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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도론 제7권
4. 행문품 ④
[문] 무엇이 염안반(念安般)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답] 안(安)은 들이쉼[入]이며, 반(般)은 내쉼[出]이다. 들이쉬고 내쉬는 상(相)에 있어서 그 염이 수념(隨念)과 정념(正念)인 것, 이것을 염안반이라 한다. 마음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하고, 안반의 상(想)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그 상이며, 접촉을 사유하는 것이 그 맛이며, 각을 끊는 것이 그 처이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만약 사람이 염안반을 수행하면 적적(寂寂)을 이루고, 승묘(勝妙)를 이루며, 장엄(莊嚴)을 이루어 사랑할 만하고, 스스로 즐기게 된다. 만약 자주 일으켜 악ㆍ불선법을 제거해 소멸시키면 몸에 게으름이 없어지고, 눈도 또한 게으름이 없어진다. 몸이 동요하지 않게 되고, 마음도 동요하지 않게 되어 4념처를 원만케 하고, 7각의를 원만케 하고, 해탈을 원만케 한다. 이는 세존께서 찬탄하는 바이고, 성인이 머무는 곳이며, 범천이 머무는 곳이고, 여래가 머무는 곳이다.
어떻게 닦는가. 처음 좌선하는 사람은 아란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적적처로 가서 결가부좌를 하고, 몸을 반듯하게 한다. 그 좌선인은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내쉬는 숨을 염한다.
내쉬는 숨을 염하여 만약 길게 내쉰다면 “나는 숨을 길게 내쉰다”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안다. 만약 길게 들이쉰다면 “나는 길게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안다.
만약 짧게 들이쉰다면 “나는 짧게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알고, 만약 짧게 내쉰다면 “나는 짧게 내쉰다”라고 이와 같이 그것을 안다.“나의 들숨은 이와 같다”고 깨닫고, “나의 날숨은 이와 같다”고 깨닫는다.희를 알고 낙을 알고 마음의 소행을 알아 마음의 행을 소멸하게 하고, 마음을 환희케 하며, 마음을 교화시키고, 마음을 해탈케 한다. 무상을 보고, 무욕을 보고, 멸을 보고, 출리를 보며 이와 같이 깨닫는다. 출리를 보며 “나의 날숨은 이와 같다”고 깨닫고, 출리를 보며 “나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은 이와 같다”고 깨닫는다.
여기에서 현전에 안(安)을 배우게 한다는 것은, 소위 생각을 묶어 코끝이나 입술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숨의 소연처(所緣處)이다. 그 좌선인은 안(安)으로써 이곳을 염한다. 들숨ㆍ날숨을 코끝ㆍ입술에서 생각[念]으로써 접촉을 관한다.
혹은 현재 염하여 숨을 들어오게 하고, 현재 염하여 숨을 나가게 한다. 현재 숨이 들어올 때 작의하지 않으며, 나갈 때도 작의하지 않는다. 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접촉하는 코끝과 입술을 염함으로써 그 접촉되는 바를 관하여 알며, 현재 염하여 숨을 들어오게 하며, 현재 염하여 숨을 나가게 한다. 사람이 목재를 자를 때에 톱과 힘을 반연하고 톱이 오고 간다는 생각은 작의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좌선인은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서 들어오고 나간다는 생각[想]을 작의하지 않고 접촉되는 코끝이나 입술을 염으로써 관해 알아, 현재 염하여 숨을 들어오게 하고, 현재 염하여 숨을 나가게 한다.
만약 좌선인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서 안과 밖을 작의하면 그 마음은 어지러워지고, 만약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 몸과 마음이 게을러지고 동요된다. 이것이 과환이다. 최장식(最長息)이나 최단식(最短息)을 작의해서는 안 된다. 만약 최장식ㆍ최단식을 작의하면 그 몸과 마음이 모두 게을러지고 동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환이다. 들고 나는 숨의 갖가지 모양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땅히 집착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와 같이 마음을 쓰면 다른 인연이 어지럽게 된다.
만약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 몸과 마음이 모두 게을러지고 동요하게 된다. 이와 같이 과환이 무변(無邊)하게 생겨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무변으로써 접촉하는 까닭에 마땅히 이와 같이 작상(作想)하여,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빠르게 하여 정진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마음을 느슨하게 하여 정진하면 게으름과 수면이 생기고, 만약 마음을 빠르게 하여 정진하면 조급함이 생긴다. 만약 좌선인이 게으름과 수면을 함께 일으키거나 조급함을 함께 일으키면, 그 몸과 마음이 게을러지고 동요하게 된다. 이것이 과환이다.
그 좌선인은 아홉 가지 작은 번뇌가 청정해진 마음으로 현재 들숨을 염하면 그 상(相)이 일어나게 된다. 상이라 하는 것은 솜을 뽑아내고 고패(古貝 : 목화)를 뽑아 몸에 부비면 즐거운 촉감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시원한 바람이 몸에 닿으면 즐거운 촉감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의 바람이 코와 입술에 닿는 것을 보고는 형태나 색깔을 말미암지 않고 염으로 풍상(風想)을 짓는데, 이것을 상이라 한다.
만약 좌선인이 닦고 또 여러 번 반복해 닦으면 증장을 이루고, 만약 코끝에서 증장하여 미간과 양 뺨에서 여러 번 주처를 이루면 머리에 그 바람이 가득하게 된다. 이 증장으로부터 몸에 부드러운 즐거움[猗樂]이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을 구족이라 한다. 또 어떤 좌선인은 처음부터 다른 상[異相]을 보기도 하니, 연기나 안개나 먼지나 부서진 금과 같고, 또 바늘과 같고, 개미가 문 것과 같고, 갖가지 색깔을 보기도 한다. 만약 좌선인의 마음이 명료하지 않으면 그 다른 상에 대해 다른 생각[異想]을 일으켜 전도되고, 출입식의 생각[想]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명료하다면 좌선인은 다른 생각을 짓지 않고, 현재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나가는 숨을 염하여, 다른 생각을 짓는 것을 떠난다. 만약 이와 같이 작의하면 다른 상은 곧 소멸한다. 이 좌선인은 미묘한 상을 얻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으며, 현재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나가는 숨을 염한다. 그 상이 자재하면 그 자재한 상으로 수행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 욕심이 자재함으로 말미암아 현재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나가는 숨을 염하여 기쁨을 일으킨다. 이미 기쁨이 자재하고 욕심이 자재한 상태에서 현재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나가는 숨을 염하여 사(捨)를 일으킨다.
그는 이미 사가 자재하고 욕심이 자재하고 이미 기쁨이 자재한 상태에서 현재 들어오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나가는 숨을 염한다. 그러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모든 개(蓋)가 소멸하고, 선분(禪分)이 일어난다. 이 좌선인은 이미 적멸의 훌륭한 4선정을 얻은 것이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또 선사(先師)가 염안반(念安般)을 닦는 네 가지 방법을 설하였으니, 소위 산(算)ㆍ수축(隨逐)ㆍ안치(安置)ㆍ수관(隨觀)이다.
