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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빈민과 부랑인에 대한 선교적 과제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신학대학원
한국지역연구과정
김 홍 술
감사의 말씀
불혹의 나이를 넘어 다소 늦은 감이 있으나, 내 손으로 논문 한편을 내 놓는다는 일이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부산 지방에서도 이름 없는 군소 신학을 졸업한 내게, 다시금 학문의 길을 열어주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 주시며 인도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놀랍기만 하다.
이렇게 한편의 논문을 매듭짓고 뒤를 돌아보니, 오늘의 이 결실이 있기까지 잊을 수 없는 두 분이 먼저 떠오른다. 20대 후반에 만나 신학적 눈을 뜨게 해 주시고 신학의 깊이를 느끼게 해 주신 김 치영 목사님이 계셨고, 30대 후반에 만나 사제의 벽을 헐고 마음과 지성을 열며 신학의 넓이를 알게 해 주신 김 용복 총장님이 계셨다. 두 분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존경과 감사를 길이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논문의 자료를 협조해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부산대학교의 윤 일성 교수님과, 한국 도시 연구소의 서 종균 연구원께 감사한다. 평소 부산 지역 사회에서 사회복지 분야에 교분을 가지면서 애정 어린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부산대학교의 류 기형 교수님과 신라대학교의 박 광준 교수님, 부산광역시 정책개발실 연구원 초 의수 박사님께 감사한 마음 또한 잊지 않는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이나 지연되던 논문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지도해 주신 이 남섭 교수님께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하고 싶다. 마지막 정리 단계에 사제의 옛 정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신 박 희영 목사님과, 본 연구자의 손발이 되면서도 불평하나 없이 컴퓨터 작업을 끝내 준 아내에게 무어라 고맙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작은 결실을 하나님과 홀로 계시는 나의 어머님, 그리고 앞서 가신 아버님의 영전에 드리고 싶으며, 나와 함께 공동 생활하는 부랑인 형제들과 이 땅의 가난과 절망의 짐을 지고 가는 뭇 형제들을 위하여 남기고 싶다.
1998년 1월
멧샘 김 홍 술
논문개요
세계의 도시 인구 비율은 1950년 29%에서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45%를 넘어섰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2025년쯤에는 65%의 인구가 도시에 밀집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도시화는 제3세계, 특히 우리 나라에 있어서 산업화 정책에 의한 농촌 피폐와 이농의 결과로 촉진되었고, 이것은 급기야 도시빈민을 구조적으로 생산해 내는 원인으로 제공되었다.
도시빈민은 자기 생존을 지키기 위해 저항과 투쟁에 점철된 역사를 이어왔으나, 식민 자본주의와 빈익빈 부익부 사회계급 질서에서 끝내 생산의욕과 사회적응력을 잃게 된다. 따라서 일부 도시빈민 계층은 실업, 가정파탄, 알코올 중독 등의 수순을 밟으며 마침내 '부랑인'이란 룸펜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국가적 정책은 아직도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요 보호자 개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부랑인은 우리사회의 사회 경제적 요인과 이에 연루한 가정과 인격의 파탄으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부랑인은 사회구조적 생산물이며 우리사회가 배태한 탈락 계급이기 때문에, 국가는 사회 보장적 책임과 의무를 진다 하겠다.
부랑인에 대한 현행 복지 법률이 없는 가운데, 정부의 일개 부처의 훈령 하나로 우리 나라의 부랑인 시설 보호 사업은 시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알맹이 없는 껍데기라 할 수밖에 없다. 한때 초법적 단속, 수용으로 인한 인권 문제가 제기된 이후, 지금은 그저 보호사업에만 머물 뿐이다. 현행 사회복지 사업법에 준한 부랑인 보호 시설들은 인간성 및 인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정황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부랑인들이 다른 여러 시설(특히 정신 질환자 요양시설이나 정신병원)에 대거 입원되어 있고, 정신의학적 치료와 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거의 아무런 효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사회일각에서는 소규모 비법정시설을 운영하면서, 대체 가정 역할과 사회복귀 준비 등 생기있게 소외자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곳들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본 연구자가 지난 8년간의 부랑인 관련 사업과 4년간 운영했던 '부활의 집'(비법정시설)은, 그 중의 한 표본으로서 제시하고자 하는 한 대안이다. 시설장인 본 연구자는 공동생활에 함께 참여하면서 지난 4년간 이곳을 운영해 온 결과, 교회를 찾아 오는 부랑인들에게 응답해야 할 신학적 의의와 사회 복지적 선교과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곧 한국교회의 21세기 선교적 비젼 중 가난한 자와 소외 받는 자에 대한 사회복지 선교의 한 가닥이 그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부랑인에 대한 구체적 선교대안은 바로 공동체적 대체가정을 통하여, 인권과 재활과 신앙 이 세 가지의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다. 세계를 휩쓰는 무한 경쟁적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가난한 자를 향한 복음의 영성만이 사회보장 구현에 대한 참된 희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ABSTRACT
A Missionary Task for the Impoverished and the Homeless
in Pusan Area
by
Kim Hong-Sool
The rate of urban population in the world has increased from 29%(1950) to 45%(1990). It is now expected that about 65% of the world population will center around urban area in 2025. In particular, the urbanization in the third world countries including Korea has been prompted by industrial policies, devastating rural villages and producing an increasing number of poor urban dwellers. This group of poor urban dwellers has been denigrated as social outcasts as they were deprived of their economic ground and social stability in the midst of the current colonizing capitalism and unequal social hierarchy. Consequently, they suffered from unemployment, alcohol addiction, impoverishment, and family dissolution. The national policies for them, however, do not go beyond the superficial level on which they are recognized as the chief target to be watched over.
The social outcasts are produced by the disintegration of one's personal life and family life, as well as by unfair social structure. Since they are dropped off from the center of our society, they are to be protected on the national level. But no legal protection is granted for the sake of those people. Only arbitrary governmental order is all in practice. This system is like a husk without kernel. Once the issues on human right have been raised for them, the government has sought to protect them passively without being able to restore their humanity and social relationship. To make it worse, many of them are guarded in ill-conditioned mental health care centers and rehabilitation centers, yet their rehabilitation programs turn out unproductive.
In this midst, there came to be an increasing number of voluntary groups to manage rehabilitation programs with a view to caring for the alienated social outcasts in a community life, in order that they restore their family role and social role. The 'House of Resurrection' which I managed for the past four years with eight years of program coordination is one of the examples in this regard. Out of my experiences, I could realize anew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and missionary task of social welfare in response to their need. I am now confident that the diakonia mission for the social outcasts and the poor is the major part of the mission in the Korean church in face of the 21st century. The practical alternative plan proposed in this thesis is to nourish their faith, to improve their human right, and to prompt their rehabilitation. The gospel for the poor is now more urgent as a hope for healthy social welfare since the whole globe has been turning into a big market with limitless competition.
Ⅰ.서론: 문제의 제기, 연구방법 및 한계
1. 도시화와 도시빈민
세계 인구의 56억중 22억이 도시에 몰려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도시 인구의 비율은 서구라파 72%, 남미 69%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32%를 넘어서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서구 문명화와 비례하며, 도시의 인구 증가에 따라 문제 중 빈곤, 주택난, 범죄, 교통, 인권, 여성, 어린이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도시빈민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10억, 그리고 지난 1993년에는 13억의 사람들이 제3세계의 슬럼과 스커트(skirt;변두리)로 몰려들었다. 현재 개발도상국 도시인구의 3/4정도는 슬럼과 판자촌에 밀집되어 있다.
1960년대 초 남한 인구의 70%는 농민이었다. 한국 사회의 공업화(근대화)는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결과를 빚었고, 30여년이 지난 현재는 남한인구의 70%가 오히려 도시인구가 되었다. 신흥 군부 정권에 의한 경제 개발 계획으로 한국경제는 파행적이지만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1980년대「88서울 올림픽」을 겨냥하면서 서울과 수도권 도시빈민에 대한 대대적인 재개발이 실시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도시빈민의 생존권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빈부 계층간 갈등의 폭을 심화시켰다. 한편, 부산의 경우 6·25 한국 전쟁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의 판자촌, 슬럼 등이 그대로 40여년간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고, 도시계획과 재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인구의 도시집중화로 거의 10배가 넘는 거대도시가 되어 버렸다. 부산은 현재 전국 최대의 불량 주택 보유율을 갖고 있으며, 최근 인구 현황도 포화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시빈민은 거의 대부분 타향인이고 직업별로 보면 생산직이나 사무직 노동자보다 오히려 날품팔이, 노점상, 행상, 막노동, 청소부, 가정부, 무직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도시의 높은 생활물가와 주거비, 교육비, 문화적 차등으로 인한 열등의식, 피해의식 속에서 생활의 여유와 보람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가정파괴의 요인이 늘 도사리고 있으며, 삶에 대한 애착이 붕괴되면서 쉽게 타락하기도 한다. 또한 동일한 도시문화권에서 사치 향락을 즐기는 중산층 및 부유 계층에 대한 저항의식도 적지 않게 축적된다.
