 처가가 있는 양동마을에 들어오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곳은 여강이씨의 집성촌에 손소 선생이 결혼해서 들어와 살게 되면서 손씨와 이씨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그럼 손소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손소영정
1433년(세종 15)∼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아버지는 증병조참판 손사성(孫士晟)이다.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고, 승정원 집현전의 후신인 예문관의 겸예문관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기도 하며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 11월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는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어서, 그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여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그의 노부를 봉양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손소의 집안이 처가에 기댈 정도로 몰락한 양반가였거나 하지는 않은 듯하다. 경주에 본관을 둔 꾸준히 벼슬을 하며 세조 때 등용되어 차근차근 승진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아 외관직의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남자가 처가에 얹혀사는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 그리 흠이되는 일은 아니었나 보다.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하랴는 속담과 같이 처가살이가 곤욕스런 일이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란 것이다.
여하튼 처가가 있는 양동마을에 들어와 살게 된 손소는 이 양동마을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곳에 집을 짓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양동마을의 서백당이다. 우선 서백당에 가보도록 하자.
서백당을 중심으로 마을지도의 제4코스 또는 내곡코스로 불리우는 코스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마을을 품고 있는 산 설창산 아래 자리잡은 양동마을에서 비교적 높은 지대의 코스를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4코스(내곡)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서백당→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안동 하회마을은 물돌이 마을이란 이름처럼 물이 돌아나가는 지대에 형성되어 있어 비교적 높낮이가 크게 차이나지 않으며 마을 전체가 개방적이면서 집과 집의 대문이 마주보지 않는 식으로 배치되어 친족끼리도 사생활은 보호해주려 애를 쓴 반면 양동마을은 네개의 큰 구획으로 나누어지며 지대의 높낮이 차이도 꽤 있는 편이며 폐쇄형으로 바깥에서 안쪽이 잘 안보이는 집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근암고택
정조 4년에 이정수가 세운 집이며 그 4대손인 이희구의 호인 근암을 따 근암고택으로 바꿔 부르는 집이며 사랑채가 안채 담밖으로 떼어놓아 중부지방이나 호남지방에서도 보기 드문 배치방식으로 꾸몄다. 이는 집주인의 전통 남녀유별 사상이나 생활관이 작용한 결과로 짐작하는데 방 2칸과 대청 1칸의 작은 크기로 간소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소박하고 간소하게 지은 집으로 주거 공간의 기능에 따라 구성을 달리 배열한 특색있는 변화를 보이고 있어 가치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상춘헌
조선 영조 6년(1730)경에 지었다고 하며, 양동마을에서 일반적인 튼 'ㅁ'자형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의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의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안마당에서 볼 때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툇마루를 둔 건넌방, 왼쪽 끝칸에 안방, 안방 밑으로 부엌을 둔 'ㄱ'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보통 부엌을 두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놓은 점인데 이는 중부지방 민가의 일반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다.
사호당
이 집은 사호당 이능승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사호당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헌종 6년(1840)에 지었으며 일반적인 'ㅁ'자 기본 평면을 가진 양반집이다.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ㄷ'자형 안채에 '一'자형 행랑채가 놓여 'ㅁ'자형을 이루고, '一'자형 사랑채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다음은 내곡코스의 중심이며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잘 알려진 서백당이다. 양동마을에서 이택원 가옥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살림집 서백당
서백당은 양민공 손소(孫昭)가 1454년(성종 15)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書百堂)이라고도 한다. 손소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孫仲暾)과 외손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李彦迪)이 태어난 곳이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집의 안채가 있고, 사랑 뒷마당에는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문간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의 홑처마 기와 맞배지붕이며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몸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집 평면으로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납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 역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두리기둥 4개로 처리하였다. 특히 안방과 건넌방의 귓기둥과 측면 제2기둥에 각각 두리기둥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정원에는 경상북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건축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있다.
서백당은 사랑채의 편액이며 송첨이라 쓰인 편액도 보인다. 대청의 난간이 참 인상적이다. 서백당의 서백이란 참을 인자 100번을 쓰면서 인내를 배운다는 뜻으로 최근에 지어진 당호라고 한다. 현재는 손소의 19대손인 손중만씨의 소유이다. 서백당은 건축연대가 양동마을의 모든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그 가치가 크며 대문채에서 한단을 높여 지은 사랑채가 특징이다.
낙선당
월성손씨(月城孫氏)의 종가인 손동만(孫東滿) 가옥의 북측 산중턱에 있다. 서향집으로, 대문채·사랑채·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낙선당 손종로 선생의 호를 따라 지어진 당호이며 손종로 선생의 집이다.