[문] 무엇을 산이라 하는가?
[답] 처음 좌선하는 사람이 처음의 내쉬는 숨으로부터 들이쉬는 숨에 이르기까지 1부터 10에 이르고, 10을 넘으면 세지 않는다. 또 설하기를, 1부터 5에 이르고 5를 넘으면 세지 않으며 그 뜻을 틀리게 하지 않는다. 그때 마땅히 세고, 나아가 그 세는 것을 떠난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따라서 그 생각을 머물게 하는 이것을 산이라 한다.
수축이란 산을 포섭한다. 염으로 간단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따르는 것을 수축이라 한다.안치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코끝이나 입술이 바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접촉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풍상(風想)을 지어 생각을 머물게 하는 것을 안치라고 한다.
수관이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접촉이 자재함을 말미암아 마땅히 상을 따라서 관해야 하고, 여기에서 생겨나는 희락 등의 법을 마땅히 따라서 관해야 한다. 이것을 수관이라 한다.그 산은 각을 소멸하는 것으로서 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수축은 거친 각[麤覺]을 소멸하는 것으로서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서 간단없이 생각을 짓는 것이다. 안치란 어지러움을 끊고, 부동상을 짓는 것이다. 수관이란 상(想)을 수지하는 것이 되며, 수승법을 알게 된다.
길게 숨을 들이쉬고, 짧게 숨을 내쉰다. 짧게 숨을 들이쉬는 곳에서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방편으로 짓는 바로서 그 성(性)을 초과한다. 이것을 장(長)이라 한다. 성이란 지(智)를 나타내는 것이고, 지는 어리석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 무엇이 어리석지 않은 것인가?
[답] 처음 좌선하는 사람이 몸과 마음에 부드러움을 얻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염하여 현재 머물면 그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미세해지고, 그 숨이 미세한 까닭에 취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좌선인이 만약 길게 숨을 쉬고 따라서 관하여 “길다”고 작의하면 나아가 그 상이 일어나 머물게 된다. 만약 상이 이미 일어나 머물면, 성으로써 마땅히 작의해야 한다. 이것을 어리석지 않음이라 한다. 또 마땅히 마음으로 숨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 어떤 때는 길게 하고 어떤 때는 짧게 하며 이와 같이 마땅히 닦아야 한다. 또 좌선인은 사(事)로써 분명한 상을 일으켜 이것을 마땅히 닦아야 한다.“모든 몸을 알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우는 자는 두 가지 행으로써 일체의 몸[一切身]을 안다. 어리석지 않은 까닭이고, 사(事)로써 아는 까닭이다.
[문] 무엇이 어리석음 없이 일체의 몸을 아는 것인가?
[답] 만약 좌선인이 안반정(安般定)을 염하면 몸과 마음에 희락의 감촉이 가득해지고, 희락의 감촉이 가득한 까닭에 일체의 몸이 어리석지 않게 된다.
[문] 무엇이 사(事)로써 일체의 몸을 아는 것인가?
[답] 들어오고 나가는 숨은 소위 한 곳의 색신에 머무는 것이다. 출입식사(出入息事)ㆍ심법ㆍ심수법을 몸이라 하고, 이 색신을 몸이라 한다. 이것을 일체의 몸이라 한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일체의 몸을 보고 앎으로써, 비록 몸이 있더라도 중생(衆生)이 없고 명(命)도 없다.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소위 3학(學)이다. 첫째는 증상계학이고, 둘째는 증상심학이며, 셋째는 증상혜학이다. 여실한 계, 이것을 증상계학이라 한다. 여실한 정, 이것을 증상심학이라 한다. 여실한 혜, 이것을 증상혜학이라 한다. 그 좌선인은 이 3학을 그 일에서 염으로 작의하여 그것을 배우고, 닦고 나서도 여러 번 반복해 닦는다. 이것이 “그것을 배워 몸의 행을 소멸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몸의 행이라 하는가. 이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몸의 행으로써 몸을 굽히고, 펴고, 움직이고, 흔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의 행에서 현재 적멸을 이루게 한다.
또 거친 몸의 행을 현재 적멸하게 한다. 미세한 몸의 행으로 초선을 수행하며, 그로부터 가장 미세함으로써 제2선을 닦고, 그 가장 미세한 수행으로부터 제3선을 배우고, 남김없이 소멸함으로써 제4선을 닦는다.
[문] 만약 남김없이 들고 나는 숨을 소멸하면 무엇으로 염안반을 수행하는 것인가?
[답] 처음의 상[初相]을 잘 취하는 까닭에 출입식을 소멸함으로써 그 상이 일어날 수 있어 상의 수행을 성취한다. 왜냐하면 모든 선상(禪相)이 있기 때문이다.
“희(喜)를 아는 것을 사(事)로 삼으며 나는 숨을 들이쉬는 것을 안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가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2선처에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기쁨은 두 가지 행으로써 앎[知]을 이루니,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알기 때문이고, 사로써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정에 들어, 희를 아는 것을 성취한다. 어리석음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고, 관으로 알기 때문이고, 대치로 알기 때문이고, 사로 알기 때문이다.
“낙을 아는 것을 성취해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가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내쉬는 숨을 염하며 3선처에서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두 가지 행으로써 앎을 이루니,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알기 때문이고, 사로써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마음의 행을 알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말한 마음의 행[心行]은 상(想)ㆍ수(受)를 말한다. 4선처에서 이런 저런 마음의 행을 일으켜 두 가지 행으로써 앎을 이루니,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알기 때문이고, 사로써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마음의 행을 적멸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말한 마음의 행은 상(想)ㆍ수(受)를 말한다. 거친 마음의 행을 적멸시키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마음을 알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가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그 마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두 가지 행으로써 앎을 성취하는 것이다. 즉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알기 때문이고, 사로써 알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마음을 환희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말한 환희하게 한다는 것은 기쁨을 말한다. 2선처에서 기쁨으로써 마음을 용약시키며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마음을 교화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 좌선인이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염과 작의로써 그 마음을 사(事)에 머물게 하고 오로지 하게 하고, 일심으로 교화하여 그 마음을 머물게 하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 좌선인이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만약 마음이 느슨하면 게으름으로부터 해탈시키고, 만약 마음이 급하면 조급함에서 해탈시키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교만하면 염(染)으로부터 해탈시키면서 그것을 배우고, 만약 마음이 하열하면 진에로부터 해탈시키면서 그것을 배우고, 만약 마음이 더러우면 소번뇌로부터 해탈시키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또 사(事)에서 만약 마음이 즐거움에 안착하지 않으면 안착하게 하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항상 무상을 보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가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그 들이쉬고 내쉬는 숨 및 그 들이쉬고 내쉬는 일과 심법ㆍ심수법에서 그 생멸을 보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항상 무욕을 보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며 “그것은 무상법이다. 그 법은 무욕이다. 이것이 니원이다”라고 들이쉬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항상 소멸을 보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것은 무상법이다”라고 여실히 그 과환을 보고, “그 나[我]의 소멸이 곧 니원이다”라고 적적한 견으로써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항상 출리를 보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라고 이와 같이 배운다는 것은, “그것은 무상법이다”라고 여실히 그 과환을 보고, 그 과환을 현재 버리고, 적멸의 니원에 머물러 마음을 안락하게 하면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적적하고, 이와 같이 묘하다. 소위 일체의 행이 적적하고, 일체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애욕이 소멸하고, 욕심이 없는 적멸한 니원이다.
