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날갯짓에 폭풍이 이는 까닭(송광사 여름수련회 수행기 10)
종무소에서 받은 하얀 고무신은 구두에 비해 헐렁하여 처음에는 걷기가 불편했지만 점점 내딛는 한발 한발이 안정되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도 좋아졌다. 고무신 얇은 밑창을 통하여 땅의 모양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검정 고무신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고무신은 신발과 슬리퍼의 역할을 함께 해 주니 합숙 생활에는 더욱 편리했다. 고무신을 신은 채 발을 씻고 나와 바닥에 괸 물을 탈탈 털어 섬돌 위에 거꾸로 놓아두면 고무신은 밤새 순결해진듯 하얗게 말라 있었다. 고무신은 새벽 종소리에 맑아진 나의 육신을 때묻지 않게 실어가는 한 쌍의 돛단배였다.
고무신의 이마에는 'ㅇ', '# ', '송' '♀' 등 비표가 그려져 있었다. 내가 받은 고무신에는 '고'라는 표시가 있었다. 그 고무신을 맨 처음 신은 사람이 고무신을 발견한 기쁨을 '고'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영어로도 읽혀져 '나아가라'고 독려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나도 모르게 '미스 고'가 떠올라, 성이 고 씨인 도반이 자기 흔적을 남기려고 기입해 두었다고 마무리 했다. 아무튼 '고'는 수련장 밖에서 내가 나의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표시였다. 나는 그 고무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수련기간 중의 내 분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수련장인 사자루, 예불장소인 대웅전, 숙소인 대지전 등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갈 때는 고무신을 가지런히 놓거나 신발장에 넣어야 했는데 나올 때 자기 것을 찾는 데는 이 비표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20 명의 수련생들이 한꺼번에 나가고 들어가기 때문에 비표만으로 자기 고무신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꼭 자기가 고무신을 놓아둔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해 두어야 했다.
사자루에는 7 개의 신발장이 있었는데, 각 반 번호 순으로 배치된 각자 자리로 가기에 편리한 위치에 반과 번호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래서 고무신을 신발장 제 자리에 넣고는 곧바로 자기 자리로 갈 수 있었고 나올 때도 자기 고무신을 쉽게 꺼낼 수 있었다. 나는 고무신을 넣고 꺼내는 일이 일사불란 하게 이루어지는 걸 보며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 과정이 어느 순간 어그러질 것 같은 불안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틀 째 아침이었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사자루로 돌아와 보니 신발장 내 자리에 다른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그 고무신을 옆으로 밀어두고 나의 고무신을 넣었다. 휴식시간에 나와 보니 밀어 놓았던 고무신은 없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다시 그 고무신이 내 자리에 놓여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대웅전으로 옮겨 가기 위해 신발장으로 갔는데 결국 이번에는 나의 고무신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현기증이 돌았다. 도반들이 계속 몰려나왔다. 신발장 앞에서 마냥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맨발로 대웅전까지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사정을 알리려 해도 묵언이니 무슨 말을 할 수 없었고, 지도법사께 필담으로 사정을 알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분란을 더욱 크게 일으키는 것이라 판단했다.
누군가가 자기 고무신을 두고는 나의 신발을 잘못 신고 갔을 것이다. 그 사람의 고무신을 찾아내어 내가 신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조치였다. 그러면 그와 나, 단 두 사람만 불편함을 감내하면 된다. 그러나 내가 그의 고무신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머뭇거리고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니 나는 그 상황에서 가능한 유일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옆 신발장에서 내 발에 맞을 것 같은 고무신을 꺼냈다. 손발이 떨렸다. 그것은 사라진 나의 고무신보다 작아서 발에 꽉 죄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면서 내가 신고있는 그 고무신의 주인이 툇마루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조금 전 내가 했던 고민을 지금 똑같이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곧 나와 같은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하였다. 나는 '고'라는 비표가 있는 나의 고무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고무신이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하며 걱정하기도 했다. 아무리 사소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내가 부여하는 의미가 커질수록 그 대상에 얽매이는 정도도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 고무신을 신고 간 그 도반은 내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나의 고무신을 신고 갔던 것일까?.
그것은 도미노 현상과 같았다. 빠른 속도로 고무신은 바뀌어져 갔다. 내가 다시 바꿔 신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몰랐다. 그 끝없는 바꿔치기를 그치게 하려면 누군가가 한나절만 맨발로 다니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바꿔치기에 가속도가 붙어 마침내 지도법사의 신발이 없어진 것은 내가 고무신을 잃어버린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혼란의 시작은 한 사람의 고의나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120 짝의 고무신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만들었다. 여기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지구 저쪽에서 폭풍이 일어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연기와 인연의 고리가 그 위력을 보여준 것일 테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차 없이 얽매이게 되는 고리. 그것이 당혹감을 주어 남을 불안하게 만드는 나쁜 인연의 고리라면 끊어 주어야 하리니,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로 걸어가는 성인을 기다려야 할까? 그것이 사소한 집착에서라도 벗어나게 해 주는 좋은 인연의 고리라면, 백 명 모든 도반들이 아무 고무신이라 닥치는 대로 신게 하여, 어떤 때는 꽉 죄는 고무신 때문에 물집이 생기도록 하고, 또 어떤 때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고무신이 벗겨져 다시 신느라 허겁지겁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그래야만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부터도 해방되는 것일까? 사라진 고무신은 이래저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첫댓글 원봉 거사님, 이 글은 전에 어디에 게재하신 것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신발 하나에도 섬세한 사유를 하시고 거기에 담긴 연기의 도리를 읽어내는 원봉 거사님이 당시에 이글을 읽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 옵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할 것 같은 신발 신기가 이러할진대 우리가 의식 못하는 수많은 일들이 이렇게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신비롭기도 하고 전율까지 느끼게 됩니다. 한 점 어김 없는 연기의 법칙을 신발 법문으로 예리하게 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