부산을 포함한 전국 6대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의 60%가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는 영세민인데, 60년대와 70년대에 비해 80년대 이후부터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의 발전을 추구하는 의욕이 현저히 감퇴되었다.
2. 부랑인의 생성과 진화
부랑인은 후기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발생하였다. 산업사회는 도시팽창을 불러왔고 도시팽창에는 반드시 도시빈민 계층의 증가가 따랐다. 부랑인은 도시빈민 계층이 사회적응에 대한 의욕이 좌절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산업사회가 시장자본주의 사회로 질주하는 도시에서 발생하는 부랑인은, 사회구조적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산해 내는 산물이다. 김범수도 부랑인의 발생원인을 사회병리적 요인, 급격한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가정기능의 약화 및 파탄 등으로 보았다. 선진국에서는 부랑인 발생에 대한 원인 규명과 대책 및 예방사업을 실시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성장이 일어날 무렵인 1970년대부터 부랑인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물론 일제시대나 해방 후 또는 한국 전쟁 이후에도 걸인 등은 많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관점에서 보는 부랑인의 범주로는 적절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부랑인 복지 시초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민간자선사업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에는 정부관리의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1970년대까지는「노숙자 보호소」를 마련하여 숙식만 제공하는 사업이었으나, 1981년에 와서는 정부가 부랑인에 대한 적극적 실태조사 및 대책을 세우게 된다. 이때 중점적인 정책은 시설을 확충하여 시설부족을 해소하고,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분리하여 전문영역별로 시설화 하고, 자활촉진사업을 적극 실시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다. 또한 부랑인 시설의 운영을 민간기관에 위탁하며, 단속 및 예방을 위한 행정체제의 합리화를 꾀하였다.
3. 부랑인의 정의
부랑인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민중서관이 발행한 국어사전에 의하면 부랑인은 "일정한 주소나 생업이 없이 빈둥빈둥 놀면서 난봉짓이나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 이라고 설명되어 있고, 동아출판사가 간행한 국어사전에는 "부랑자" 로 수록되어 있는데,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난봉이나 부리는 사람" 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편, 내무부 훈령 410호에서는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하여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을 말한다." 라고 정의 되어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자기모순으로 배태한 걸인, 빈곤자, 부랑인 등은 사회보장에 의하여 보호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기 흉한 존재, 거리의 미관을 해치는 존재, 따라서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하여 단속해야 하는 존재로 천시하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준다. 결국 이 지침은 1987년도 1월 16일 부산 '형제 복지원' 과 대전 '성지원' 사건 이후, 보건 복지부가 부랑인 업무를 주관하면서 폐지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지침으로서 부랑인이란,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무의무탁한 사람 또는 연고자가 있어도 가정보호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리를 방황하면서 시민에게 위해와 혐오감을 주는 등 건전한 사회질서의 유지를 곤란하게 할 뿐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결함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활동능력이 결여된 정신질환자, 알코올 중독자, 걸인, 앵벌이, 18세 미만의 부랑아, 불구 폐질자 등을 대상으로 한다." 고 발표하였다.
영어에서는 부랑인을 Vagabond, Wanderer, Hobo, Homeless, Street people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주로 Homeless로 사용하고 있는데, '무주택자' 와 '가정을 잃어 버린 자'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랑인도 국가나 사회의 보장과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 정부의 관점은 부랑인을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어지럽힐 우려가 있는 자로 취급함으로써, 복지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통제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학계에서는 조심스럽게나마 복지대상이나 국민적 권리자로 주장하는 일도 없지 않다. 이윤구는 부랑인을 "생활수단과 생활공간을 포함한 살 권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면서 구걸하거나 탈선행위를 하게 되는 사회보호 대상자" 로 말하고, 차흥봉은 "일정한 주거나 생업수단이 없이 상당한 기간동안 거리를 배회하며 구걸을 하거나 노숙하는 자" 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부랑인에 대한 정의와 개념에 대해, 정부와 학계가 이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백종만은 '부랑자'가 영미권의 Homeless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같이 '사회구조의 희생자' 라는 관점을 반영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백종만은 부랑인의 부정적 특성 예컨대 의타성, 무계획성, 욕구 불만, 열등감, 반사회적 언동등은 부랑생활의 결과로 획득된 속성들로, 부랑인들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성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백종만은 부랑인은 복지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할 때 인식해야 할 것은, 그들의 부정적인 속성들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성장과 발전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회복하는 재활(Rehabilitation)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부랑인이란 용어 대신에 "안식처를 잃은 사람들" 이란 용어로 대체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부에서는 최근 부랑인의 발생요인을 사회구조적 요인에서 찾고있다. 우리나라의 정부도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복지사회를 함께 누려야 할 주체의 하나로 부랑인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시장자본주의가 강화되는 21세기를 앞둔 시점에서, 경쟁사회로부터 낙오된 부랑인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스스로 안고 해결해 나가야 할 중요한 사회복지 주체이다.
4. 문제의 제기와 가설
도시빈민의 최후 종착역이요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자로 규정되어야 할 부랑인이 사회의 암적 존재로 취급된 것은 그역사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많은 실업자 중 부랑인들이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1662년에 이르러서는 이른바「정주법」을 제정하여 신체 건강한 부랑인을 합법적 여행자들과는 엄격히 구별해, 부랑인 발생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억압과 탄압정책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그 이후 서방 선진국들은 점진적으로 부랑인에 관한 사회보장 정책을 연구, 시행하였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통제의 대상이요 보호하고 지도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소수의 뜻있는 학자들이 정부나 사회에 대해 조심스럽게 대안을 제시해 보지만, 아직은 우리 현실에 요원한 숙제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의 부랑인에 대한 법제도와 행정실태 그리고 사회적 정황 등을 살펴보자. 법제도란 부랑인 관련 법률과 규범을 말하는 것인데, 사회복지 사업법과 시행령, 규칙 그리고 훈령(지침, 규정) 등에 적시되어 있다. 특히 부랑인 선도시설 법인의 경우 1인 15.48m²와 30명 이상 상시 수용시설을 기본 규모로 규정하고 있고, 직원도 시설장을 비롯하여 총무, 상담원, 의사(촉탁의사), 간호사(간호조무보조원), 생활지도원, 보조원, 영양사, 사무원, 경비원 등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 사회복지 사업을 희망하는 자가 있다 해도 막대한 재산과 인력준비로 인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설령 기본 재산을 갖추었을지라도 부랑인 수용 관리에 대한 시설 및 인력을 효과적이고도 능률적인 행정을 기하기 위하여 수용인원을 증원시켜야 할 필요를 안고 있다. 그래서 1987년 이전까지는 강제수용 정책으로 인권 및 사회복귀가 거의 불가능 하였기 때문에 시설의 포화운영이 불가피하였다. 그런데 1987년 4월에 발표한 훈령 523호 부랑인 선도시설 운영 규정 제3조의 입소 대상을 보면 ①연고자가 없거나,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65세 이상 노쇠자와 18세 미만의 아동, 폐질, 정신질환 또는 심신장애 등으로 생활능력이 없는 자로서 시, 군, 구청장이 보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자, ②일정한 주거가 없이 구걸하는 부랑인으로서 본인이 원하고 시장, 군수 가 인정하는 자, ③ ①과 ②에 해당하면서 경찰관서의 보호요청이 된 자로 되어있다. 이리하여 본인이 원해도 입퇴소 심사위원회가 결정해 주지 않으면 입소할 수 없고, 무단퇴소를 하여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도록 명시되어 있어 입소자는 자연 줄어들게 되었다. 그 결과 기존 부랑인 선도시설 법인의 경우, 점차 그 성격이 바뀌게 된다. 신체질병이나 노쇠, 정신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부랑인은 도시의 거리로 다시 돌아 오게 되는데, 이 부랑인들에 대해서는 마땅한 대책이 없다. 스스로 선택하는 신체적 자유와 부랑생활의 삶을 강제로 통제 할 제도적 장치는 이미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랑인들에게 적절한 사회복지 서비스가 제도적으로 가능한가이다. 본 연구자는 8년동안 부랑인을 가까이서 봉사해 온 경험과 4년간의 공동생활 체험을 기초로 하여, 소규모 공동체 시설을 그 대안으로 삼아 보았다. 이 소규모 공동체 시설은 그룹 홈(group home)과는 약간의 의미를 달리한다. 20명 내외의 부랑인 수용자가 한 가족적 형태를 가지고 자율성을 최대로 구현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시설장이 공동으로 생활해야 하는 희생적 요구가 있으며, 1∼2명의 보조자가 있으면 더욱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대규모 수용시설은 거의 수용자의 관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으나, 이 같은 소규모 공동체 시설은 구성 가족간에 인간적이고 유기체적인 관계가 자연히 형성되므로, 구성가족 한사람 한사람이 활력을 찾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 해 나가게 된다.
5. 연구의 방법론과 한계
본 논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 연구자가 8년 동안 부랑인들을 가까이서 관찰해 오고, 또 4년 동안(현재도 계속 중임) 공동생활 해 온 경험을 토대로 한다. 즉 사례를 중심으로 문헌연구, 행정자료 연구, 현장조사 등을 논술 재료로 삼고자 한다. 문헌연구는 부랑인 관련 단행본 서적, 논문, 각종 정기 및 비 정기 간행물, 신문 등을 참고로 하고, 몇몇 신학서적과 법전 등도 참고로 하였다.