이 16처에서 앞의 12처는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성취시켜 최초의 무상을 본다. 뒤의 4처는 단지 비바사나만 성취시킨다. 이와 같이 사마타ㆍ비바사나를 알아야 한다.
또 그 일체는 네 종류, 즉 이와 같이 닦음[如是修], 관의 구족[觀具足], 일어나게 함[令起], 유시견(有時見)이다. 현재 들이쉬는 숨을 염하고 현재 내쉬는 숨을 염하는 것, 이것을 길고 짧음에 대한 앎을 닦는 것이라 한다. 몸의 행을 소멸하게 하고, 마음의 행을 소멸하게 하고, 마음을 환희롭게 하고, 마음을 교화시키고, 마음을 해탈시키는 것, 이것을 일어나게 함이라 한다. 일체의 몸을 알고, 즐거움을 알고, 마음의 작용을 알고, 마음을 아는 것, 이것을 관의 구족이라 한다. 항상 무상을 보는 것에서 비롯되는 처음 4행, 이것을 유시견이라 한다.
또 닦음이란 안반을 염함으로써 지(地)를 수지하는 것, 이것이 닦음이다. 이 안반염은 지를 수지하고, 이 수지는 각(覺)이 있는 것이며, 그 각이 있다는 것은 관이 있다는 것, 지에 대한 관이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아는 것은 제2선의 지(地)이고, 즐거움을 아는 것은 제3선의 지이고, 마음을 아는 것은 제4선의 지이다.
또 그 일체는 두 종류를 이룬다. 소위 닦음[修]과 충만[滿]이다. 이 수행에서 오직 그것만 충만이라 하는 것은 16행의 불감(不減)이다. 닦음이란 종자와 같으니, 공덕의 원인이 되는 까닭이다. 충만이란 꽃의 과실과 같으니, 서로 비슷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까닭이다.만약 이와 같이 염안반을 수행하면 4념처가 원만히 성취되고, 4념처를 닦으면 7보리분이 원만하게 되며, 7보리분을 닦으면 명해탈이 원만해 진다.
[문] 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얻는가?
[답] 길게 들이쉬고 나가는 숨을 최초로 하는 4처가 신념처(身念處)를 이룬다. 일어남을 아는 것을 처음으로 하여 수념처(受念處)를 이룬다. 마음을 아는 것을 처음으로 하여 심념처(心念處)를 이룬다. 무상을 보는 것을 처음으로 하여 법염처(法念處)를 이룬다. 이와 같이 염안반을 닦으면 4념처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무엇이 4념처를 닦음으로써 7보리분을 원만히 이루는 것인가. 염처를 닦을 때에 염이 머물게 되어 어리석지 않은 것, 이것을 염각분(念覺分)이라 한다. 그 좌선인이 이와 같이 염이 머물러 고ㆍ무상ㆍ행을 가려낼 줄 아는 것, 이것을 택법보리분(擇法菩提分)이라 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법을 간택하여 정진을 행하며 늦추지 않는 것, 이것을 정진각분(精進覺分)이라 한다. 정진을 행함으로써 희를 일으키고 번뇌가 없는 것, 이것을 희각분(喜覺分)이라 한다
. 환희심으로 인해 그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되는 것, 이것을 의각분(猗覺分)이라 한다. 그 몸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즐거움이 있고 그 마음이 정을 이루는 것, 이것을 정각분(定覺分)이라 한다. 이와 같이 정심(定心)으로 평정[捨]을 이루는 것, 이것을 사각분(捨覺分)이라 한다. 이와 같이 4념처를 닦음으로써 7보리각분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무엇이 7보리각분을 닦음으로써 명해탈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인가. 이와 같이 7각분을 많이 수행하면 찰라에 도가 성취되어 밝음이 원만해지며, 찰라에 과가 성취되어 해탈이 원만해진다. 이와 같이 7보리분을 닦음으로써 명해탈을 원만히 성취한다.
[문] 일체의 모든 행은 지(地)로 인해 유각ㆍ무각을 성취한다. 이와 같다면 염안반에서 어찌하여 오로지 “염안반으로 각을 없앤다”고만 설하고, 나머지는 설하지 않는가?
[답]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각을 설한다. 불주(不住)란 선(禪)의 장애이다. 이러한 까닭에 각을 없애고, 이 뜻에 의해 설한다. 어떠한 까닭에 풍(風)에서 즐거움이 접촉하는가. 마음에 의해 즐거움과 접촉하는 것은 각과 같다. 건달바는 소리를 듣고 따라 집착하는 까닭에 각을 끊는다. 또 방죽을 걷는 것과 같이 마음으로 전념하면서 의지해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염안반으로 각을 없앤다고 설하는 것이다.[염안반을 마친다.]
[문] 무엇이 염사(念死)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답] 수명이 끊어지는 것,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그것에 마음을 기울여 어지럽지 않은 것, 이것을 닦음이라 한다. 자신의 수명이 끊어진 것을 상으로 삼고, 싫어하는 것을 그 맛으로 삼고, 어려움이 없음을 처로 한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만약 염사를 수행하면 상선법(上善法)에서 불방일을 성취하며, 불선법을 싫어하는 것을 성취하며, 모든 복식을 많이 받거나 축적하지 않으며, 마음이 인색하지 않고, 몸의 수명을 보고 마음이 탐착하지 않으며, 무상상(無常想)ㆍ고상(苦想)ㆍ무아상(無我想)을 지어 모두를 원만히 성취하게 하고, 선취로 향하게 되고, 제호로 향하게 되고, 장차 임종에 이르러서는 마음에 조그마한 잘못도 없게 된다.
