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외교통상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세종 시대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를 선정하였다. 이예의 가장 두드러진 공적 중의 하나는 조선 건국 초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 있어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 이예에 대해 살펴보자. | |
조일 통교의 근간이 된 ‘계해약조’ 체결
조선왕록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 시대 60년간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간에는 총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계해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444년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년)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긴밀한 대일 외교의 결과였으며, 대일 외교의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다. 그는 43년간 외교관으로서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 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기여했다. 또한,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사수할 수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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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의 초상화. <출처 : 충숙공이예선양회> | |
충·효·애의 마음을 가진 인물, 진정한 외교관으로 거듭나기까지
이예는 나라에 대한 충(忠)과 어머니에 대한 효(孝), 그리고 국민에 대한 사랑(愛)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 진정한 외교관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예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43년 동안 지략과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귀환시켰다. 8세에 왜구에 의해 어머니를 납치당한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닌 그는 고려 말부터 횡행했던 왜구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낯선 섬나라에서 고생하는 국민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 |
울산문화예술회관 뒤편에 위치한 '충숙공 이예 선생' 동상. <출처: 충숙공이예선양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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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 출신이다. 1396년 왜구에 붙잡혀간 자신의 군수를 구하기 위해 자진하여 대마도까지 잡혀간 후, 결국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신분을 올려주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군수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왜구의 배에 올라탄 일이 외교관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예는 이후로 40여 차례가 넘게 교토, 큐슈,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었는데, 71세의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할 만큼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 |
전문지식, 탁월한 언어 능력과 협상력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능력 및 협상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지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란 곧 국제 관계를 지휘하는 지략이다.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지략을 통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예가 1401년에 50명, 이후 1410년까지 매년 일본을 왕래하며 500여 명, 1416년 40여 명 등 15차례에 걸쳐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킨 사례는 대일외교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그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1 통신사 행렬도. 현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행렬도는 일본인이 그린 작품이 다수이다. <출처 : 유종현 역, [조선통신사 이야기]. 원작은 일본 대마시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소장 [조선통신사행렬도 두루마리 그림].>
- 2 통신사의 길고긴 행로. 조선 전기에는 일본 막부의 쇼군이 교토에 있었으므로 통신사가 교토까지 파견되었고, 후기에는 쇼군이 있는 에도(지금의 동경)와 닛꼬까지 파견되었다. <출처 : [마음의 교류 조선통신사 - 에도시대로부터 21세기에 보내는 메시지]>
이예는 쉽게 말해 조선의 ‘일본통’이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아프리카나 이라크 같이 험지라 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아시아 외교의 변방이었던 유구(오끼나와)와 일기도(이끼) 등에도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 도입을 건의하고 우리의 대장경 및 불경 보급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 일본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등 문화외교에도 앞장섰다.
조선초 일본에 대해 이예만큼 잘 아는 인물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기도와 대마도의 정세(情勢)와 병세(兵勢), 일본 선박이나 문물의 장점, 문인제도, 대일 통교 정책까지, 이예가 얼마나 일본에 대해 통달한 사람인지 상세히 알 수 있다. 1426년 세종이 54세의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독보적 대일 외교통이었다. | |
국제 외교와 외교관으로서의 표본
세계화 시대에 외교가 무엇이고 외교관은 어떠한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이예의 일생과 그의 업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익을 도모하는 일이라면 ‘예(藝)’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함으로써 대일관계 안정화에 공헌한 이예는 오늘날 외교의 정도와 외교관의 자질에 대해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그를 2010년 외교 인물로 선정한 것도 애국심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공직자의 모범으로 삼기 위함일 것이다. | |
참고문헌 : 이명훈 엮음, 2005 [李藝의 사명, “나는 조선의 통신사로소이다”]
한일관계사학회 편, 2006 [통신사 李藝와 한일관계』
첫댓글 귀한 자료를 찾아 퍼 왔네요.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