사례연구로는 본 연구자가 1990년 5월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는 부랑인의 재활공동체 "부활의 집" 을 연구대상으로 한다. 그간 경험했던 여러 사례들을 이론화하며 실제 운영했던 방법 등을 기술하여 다른 연구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본 논문의 방법론은 부랑인의 재활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려진 '그룹 홈' 방법론과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본 연구자가 사회복지 분야의 전문적 지식과 훈련이 없이 단순한 종교적 동기에서 부랑인 공동체를 시작했기 때문에, 사례연구(Case Work)를 사회사업적 관점에서 시도하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자는 직접 부랑인 공동체에 합류하여 생활하고 있고,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충분한 대화와 교감을 통하여 체득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들을 소중한 자료로 확신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부랑인 재활공동체는 아니지만 복합공동체로서, 장애인, 노인,아동, 부녀 등이 함께 거주하는 형태의 운동이 개별적으로나마 적지 않게 확산되고 있어서, 본 논문 논거의 뒷받침을 더해 주는 듯 하다. 본 연구자는 현재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작은 공동체 복지시설들이 전문적 지식과 제도적 뒷받침으로 적극 수용되길 기대하며, 또한 운영자들도 비록 작은 시설들이지만 소중한 경험들을 토대로 학문적 자료와 역사적 실험의 기틀을 마련하기를 바란다.
Ⅱ. 한국의 도시빈민
1. 일제시대의 도시빈민
일제시대의 도시빈민이라 함은 1920년대 중반부터 대도시와 중소도시 근처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 도시빈민을 말한다.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의 농민은 식민지 정책으로 농촌의 생산물을 수탈 당했고, 그 결과 발생된 농촌 빈민은 생산 수단을 잃어버리고 이농을 한다. 이때 만주 및 간도지방으로 또는 산간지방의 화전민으로 많은 조선농민의 이농이 시작되었고, 도시로 몰려온 농촌 빈민들은 주변에 토막 을 짓고 살면서 대규모 댐 공사장이나 철도건설 현장 등에 날품일을 하며 살았다. 1920년대 중반쯤에는 연간 15만명 정도의 이농민이 발생하였는데, 이들 이농민 중 불과 11%만이 공업 및 기타 노동자로 전환되었을 뿐, 나머지는 날품팔이 등으로 생을 이어가야 하는 토막민의 군락으로 형성되었다. 이처럼 토막민이 늘어나자 일제당국은 도시 미관상의 이유를 붙여 강제로 도시 외각의 일정한 장소로 내쫓았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막민을 비롯한 도시빈민, 화전민, 농촌과 도시 사이를 떠도는 유랑인, 걸인 등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들은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이리저리 쫓겨 다녔고 저항 또한 반복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이 진전되면서 농민 계급은 더욱 피폐화, 이는 그들을 도시로 유입토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래 <표-1 >은 1930년대 공업 추진화 이후 토막거주자 및 불량주택 거주자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표-1> 1939년∼1942년 전국 토막 및 불량주택 조사
조사년월일
토막 거주자
불량주택 거주자
계
호수
인 구
호수
인구
호수
인구
1939.10.1
1940.10.1
1941.10.1
1942.10.1
2,779호
4,877호
3,397호
3,731호
11,709명
19,567명
14,599명
9,604명
23,957호
29,213호
32,938호
29,609호
104,250명
124,697명
147,297명
128,858명
26,736호
34,090호
36,335호
33,340호
115,959명
144,264명
161,896명
138,462명
자료:강 만길(1987년:251)
2. 해방 이후부터 산업경제개발 이전까지
8·15해방이 되면서 중국, 일본, 북한 등에 이주하였던 이농민들이 다시 고국으로 귀화하지만 이들은 거의 난민 상태였다. 아래 <표-2>에서 보듯이 약 200만명이 대한민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농토 확보의 어려움이나 미국 원조경제 등의 유인 요건으로 도시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즉 일제하에 해외로 거의 쫓겨 나다시피 떠난 귀환 인구들이 들이닥치면서, 서울, 인천 등 도시에는 빈곤, 실업, 주택난 문제가 급격히 발생하게 된다. 이것은 일제시대 도시로 몰려든 토막민과 함께 업친데 덥친 격으로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났다.
<표-2> 남한으로의 귀환민과 월남민 수의 추정 (1945∼1949)
내무부
등록자수
보건사회부
통 계
1949년도
인구조사
추정치
김 철
권 태환
일 본
만주 및 기타
북 한
1,118
423
649
1,407
619
456
936
270
481
1,300
430
150
1,379
416
740
계
2,190
2,482
1,687
1,880
2,535
권 태환,"한국의 인구 변화와 그 구성요소",1925∼1966
송 병락, F.S.밀즈,"성장과 도시화 문제", KDI, 1980, p.74.
자 료:정건화(1987년: 71)에서 재인용
한편, 1950년에 실시된 농지개혁 실패와 잉여 농산물의 공급으로 농촌의 피폐화는 가중되었고, 이농의 대열이 또 다시 일게 되었다. 이때 도시는 아직도 이농민을 고용할 만한 공업화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는 기형적인 모습일 수 밖에 없었다. 6·25 전쟁이 나자 온 국민은 피난민과 이재민이 되어 방방곡곡 전란속에서 삶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부산은 전쟁 당시 전국 피난민이 모여들어 판자집, 루핑집, 함석집 등으로 산비탈을 메웠고, 이들 피난민 중 북한 출신 전쟁 난민들의 70% 이상이 도시지역에 눌러 앉아 정착하였다. 그래서 나라안은 온통 빈민, 부랑인으로 가득 찼다. 부모와의 사별 또는 이산, 가옥의 파손은 가족간의 유리생활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한 시설수용보호를 요하는 난민구호사업도 대규모화 될 수밖에 없었다. 전국에는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등이 급격히 증가되어 1959년에는 686개소의 후생 시설이 설립되었다. 이 중 부랑자 시설이 37개소, 걸인 수용시설이 3개소가 있었다.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직 후까지 정치는 불안정했고 국가행정도 전란의 홍역 속에서 무계획적이고 불충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외국 자선기관들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고 민간 구호시설들은 우후죽순같이 난립하여 국내 사회복지계는 일대 혼란에 빠질 지경이 되었다. 1960년대 5·16 군사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빈민 구호사업과 무의 무탁한 부랑걸인의 수용보호사업은 아직도 일제때의 '조선 구호령'에 의해 실시되고 있을 뿐이었다.
3. 군사독재 정부시대
1960년대에는 강력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산업화)로 인해 도시에 고용구조가 창출됨과 함께, 저곡가로 인한 농촌몰락은 대규모 제 3의 이농현상을 유발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도시로의 밀집된 과잉 포화 인구는 곧 빈곤, 실업과 함께 대규모 무허가 정착지를 확대시켰다. 이 시기부터 이른바 도시빈민의 구조적 생산이 시작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연평균 60만명 이상이 도시로 몰려들어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무작정 도시로 몰려든 이농인구는 정상적인 주택시장 공급에서 배제되어 임의로 건축하거나, 불법건축물 등으로 주택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들이 형성한 자생적 무허가 정착지는 도시 접근이 쉬운 지역으로 당시 발달된 시가지에 한 축을 이루어 형성되었다. 이것은 고용기회가 많고 교통사정 및 생계활동에 유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하였고 하천변, 고지대, 산비탈, 다리 밑, 제방 주위 등, 국·공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저렴하고 구하기 쉬운 재료(판자, 루핑, 함석, 블록, 비닐 등)로 소위 '판자집'을 지어 살았다. 이들 무허가 정착지는 일제시대 토막집단 거주지를 포함하여 새로운 '빈민군'이 된 것이다.