어떻게 수행하는가. 처음 좌선하는 사람은 적적에 들어가 앉아 일체의 마음을 거두고, 흐트러지지 않은 마음으로 중생의 죽음을 염한다. “나는 죽음의 법에 들고, 죽음의 세계로 나아가고, 죽음의 법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염한다. 『열저리파타수다라』에서 “만약 사람이 죽음을 관하는 것을 즐긴다면, 마땅히 살해된 사람을 관하여 그 죽음의 인연을 보아야 한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염사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우상응(憂相應)ㆍ경상응(警相應)ㆍ중인상응(中人相應)ㆍ지상응(智相應)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마음에서 그 연을 일으켜 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우상응이다. 어린아이가 졸지에 목숨을 마친 것을 비탄하며 염하는 것을 경상응염이라 한다. 사유인(闍維人)이 생을 떠나는 것을 염하는 것과 같은 이것을 중상음염이라 한다. 항상 세간을 관해 마음에 싫어함이 생기는 것을 지상응염이라 한다. 여기에서 좌선인은 우상응ㆍ경상 응ㆍ중상응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과환을 능히 없애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지상응만을 부지런히 수행하여야 한다. 능히 과환을 없애기 때문이다.
죽음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등사(等死)ㆍ단사(斷死)ㆍ염염사(念念死)이다. 무엇이 등사인가. 가중생(假衆生)에 의지하는 것, 이것을 등사라 한다. 단사라고 하는 것은 아라한이 번뇌를 이미 끊는 것을 말한다.
염염사라 하는 것은 모든 행이 생각 생각마다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또 죽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부시절사(不時節死)와 시절사(時節死)이다. 자살하거나 타살되거나 병으로 혹은 이유도 없이 중간에 죽는 것, 이것이 부시절사이다. 수명이 다하거나 혹은 늙어서 죽는 것, 이것을 시절사라 한다. 마땅히 이 두 종류의 죽음을 염해야 한다.
또 선사(先師)는 8행으로써 염사를 수행할 것을 설하였다. 즉 흉악한 사람에게 쫓기는 것처럼, 인연이 없음으로써, 본취(本取)로써, 몸은 많은 것에 속한 것으로써, 수명에 힘이 없는 것으로써, 구원(久遠)을 분별함으로써, 무상(無相)으로써, 찰나로써 죽음을 염하라고 설하였다.
[문] 흉악한 사람에게 쫓기는 까닭에 염사를 수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 살해되는 사람이 장차 죽을 곳에 가면 흉악한 사람이 칼을 빼어 쫓아오는 것과 같다. 그는 흉악한 사람이 칼을 빼어 뒤를 쫓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이 사유한다. “이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 중 몇 번째 발자국에서 죽게 될까? 내가 도망가도 반드시 죽고, 내가 선다 해도 반드시 죽고, 내가 앉아도 반드시 죽고, 내가 잠들어도 반드시 죽는다” 이와 같이 좌선인은 흉악한 사람에 쫓기는 까닭에 마땅히 염사를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인연이 없는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태어난 것을 죽지 않게 할 인연은 없고 방편은 없다. 해와 달이 뜨면 지지 않게 할 인연이 없고 방편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인연이 없는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이다.
[문] 무엇이 본취인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그 이전의 다재왕(多財王)ㆍ대승왕(大乘王)ㆍ대신력대선견왕(大神力大先見王)ㆍ정생왕(頂生王) 등 그 일체의 왕도 모두 죽음의 법에 들었다. 또 옛날의 모든 선인들, 대신통ㆍ대신력을 가졌던 비사밀다도 몸에서 불과 물을 뿜어내던 사마달리 선인도 죽음의 법에 들었다. 또 예전의 성문들, 대지혜ㆍ대신통ㆍ대신력을 가졌던 사리불ㆍ목건련 등도 죽음의 법에 들었다.
또한 모든 연각인들, 스스로 스승 없이 일체의 공덕을 성취한 자들 역시 죽음의 법에 들었다. 또한 모든 여래ㆍ응공ㆍ정각ㆍ무량무상ㆍ명행구족도 공덕의 피안에 이르렀지만 또한 죽음의 법에 들었다. 하물며 나의 짧은 수명이 어찌 죽음의 법에 들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예전에도 취했던 까닭에 염사를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몸은 많은 것에 속한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풍(風)ㆍ담(痰)이 화합함으로써 죽음의 법을 이룬다. 혹은 갖가지 벌레가 화합하거나 혹은 음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죽음의 법에 들고, 독사나 지네에게 물리고 쥐에 물려 죽음의 법에 들게 되며, 사자나 호랑이ㆍ표범ㆍ용ㆍ소 등에 물려도 죽음의 법에 든다. 혹은 인ㆍ비인에게 살해되어 죽음의 법에 든다. 이 몸은 이와 같이 많은 것에 속하는 까닭에 염사법을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수명에 힘이 없는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두 가지 행으로써 수명이 무력해지는 까닭에 염사를 닦는다. 즉 처(處)가 무력한 까닭에, 의(衣)가 무력한 까닭에 수명이 무력하게 된다.
[문] 무엇이 처가 무력한 까닭에 수명이 무력한 것인가?
[답] 이 몸에 자성이 없는 것이 물거품의 비유와 같고, 파초의 비유와 같다. 진실이 없고, 진실을 벗어난 까닭이다. 이와 같이 처가 무력한 까닭에 수명이 무력하게 된다.
[문] 무엇이 의가 무력한 까닭에 수명이 무력하게 되는 것인가?
[답] 이것은 들고 나는 숨에 묶인 것이고, 4대에 묶인 것이고, 음식에 묶인 것이고, 4위의에 묶인 것이고, 체온에 묶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의(依)가 무력한 까닭에 수명이 무력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 두 가지 행으로써 수명이 무력하게 되는 까닭에 죽음에 대한 염을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구원[遠]을 분별함으로써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아득한 옛날로부터 일체가 이미 생겨났고, 현재세에서는 백년도 지나지 못해 모두 죽음의 법에 들어간다. 이것을 구원을 분별하는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이라 한다. 또한 “내가 하루 낮밤 동안 살아있으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
하루 낮밤 동안 세존의 모든 법을 사유하면 나는 큰 은혜를 얻으리라”고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하루를 살아있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한나절을 살아있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짧은 시간 동안 살아있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한 식경(食頃)이나 반 식경 동안 살아있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음식 덩어리를 네댓 개 집어 먹을 동안 살아있으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숨을 들이쉬는 때 숨을 내쉬는 순간에 이르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고 하거나 혹은 “숨을 내쉴 때 숨을 들이쉬는 순간에 이르리라고 내 어찌 장담하랴”라고 하면서 구원(久遠)을 분별하는 까닭에 염사를 닦아야 한다.
[문] 무엇이 무상(無相)인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상이 있지 않으므로 죽음 또한 때가 있지 않은 것, 이것이 무상인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이다.
[문] 무엇이 찰나인 까닭에 염사를 닦는 것인가?