건축연대는 1540년경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언덕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대문채와 마주하는데, 대문채는 중앙에 대문을 두고 좌측에 마구간, 우측에 1칸 행랑방을 두고 있다.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좌측으로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곳간채가 있고, 우측 끝에 방1칸을 들였다.
낙선이란 착함을 즐긴다는 것이며 세조충효라는 편액은 굳이 해석하자면 충효를 세상의 담쟁이처럼 덮는다는 뜻으로 충과 효를 숭상하는 유교 양반가의 정신이 잘 드러나는 편액이라 하겠다.
이 건물은 철종11년 창은 이남상공이 지은 집으로 건축학자들의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집이다. 이남상공의 아들 이재교란 분이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대원군에게 만인소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남의 가옥배치를 가졌으나 방의 용도가 특이하게 배치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며 조선 말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정사는 정신을 수양하는 집 학문을 닦고 베푸는 곳의 의미를 가진 말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당호로 많이 사용되었고 회재 이언적의 독락당도 옥산정사란 이름이 붙어 옥산이란 자신의 호에 정사를 붙여 학문을 갈고 닦고 정신을 수양하는 주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당호라 할 수 있다.
내곡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인 유학자 내곡(內谷) 이재교(李在嶠:1822∼1890)가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1905년에 건립한 정자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설창산(雪倉山) 기슭에 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뒤쪽 중앙에 방을 덧달아 전체적으로 T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건물 앞쪽은 2층 누각 형태이나 뒤쪽은 높은 지대와 연결되어 마루로 바로 통하게 설계되었다. 전면과 측면이 계자난간으로 막혀 있어 뒤쪽으로 출입구를 내었으며, 빗물이 담 밖으로 흘러나가도록 건물을 빙 둘러 물길을 조성하였다.
4코스를 돌아보았다면 이 양동마을이 1450년대부터 1905년대까지 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관리되고 조성되어 온 마을임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초부터 조선말까지 조선의 가옥 건축 양식의 변화와 집주인이 가옥에 담으려는 정신에 따라 다양한 변화와 짜임새 그리고 지은 사람의 공간관이 다양하게 보여진다는 것이 양동마을을 둘러보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곡정에서는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 자락의 밑에서 펼쳐져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양동마을에는 식당이나 다리쉼을 하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많지는 않은데 양동마을에 갔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면 미리 우향다옥이란 곳에 민박과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밥을 해먹어도 좋겠지만 귀찮다면 우향다옥에서 식사를 하고 배를 채운 후 양동마을을 계속 돌아보도록 하자. 저녁에 이 집에서 막걸리를 받아 시켜놓고 동행한 사람들과 어스름이 내린 저녁에 술 한잔하는 것도 참 좋을 듯하다. 예전에 하회마을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전에는 한적한 겨울의 낭만이 있어 2만5천원 정도로 막걸리를 먹으면 방 하나를 내주는 술집이 있어 매우 좋았던 기억이 있다. 요샌 그런 정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게 참 아쉽다.
점심을 먹었다면 이제 또 부지런히 5코스와 6코스를 돌아보도록 하자.
두곡고택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6대손 이시중의 분문가(分門家)로서 1773년(영조 49)경에 건축되었으며, 그후 다른 분문인 이조원(李祖源)이 매가하여 천석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주인 이희태(李熙太)는 이조원의 손자이다.
넓은 대지를 토석담장으로 둘러싸고 ㄱ자형 평면구성인 안채와 一자형 평면구성인 사랑채·아래채가 어우러져 튼口자형으로 배치되었다. 뒤쪽으로 행랑채와 방앗간채가 1채씩 있고, 앞쪽으로는 대문간채가 있는데, 그 안쪽에 마구간이 있다. 안채만 ㄱ자형 평면구성이고, 나머지는 모두 一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당
조선 선조 때 하양(河陽) 현감을 지낸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의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향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1636년경 경상북도 경주시 양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 건립되었다. 이의잠의 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양 주민들이 바친 영정을 지역 유림에서 봉안해오다가 경주 유림으로 넘기면서 영당을 건립하여 안치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에는 삼문(三門)을 세우고 주위로 토석 담장을 둘렀다. 매년 중양절(重陽節:음력 9월 9일)에 추모제를 지낸다.