한국의 이농현상은 경제발전과 산업구조의 재조정에 따른 농업인구의 자연적 이농이라기보다는 소작제도가 다시 발생하고, 타지에서 거주하는 지주가 늘어나고 무분별한 외국 농축산물의 수입이 증가하는 등 농업전반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다. 다시 말해 농업의 모순이 도시화의 기형을 부채질하였고, 여기에서 새로운 도시빈민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1967년, 공화당 군사정부는 당시 23만 3천 가구의 무허가 건물과, 여기에 기거하는 1백 27만 인구를 도시 외각으로 내몰기 위해, 1968년 경기도 광주시에 50만명 규모의 위성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1971년에는 철거민들이 대규모로 저항하였으며, 이 철거민의 폭동은 한국 빈민운동사의 효시로 남게 되었다. 공화당 군사정부의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동안, 산업구조는 자본이 또 다른 자본을 형성시키는 자본 집약적인 산업으로 변모하여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하였다. 소위 경제성장 논리로 노동자의 권익보다, 기업의 지원 육성에 열을 올렸고, 이것은 필경 기업의 재벌화를 부채질 하였다. 게다가 1973년 유신헌법 제정 이후 국가권력의 횡포는 극도에 달하였고, 공화당 군사정권이 몰락하기까지 1970년대 도시빈민은 자연발생적으로 간헐적으로나마 항거를 일으키곤 하였다. 이 자연발생적이며 일시적인 항거는 조직성이나 운동성이 취약한 사건들이었으나, 점점 사회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여타 민중운동 세력과 운동권에서의 참여가 일반화되면서, 비로소 조직운동으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의 광주항쟁은 빈민운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항쟁 당시 부산 부두의 날품팔이 부역노동자들과 자갈치 시장의 노점상들, 광주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등 도시빈민들이 주력 운동세력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이것은 빈민에 대한 인식을 한국 사회 변혁운동 주체로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한창 호황을 누리던 건설경기는, 중동전쟁이 일어나고 부실 공사가 빈번하고 국내 정치가 불안정하여 퇴조를 맞게 된다. 결국 국내로 철수한 건설자본은 막대한 과잉 자본을 형성하여 그 출구를 정부측에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출구는 곧바로 도시빈민 지역의 재개발 사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80년대의 도시빈민 운동은 합동 재개발 사업으로 인한 철거반대 투쟁으로써, 그 이론적 면에서나 대중 참여와 조직 측면에서 볼 때 이전시기보다 크게 진보한 것이다. 합동 재개발 사업의 시행은 공영개발과는 달리, 빈민 지역의 가옥주들과 민간건설회사가 공사를 진행하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철거반대 투쟁이 체제까지는 위협하지 못하고, 민간 건설 회사들의 이윤을 보장하여 재개발이 활성화되는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도시빈민 운동은 '철거반대 투쟁'과 노점상 단속에 대한 '생존권 투쟁' 등의 한 축과, 도시빈민 지역에서 공부방이나 탁아방 등을 운영하면서 일상적인 사업속에서 빈민지역 주민들의 의식을 깨워 주민을 조직하려는 또 다른 한 축으로 진행되었다. 1980년 5월 17일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 군부세력은, 그들의 정권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각종 국제 회의 및 매머드 스포츠 행사 유치에 열을 올렸다. 1983년의 IBM, IBRD총회, 1985년의 IPU, ASTA총회, 1986년의 ANOC, 아시안 게임, 그리고 88올림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기 노점상들의 대대적인 단속과 재개발 지역의 강제 철거가 대단위로 이루어졌으며,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 사목위원회' 와 1986년 '기독교 도시빈민 선교협의회', 1987년 '지역사회 탁아소 연합회', '서울 철거민 협의회', 1988년 '전국노점상 연합회' 등의 조직으로 빈민운동의 새로운 전열이 정비되었다. 특별히 철거민, 노점상들의 투쟁운동은 빈민 운동의 대표적 형태로써 1980년대의 주도권을 잡았다. 1984년 8월 서울 목동의 철거반대 투쟁, 1985년 4월 사당 3동, 1986년 3월 상계동, 양평동 등의 철거민들의 항쟁은, 1987년 6월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으로 이어지는데 한 몫을 하기도 한 역사적 의의도 있다. 특히 1988년에 들어서 신림 2동, 도화 1동, 동소문동, 돈암동, 전농동, 사당 2동 등의 가열찬 투쟁은, 사실상 1980년대 빈민운동의 최고 절정기이다.
그러나 1989년에 들어서면서 서울시의 '불량주택 재개발사업 업무지침'이 개정되었고,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은 영구임대주택과 3개월분의 주거 대책비 중 한가지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되어 합동 재개발과는 달리, 거주민들의 재 입주를 위한 법이 시행되었다. 이 밖에도 200만 호 주택공급과 이중 25만 호 영구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된 이후, 합동 재개발 사업의 시행은 줄어들었으며, 철거반대 투쟁도 전과 같지 않게 가라앉았다. 따라서 일부 빈민운동의 진영에서는 새로운 운동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싹트고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퇴조기를 맞은 듯했던 합동 재개발 사업은 신도시 개발이 일단락 되는 1990년대 초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때 철거민의 주거권 투쟁은 다시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가수용시설 쟁취와 공공 임대주택의 보장이 당면 투쟁 목표이었다. 한편 1990년 6월에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조직이 출범하였는데, 이 조직은 기존 철거반대 투쟁보다는, 국민들의 주거권 운동을 지향하는 지역 운동 조직체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출발하였다. 1990년대는 철거민들의 투쟁운동의 성과로 임시 수용시설이 갖추어지고, 공공 임대주택이 1995년쯤 이르러 많은 부분 완성되기 시작했다.
부산지역에서도 1989년 부산철거민 협의회가 결정되었고, 1992년에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부산 시민연합과 부산 노점상 연합회가 차례로 조직되어, 철거지역에서의 격렬한 투쟁이 이어지기도 했다. 1989년 문현동, 범 6동을 비롯, 1990년 대연동, 1991년 장림동, 당감동, 1992년 용호동의 도시빈민 주거권 투쟁은, 부산지역 빈민운동사에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1994년∼1995년에 걸친 우1동 승당 마을 철거반대 투쟁은 전국을 경악시킨 투쟁일지로 잘 알려져 있다.
4. 1992년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는 빈민운동가들과 단체들간의 조직문제 논쟁으로 인해 운동의 침체기를 맞는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의 '도시빈민 공동투쟁 위원회', 1989년 11월 '전국 도시빈민 연합', 1992년 7월 '전국 도시빈민 협의회' 등으로 소모적인 토론과 조직의 이합 집산으로 도시빈민운동의 쇠퇴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즉 빈민운동이 민중, 민주, 자주통일 등과 함께 정치 세력화해야 한다는 측과, 순수히 지역운동으로 머물러야 한다는 논의가 그것이다. 이렇게 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이 논리적 논쟁과 방향 찾기 등으로 우왕좌왕한 배경에는 것은, 당시 우리 나라의 경제 사회적 변화도 한 몫 하였다. 즉 도시빈민 밀집지역이 해소되고 대단위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도시 빈민들은 아파트에 입주하거나 다른 생활근거지로 점차 해산되었기 때문에 운동의 주체 세력이 소멸되어 가는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한편,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우리사회는 일대 충격을 받았다. 특히 1980년대에 절정을 이룬 유물론적 역사관과 계급투쟁론적 사상은, 우리사회의 천민 자본주의와 식민 자본주의를 걷어내고, 민중, 민주, 자주적인 정치이념으로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다방면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도시빈민 운동도 계급론적 정치이념화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급론적 투쟁의 산실이었던 소련이 붕괴되자, 사회주의 이념이나 혁명적 투쟁노선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운동세력은 큰 혼란과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1990년도에 들어서면서 세계 질서는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제동 장치가 풀리게 되고, 거부할 수 없는 자유시장 체제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론적 사회 변혁운동은 하루 아침에 버려질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빈민운동으로서 사회변혁을 꾀하려던 활동가, 운동가들은 자기 논리를 재검토하기 위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사회가 사회 경제적으로 도시빈민의 요구를 일정 정도 해소해 놓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편,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운동이 있었는데, 사회보장, 사회복지 운동이 그것이다. 생산 공동체, 복지 공동체 등을 실험하며 시장경제 체제를 견제하고 보완하는 일을 모색하는 운동이었다. 이것은 고전적 빈민의 개념을 재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 것이다. 계급론적 관점에서 빈민의 범주에서 제외시킨 룸펜(Lumpen,생산적 사회 구성체에서 제외된 계층의 총칭)을 다시 찾아, 단순히 동정적이고 자선적 동기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이 사회의 희생자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걸인, 양아치, 전과자, 마약중독자, 부랑인, 창녀, 무의탁자, 연고없는 고질병자나 장애인 등이 그들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빈민은 생활 보호법에 의해서 국가로부터 생활보호를 받는 사람과함께, 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가난한 룸펜 모두를 지칭한다. 대개 이러한 빈민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능력이 없거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현재, 법률로서의 생활보호를 받고 있는 영세민을 살펴보면, 거택보호자가 296,988명, 시설에서 보호받는 자가 76,769명, 자활보호자가 1,039,908명으로서 모두 1,413,665명이 된다. 이는 전체 인구와 대비하여 3.1%밖에 되지 않지만, 법정지원을 받지 못하는 절대빈곤 계층과 룸펜 등을 합친다고 볼 때 10%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 이중 법정 도시빈민(생활보호 대상자)만 보더라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 6개 도시에만 376,740명으로, 대비로 보면 26.7%나 차지하고 있다.