[답] 과거와 미래를 헤아리지 않고, 단지 현재의 연을 헤아림으로써 중생의 수명은 일념의 때에 머문다. 그에 따라 2념에 머무는 것이 없으므로 일체중생은 찰나심에서 사라진다. 아비담에서 “과거심에 있어서는 이생(已生)이 없고, 당생(當生)이 없고, 현생(現生)이 없다. 미래심에 있어서는 이생이 없고, 현생이 없고, 당생이 없다. 현재심의 찰나에 있어서는 이생이 없고, 당생이 없고, 현생이 있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 게송에 설한 바와 같다.
수명 및 몸의 성품
고락 및 일체 존재는
일심과 상응하고
찰나에 빨리 생기한다.
미생에 있어서는 생이 없고
현생에 있어서는 생이 있다.
마음이 끊어지는 까닭에 세상이 죽나니
이미 세상이 없어졌다고 설한 까닭이다.
이와 같이 찰나인 까닭에 염사를 닦아야 한다. 그 좌선인은 이 문과 이 행으로써 이와 같이 현재에서 염사를 닦아 그 싫어함을 일으키고, 그 싫어함이 자재하고 염이 자재함으로써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모든 개(蓋)가 소멸하고, 선분이 일어나게 되며, 외행선이 머물게 된다.
[문] 무상상(無常想)과 염사, 이 둘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음(陰)이 생멸하는 일을 무상상이라 하고, 모든 근의 파괴를 염하는 것을 염사라 한다. 무상상ㆍ무아상을 닦음으로써 교만을 없애고, 염사를 닦음으로써 무상상 및 고상이 머물게 되나니, 수명이 끊어지고 마음을 없앤 까닭이다. 이것을 차별이라 한다.[염사를 마친다.]
[문] 무엇이 염신(念身)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답] 몸의 성품[身性]에 대한 염을 닦는데 그 염이 수념과 정념인 것, 이것을 염신이라 한다. 이 염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 이것을 닦음이라 한다. 몸의 성품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상이고, 싫어함이 그 맛이며, 실체가 없음[無實]을 보는 것이 그 일어남이다.
무엇이 공덕인가. 염신을 닦음으로써 감내(堪耐)를 성취하여 두려움을 감내하고, 추위와 더위 등을 감내한다. 무상상ㆍ무아상ㆍ부정상ㆍ과환상 등 그 상을 원만히 성취하며, 그 뜻에 따라 4선을 얻는다. 모든 법을 분명히 함으로써 닦아 만족케 하며, 선취로 향하게 하고, 제호로 행하게 한다.
어떻게 닦는가. 처음 좌선하는 사람은 적적에 들어가 앉아 일체의 마음을 거두고, 어지럽지 않은 마음으로 오로지 몸의 성품[身性]1)을 닦는다.어떻게 몸의 성품을 닦는가. 소위 이 몸은 머리카락[髮]ㆍ털[毛]ㆍ손발톱[爪]ㆍ이빨[齒]ㆍ피부[皮]ㆍ살[肉]ㆍ힘줄[筋]ㆍ뼈[骨]ㆍ골수[髓]ㆍ뇌(腦)ㆍ간(肝)ㆍ심장[心]ㆍ비장[脾]ㆍ폐(肺)ㆍ쓸개[膽]ㆍ위(胃)ㆍ비계[肪]ㆍ고(膏)ㆍ뇌막(腦膜)ㆍ대장(大腸)ㆍ소장(小腸)ㆍ대변[屎]ㆍ소변[尿]ㆍ고름[膿]ㆍ피[血]ㆍ가래[痰]2)ㆍ땀[汗]3)ㆍ점액[涎]ㆍ눈물[淚]ㆍ콧물[涕]ㆍ침[唾]으로써 부정하다.
각주
1) 원문은 “심성(心性)”이다. 문맥으로 보아 ‘심(心)’은 ‘신(身)’의 오자로 추정된다.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이하에도 ‘신(身)’을 ‘심(心)’으로 오기한 곳이 여럿 있는데, 마찬가지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2) 원문은 “담(淡)”이나 ‘담(痰)’의 오자로 추정된다. 이하에도 ‘담(痰)’을 ‘담(淡)’으로 오기한 곳이 여럿 있는데, 마찬가지로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3) 원문은 “오(汚)”이나 ‘한(汗)’의 오자로 추정된다.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처음 좌선하는 사람은 이 32행에 있어서 처음엔 차례대로 올라가고 다음엔 차례대로 내려가 “훌륭하다”고 입으로 말하고는 항상 설하고, 항상 관하여야 한다. “훌륭하다”고 항상 관함으로써 입으로 말하고, 이때는 하나하나의 4행으로써 하며, 오직 마음으로써 마땅히 깨달아야 한다. 즉 색ㆍ행ㆍ형상ㆍ처로써 하여야 한다. 분별로 일어난 거친 상으로써, 혹은 하나, 둘, 다수로 잘 상응하여 취한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세 가지 각으로써 일으킴을 성취하나니, 즉 색(色)으로써 염(厭)으로써 공(空)으로써 일으킨다. 만약 좌선인이 색으로써 상을 일으키면, 그 좌선인은 색일체입의 자재를 말미암아 마땅히 작의해야 한다.
만약 좌선인이 염으로써 상을 일으키면, 그 좌선인은 부정으로써 마땅히 작의해야 한다. 만약 좌선인이 공으로써 상을 일으키면, 그 좌선인은 계(界)로써 마땅히 작의해야 한다. 만약 좌선인이 일체입에 의지한다면 4선을 일으키고, 만약 좌선인이 부정사(不淨事)에 의지한다면 초선을 일으키고, 만약 좌선인이 계사(界事)에 의지한다면 외행선을 일으킨다. 여기에서 진에를 행하는 사람은 색으로써 상을 일으키고, 탐욕을 행하는 사람은 염으로써 상을 일으키고, 지혜를 행하는 사람은 계로써 상을 일으킨다. 또 진에를 행하는 사람은 색으로써 마땅히 작의하고, 탐욕을 행하는 사람은 염으로써 마땅히 작의하고, 지혜를 행하는 사람은 계로써 마땅히 작의한다.
또 13행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한다. 즉 종자(種]ㆍ처(處)ㆍ연(緣)ㆍ흐름[流]ㆍ차제형(次第形)ㆍ충종(蟲種)ㆍ안처(安處)ㆍ취(聚)ㆍ증(憎)ㆍ부정(不淨)ㆍ처(處)ㆍ부지은(不知恩)ㆍ유변(有邊)으로써 염해야 이다.
[문] 무엇이 종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하는 것인가?
[답] 독의 종에서 생겨나는 수유(茱萸)ㆍ구사다기(拘沙多紀) 등 일체 생물처럼, 이 몸은 부모의 부정(不淨)으로부터 생긴다.
부정한 종에서 생긴 이 몸은 부정을 이룬다. 이와 같이 종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한다.
