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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서 3·1절에 부부동반 산행을 가신다기에 두꺼운 겨울옷과 아이젠을 챙겨드렸다. 3월은, 적어도 산에서만큼은 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녘의 산이라 하더라도 산은 산이기에 도시 분위기에 휩싸이면 곤란하다. 한 달 먼저 겨울이 오고 두 달 늦게 겨울이 가는 것이 산이다.
가끔 뉴스를 듣다보면 봄에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산행 준비를 잘못했기때문인 것이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화사한 봄옷을 입고 다니는 여인네들을 볼지언정 산에 갈 때는 겨울채비를 그대로
챙기기를 바란다.
그래도 만일 3월에 산에서 봄 향기를 느끼고 싶다면, 옷보다는 먹거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맞다. 산 아래 봄내음을 산속에서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주로 조리과정이 쉽고 간단한 요리를 소개했지만, 이번 달만큼은 약간 번거롭더라도
향긋한 봄냄새를 즐길 수 있는 요리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겨우내 떨어진 입맛 살려주는 음식들
그 중 발에 밟힐 때 바지락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바지락이라 불리는 이것은 3월이 오면 반드시 먹어줘야 하는 건강식 중 하나다. 산 아래서는 이것을 가지고 국이나 찜 등 다양한 요리를 해먹지만, 산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요리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바지락 솥밥은 산에서 비교적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는 메뉴다.
바지락을 구입할 때는 껍질을 제거한 살만 골라져 있는 것이 좋다. 산에서 별다른 준비 없이 바로 조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슈퍼마켓에 가면 밀폐포장된 것을 구입할 수 있고, 시장에서 구입하면 밀폐용기에 담아 가면 된다. 나머지 재료는 건새우와 중간 크기의 마른 멸치, 그리고 표고버섯과 홍당무 정도다.
조리할 때는 깨끗이 씻은 쌀에 바지락을 올리고, 그 옆에 멸치와 새우, 그리고 잘게 썬 홍당무를 올린 다음 물을 붓고 밥을 하기만 하면 된다. 이 때 물은 평소보다 20% 정도 더 잡고 뜸도 20% 정도 더 들여야 한다. 밥이 완성되면 밥 위에 재료들이 떠있게 되므로 먹기 직전에 주걱이나 숟가락으로 한 번 뒤집는 게 좋다.
비록 산속의 날씨는 한겨울의 그것만큼이나 매섭겠지만, 이 요리 주변에는 향긋한 봄 냄새가 풍길 것이다. 먹을 때는 달래- 와 간장을 섞은 양념장을 넣어 비벼먹으면 그만이지만, 약간의 소금과 후추만 뿌려 먹어도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이
- 기가 막히다.
바지락은 우리나라에서는 굴과 홍합 다음으로 많이 생산되며, 2월부터 4월 사이에 맛이 가장 좋다. 이것에는 다른 재료보다 - 필수 아미노산이 풍부하다고 한다. 필수 아미노산은 체내에서 만들어지지 않거나 만들어지더라도 그 양이 충분치 않으므로
-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한다. 만약 필수 아미노산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으면 단백질이 잘 생성되지 않는다.
특히 바지락에는 철분과 아연이 풍부해 노약자나 어린이, 임산부의 영양식으로 권할 만하다. 저혈압이 있는 사람에게도 좋다. 자주 먹으면 혈색도 좋아지고 피부도 매끈해진다. 또 예로부터 바지락 국물은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 좋다는 말이 전해온다. - 바지락에는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고 간장 기능을 활발하게 해주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란다. 바지락을 많이 넣고 술국이나
- 해장국을 끓여 먹으면 과음 때문에 생기는 지방간을 예방하는 데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체질적으로 간 기능이 허약한 사람
- 도 자주 먹으면 좋다.
고슬고슬 잘 지은 바지락 솥밥은 맛도 일품이지만, 춘곤증에 시달려 잃어버렸던 입맛을 되찾아줄 정도로 몸에 좋다. 솥밥 - 이외에도 바지락을 소금간만 해서 맑고 시원하게 끓여 먹는 것도 좋고, 된장국으로 끓여도 좋다. 된장의 효소가 바지락의
- 담백한 맛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한의학에서는 몸이 허약해 식은땀을 자주 흘리는 사람이 바지락 껍데기를 잘 말려 가루를 낸 다음 헝겊주머니에 넣고 달여 - 서 차처럼 수시로 마시면 아주 좋다고 한다. 특히 밤에 흘리는 식은땀을 한의학에선 도한(盜汗)이라 하여 건강에 매우 좋지
- 않은 것으로 보는데, 바지락 껍데기 가루를 달인 물은 이 도한증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있단다.