<표-3 > '97년도 전국 시도별 생활보호 대상자 현황
(단위:명)
구분
거택보호
시설보호
자활보호
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18,627
16,361
7,710
9,740
5,400
5,338
13,141
10,976
4,909
2,086
3,202
3,511
72,198
59,249
46,844
30,453
38,824
28,153
103,966(7.4%)
86,586(6.1%)
59,463(4.2%)
42,297(3.0%)
47,426(3.4%)
37,002(2.6%)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36,370
18,811
13,164
22,659
24,882
41,395
37,021
34,447
5,063
6,939
1,419
4,423
4,438
4,732
5,369
5,491
5,002
1,131
56,852
50,356
44,416
107,224
113,202
183,731
119,808
81,612
6,986
100,161(7.0%)
70,586(5.0%)
62,003(4.4%)
134,321(9.5%)
142,816(10.1%)
230,495(16.3%)
162,320(11.5%)
121,016(8.6%)
13,180(0.9%)
계
296,988
76,769
1,039,908
1,413,665(100%)
보건복지부, 1997년도 생활보호 업무지침, p. 28참조했음
Ⅲ.한국의 부랑인
1. 부랑인에 대한 일반적 대중인식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걸인'이라 일컫는 사회계급은 일찍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부랑인'에 해당하는, '걸인'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동냥으로 살아가는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노비, 하인, 머슴, 식모 등의 계급보다 낮은 부류로,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가족과 주거를 열악하게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의 경제가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그 '걸인'은 가족구성이나 주거를 완전히 잃은 '부랑인'이란 새로운 계급으로 나타났다.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숙제로 여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역 광장 주변, 지하철 역, 버스터미널 부근 거리에 만취해 쓰러져 있는 사람, 웅크리고 앉아있는 사람, 구걸 행각을 하는 사람, 노숙하는 사람, 여럿이 주저 앉아 술을 마시거나 짤짤이 하는 사람들 같은 부랑인들이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다.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한마디로 곱지 않다. 부랑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커녕, 그들이 그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애써 생각해 보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게으르고 무능력하며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결함이 있다고 본다. 이 바쁘고 할 일 많은 세상에 술이나 마시고 길거리에 누워 잠이나 자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요, 도와 줄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열심히만 일하고 살면 저렇게 누추한 꼴로 지내지는 않을 텐데, 노력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삶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묵시적으로 사회적 낙인이 되고 있고, 이와 더불어 가난한 사람에 대한 통념도 부랑인에 대한 것처럼 사회적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지난 몇 년간 언론사 일간지의 독자란만 보아도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를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일간신문의 경우를 들어 살펴보았다.
요즘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전국 어디를 가도 부랑인들이 역, 터미널 등을 배회하면서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집에 오려고 시외버스 터미널에 갔더니 3명의 부랑인들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술과 빵을 먹고 있었다. 잠시후 대합실 내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덩치가 큰 부랑인이 다른 부랑인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피가 나는데도 계속 때리고 있었다. 병까지 깨들고 난동을 부려 말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대합실에는 3∼4명의 부랑인들이 며칠씩 머물면서 승객의 불안을 조장하는 일이 흔히 있다. 이들은 차표를 사러 드나드는 승객들에게 욕을 하고 돈이나 담배를 달라고 요구해 주민들은 터미널에 가기가 무섭다고 한다. … 당국은 부랑인들에 대한 철저한 복지대책을 세워 이들 때문에 선량한 주민들이 불안에 떠는 일이 없도록 해 주기 바란다.
고양시에서 서울역을 경유하여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다. 서울역은 우리나라의 교통관문 중에서도 얼굴에 해당되는 곳으로, 수많은 여행객들이 이용하는데 그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다. 그러나 서울역 광장이나 지하도에는 늘 부랑인들이 많아 시민들에게 불편과 불쾌감을 주고 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취해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고 고함을 지르며 나뒹구는 등 꼴불견이다. 광장에서 화투를 치다가 자기네들끼리 싸움이 붙어 난장판을 벌이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한나라의 수도 특히 교통의 주요관문인 서울역의 환경이 하루 빨리 정화되어서 깨끗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서울역 앞을 순찰 중인 한 경찰관은 '혐오감을 줄 뿐만아니라 질서유지 차원에서도 문제가 크지요, 하지만 집도 없이 떠도는 모습을 보면 측은합니다. 수차례 설득해 시설로 보내지만 대개 몇 주일을 못참고 다시 길거리로 나오고 말아요.…'
서울시 PC 모니터 관계자에 따르면, '이 달 들어 지하철 구걸행위 단속을 요구하는 통신이 하루 1∼2건씩 뜨고 있다'며, '예전에는 없던 일'이라고 말했다.
2. 부랑인의 발생원인과 과정
(1) 가정환경과 성장배경
본 연구자는 4년여간 부랑인 재활공동체인 부활의 집을 거쳐나간 사람과 현재까지 생활하고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약 200여 명을 상담한 기록을 중심으로 통계와 분석을 해 보았다. '부활의 집'은 얼마간 재활의지를 갖고 있는 성인 남성만 의 공동생활 공간으로 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거리의 부랑인, 시설의 부랑인 등 더 광범위한 조사와 분석을 병행하지 못하였던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
부랑인들은 20대부터 80대까지 그 연령 폭이 넓다. 그 중 〈표-4〉를 보면 40∼50대가 가장 많은데, 이 때가 사회생활을 하는 왕성한 시기이며 가장(家長)으로서 무거운 부담을 안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표-4〉연령별 분포도 〈표-5〉출생 및 성장 분포도
연령
인원(명)
백분율(%)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4
29
49
41
10
1
1
3.0
21.5
36.3
30.4
7.4
0.7
0.7
계
135
100.0
출 생
성 장
구분
인원
(명)
백분율
(%)
구분
인원
(명)
백분율
(%)
농촌
중도시
대도시
79
24
32
58.5
17.8
23.7
농촌
중도시
대도시
71
22
42
52.6
16.3
31.1
계
135
100.0
계
135
100.0
다음으로 출생하고 성장하였던 고향별로 살펴보면, 도회지보다 농촌이 훨씬 많이 차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표-5참조〉왜 도회지 출신보다 시골 출신이 더 많을까? 그것은 부랑인의 연령으로 보듯이 그들 출생시기와 성장시기가 대부분 1960년대 이전이었던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6·25한국전쟁 직후의 출생세대와, 8·15광복 전후의 출생세대가, 농촌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생 및 성장의 사회적 배경은 그들의 가정환경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전쟁으로 인해 정상적인 가족관계를 갖지 못한 요인은, 그들의 성장과정의 인격형성과 인생 성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요인으로부터 성격, 학력, 결혼, 직업 등이 결정되며, 그것은 결국 그들이 부랑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준비된 과정이었다.
그러면 먼저 가족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경우와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경우를 구분할 필요가 있고, 이보다 양친 모두를 어린시절에 여읜 경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표-6참조〉왜냐하면 그때만 하더라도 가부장적 가족 체계가 지금보다 훨씬 강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른 사망은 어린 당사자들은 물론 어머니에게도 엄청난 충격과 경제적 부담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의 이른 사망도 아버지는 물론 어린 당사자에게 크나큰 좌절이 아닐 수 없었다.
〈표-6〉 부모 사망 조사표
양친사망(%)
부친사망(%)
모친사망(%)
1세∼10세
11세∼20세
21세∼30세
31세 이상
27명(20.1)
19명(14.0)
18명(13.3)
39명(28.9)
39명(28.9)
12명( 8.9)
14명(10.4)
45명(33.3)
31명(22.9)
14명(10.4)
15명(11.1)
40명(29.6)
계
110명(81.5)
110명(81.5)
100명(74.0)
〈표-6〉은 성장시절 부모의 사망이 부랑인으로 전락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양친 사망의 경우는 편부모 사망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양친사망후 어린자녀들로 구성된 가구는 응집력을 잃게 되고 험한 세태를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에 친척, 이웃, 고아원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상황이 더욱 나빠지게 된다. 한편 생부모 슬하보다 어린시절 양부모나 의붓 부모 슬하에서 성장한 자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도 성장과정에서 가정환경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다음으로 형제 자매 관계가 부랑인으로 내모는 상당한 이유였음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표-7〉에서 장남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고 다음은 막내로 나타났다. 왜 장남, 막내 순일까? 그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 장남에게 부하되는 책임과 짐이 본인의 능력이나 당시의 여건에 비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압박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두 번째 순위인 막내는 일반적으로 부모의 사랑과 보호로부터 갑작스런 단절과, 성장과정에서 책임감과 인내력의 부족으로, 나약한 인격형성이 되기 때문이다.
〈표-7〉형제 관계 조사표
출생순위
인원(명)
백분율(%)
장 남
차 남
삼남이하
막 내
외아들
고 아
무응답
43
22
12
23
10
2
23
31.9
16.3
8.9
17.0
7.4
1.5
17.0
계
135
100.0
마지막으로 혼인 유무와 부부관계를 주의깊게 살펴보도록 하자.