[문] 무엇이 처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하는 것인가?
[답] 이 몸은 울다라 꽃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고, 구모타ㆍ분다리가 꽃으로부터 생긴 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배에서 생겼고, 부정하고 냄새나는 것들이 짓누르는 틈에서 생겼고, 생장(生藏)과 숙장(熟藏)으로부터 생겼고, 좌우협의 포낭에 싸여 척추의 뼈 있는 곳에 머물렀으니, 그 처가 부정하고 몸을 구성한 것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처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한다.
[문] 무엇이 연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하는 것인가?
[답] 이 부정한 몸이 증장하고 유지됨에 있어서도 금이나 은ㆍ구슬 등으로 증장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전단ㆍ다가라ㆍ침향 등의 연으로 증장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몸이 어머니 배로부터 생겨나 어머니에게서 받아먹는 것에는 콧물[涕]ㆍ침[唾]ㆍ기름[涎]ㆍ눈물[淚] 등이 서로 섞여 있으며, 모태에서 생긴 냄새나는 음식과 유액(流液)이 증장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모태에서 나온 뒤에도 그가 먹는 밥ㆍ젖ㆍ떡ㆍ콩에는 콧물ㆍ침ㆍ기름ㆍ고름이 서로 뒤섞여 있으니, 이 몸은 냄새나고 더러운 액체로 증장하고 유지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문] 무엇이 흐름[流]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답] 똥ㆍ오줌이 가득한 가죽 주머니에 구멍이 여럿 뚫려 더러운 것들이 흘러나오듯이, 이 몸도 또한 똥ㆍ오줌으로 가득 차있다. 이와 같이 이 몸에서는 먹었던 음식과 콧물ㆍ침ㆍ똥ㆍ오줌이 뒤섞인 냄새나는 것들과 갖가지 부정한 것들이 아홉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니, 구멍이 여럿 뚫린 까닭이고, 가득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와 같이 흐름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문] 무엇이 차제형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답] 이 몸은 최초의 업으로써 차례대로 성립된다. 처음의 7일은 가라라(迦羅邏)를 이루고, 두 번째 7일에는 아부타(阿浮陀)를 이루며, 세 번째 7일에는 비시(俾尸)를 이루고, 네 번째 7일에는 아나(阿那)를 이루며, 다섯 번째 7일에는 5절(節)을 이루고, 여섯 번째 7일에는 4절을 이루며, 일곱 번째 7일에는 다시 또 사절이 생기고, 여덟 번째 7일에는 다시 또 28절이 생기며, 아홉 번째 7일 및 열 번째 7일에는 또 척골(脊骨)이 생기고, 열한 번째 7일에는 또 300골(骨)이 생기며, 열두 번째 7일에는 또 800절이 생기고, 열세 번째 7일에는 또 900근(筋)이 생기며, 열네 번째 7일에는 또 100육환(肉丸)이 생기고, 열다섯 번째 7일에는 또 피[血]가 생기며, 열여섯 번째 7일에는 막(膜)이 생기고, 열일곱 번째 7일에는 피부[皮]가 생기며, 열여덟 번째 7일에는 피부색[皮色]이 생기고, 열아홉 번째 7일에는 업에서 생긴 바람[風]이 곳곳에 미치고, 스무 번째 7일에는 아홉 구멍[九窮]이 이루어지고, 스물다섯 번째 7일에는 1만7천 주(湊)가 생기며, 스물여섯 번째 7일에는 몸이 견고해지고, 스물일곱 번째 7일에는 힘이 생기며, 스물여덟 번째 7일에는 9만9천의 모공(毛孔)이 생기며, 스물아홉 번째 7일에는 모든 신체부위를 구족하게 된다. 또 설하기를, 일곱 번째 7일에는 몸이 생겨 어머니의 등에 기대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앉는다. 마흔두 번째 7일에는 업에서 생긴 바람으로 다리를 돌려 위로 향하고, 머리를 아래로 향해 산문(産門)을 향한다. 이때 비로소 세상에서 말하는 가명의 사람이 생긴다. 이와 같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형체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한다.
[문] 무엇이 충종(蟲種)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하는 것인가?
[답] 이 몸은 8만호나 되는 벌레[蟲]의 먹잇감이다. 머리칼에 의지하는 벌레를 발철(髮鐵)이라 하고, 두개골에 의지하는 벌레는 이종(耳腫)이라 하며, 뇌에 의지하는 벌레는 전광하(顚狂下)라 한다. 전광에는 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우구림바(塸拘霖婆)라 하며, 둘째는 습바라(濕婆羅)라 하며, 셋째는 타라가(陀羅呵)라 하며, 넷째는 타아시라(陀阿尸邏)라 한다. 눈에 의지하는 벌레는 지안(舐眼)이라 하고, 귀에 의지하는 벌레는 지이(舐耳)라 하고, 코에 의지하는 벌레는 지비(舐鼻)라 한다. (지비에) 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루구모가(樓扣母可)라 하며, 둘째는 아루구(阿樓扣)라 하며, 셋째는 마나루모가(摩那樓母可)라 한다. 혀에 의지하는 벌레는 물가(勿伽)라 하며, 혀뿌리[舌根]에 의지하는 벌레는 모단다(母但多)라 하며, 이[齒]에 의지하는 벌레는 구바(狗婆)라 하며, 이뿌리[齒根]에 의지하는 벌레는 우바구바(優婆狗婆)라 하며, 목구멍[喉]에 의지하는 벌레는 아바리가(阿婆離呵)라 한다.
목에 의지하는 벌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로가라(虜呵羅)라 하며, 둘째는 비로가라(毘虜呵羅)라 한다. 털[毛]에 의지하는 벌레는 지모(舐毛)라 하고, 손발톱[爪]에 의지하는 벌레는 지조(舐爪)라 한다. 피부에 의지하는 벌레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도나(兜那)라 하며, 둘째는 도난다(兜難多)라 한다. 막(膜)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비람바(鞞藍婆)라 하며, 둘째는 마하비람바(摩訶鞞藍婆)라 한다. 살[肉]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아라바(阿羅婆)라 하며, 둘째는 라바(羅婆)라 한다. 피[血]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바라(婆羅)라 하며, 둘째는 바다라(婆多羅)라 한다. 힘줄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뢰다로(賴多虜)라 하며, 둘째는 희다바(喜多婆)라 하며, 셋째는 바라바다라(婆羅婆多羅)라 하며, 넷째는 라나바라나(羅那婆羅那)라 한다. 맥(脈)에 의지하는 벌레는 가율협나(架栗俠那)라 한다. 맥근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시바라(尸婆羅)라 하며,
둘째는 우바시바라(優婆尸婆羅)라 한다. 뼈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알치[제(除)와 리(里)의 반절]비타(遏褫毘馱)라 하며, 둘째는 안나비타(安那毘馱)라 하며, 셋째는 태[도(塗)와 리(履)의 반절]리타비타(殆履拕毘拖)라 하며, 넷째는 알치환가라(遏褫絙可羅)라 한다. 골수[髓]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미[망(亡)과 비(比)의 반절]사(弭社)라 하며, 둘째는 미사시라(弭社尸羅)라 한다. 비장[脾]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니라(尼羅)라 하며,
둘째는 비다(比多)라 한다. 심장[心]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사비다(死毘多)라 하며, 둘째는 우발타비다(優鉢拕毘多)라 한다. 심근(心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만가(滿可)라 하며, 둘째는 시라(尸羅)라 한다. 비계[肪]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가라(哿羅)라 하며, 둘째는 가라시라(哿羅尸羅)라 한다. 방광(膀胱)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미가라(弭哿羅)라 하며, 둘째는 마하가라(摩訶哿羅)라 한다. 방광근(膀胱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가라(哿羅)라 하며, 둘째는 가라시라(哿羅尸羅)라 한다. 포(胞)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사바라(娑婆羅)라 하며, 둘째는 마하사바라(摩訶沙婆羅)라 한다.