동호정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4대손 수졸당(守拙堂) 이의잠(李宜潛)을 추모하기 위하여 1844년(철종 5)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동쪽 산 중턱에 있다. 전면 4칸·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양쪽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기단은 자연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네모나게 다듬은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현재 당내에는 후손 이능윤(李能允)의 '동호정기(東湖亭記)'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이제 6코스를 따라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 안계천변을 따라서 있는 건물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정충비각
손종로의 후손 손영호가 소유, 관리한다. 낙선당 손종로는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고 남포현감을 지냈다. 1636년(인조 10) 병자호란 때 종군하여 경기도 이천의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그를 수행한 충직한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했다. 전사한 뒤 시체를 찾지 못해 의관으로 초혼장을 지냈다.
이 비각은 1783년(정조 7) 손종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왕이 명령을 내려 세운 비각이다.
향단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때인 1540년에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손씨 대종가인 관가정(보물 442)이 같은 양동리에 세워지자 이에 외척의 입지를 마련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향단은 99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고 현재는 56칸의 단층 기와지붕이다. 전면의 한층 낮은 곳에 동서로 길게 9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후면에 행랑채와 병행시켜 같은 규모의 본채가 있다. 그 중앙과 좌우 양단을 각각 이어서 방으로 연결하여, 전체 건물이 마치 ‘日’자를 옆으로 한 것 같은 평면이다. 따라서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한 몸체로 이루어진 2개의 마당을 가진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의 사대부가 99칸의 한계를 가진 것은 오직 임금만이 100칸 이상의 궁궐을 지을 수 있다는 원칙을 정하고 그를 지켰기 때문이다.
내부는 온돌방과 마루를 서로 번갈아 배치하였으며 동단에 큰 대청이 있고 서단에는 곳간, 중앙에 제일 큰 온돌방을 두었다.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대문간은 앞채의 동쪽에서 세번째 칸에 마련하였으며 중앙의 큰 온돌방 북쪽에는 좁은 통로가 있어 이곳을 거쳐 그 안에 있는 마당에 들어간다. 사대부가의 격식과 품격을 갖추면서, 주거문화의 합리화를 꾀한 공간구성을 보이는 주택이다.
향단은 공간을 넓게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 효율적으로 공간을 활용하려한 독특한 구조로 양동마을에서 가장 건축학적 연구의 가치가 높은 가옥으로 유명하다. 특히 아기자기하게 공간을 활용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므로 오랜 시간 머물면서 그 독특함을 즐기면 좋을 듯하다.
특히 회재가 직접 지은 건물로서 회재의 정신 사상과 공간에 대한 합리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어 회재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가옥이라 할 수 있다.
관가정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관리로서 중종 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손소의 아들 손중돈은 조카가 되는 회재 이언적과 함께 양동마을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로 꼽히는 인물이니 이 집도 양동마을에서는 아주 중요한 집이라 할 수 있겠다.
언덕에 자리잡은 건물들의 배치는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가운데의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담으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둘러 막아, 집의 앞쪽을 탁 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보통 대문은 행랑채와 연결되지만, 이 집은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대문의 왼쪽에 사랑방과 마루가 있다. 마루는 앞면이 트여있는 누마루로 ‘관가정(觀稼亭)’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문의 오른쪽에는 온돌방, 부엌, 작은방들을 두었고 그 앞에 ㄷ자로 꺾이는 안채가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살림을 하는 공간으로, 부엌, 안방, 큰 대청마루, 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이 된다.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뒤쪽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워 조금은 웅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랑방과 누마루 주변으로는 난간을 돌렸고,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 지붕으로 이어져 있다.
관가정은 조선 중기의 남부지방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수운정
이 정자는 서쪽 산정에 서남쪽으로 안강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는데, 1582년(선조 15) 손재취(孫齋萃)가 세웠다고 한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서측에서부터 대청 4칸, 방 2칸을 두고,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의 사랑방 뒤 모서리와 90°로 꺾인 곳에 작은문을 두고, 이의 북쪽으로 마루방 1칸과 행랑방 1칸으로 이루어진 행랑채를 두었는데, 이곳에서 정자생활의 뒷바라지를 한다.
이 정자는 임진왜란 때 태조의 쉬용영상을 가져와 잠시 모셨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안강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평민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는 양반들의 시선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녁 노을이 지는 무렵이나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는 이 수운정등의 방향에서 안강평야를 바라보면 그 풍광이 오감을 만족시키더라는 지인 위혜진 선생님의 감회를 여러분도 꼭 느껴보시기를 ㅋㅋ
다음 시간에는 양동마을에 남아 있는 회재 이언적의 흔적을 중심으로 양동마을의 나머지 가보지 못한 곳을 둘러보며 양동마을 기행을 마무리하도록 한다.
-- 다음에 계속
출처-http://theplace2012.tistory.com/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