〈표-8〉혼인 관계 조사표 〈표-9〉자녀 양육 관계 조사표
구 분
인원(명)
백분율(%)
유지 및 별거
사 별
이 혼
미혼(동거)
무응답
35
2
20
64
14
26.0
1.5
14.8
47.4
10.3
계
135
100.0
구 분
인원(명)
백분율(%)
본인
배우자
부모
형제
친척
고아원
유기
무응답
0
29
21
8
4
1
4
4
0
40.8
29.7
11.3
5.6
1.4
5.6
5.6
계
71
100.0
〈표-8〉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미혼의 경우가 혼인했던 경우보다 많고, 혼인의 경우는 모두 헤어져 살기 때문에 부부의 결별이 얼마나 중대한 요인을 제공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혼인을 한 사람은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여 부랑자가 되고, 다른 한편 혼인을 못한 자(안한 자도 포함)는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지 못한 심리적 패배의식을 안게 되었다. 미혼일 때 동거 경험을 가진 자도(괄호안의 경우) 23.4%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다른 각도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혼인을 해도 자녀를 두지 않고 이혼한 경우는 동거경험과 다를 바 없으며, 동거 경험을 가졌어도 자녀를 낳아 일정 기간 동안 양육을 했다면 혼인후 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앞서 지적한 몇가지 요인보다 부부관계의 결별과 가정해체로 인한 요인은, 현대에 이를수록 결정적인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헤어진 이후 자녀 양육 문제도 〈표-9〉와 같이 단 1명의 경우도 본인 스스로 챙기지 않고 배우자나 부모, 형제, 고아원, 유기 등으로 떠넘겨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2) 사회 경제의 영향과 주거의 불안정
① 사회 경제적 요인
칼빈(John Calvin)사상에 기초를 둔 이른바 '경제적 성공은 신에게 받은 축복이며 가난이란 적자생존의 실패자가 필연적으로 받는 형벌'이라는 논리는, 부르조아 자본주의 논리에 일조를 하면서 서구 및 미국 등에서 부랑인 양산에 직접적인 배경을 제공했다. 산업 자본주의가 한 사회의 생산양식으로 자리잡은 후에 도시빈민과 부랑인 문제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런데 도시빈민이나 부랑인의 발생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적 보장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있다. 부르조아 권력과 자본가는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배태되는 빈곤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오히려 사회보장 정책이나 사업을 시혜적 차원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산업자본주의는 도시화를 부채질했고, 도시로 몰려드는 20세기의 가장 극적이고 엄청난 변화인 이농현상은, 도시내의 주거, 고용, 빈부격차, 교통난 등 다양한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도시화는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 따른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농현상은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우리의 이농현상은 농촌의 피폐로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이 농촌의 빈곤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농업과 농촌의 피폐를 이유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와 그에 따른 도시 농촌간 경제 불균형은,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이르는 오늘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가? 개인적 태만이나 개인적 자기향상 노력 부족,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습관 등의 개별적 도덕적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의 그늘 속에 묻힌 희생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절대적 빈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결함, 무능력, 나태 등에서도 일부의 요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소득분배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상대적 빈곤문제는 개인적 요인보다는 사회구조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농촌의 높은 빈곤율은, 공업화·산업화·도시화에 밀린 농업투자의 결핍에서 연유하고, 또한 성장전략 산업에서 제외된 농업은 30여 년의 경제계획에도 불구하고, 성장과 분배에서는 소외지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산업화·도시화에 의해 도시로 몰린 도시빈민도 정치적 격변 속에서 지배그룹과 피지배 그룹간의 경제적 대립, 수출산업과 내수 산업간의 격차, 은행자금 이용상의 제약, 저 생산성 노동, 직종간 임금격차, 지가 및 부동산의 급등, 실업 등의 이유로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개인적 요인보다 사회적 문제에서 발생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이 상대적 빈곤 현상의 악순환이 부랑인의 발생을 부채질한다. 다음은 사회 경제적 요인에 대한 부랑인 발생의 대표적 사례를 소개한 것이다.
부활의 집에 1995년 12원 5일 입주한 L씨는 전북 남원이 고향인데,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향에서 성장하였습니다. L씨는 20년전 가족들과 함께 모두 부산으로 이사오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의 학력으로나마 동명목재 합판공장의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합판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 후 스텐공장, 제분공장 등을 전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10여 년 쯤 지난 어느 날 가난에 지친 아내가 도망을 가버리고, 지난 해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마저 가출해 버렸습니다. 이후 L씨는 점점삶을 비관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살고 있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모진 목숨만 남아 부산의료원 행려자 병동에서 다리수술을 받고 있던 중, 원목 P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부활의 집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L씨는 그 후유증으로 지능상태가 부족해졌고 한쪽다리에 심한 장애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집에 지난 6월 22일 입주한 B씨는 부산 괴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남 2녀 중 외아들로서 가정형편상 고교를 중퇴하고 B씨는 일찍부터 나전칠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릴적 교통사고 때 입은 좌측다리 장애로 자라면서 깊은 열등감이 B씨를 눌렀으나, 역심히 노력하여 구포에서 영세업이지만 칠기공장을 운영했습니다. B씨는 24세때 비교적 일찍 결혼도 하여 1남 1녀를 두고 단란한 생활로 한때는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1979년도 자개업계의 퇴락과 부도 등을 감당할 수 없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 버리자, 좌절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술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B씨는 끝내 가정도 돌보지 못한 채 1987년경에는 이혼을 하고 아이들은 가까운 친척들이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뒤 B씨는 일가 친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채 끝없는 방황과 타락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온 것입니다.
②주거 불안정의 요인
도시빈민의 경우 주거 형태는 무허가 불량주택의 소유나 임대, 일반 주택 임대, 공공 임대 아파트나 공동 주택 임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주거 불안정이란 높은 주거비 부담과 무허가 및 불량주택에 대한 정부 및 지방자치 단체의 재개발 사업 등이다. 높은 주거비 부담은 도시의 치솟는 지가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는 월세 및 보증금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정부의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된 저소득층의 월세 및 보증금 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표-10〉저소득층 월세 및 보증금
(단위:만원)
저 소 득 층(1990년)
저소득계층(1988.국개연)
전국
중소도시
대도시
전도시
서울
지방도시
전세 보증금
보증부 월세
보증부 보증금
월 세
341
6.2
148.5
4.3
304
5.9
172.4
4.4
438
6.3
145.6
5.7
729
―
―
―
951
―
―
―
617
―
―
―
다음으로 무허가 및 불량주택 지역 재개발 문제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주택의 문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주택의 불량화와 주택의 부족이다.
1960년대 이후 실시된 무허가 불량촌에 대한 집단이주 정책, 현지개량, 합동 재개발과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농어촌 주택 개량사업 등으로 불량 주택은 어느정도 감소되었다고 보는 측면도 없지는 않다. 1988년 부터 시작된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에서, 6공화국 정부는 2백만호 건설계획을 세우고 주택의 공급을 확대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급의 확대가 실수요자들에게 실질적인 주택의 취득과 사용으로 이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미분양과 건설업체의 도산에도 불구하고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은 올랐고, 실제 필요한 저소득 계층들에게 주택마련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그 결과 도시 재개발 사업을 건설업계에 위탁 처리하면서, 재개발지역 저소득층 빈민이나 철거민들로부터 전면적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를 유발시켰다. 많은 도시 저소득 계층 도시빈민은 정부의 주택실정에 의해 더욱 주거가 불안해졌고, 이러한 요인은 다른 요인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빈민을 가정과 삶의 터를 잃고 거리로 내쫓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의 주택공급과 재개발 계획 정책은 이윤논리에 의해 작동되는 주택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저소득층의 주거 입지는 점차 축소되고 있으며, 이들의 주거 불안정과 주거 위기는 부랑인으로 전이될 수 있는 개연성을 높인다. 특히 실업, 사업실패 등은 가계유지의 곤란, 가정파탄 등으로 이어져 부랑인으로 전락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다음은 부랑생활로 전락하는 한 사례로서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R씨는 14세 되던 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부모님이 하시던 농사를 물려받았습니다. 40세가 될 때 까지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시골 집도 있었습니다. 40세가 되던 해에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남는 것도 없어서 땅도 팔고, 집도 팔아 인천 부평으로 올라왔습니다. 땅을 판 돈으로 사업을 하는 동생에게 조금 떼주고, 나머지로 방 두칸짜리 전세를 얻었습니다. 이 후 둘째 아들이 자신의 명의로 작은 연립을 구입하여 그곳에서 생활하였으나, 다시 집을 팔아 트럭을 사는 바람에 월세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후 R씨는 홀로 보증금 200만원에 월15만원하는 월세방에서 살았습니다. 노동일을 하는 것도 힘에 부쳐 잘 못하게 되고, 아들이 생활비를 제대로 챙겨 주지 않게 되자 보증금을 잃게 되면서 주인으로부터 쫓겨났습니다.
1996년 7월 2일 부활의 집에 입주한 K씨는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3남 2녀 중 장남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K씨는 군 제대 후 부친이 경영하던 목공소 일을 도왔었는데, 1972년 대신동 저수지 붕괴사고로 물난리를 만나 가산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어머니마저 여읜 채 반송으로 이주하라는 부산시의 요구와 보상금도 여의치 못해, 안락동에 겨우 판자집을 마련하였습니다. K씨는 그때부터 마음을 잡지 못하고 목공구 가방만 멘 채 공사장 등지를 떠도는 생활을 했습니다. 27세쯤에는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착하려고도 했으나, 막노동 판에서 생활하던 타락한 습성으로 교도소 등을 드나들게 되어 헤어졌습니다. 그 후 1980년에는 몸에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2년동안 고생도 한 K씨는, 출소 후 가방을 메고 사우디에 두 번씩이나 다녀오는 등 여전히 방랑의 벽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과 함께 바닥 인생을 마감하려고 육교 위에서 뛰어내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산의료원에 실려 오랜 어깨수술을 마치고, 원목실을 통하여 부활의 집을 찾게 된 것입니다.