포근(胞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뢰다(賴多)라 하며, 둘째는 마하뢰다(摩訶賴多)라 한다. 소장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추뢰다(帚賴多)라 하며, 둘째는 마하뢰다(摩訶賴多)라 한다. 장근(腸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파(波)라 하고, 둘째는 마하사파(摩訶死波)라 한다. 대장근(大腸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안나바가(安那婆呵)라 하며,
둘째는 박과바가(博果婆呵)라 한다. 위(胃)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우수가(優受哿)라 하며, 둘째는 우사바(優社婆)라 하며, 셋째는 지사바(知社婆)라 하며, 넷째는 선시바(先市婆)라 한다. 숙장(熟藏)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바가나(婆呵那)라 하며, 둘째는 마하바가나(摩訶婆呵那)라 하며, 셋째는 다나반(陀那槃)이라 하며, 넷째는 분나모가(粉那母可)라 한다. 쓸개[膽]에 의지하는 벌레를 필다리가(必多離訶)라 한다. 침[唾]에 의지하는 벌레를 섬가(纖呵)라 한다. 땀[汗]에 의지하는 벌레를 수타리가(髓陀離呵)라 한다. 지방[脂]에 의지하는 벌레를 미타리가(弭陀離呵)라 한다. 강(强)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수바가모(藪婆呵母)라 하고, 둘째는 사마계다(社摩契多)라 한다. 강근(彊根)에 의지하는 벌레에도 또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처가모가(處呵母珂)라 하며, 둘째는 타로가모가(陀虜呵母珂)라 하며, 셋째는 사나모가(娑那母珂)라 한다.
다섯 종류의 벌레가 있어 신전(身前)에 의지해 신전을 먹으며, 신후(身後)에 의지해 신후를 먹으며, 신좌(身左)에 의지해 신좌를 먹으며, 신우(身右)에 의지해 신우를 먹으니, 그 벌레의 이름은 전다사라(栴陀死羅)ㆍ순가사라(脣呵死羅)ㆍ불투라(不偸羅) 등이다. 아래의 두 구멍에 의지하는 세 종류의 벌레가 있으니 첫째는 구루구라유유(拘樓拘羅唯喩)라 하며, 둘째는 차라유(遮羅喩)라 하며, 셋째는 한두파타(寒頭波拕)라 한다. 이와 같이 벌레들이 머무는 곳으로써 마땅히 몸의 성품을 염해야 한다.
무엇이 안(安)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족골(足骨)에 경골(脛骨)이 안주한다. 경골은 비골(髀骨)에 안주한다. 비골은 가골(髂骨)에 안주한다. 가골은 척골(脊骨)에 안주한다. 척골은 비골(脾骨)에 안주한다.
비골은 비골(臂骨)에 안주한다. 비골은 항골(項骨)에 안주한다. 항골은 두골(頭骨)에 안주한다. 두골은 협골(頰骨)에 안주한다. 협골은 치골(齒骨)에 안주한다. 이와 같이 이 몸은 골절(骨節)이 안으로 얽혀 있고 피부로 그 위를 덮어 이 더러운 몸[穢身]을 이룬다. 이는 행업(行業)으로부터 생긴 것이지 다른 것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이 안주하는 것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무엇이 취(聚)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9두골(頭骨)ㆍ2협골(頰骨)ㆍ32치골(齒骨)ㆍ7항골(項骨)ㆍ14흉골(胸骨)ㆍ24협골(脇骨)ㆍ18척골(脊骨)ㆍ2가골(髂骨)ㆍ64수골(手骨)ㆍ64족골(足骨)이 있고, 살[肉]에 의지하는 64연골(軟骨)이 있다. 이 300골(骨)ㆍ800절(節)ㆍ900근(筋)이 얽혀 있고, 900육환(肉丸)ㆍ1만7천의 주(湊)ㆍ8백만의 머리카락ㆍ9만9천의 털이 있다. 또 60간(間)ㆍ8만의 벌레가 있고, 쓸개ㆍ침ㆍ뇌는 각각 1파뢰타(波賴他)[양(梁)나라 말로 하면 무게 4량(兩)이다.]이고, 피는 1아타(阿咃)[양나라 말로 하면 3승(升)이다.]이다. 이와 같이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형(形)은 똥 무더기와 오줌4)의 모임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무더기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으로 염해야 한다.
무엇이 증(憎)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그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인 제일 청정하고 사랑하는 복식(服飾), 이와 같은 꽃과 몸에 바르는 향, 의복의 장신구, 잠자고 앉고 기댈 때 쓰는 침낭ㆍ베개ㆍ요ㆍ양탄자[氍]ㆍ모포[毹]ㆍ담요[毾㲪]ㆍ침상[床]ㆍ휘장[帳]ㆍ와구(臥具)등과 갖가지 음식ㆍ주처ㆍ공양을 마음으로 애지중지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싫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싫어지는 것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무엇이 불청정(不淸淨)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옷 및 갖가지 복식은 정결하지 않게 되었더라도 다시 세탁하면 청정하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청정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고,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 또 향을 몸에 바르고, 향수로써 씻더라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각주
4) 원문은 “시(屎)”이나 ‘뇨(尿)’의 오자로 추정된다.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부정한 까닭이다. 이와 같은 것이 청정하지 못함으로써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이다.
