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주가 눕는 풍경 외 4편
최진화
바라만 보는 두려움으로
아주 오래전 동여맨 기억들이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이국의 황혼녘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 목욕탕에만 가면
도망가던 딸내미 붙잡아 사타구니의 때를 박박 밀던
튼튼하고 아팠던 야속한 손
긴긴 겨울밤 내내 끄덕이는 고개를
참아가며 잰 놀림으로 털실을 자아
조끼며 장갑이며 모자를 뜨던 신기한 손
아버지 통금 넘어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양은냄비 죄다 끌어내어 새벽이 되도록
닦아대던 눈물과 한숨의 손
이제는 검버섯이 푸른 핏줄 따라 흐물거리는
마른풀처럼 힘없는 손입니다
그 손이 마지막 여행의 차창에 마음을 기댑니다
끝없이 스러져가는 전신주 사이로
당신의 가버린 세월을 낯선 풍경에 그려가면서
노을처럼 웃고 있습니다
소살리토*
나무의 모양이 다른 것은
햇빛과 바람
비의 맛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바다의 색깔이 다른 것은
하늘과 구름이
파도의 술렁임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새들의 날개 크기가 다른 것은
먹이를 향한 욕망이
자유를 갈망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겠지
사람들의 눈빛이 다른 것은
마음 속 켜켜이 쌓인
피 속을 흐르는 오래된 슬픔의 빛깔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겠지
* 샌프란시스코 맞은편 금문교를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
추신
눈이 감기지 않는
검은 밤이 오네
기름을 뚝뚝 흘리며 몸을 뒤집는 생선처럼
잠속에서 지글거리네
너무 뜨거웠던 커피
놓쳐버린 지하철
끈 떨어진 가방
내 이마에 손을 얹는 낯선 남자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친구
밟히지 않는 브레이크
잔상으로 퍼지는 필름들 속으로
눈이 떠지지 않는 붉은 아침이 오네
비린내 맡은 암고양이처럼
날쌔게 머리칼을 낚아채는 발톱이라도 있어
누가 좀 날 흔들어 깨워주었으면
나무의 시간
어디서 베인 상처인지
아물기 위한 시간이 어둠처럼 깊다
오래 들여다보니
피 묻은 날개들이 살 속에 박혀 있다
푸른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 때
밝은 햇살이 설탕처럼 달콤할 때
나무는 베인 줄도 모르고
여름, 겨울을 지나가는 새떼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계절에 오지 않았던 비가 오고
골짜기 사이로 용암이 흘러내리듯 날개들이 떠내려갔다
내 수액과 이끼와 숨을 먹고 자란
가늘고 둥글고 보드랍고 딱딱한 그것들이 사라져갔다
가지를 잃어 가며
나무는 더욱 단단해지는 뿌리로
흙바닥을 뚫고
먼 하늘이 우는 소리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남자는
고치속의 애벌레
날아오를 순간을 기다린다
밤새도록 파레트에 몸을 적셔도 사랑의 색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주를 덮는 여자의 우산 속에서
남자는 날지 못한다
날개를 펴지 못한 죽음 같은 사랑이
화석처럼 굳어간다
세상이 그들을 나누기 전
남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색을
렌즈에 남긴다
사람들은 감전된 듯 자신을 복사해
그 속에 들어가 눕는다
* 미국의 사진작가 애니레보비츠가 찍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사진
최진화 : 2005년 『문학나무』로 등단. 시집 『푸른 사과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