(3) 노동시장과 고용조건
거리에서 만나는 부랑인들을 보면, '그들이 처음부터 일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을까, 또 일하기를 원치도 않고 싫어할까, 저 멀쩡한 신체조건으로 일만하면 저런 비참한 생활을 면할텐데' 등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갖게 된다. 일, 곧 노동이란 흔히 '돈 버는 활동'으로 오해를 하기 쉽지만 그것은 피상적이요 대단히 왜곡된 노동관이다. 노동이란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산적인 자기발전 활동이며, 사회적 봉사활동이기 때문에, 일을 잃고 실업자가 되는 것은 인간을 비참한 상황으로 치닫게 한다. 현재 거리에서 실업의 상태로 부랑생활하는 사람들도 한때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서 노동을 하던 이웃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들은 일을 잃었고, 비참한 상태로 오랜 시일을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모습을 점점 잃어갔다.
그렇다면 어떤 요인들이 그들로 하여금 일할 수 없게 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게으르고, 무능하고, 책임감이 없어서 노동조건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기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본 연구자는 지난 4년동안 부랑인들과 생활해 본 경험으로 보아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게으름과 무능함 그리고 무책임 때문이 아니라-혹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성장환경이나 주변상황이 그로 하여금 노동의욕을 꺾고 좌절시키는 이유를 제공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오랜 부랑생활 속에서 몸에 밴 악습이 축적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은 어릴적 가정환경이 열악하여 가정교육이나 학교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했으며, 소아마비나 각종 질환의 후유증으로 지체 및 정신장애를 받아 심리적·정신적으로 위축되었다. 또한 성장한 이후에도 갑작스런 충격이나 사고로 (신체적 장애, 질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나 사별, 이혼, 사업실패, 배신 등)좌절하고 노동의욕을 상실하게 되면서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노동 시장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 같으나 엄밀히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고 파는 시장조건에서 노동력이란 상품이다. 즉 지식, 기술, 건강, 창작력, 언어, 용모 등 다양한 요구 조건을 필요로 한다. 현대 도시사회에서는 이처럼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 생활이 가능하다. 고용인에게 노동력을 파는 직장인이 있는가 하면, 행상이나 가게처럼 스스로 노동력을 활용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런데 노동력을 잃거나 노동력 매매 의욕을 상실했다고 할 때, 사람은 실업이란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안게 된다.부랑인의 사회적 문제의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실업에 있다. 주민등록법이나 의료보험, 민방위법, 향토예비군법 등 현실적으로 선결해야 할 문제는, 부랑인들로 하여금 사회구성원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 하는 당면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구청이나 복지관, 장애인 고용 촉진 공단 등에서 구인 및 구직 써비스를 제공한다지만, 이것은 부랑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따라서 이들은 신분증명을 요구하지 않는 막노동을 하거나, 연안어선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때로는 악덕 기업주들에게 수탈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부랑인에 대한 행정적 처우와, 법 제도는 그들이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이것은 곧 실업의 고정화를 부채질하는 새로운 사회 구조적 문제점이다.
(4) 노동능력 상실과 사회적 냉대
부랑인의 노동능력 상실의 경우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이다. 그 첫째는 질병이나 알코올 중독 그리고 정신질환에 의해 노동능력을 상실한 경우이고, 둘째는 교통사고나 직업상 사고(산업재해 포함)를 만나 노동능력을 잃은 경우이고, 마지막은 강제수용, 인신매매, 폭행피해 등을 당하여 얻은 신체적, 정신적 불구로 인해 노동능력을 잃은 경우이다. 다음의〈표-11〉은 이를 입증해 주는 조사자료로써 부랑인이 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원인을 보여주고 있다.
<표-11> 노동능력 상실 원인 조사표
연령\구분
질병, 알코올, 정신질환(A)
교통사고, 산업재해(B)
인사사고(C)
30대 이하
40대
50대
60대
70대 이상
33 명중 24 명 72.7 %
49 명중 41 명 83.7 %
41 명중 35 명 85.4 %
10 명중 9 명 90.0 %
2 명중 1 명 50.0 %
33 명중 6 명 18.2 %
49 명중 5 명 10.2 %
41 명중 2 명 4.9 %
10 명중 0 명 0 %
2 명중 0 명 0 %
33 명중 3 명 9.9%
49 명중 3 명 6.1%
41 명중 4 명 9.7%
10 명중 1 명10.0%
2 명중 1 명50.0%
평균
135명중 110 명 76.36 %
135 명중 13 명 6.66 %
135 명중 12명17.14%
<표-12> 노동력과 부랑생활과의 관계
노동능력을 잃고 부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135 명중 10명
7.4 %
부랑생활로 노동능력을 잃게 되었다.
135 명중 121명
89.6 %
노동능력이 없으므로 부랑생활을 하게 되었다.
135 명중 4명
3.0 %
노동능력 상실이 부랑인이 되게 하는 원인도 있겠지만, 부랑인으로서 노동능력을 발휘하고 생활하던 중 부랑생활을 오래 하면서 노동능력을 잃어가는 경우가 오히려 많은 경우로 나타나고 있다. 〈표-12참조〉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그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다. 부랑인에 대한 인식이 발생 원인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면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대개 특수한 성격으로 다루어지는데, 이것은 현상적으로도 나타나는 퇴행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데서 기인한다. 알코올 중독에 노동의욕이 없고 책임감이나 미래의 대한 희망이 없는 등 '구제불능의 사람들' 이란 인식이 바로 이 특수한 계층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다. 이는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외면하고 현재 부랑생활 상태에만 주목한 결과, 문제를 현상태에서만 보도록 강요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나 제도적 처우에 그대로 반영된다. 부랑인은 마땅히 천대받을 만한 사람들이요, 우리 사회를 좀먹고 더럽히는 해충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감정적으로도 싫어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강제적으로라도 그들을 수용하여 노동을 시키고, 기술이나 사회 적응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동정과 자선의 대상이 아니요, 평등과 공생의 대상도 아닌 무익한 사회악이라고 보기 때문에 소외와 냉대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과 사회적 냉대는 부랑인을 사회보장적 관점으로 보는 시각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빚게 해, 지금까지 '부랑인 복지법'을 제정치 못한 원인이 되고 있다.
3. 부랑인의 생리와 삶의 유형
부랑인은 의식주를 어떻게 해결할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주거지나 직업 등이 없으면서 오래도록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우선 의복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한다. 외관상에서 드러나듯 한번 입은 옷은 갈아 입는다든지 세탁을 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부랑인의 경우 교회나 개인 등으로부터 얻은 옷을 계절이나 용도에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입고 산다. 그러다 새로이 옷을 얻게 되면, 입던 옷을 버리고 갈아입는다. 음식은 매우 불규칙하게 섭취하는데 성당이나 교회의 무료급식소, 복지관 등 자선기관이 행하는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때로는 식당 등에서 얻어 먹거나 사서 먹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부 부랑인은 극도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여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부랑인들은 주로 노숙을 한다. 일부 부랑인은 일세방이나 월 사글세방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지하도나 지하상가 한 귀퉁이 또는 역사 대합실, 주택가 처마 밑, 빈 가옥 등 닥치는 대로 잠자리를 정한다. 이처럼 부랑인들의 의식주 생활 모습은 도시빈민의 최악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표-13> 주거 유형별 조사표
노 숙
타인에 더부살이
일세방
월 사글세방
기 타
85 명
( 63.0 %)
11 명
( 8.1 %)
24 명
( 17.8 %)
6 명
( 4.4 %)
9 명
( 6.7 %)
그러면 부랑인은 이 같은 생활환경 가운데에서 어떠한 생리(삶의 방법: way of living)가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체로 부랑인은 욕구, 욕망, 목표, 희망, 집념 등 목적의식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극도의 자존심 붕괴는 죽음을 선택케 하는 심리를 강하게 자극하며, 그 죽음의 선택에 대한 실패나 좌절은 또 다시 삶에 대한 비굴한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같은 현상은 교육이나 노동을 통해 사회적 자기실현 정도가 발달된 사람일수록 더욱 드러난다. 한편, 이와 달리 어릴 때부터 신체적 장애나 가정 환경으로 열등감에 깊이 사로잡힌 경우에는, 오랜 세월 속에 좌절하고 체념해 왔기 때문에 앞서 지적한 경우만큼 급격한 행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부랑인의 삶의 유형을 구분해 보면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주거형태로 나누어 본 것인데, 그 첫째가 "노숙형(Aa군)"이요 다음이 "일세형(Bb군)"이다. 우선 "노숙형" 부터 살펴보자. "노숙형"이란 주거용도를 가진 가옥 내에서 숙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리에서 숙박을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거리란 지하도, 지하상가, 역 대합실, 공원, 주택가 처마 밑, 빈 가옥 등이다. 이 "노숙형"도 사실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일정한 장소를 정하지 않고 아무 장소에 아무 날에라도 관계없이 아무렇게나 숙박하는 것(A군)과, 둘째는 그나마 일정한 장소를 정하고 꼭 그곳에서 숙박하는 것(a군)이다. A군의 부랑인은 그 정신 상태가 극도의 좌절과 절망을 견디지 못하여 거의 술에 만취하여 있고,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다 옷에 오줌이나 배설물 등을 묻히고도 게의치 않은 채 뒹구는 경우이다. 이들은 술이 깨면 배고픔과 통증(여러 가지 질병이나 상처 등으로 인한), 그리고 괴로운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자 다시 술을 찾게된다. 구걸을 하거나 가게 등을 찾아가 추태를 부리며 성가시게 하면서 이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술은 주로 소주인데, 안주도 거의 없이 마시며 다시 골아 떨어지는 반복 적인 생활을 한다. 행려자, 부랑인들 가운데 동사(凍死)와 윤사(輪死)율이 가장 높은 부류도 바로 이 A군이며, 과음과 만취로 인한 뇌졸증(중풍)유발과 뺑소니 교통사고로 인한 지체 장애를 얻는 경우도 바로 이 A군이다.