무엇이 처(處)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꽃이 연못에 의지해 생기듯이, 열매가 과처(果處)에 의지해 생기듯이, 이와 같이 이 몸에서는 갖가지 번뇌로부터 질환이 생긴다. 이와 같이 안통(眼痛)ㆍ이통(耳痛)ㆍ비통(鼻痛)ㆍ설통(舌痛)ㆍ신통(身痛)ㆍ두통(頭痛)ㆍ구통(口痛)ㆍ치통(齒痛)ㆍ환수(患嗽)ㆍ급기(急氣)ㆍ한열(寒熱)ㆍ복통(腹痛)ㆍ심민(心悶)ㆍ간광(癎狂)ㆍ풍병(風病)ㆍ곽란(霍亂)ㆍ나(癩)ㆍ영(癭)ㆍ토혈(吐血)ㆍ선(癬)ㆍ창(瘡)ㆍ개(疥)ㆍ과(瘑)ㆍ마비(痲痹)ㆍ한병(寒病) 등 이 몸에는 끝없는 과환이 있다. 이와 같이 처로써 마땅히 몸의 지성을 관해야 한다.
무엇이 은혜[恩]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가장 훌륭한 음식으로 자기 몸을 보살피고, 혹은 목욕도 하고, 향도 바르고, 잠도 자고, 앉기도 하면서 옷과 천으로 스스로 장엄하더라도 독 있는 나무와 같은 이 몸은 도리어 은혜를 모르고 늙음을 향하고, 병을 향하고, 죽음을 향하는 것이 은혜를 모르는 친구와 같다. 이와 같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무엇이 유변(有邊)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하는 것인가. 이 몸은 사유(闍維 : 화장)될 수도 있고, 혹은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혹은 파괴될 수도 있고, 혹은 마멸될 수도 있으니, 이 몸은 한계가 있다. 이와 같이 한계가 있는 것으로써 마땅히 몸의 자성을 염해야 한다.
그 좌선인은 이 문(門)으로써, 이 행으로써, 이 자성으로써 마땅히 이 몸을 염해야 하고, 염의 자재ㆍ혜의 자재로써 어지럽지 않은 마음을 이룬다. 만약 어지럽지 않은 마음을 이루면 모든 개(蓋)가 소멸하고, 선분(禪分)이 일어나며, 그 즐기는 바에 따라 수승함을 얻게 된다.[염신을 마친다.]
[문] 무엇이 염적적(念寂寂)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답] 적적이란 신심의 동란(動亂)을 없애 이미 굴복시키고 끊은 까닭에 이것을 적적이라 한다. 현재에서 적적을 염하는데 그 염이 수념(隨念)ㆍ정념(正念)인 것, 이것을 염적적이라 한다. 염으로써 어지럽지 않음에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부동(不動)의 공덕을 일으키는 것을 상으로 한다. 부조(不調)가 그 맛이다. 오묘한 해탈이 그 처소이다. 무슨 공덕이 있는가. 만약 염적적을 수행하면 편안히 잠들고 편안히 깨어나며, 적적을 이루고, 모든 근이 적적하여 마음의 소원이 구족하게 된다. 가애(可愛)를 이루며, 참괴(慙愧)를 구족하게 된다. 항상 사람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지고, 선취(善趣)로 향하고, 제호로 향한다.
어떻게 그것을 닦는가. 처음 좌선하는 사람은 적적에 들어가 앉아 일체의 마음을 거두고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저 비구가 모든 근이 적적하고 마음이 적적하고 일처(一處)의 적적을 즐기는 것과 같이, 그에 상응함으로써 머문다. 그 비구는 신ㆍ구ㆍ의로써 혹은 보고, 혹은 듣는데 적적의 염으로써 하고, 적적의 공덕으로써 한다. 세존이 설한 바와 같다.
“그 비구는 계를 구족하고, 정을 구족하고, 혜를 구족하고, 해탈을 구족하고, 해탈지견을 구족하였다. 만약 비구가 그 비구를 보게 되면, 나는 그것을 큰 은혜를 얻는 것이라 설한다. 만약 그 비구에게 들으면, 나는 큰 은혜라 설한다. 만약 그에게 찾아가면 나는 큰 은혜라 설한다. 만약 그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만약 그를 염하고, 만약 따라서 출가하면, 나는 그것을 은혜를 크게 얻는 것이라 설한다.”
어떠한 까닭에 이와 같은가. 모든 비구가 그 설법을 들으면 두 가지 소란스러움[憒鬧]에서 벗어나게 된다. 소위 몸이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이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비구가 초선에 들면 적적염으로써 모든 개(蓋)를 소멸하고, 만약 제2선의 염에 들면 그 각(覺)ㆍ관(觀)이 소멸하며, 만약 제3선의 염에 들면 그 희(喜)가 소멸하고, 만약 제4선의 염에 들면 그 낙(樂)이 소멸한다. 만약 허공정염(虛空定念)에 들면 색상(色想)ㆍ진에상(瞋恚想) 등 갖가지 상이 소멸하며, 만약 식정염(識定念)에 들면 그 허공이 소멸한다. 만약 무소유정염(無所有定念)에 들면 그 식입상(識入想)이 소멸하며, 만약 비상비비상정염(非想非非想定念)에 들면 그 무소유상이 소멸한다. 만약 상수멸염(想受滅念)에 들면 그 상(想)ㆍ수(受)가 소멸한다. 만약 수다원과염(須陀洹果念)을 얻으면 견일처(見一處)의 번뇌가 소멸하고, 만약 사다원과염(斯陀洹果念)을 얻으면 거친 음욕ㆍ진에의 번뇌가 소멸하며, 만약 아나함과염(阿那含果念)을 얻으면 미세한 번뇌의 음욕ㆍ진에가 소멸한다.
만약 아라한과염을 얻으면 그 일체의 번뇌가 소멸하며, 만약 니원에 들어가면 적적염으로써 일체 모두가 소멸한다.그 좌선인이 이 문(門)으로써, 이 행으로써, 이와 같이 공덕으로써 적적을 염하면 그 마음이 믿음을 이루고, 믿음의 자재와 염의 자재로써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되면 모든 개가 소멸하고, 선분이 일어나고, 외행선이 머물게 된다.[염적적을 마친다.]
10념처에 이 산구(散句)가 있다. “만약 과거ㆍ미래의 불공덕(佛功德)을 염하면 이것을 염불을 닦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연각의 공덕을 염한다. 만약 잘 설하신 일법(一法)을 염하면 이것을 염법(念法)을 닦는 것이라 한다. 만약 한 성문의 수행공덕을 염하면 이것을 염승(念僧)을 닦는 것이라 한다. 그 계(戒)를 염하면 이것을 염계(念戒)를 닦는 것이라 한다. 그 시(施)를 염하면 이것을 염시(念施)를 닦는 것이라 한다. 만약 염시를 좋아하고 즐기면서 공덕이 있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마땅히 받는 모양새를 취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 보시하지 않은 것을 보시로 받는다면, 나아가 한 톨도 마땅히 먹어서는 안 된다. 염천(念天)은 믿음을 성취하고 거기엔 5법이 있으니, 마땅히 염천을 닦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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