봄에 나오는 배추로 만든 봄동 된장국
조리할 때는 코펠에 쌀뜨물을 반쯤 붓고 국물용 멸치와 건새우, 그리고 다시마를 넣고 끓인다.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제거해 넣어야 한다. 15분 정도 있으면 구수한 향의 국물이 우러날 것이다. 그러면 불을 줄이고 된장을 풀어 끓이다가 봄동 배추를 먹고 싶은 크기로 떼내어 넣는다. 좀 많다 싶을 정도로 넣어도 끓으면 부피가 줄기 때문에 문제없다. 배추가 숨이 죽고 푸른 색깔이 없어지면 먹어도 좋은데, 시간이 있다면 가능한 푹 끓여 먹는 게 맛이 좋다.
국을 끓이고 남은 봄동은 뚝뚝 떼어내어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거나 쌈으로 먹어도 좋다. 이 시기에 먹는 이것은 다른 - 계절보다 단맛이 나고 고소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국이나 무침, 쌈 등 어떤 요리를 해도 맛이 좋다. 이 맛에 푹 빠져 하산길
- 옆 남의 밭에서 피어오른 봄동에 손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바지락 솥밥과 봄동 된장국으로 좀 부족하다면 한쪽 옆에서 이면수를 구어 같이 먹는 것도 좋다. 이면수 구이는 3월의 제철 - 음식으로 이 계절 밥반찬으로 그만이다. 시중에서는 밀폐포장된 것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다른 재료 필요 없이 약간의 식용유
- 나 버터, 그리고 소금만 있으면 맛있는 생선구이를 즐길 수 있다. 뜨끈하고 향긋한 밥 한 술에 이면수를 올려 먹고, 달디단 봄
- 동 된장국으로 마무리하는 식단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것이다.
3월엔 겨울채비로 나서 봄기운 담아오길
앞서 말했듯이 3월에 산에 가면서 봄 산행 채비를 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근무 하는 후배의 말을 빌면 3월의 산은 ‘봄의 옷을 입은 겨울’이란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팔다가 옷이 부실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옷이라도 벗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라니 사람들이 얼마나 3월의 산을 무시하는 줄 알 것 같다.
매년 3월1일 저녁 뉴스를 듣다보면 봄맞이 산행을 떠났다가 조난당하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사람들의 부주의가 아닌가 한다. 비록 아직은 겨울 채비를 한다 하더라도 배낭 속에는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있게 준비해 야영장에 모
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봄 요리를 해 먹는다면 거기서부터 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 봄 대둔산을 찾은 적이 있다. 봄의 향기를 만끽하고 싶어 산의 남쪽인 완주군 운주쪽으로 코스를 잡았다. 산행 들머리에 있는 마을을 지나는데 어느 집 텃밭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봄동이 자라고 있었다. 마침 그 밭주인 같아 보이
는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볕을 쪼이고 계시기에 좀 살 수 없겠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그딴 것을 어떻게 파냐고 먹을 만큼
만 뽑아 가라고 하시며 필자더러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간 손자 닮았다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정말 먹을 만큼 배추를 뽑아 담고 떠나려는데 할머니가 등산용 스틱을 가리키며 얼마 정도면 그것을 살 수 있냐고 물으셨다.한참 생각 끝에 내 보물단지였던 스틱을 그 할머니에게 드리고 돌아섰다.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생각나서였다. 맨날 등산만
다니면서 자기 장비 챙길 줄만 알았지 할머니께 살아생전 지팡이 하나 챙겨드리지 못한 이 불효 손자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 싱싱하고 달큰한 봄동으로 이틀 내내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비록 하산길에 스틱이 하나밖에 없어 진흙길에미끄러지면서 다리를 다쳤지만 그 스틱이 아깝지 않았다. 불효에 대한 벌이라 생각했다.
길가에 눈이 슬슬 녹으면서 뉴스에서는 벌써 봄소식을 전하느라 난리다. 점심시간에 따뜻한 볕을 쪼이니 그 날 느꼈던 할머니의 흐뭇한 미소와 구수한 봄동 된장국이 생각났다.
다음 주에는 모처럼 시외버스터미널로 달려가 대둔산에나 다녀와야겠다. 일자로 곧은 스틱보다 기역자로 굽은 것을 사 가지고 그 할머니를 한 번 더 찾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미소와 먹음직스런 봄동을 한 아름 안고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