이와는 달리 a군 부류의 부랑인은 일차적인 단계(앞서 설명한 A군)를 거치고 발전한(?)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은 어느정도 정신적 심리상태가 아물면서 무디어 질 때,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며 자리를 잡아가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이제 자신의 짐(가방이나 괴나리 봇짐)을 챙겨 다니기도 하며, 어떤 이는 버너나 냄비 같은 것도 준비해 다니면서 음식을 끓여 먹기도 한다. 이 단계에서는 완전히 의식이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하지 않고, 같은 처지의 동료끼리 교분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다. 또 A군 부랑인들은 이른바 '꼬지'(동냥이나 구걸)로 연명을 하며, 경력이 더할수록 요령이나 수단이 좋아져서 전국 각 시설 및 무인가 시설 공동체 등을 떠돌며 겨울을 나기도 한다. 이 a군에는 나름대로 권력투쟁(?)이 존재하여 약육강식의 논리로 나타나며 싸움과 화해 등으로 집단을 형성, 존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소수는 그 집단에 소속됨을 꺼려하여 전국적으로 배회, 방랑하는 경우도 있으며, A군과 a군 두 경우 모두 단속기관에 의해 본의 아니게 사회복지 시설, 정신요양시설,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한다. a군에는 정신박약, 정신분열, 우울증(Hypochondrie), 간질, 조울증 등 정신질환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A군에서 a군에까지 거치면서 상당수가 사고(교통, 폭행, 실족, 자해 등)를 만나 지체 및 정신장애자가 되어 더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한다.
이젠, "일세형(Bb)군"을 살펴 보도록 하자. "일세형"이란 주거용도를 가지고 있는 일정한 가옥 내에서 숙박을 하는 부랑인 부류를 말하는데, 이들도 두 유형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른바 '벌집'이라 불리는 일세방으로서 매일 3,000원∼5,000원 정도의 일세를 지불하며 사용하는 방이나 최하류 여인숙 등을 이용하는 부류(B군)를 들 수 있다. 여기다 별도로 덧붙인다면 아는 사람(친지, 동료, 친구 등)의 숙소에 빌붙어 숙박문제를 해결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이들은 구걸한 수입으로 2∼3명이 어울려 고정된 방을 정하고 지내는데, 모두 한결같이 일정한 직업을 구하는 것을 체념한 채 하루하루를 구걸한 것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수세미나 이쑤시게, 칫솔 등 가볍고 작은 물품만 가지고 다니며 구걸형 판매도 하면서 지내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대개 혼자서 숙소를 얻어 지내고 있다. 이들의 하루 수입은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4∼5만원씩이나 되며 돈이 떨어져야 다시 판매에 나간다. 이들은 돈으로 제일 먼저 술과 담배를 구하며 다음으로 숙박비를 내거나 약 등을 산다. 음식을 사먹는 일은 거의 생각지도 못하며, 때때로 목돈(3∼5만원 정도)을 쥐면 퇴폐 이용업소나 역 근처 하층 윤락 업소를 찾아 남성임을 확인(?)하곤 한다.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서 유동하는 여행객만 상대로 하는 사람, 사무실이나 상가 등을 찾아가는 사람, 교회나 사찰 등 종교시설을 찾아가는 사람 등 여러 종류로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위 B군에서도 '고급형 꼬지파'가 있는데, 이들은 2∼3명이 어울려 장애인 수첩이나 위조 증명서 등을 이용하면서 고소득 구걸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장례식장이나 상가(喪家) 또는 개업식장, 결혼식장 등을 찾아다니는데, 그 수입이 짭짤하여 지출과 씀씀이가 일반서민에 견줄만 하다.
"일세형" 중에서도 사실상 월 사글세로 사는 부류의 사람들(b군)도 있는데, 이들이 B군과 구분을 하는 이유는 월 사글세방에서 살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b군은부랑인으로 보기에는 다소 의심이 갈 정도로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정한 직업을 갖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족과 거의 왕래가 없거나 이혼, 별거, 미혼 등으로 혼자 산다는 것과, 그 중 일부는 주민등록 등 법률상 신분관계를 관리하지 않고 생활할 뿐이다. 이들의 직업은 신분증명이 까다롭지 않게 고용해 주는 연 근해 어선의 잡부나 일용직 건설현장 잡부 등이다. 이 b군은 일이 있을 때는 직장에서 건강한 생산직 노동자의 모습이지만, 일터를 잃으면 있던 것을 축내면서 술이나 마시며 빈둥빈둥 세월을 보낸다. 특별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저축이나 재산을 늘리고, 좋은 물건을 사야 할 이유가 없다. 희망이 없는 덧없는 삶의 반복 속에서 다만 생계의 압박이 다가올 때에 허겁지겁 일터를 구할 뿐이다. 이들은 월급 등 목돈이 잡히면 경제적으로 관리하면서 살 것을 생각지 않고, 우선 고급술집과 윤락가를 먼저 찾는다. 단 한번만이라도 쾌락으로 공허한 마음을 채우며 즐기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고 돈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점점 자괴감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리하여 A군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4. 내면적 자기 파괴와 소외
부랑인은 표면적으로 볼 때 대개 온순하고 착한 성품을 보여준다. 외향적인 성격보다는 내성적 성격이 많으며 자신의 내면적 고통이 정신질환으로 발전되고 있다. 사회적 범죄 유형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내면적 자기파괴를 저지르는 부랑인은 범죄자들과 다르다. 여기서 내면적 자기파괴란 어떤 의지나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폭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극도의 좌절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포자기 하는 행위를 말한다.
'내면적 자기파괴'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간의 내면세계 곧 마음, 양심, 감정, 의지 등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정한 인격을 이룬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격체이다. 그런데 이 내면 세계는 하나님과 생명의 교류가 지속됨으로써 더욱 아름답고, 온전하고, 거룩해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류란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랑, 정직, 충성, 겸손, 인내, 신뢰 등으로서 활발한 교류를 갖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할 때 건강한 내면 세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류는 또한 자신의 실존적, 개인적 수양을 넘어서, 인간과 인간, 나와 너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 타락한 인간들의 내면적 자기파괴 행위란 곧 사랑, 정직, 충성, 겸손, 인내, 신뢰 등을 짓 밟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무시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다. 그 결과 마음, 양심, 감정, 의지 등의 인격요소가 황폐해지고 결국 영혼(내면세계)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자기파괴의 행위가 극도의 상태로 발전되면서 부랑인 또는 범죄인 유형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자신의 실존적, 개인적 품성을 짓밟아 버리고, 인간관계에서는 타인을 해치기도 한다. 이것은 극도의 절망과 좌절에서 오는 - 생명으로 회귀하려는 - 반사적 반응이다. 즉 병균이 몸에 침입하여 세력이 확대될 때 회복하려는 몸속의 자생 저항력과 부딛혀, 고열과 분비물 방출 등으로 인해 신체적 고통이 따르듯이, 사탄의 세력 곧 죽음의 세력이 인간의 건강한 내면세계에 침입하여 희망을 죽이고 절망과 좌절과 공포로 휘몰때, 인간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간 관계적) 물의를 일으키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범죄자들이 타인을 괴롭히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생명을 애타게 부르짖는 절규의 몸짓이요, 하나님을 찾는 또 다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부랑인들이 자신을 끝없이 학대하며 추태를 부리고 사회적 부담을 안겨주는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부랑인의 소외는 여느 소외와 달리 심각한 양상으로 표출된다. 소외란 서로 벌어져 버성기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관계가 버성기게 되는 것은 한쪽이 멀어져 가는 경우와 양쪽이 서로 멀어져 가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또한 한쪽이 멀어져 갈 때 다른 한쪽이 그대로 정지해 있는 경우와 다른 한쪽을 향해 만나려고 쫓는 경우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 소외 상태를 벗어 날 수 없는 경우이다. 소외는 차별에서 비롯된다. 차별의식은 나는 너와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다. 차별은 차이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지 않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차별은 평등의식에 위배하는 일이다. 이 차별의식에는 내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것과 남보다 열등하다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부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